심남일실기<백두대간 의병전쟁 답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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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남일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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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남일실기 해제(解題)
이 문헌은 심남일(沈南一) 의병장의 손자 되는 심명재(沈銘裁)씨가 간직한 것인데, 첫머리에는 [진지록(盡知錄)]이라는 제목 아래 국내외 각계 각층 인사에게 보내는 격고문(檄告文)과 고시(告示) 등이 책의 약 3분의 1이나 되는 분량을 차지하였고, 그 다음에는 강무경(姜武景)·안찬재(安贊在)·박사화(朴士化) 등 수십 명의 간부 명단이 적혀 있으며, 그 다음에는 (접전일기(接戰日記))라는 제목 아래 적과 싸우던 실전 기록이 실려 있다. 무신(戊申=1908) 3월 초7일에는 남평(南平)으로 행군하여 강진오치동(康津吾治洞)에 이르러 불의에 닥쳐온 왜병 수백 명과 접전한 결과 적의 머리 수십 급을 베어 첫 승리를 거둔것과, 6월 25일에는 능주노구두(綾州老狗頭) 접전에서 후군장 노병우(盧炳愚)가 왜적과 싸워 크게 승리한 것과, 10월 9일에는 해남성(海南城)으로 3백 명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여 왜적 백여 명을 베는 큰 승리를 획득한 것 등이 적혀 있다. 그 뒤에도 큰 접전만 4회나 있었고, 또 이어 무신 5월 12일에는 보성(寶城) 의병장 안규홍(安圭洪)과 석호산(石虎山)에서 합진하여 보성천동(寶城泉洞) 접전에서 승리를 거둔 이야기들이 적혀 있다.
또 심남일 의병장이 적과 부딪혀 싸운 지역은 주로 함평(咸平)·강진(康津)·장흥(長興)·능주(綾州)·나주(羅州)·보성(寶城) 등지인데, 이 넓은 지역에서 그는 독특한 전법으로 적을 유도도 하고 기습도 하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 뒤 1908년 8월 26일 일본군에게 잡혀 광주(光州)·대구(大邱) 등 재판소에서 적과 담판(법정 투쟁)하던 이야기와, 옥중에서 지은 술회시도 적혀 있으며, 끝으로 오준선(吳駿善)이 쓴 ≪의병장심남일전≫은 비록 길지는 않으나 호남 의병장으로 명성이 높았던 심남일 의병장의 투쟁 기록인 만큼 후기 의병항쟁사 자료로서 가치 있는 문헌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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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남일실기(沈南一實記)
격고문(檄告文)
우리 내외 관리 및 모든 백성들은 내 말을 분명히 들으라.
무릇 신하란 임금의 팔다리요, 백성이란 나라의 근본이다. 그러므로 신하와 백성이 임금이 없으면 누구를 추대하며 임금이 신하와 백성이 아니면 누구를 부릴 것이랴.
아 ! 왜놈이 우리나라에 있어 옛날 임진(壬辰)년의 화는 단지 우리 백성에게 미쳤지만. 오늘날의 화는 우리 땅덩이마저 집어 삼키고, 우리 국모를 시해하고, 우리 재정을 빼앗고,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앉아서 대궐만 지키게 하여, 마치 후한(後漢) 말기에 헌제(獻帝)가 허창(許昌)에 있는 것과 같이 되었다.
저 소위 총독(總督)이란 것이 무슨 위치며, 고문(顧問)이란 것이 무슨 벼슬이냐. 그런데 조정의 직제나 정치의 법령이 모두 그놈들의 손아귀에 들었으니, 이러고도 과연 나라와 임금이 있다 하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매 자연 눈물이 뜨겁고 간담이 서늘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인생이 허공에 턱을 걸고 사는 것이 아닐진대 어떻게 살아나갈 길이 없으니, 우리 팔도 사람들은 다같이 풍파를 만난 배를 탄 신세인즉, 고래 떼 같이 악독한 왜놈에게 잡혀 먹히기 전에 서로 분발한다면, 우리 강토를 회복하고 우리 종묘사직을 안정시키는 것이 오늘로서 터가 잡힐 것을 또 어찌 알겠는가.
수택(守澤)은 초야의 미천한 몸으로 군사에 관한 일을 배우지 못했는데, 동지들의 추대를 입어 외람되이 맹주(盟主)가 되었다. 그래서 한밤중에 저 유곤(劉琨)처럼 닭소리를 듣고 일어났고, 큰 강 가운데서 조적(祖逖)같이 돛대를 치며 맹서코 이 나라를 깨끗이 밝히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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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드려 바라건대 조정의 벼슬아치나 산림의 숨은 인재들은 수택더러 그 자격이 아니라 이르지만 마시고 각자 의분심을 일으켜 함께 큰 일을 치뤄 나간다면 천하만국이 또한 반드시 바람 소리 듣고 호응하게 될 것이다.
토왜(土倭)에게 타이름
아 ! 이 나라 백성은 누구나 다 임금의 백성이 아닌 바이랴. 밖에서 들어온 오랑캐는 누구나 다 임금의 원수가 아니냐. 그렇다면 백성으로서 임금을 배반하는 것이 옳으냐, 원수를 한 집단처럼 보는 것이 옳으냐. 내가 보기에는 오늘날 이 국내에서 원수 놈이 횡행하는 것은 모두 그놈들의 앞잡이가 선동하지 않는 것이 별로 없다.
아 ! 앞잡이 노릇하는 자가 누구냐. 바로 우리 임금의 백성이다. 심지어 그놈들의 관리가 되고 그놈의 군대가 되어 우리를 공격하고 우리를 원수시하여 못할 짓 없이 다 하고 있다. 그래서 출전하는 마당에는 우리나라 사람이 절반 이상이 되니 이야말로 연(燕)나라 사람으로 연나라를 치는 격이라, 이것을 참으면 어느 것인들 못 참으랴.
아 ! 이 나라 사람으로 왜놈에게 붙은 자들도 역시 덕을 좋아하는 양심이 없지 않은 우리 동포인데, 오늘날 이리 된 것은 모두 사사욕심에 가리어 본성을 상실한 때문이니 마치 거울이 티끌에 묻혀 그 광명을 상실한 것과 같다.
오직 이 나라 사람으로 왜놈에게 붙은 자는 마음을 돌이켜 본성을 되찾아 지난 일을 회개하고 돌아오면 전과 같이 깨끗한 거울이 될 것이다. 이렇게 하면 조상의 묵은 원수도 갚을 수 있고, 종묘사직도 부지할 수 있는 동시에 부귀도 여기에 있고 대의도 여기에 있다.
이것이 이른바 정당한 길이요 편안한 집이거늘, 정당한 길을 버리고 가지 않고 편안한 집을 비어 두고 살지 않으며, 오솔길과 험상한 집만 찾는다면 제 놈을 망치고 나라를 망치지 않는 자가 거의 없을 것이다.
아 ! 이 나라 사람으로 왜놈에게 붙은 자는 내 말을 똑똑히 들으라.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에 빠지고 말 것이다. 오늘날 용신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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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은 비록 나을지 모르지만 후세 역사가의 붓끝이 어찌 무섭지 아니하냐. 밝은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으니 너희들은 생각해서 하라.
각 고을 향교(鄕校)에 통고함
나라에 급한 화난이 생기면 신하는 앉아서 방관할 수 없으며, 아비에게 심한 병환이 있으면 자식은 천명만을 기다릴 수 없는 것이다.
아 ! 우리나라 을미(乙未)년 일은 천고에 일찌기 없었던 큰 변이다. 그렇다면 신하된 자가 어찌 편안히 방안에 들어앉아 국모의 원수를 갚을 생각을 안 해서 되겠는가.
수택은 선비의 집안에 태어나서 본시 군사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데도 간짓대로 기를 만들고 몽둥이로 무기를 삼고 장군을 몰아와 군대로 충당하여, 급급히 서둘기를 마치 불타는 것 끌어내고, 물에 빠진 것 건져내듯 하자니 방략도 갖춰지지 못하고 대오도 정돈되지 못하여 아이들의 장난감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사나운 범이 방안에 들어오는데 앉아서 총칼을 찾으면 너무도 때가 늦지 않은가.
이와 같은 급박한 날을 당하여 끓어오르는 의분심을 참을 수 없으므로 맹주(盟主)가 되어 군사들과 함께 앞을 다투고 섰으니, 이것이 바로 선왕의 배양한 징험이며 또한 본연의 충심이기도 하다.
옛 사람은 1여단(旅團)으로 하(夏)나라를 중흥시켰고, 1필의 말로 당(唐)나라를 창성하게 했으니, 여러분은 착한 것을 으뜸으로 삼는 처지에 있어 춘추대의를 강습한 적이 이미 오래인즉, 각자 의기를 분발하여 한 마음 한 뜻으로 서로 원조한다면 국내의 적을 제거하고 국외의 오랑캐를 무찌르는데 무슨 걱정이 있으랴. 장차 국가를 태산처럼 편안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여러분도 진작 생각한 바일 것이니 오직 이렇게 해 주기를 바란다.
옛 사람의 말에 ‘부모가 나를 낳았으니 이어받은 것이 이보다 큰 것 없고, 임금이 나를 가꾸었으니 두터운 은혜가 이보다 중한 것 없다.’했고, 또 임금과 아비는 서로 대등하니 의리가 관계된 곳에는 목숨을 바쳐야 한다.‘하였으니, 신하가 되면 그 나라를 안보하고 자식이 되면 그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것은 고금의 큰 윤강(倫綱)이라, 비록 준동하는 오랑캐라도 이 본성을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아 ! 우리나라 동포치고 어는 누가 임금의 은혜를 받지 아니한 자 없거늘, 한갓 이욕을 탐내어 달갑게 오랑캐의 종노릇을 한단 말이냐.
요즘 간신이 작해하여 임금의 은덕이 아래 사람에게 미치지 못하니, 온 군민은 살 길이 막연하나 안이 너무도 깊고 멀어서 이 사정을 들을 길이 없다. 그래서 모두 유리 분산되어 위로 부모를 섬길 수 없고, 아래로 처자를 기를 수 없이 되자 서로 원망하고 서로 참소하여 마침내 잘못을 저지른 것이니 이것이 어찌 우리 백성의 본심이겠느냐.
아 ! 너희들도 역시 우리 임금의 백성이니 백성으로서 제 임금을 친다면 옳다 하랴. 이제부터는 도로 본연의 천성을 찾아서 원망을 말고 덕으로 여겨 길이 한 마음으로 나가 조국을 바로 잡고 해독을 끼치는 좀도둑을 제거하여 병든 백성을 구제하고 능히 임금을 도와 사방을 편안케 하면 섬 오랑캐들이 저절로 와서 대궐문 아래 사죄할 것이다.
이리되면 나와 너는 함께 조정에 나아가 중흥의 녹을 온전히 누릴 것이니 오늘날 오랑캐 밑에 파리처럼 엉기고 개처럼 따르는 것과 비교해 본다면 그 경중이 과연 어떠하겠느냐.
각 고을 면장·영원(領員)·이장에게 고시(告示)함
천운이 불행하여 섬 오랑캐가 침범해 와서 민생은 어육이 되고 국가의 형세는 날로 깎여만 간다.
아 ! 옛날의 개화(開化)는 비로 만물의 뜻을 개통하여 천하의 사업을 생취시키고, 백성을 선(善)으로 화해서 풍속을 이룬다는 것인데, 지금의 개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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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 오랑캐를 개도(開導)하여 우리 백성을 악으로 화해서 전보다 전진하게 하는 것이다.
아 ! 슬프다. 마음속에 진실로 조금이라도 군신의 의가 있다면 어찌 이럴 수 있으랴.
우리 백성은 바로 5백년 동안 곱게 길러낸 백성이요, 우리 의는 바로 여러 성인의 교도한 의이다. 그러나 백성이란 마치 강물에 노니는 고기와 같아서 동으로도 갈 수 있고 서로도 갈 수 있는 것이다.
무릇 면장·영원·이장이란 것은 바로 백성을 거느리는 관원이니, 관에 있는 자가 착하면 민속도 착하고, 관에 있는 자가 착하지 못하면 민속도 착하지 못하다. 이른 바 바람을 받은 풀은 반드시 쓰러진다는 것이다.
전해 들으니 새로 측량하여 결(結)을 주리는데 있어, 향촌간에 출입하는 무리들이 권세 있는 아전들과 부동하여 이익은 자기가 차지하고 해는 백성에게 돌린다고 한다. 국가에서 측량을 다시 하는 것은 본시 백성을 살리자는 것인데, 경비를 곱이나 더 징수하므로써 민생의 도탄이 더욱 심하니 이렇게 되면 백성을 위하는 길이 과연 어디 있겠는가. 이것은 시골 백성의 세간을 털어다 주관자 몇몇의 주머니만 채워 주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일을 생각하니 마음이 서늘하고 뼈가 떨려서 밤마다 한탄만 나올 뿐이다. 맹자(孟子)는 ‘나라는 반드시 자체가 어지러워야 적이 쳐들어오는 것이다.’말했고, 소식(蘇軾)은 ‘물건은 반드시 먼저 썩은 위에 벌레가 생긴다.’하였으니 백성을 훑어내고 나라를 좀먹는 것은 그 자체가 어지럽고 썩은 데서 근거되지 않는 일이 없다. 우리가 진실로 틈을 주지 않는데 왜놈들이 비록 교활하다지만 어디를 파고 들어왔겠느냐.
원컨대 여러분은 이런 점을 통찰하시와 국가의 따뜻한 혜택을 궁벽한 곳에까지 미치게 하여 모든 동식물이 스스로 활기를 띠게 하면 밝은 빛이 비치는 곳에 모든 음사(陰邪)가 자연 용납되지 못할 것이다.
만약 농간을 부리는 무리들이 끝내 개준하지 않는다면 의병소에서 자세히 조사해서 우리 임금께 아뢰어 법에 따라 시행할 것이니, 천만 번 생각하여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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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軍中)에 고시함
아 ! 우리 좌우 선봉장 및 중군·후군·호군·기군(起軍)과 또 포병·기병·보병·기타 여러 군사들은 나의 다짐하는 말을 들으라.
아 !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이냐. 우리 3천리 강토가 하루 아침에 원수인 왜놈의 소유가 되었으니 말이다.
우리는 이웃 나라를 두고도 교제할 수 없고, 백성을 두고도 부릴 수 없고, 재산을 두고도 마음대로 쓸 수 없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저 왜놈들의 간사한 술책으로 미루어 보면 종당에는 반드시 우리 인종을 이 땅에 남겨 두지 않을 것이 뻔한 일이다.
예컨대 망한 나라는 다만 종묘·사직만 없어졌을 뿐인데, 지금 우리나라는 아울러 인종마저 멸망하게 되었다. 아 ! 어디로 간단 말이냐.
안으로는 대여섯 되는 적이 앞잡이 노릇을 하고, 밖으로는 수령(守令)이 다 따라 붙었으니, 아득한 천지에 가는 곳마다 적뿐이라, 맹서하고 장단(將壇)에 오르니 오직 믿는 것은 군사 밖에 없다.
저 옛날 진(秦)나라가 6국을 멸망시켰으나 유방(劉邦)·항우(項羽)가 군사를 일으킬 길이 없었고, 적신(賊臣)·왕망(王莽)이 천하를 빼앗았으나 광무(光武)는 중흥의 계책이 있었다. 우리 임금이 비록 원수 놈의 협박이 있을지라도 본시 요순(堯舜)의 인덕을 지니셨으니 고계(皐夔) 직설(稷偰)같은 신하만 만나면 크게 유망한 임금이라 뉘 아니 이르겠느냐.
아 ! 우리 여러 군사는 충성을 돈독히 하여 전쟁에 종사하되, 부디 한결 같은 마음으로 군법을 준수하여 능히 공을 이루어, 한편으로는 국모의 원수를 갚고 한편으로는 선왕의 땅을 회복하여 우리 요순 같으신 임금으로 하여금 마침내 편안히 앉아서 다스리게 하면 우리도 마땅히 태평가를 노래하고 좋은 세월을 보낼 것이다. 그 일이 이번 거사에 달려 있지 않았느냐.
아 ! 여러 군사들은 명령을 준수하지 않으면 마땅히 형벌이 있을 것이다. 너희들이 내 말을 믿지 않는다면 다음에 기록된 시행의 조목을 보라.
1. 좌우 선봉은 대장군이 통솔하고, 중군·후군은 선봉이 통솔하고, 호군(護軍)·기군(起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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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군이 통솔하고, 포병·기병·보병·서사(庶士)는 기군이 통솔하고, 포병·기병·보병·서사(庶士)는 10사람으로 각각 부대를 만들되 역시 통장을 둔다. 그 부대 내에 만약 범과자가 있으면 통장이 다스리고, 통장이 과실이 있으면 통장을 통솔하는 자가 다스린다.
1. 의병이란 명칭을 한 이상 군사가 지나가는 곳에서 만약 무뢰한의 행위가 있거나 혹은 몽둥이로 촌백성을 두들기거나 남의 내정에 함부로 들어가거나 하는 것은 바로 난군(亂軍)이니 죄의 경중에 따라 처단한다.
1. 지나가는 부락에서 만약 재물이나 곡식을 빼앗는 일이 있으면 이것은 적군(賊軍)이니 참형에 처한다.
1. 혹시 부녀자를 겁탈하거나 또는 사람을 살해하는 일이 있으면 이것은 역군(逆軍)이니 용서없이 처단한다.
1. 혹시 소나 말을 약탈하거나 닭·개를 함부로 죽이는 일이 있으면 이는 도군(盜軍)이니 경중에 따라서 처벌한다.
1 혹시 의병소의 장령이라 칭하고 가인(假印)을 찍어서 민간에 토색질하는 일이 있으면 이는 포군(逋軍)이니, 동중에서 자세히 조사해서 잡아 올리면 의병소로부터 처참한다.
1. 읍이나 부중을 지나갈 적에 혹시 창고 쇳대를 임의로 부수거나 관가의 물건을 빼앗는 일이 있으면 나라에서 떳떳한 형벌이 있으니 관에 보고하여 처벌한다.
1. 지나가는 각처의 전답의 곡물을 보호하여 한길로 조심해 다닐 것이며 만약 함부로 밟아 넘기는 자가 있으면 죄를 준다.
1. 복병했을 적에 포소리가 들리면 일제히 방포하여야 하며, 만약 머뭇거리기만 하고 발포하지 않으면 죄를 받는다.
1. 호군장이 징을 치면 일제히 모여 함께 밥을 먹어야 하며, 앞당겨 오는 자도 죄에 해당되고, 뒤에 떨어져 오는 자도 죄에 해당된다.
이상을 일일이 시행해야 한다. 만약 등한시하고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각각 통솔자에 책임을 묻는다.
유사(有司)를 배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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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봉장 강무경(姜武景)·임만선(任萬先)·장인보(張仁甫)
중군장 안찬재(安贊在)·박사화(朴士化)
후군장 노병우(盧炳友)·나성화(羅聖化)
후군장 최우평(崔友平)·김성재(金聖載)
도통장 김도숙(金道淑)
통장 유치선(柳致先)·공진숙(孔盡淑)
군량장 이세창(李世昌)
호군장 강달주(姜達周)·정관오(鄭官午)
기군장 장문연(張文然)·이덕삼(李德三)·김치홍(金致弘)
서기 겸 모사 염원숙(廉元淑)
도포 장경선(張京先)·김판옥(金判玉)·선도명(宣道明)
도집사 최유승(崔有承)
모사 권택(權澤)·정영태(鄭榮兌)
접전일기(接戰日記)
강진(康津) 오치동(吾治洞) 접전
무신(戊申) 3월 7일 남평(南平)으로부터 행군하여 강진 오치동에 당도했는데, 깃발이 공중을 가리고 칼과·창이 서릿발 같으니 보는 자마다 혀를 내두르고 눈을 휘둥그리며
“지금 세상의 강태공(姜太公)·제갈공명(諸葛孔明)이다. 우리 한국 5백년 종묘사직이 이로부터 중흥될 가망이 있다.”
고 모두 말하였다.
드디어 군문을 굳게 잠그고 군사들과 더불어 큰 잔치를 하는데 뜻밖에 왜병 수백 명이 충돌하여 싸움을 걸어오므로 군사를 출동시켜 서로 접전하여 오전 6시부터 오후 10시까지에 적 수십 명을 목베고 무기를 모조리 빼앗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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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長興)·곽암(藿巖) 접전
4월 15일. 장흥 관동(官洞)에 유진하고 있는데, 일본 병정 7명이 이 소식을 염탐해 듣고 곧장 들어와 습격하였다.
이보다 앞서 우리 군사는 이미 곽암 아래 복병해 있었던바. 기회를 놓질 세라 포 1발을 터뜨리니 소리가 하늘을 진동하면서 3왜놈은 땅에 넘어지고 나머지는 모두 겁내어 달아났다. 그래서 소를 잡고 술을 마련하여 큰 잔치를 하고 북을 두들기며 돌아왔다.
남평(南平) 장담원(長淡院) 접전
6월 19일. 남평 죽곡(竹谷)에 유진하고 장담원 주점 10여 호를 연댄 담장 아래 복병한 다음, 보발군을 시켜 곧 병참소에 달려 가 통지하게 했다.
저물녘에 적의 군사 60여 명이 떼를 지어 오므로 우리 군사가 한꺼번에 발포하여 5명의 왜적을 죽이고 철천(鐵川)으로 퇴진하였다.
능주(綾州) 노구두(老狗頭) 접전
6월 25일. 남평 판촌(坂村)에서 군사를 주둔하고 여러 장좌(將佐)를 돌아보며,
“노구두 산천을 누가 앞서 인도하겠느냐. 옛적부터 전쟁을 하는 자는 먼저 지형을 살핀 뒤에야 계획을 정하는 법이다.”
말하자 후군 노병우(盧炳友)가 대답하고 말을 달려 나오며,
“소장이 비록 불민하오나 산천의 형세를 자세히 압니다.”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병 90여 명을 뽑아 그에게 주며
“왜적 6,7명이 방금 지나갔으니 기를 가다듬고 출전하여 성공하고 돌아오라.”
당부했다. 그는 즉시 행군하여 적과 더불어 교전한 바 잠간 사이에 적 5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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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베고 말 2필과 무기 등속을 빼앗았다.
영암(靈巖) 사촌(沙村) 접전
7월 그믐날. 이른 아침에 모사장 권택(權澤)과 더불어 적을 토벌할 계획을 하고 점을 쳐 보니 점괘에 ‘앉아서 큰 도(道)를 말하며 여섯 나라를 통솔한다.’하였다. 권택은
“좌우로 돌담이 있는 그 사이에 복병하면 오늘 오후 2시 경에 적의 목을 베어 올 수 있다.”
말하므로 그 말에 의하여 복병하고 기다렸다.
오정이 되자 과연 영산포(榮山浦)로부터 왜장(倭將) 금평산(琴平山)이 기병 20여 명을 거느리고 쏜살같이 달려오므로 우리 후군은 포를 터뜨리며 달아나 산속으로 들어가니, 적이 포소리를 듣고 우리를 추격해 왔다.
이에 복병이 일제히 포를 터뜨려 금평산과 그 기병 10여 명을 쏘아 죽이고 행장과 무기를 탈취했다. 그래서 그 행장을 뒤져본즉 6국을 수호했고 여러번 싸움에 승전했다는 초지가 들어 있었다.
이때에 비바람이 크게 시작하여 모래를 날리고 나무가지가 부러지며 천지가 캄캄했다. 오후 2시부터 싸움이 벌어져 6시에야 끝나므로 군사를 수습하여 당산촌(堂山村)에 와 유진하였다.
나주(羅州) 반치(盤峙) 접전
8월 1일. 새벽에 가만히 생각하니 왜적 금평산(琴平山)의 시체를 운반해 가자면 적군이 반드시 많이 몰아 와 반치에 진칠 듯 싶었다. 그래서 점을 쳐 보니 점괘에 ‘대밭 속에서 거문고를 타는데 줄이 간혹 끊어진다.’하였다. 대개 적군을 많이 죽이는 반면 우리 측에도 장수 하나를 잃어버릴 수가 없지 않다는 것으로 풀이되었다.
과연 적병 40여 명이 처음에 영암으로 깃발을 날리고 오는데 우리 군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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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좁은 길목에 매복해 있다가 적의 깃발을 보자 일제히 포를 터뜨렸다. 그래서 적이 죽은 수효는 20여 명이었고, 우리 장수 조기보(趙奇普)도 순절했다. 아 !그는 죽을 곳을 얻어 죽은 것이다.
장흥(長興) 신풍(新豊) 접전
9월 20일. 대치(大峙)에서 유진하고 있는데 정탐군이 와서
“순사 부대 30명이 신풍에 묵고 있다.”
고 보고하므로 나는 선봉 강현수(姜鉉秀)를 돌아보며
“때마침 한 밤중이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습격하면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자 선봉은 응낙하고 정병 백여 명을 거느리고 곧장 쳐들어가서 크게 깨뜨림과 동시에 왜적 20여 명을 목베었다.
해남(海南) 성내(城內) 접전
10월 9일, 군사 3백 명을 거느리고 기세 좋게 출발하여 해남 성 밖 10리 지점에 유진했다. 정탐군이 여러 차례 내왕하므로 짐짓 겁내어 위축하는 모양을 보이고 있다가, 밤 10시 경에 군사를 끌고 성 안으로 충돌해 들어가서 마구 포를 쏘아 왜적 백여 명을 베었다. 이는 소위 헌병분대였다. 이튿날 새벽 전에 대둔사(大芚寺)로 퇴진했다.
능주(綾州) 돌정(石亭) 접전
10월 27일. 나는 선봉 강무경(姜武景)과 함께 병이 나서 영암(靈巖) 분토동(粉土洞)에 누워 있으면서 중군 박사화(朴士化), 후군 노병우(盧炳友)·최우평(崔友平), 통장 김도숙(金道淑), 기군장 장문연(張文然), 호군장 정관오(鄭官午)를 불러 들여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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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병이 들어서 출전을 못 하겠기에 내외 모든 사무를 제군에게 위임하는 것이니, 제군은 특별히 백성을 무마하는 데 힘을 써야 한다. 부디 재물을 빼앗지 말고, 겁탈하지 말고, 죄 없는 사람을 두들기지 말라. 그리고 또 경솔히 발동하지 말며, 적을 가소롭게 보지 말고, 가는 곳마다 백성들은 집안사람 보 듯하여 반갑게 서로 대하며, 아예 백성에게 실망을 주지 말라. 옛날 한패공(漢沛公)은 관중(關中)에 들어갔을 적에 재물을 취한 바도 없었고 부녀자를 가까이 한 바도 없었으니, 이야말로 천리(天理) 인심에 순응한 것이 아니냐.”
여러 장수는 모두 고개를 숙이며 명령대로 따르겠다하고 이날 밤에 노안리(老安里)로 출진했다.
그래서 이튿날 능주읍에 있는 헌병을 무찌를 계획으로 돌정리(石亭里)에서 군사를 먹였다.
마침내 토왜(土倭)의 암통으로 인해 왜병 3백여 명이 동북쪽으로 들어와 서로 10여 차례 어울렸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후군장 최우평이 말을 채찍질하여 나와 크게 꾸짖으며
“어리석은 오랑캐놈들아, 소위 보조원놈들아. 네놈들이 천벌을 아느냐, 의병을 아느냐. 나는 오늘 결사적으로 네놈들을 모조리 없앨 것이며, 그렇지 못하면 맹서코 물러나지 않겠다.”
서로 어울려 싸우다가 탄환을 맞아 죽었다. 천지가 참으로 무심하고 일월도 빛이 없는 것 같았다. 그 나머지 군사 20여 명도 함께 쓰러지니, 중군 박 사화가 분에 못이겨 손에 칼을 들고 말을 채찍질하여 적진으로 달려가 싸웠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총장 김도숙이 후군을 보호하여 왜적과 싸워서 20여 명을 베었다.
남평 거성동(巨聲洞) 접전
기유(己酉) 3월 8일. 대장 서리 강현수(姜鉉秀)는 박봉주(朴奉柱)·박채홍(朴彩洪)과 함께 나주 월교리(月橋里)에서 유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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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밤에 3사람의 진이 남평 운삼동(雲三洞)에서 집합하여 선동(船洞)으로 옮기는데 정탐군이 와서
“왜적 15명이 몰래 운곡(雲谷)으로 들어갔다.”
보고하므로 다시 군사를 정돈하여 본진은 장암(墻巖)에 머물고, 박봉주·박채홍은 철천(鐵川)에 진을 치고, 박민홍(朴玟洪)은 선동(船洞)에 주둔하여 4진이 서로 4,5마정 사이에 있었다.
정탐군이 와서 적이 출발해서 선동으로 들어갔다 하므로, 이내 군중에 영을 내리어 돌담 밑에 복병하게 하고 적을 유도하여 싸움을 건 결과 겨우 5명을 쏘아 죽였다. 그리고 남은 적은 영산포로 달아났다.
여러 장수가 이 소식을 듣고 와 모였기에 나는 여러 사람에게 말했다.
“적의 세력이 점점 치열하여 감히 포학을 부리니 그 세력을 막아낼 수 없은즉 여러 진이 모두 모여 적을 유도해 끌어내어 서로 어울려 승부를 결단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만약 숨고 도망하여 각자 도생한다면 이 어찌 대장부가 나라 위해 충성을 바치려는 뜻이겠느냐. 어찌 이웃 나라에 알릴 수 있는 일이겠느냐.”
일변으로는 영산포에 보발을 보내어 적의 마음을 격동하고, 일변으로는 여러 진의 책임자에게 통고하였다. 그래서 북쪽의 전수용(全垂鏞)·이대국(李大局)·오인수(吳仁洙)와 동쪽의 안규홍(安圭洪)·김여회(金如會)·유춘신(柳春信)이 일제히 와서 상의하였다.
이튿날 새벽에 천기(天氣)를 바라보게 한 바, 5색의 무지개가 서쪽을 꿰뚫었다.
모사 권택이 점을 쳐 보니 점괘에 ‘2호랑이가 다투어 싸우는데 서쪽들이 어찌 변했느냐.’하였기로, 즉시 군중에 영을 아래와 같이 내렸다.
“1부대는 동쪽 대치(大峙)에 매복하여 능주의 적을 방어하고, 1부대는 대항봉(大巷峯)에 매복하여 광주·나주·남평 3 고을의 적을 방어하고, 1부대는 서남간 월임치(月任峙)에 매복하여 영암의 적을 방어하고, 1부대는 덕룡산(德龍山) 상봉에 매복하고, 1부대는 병암치(屛巖峙)에 매복하여 서로 응원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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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 8시 경에 능주의 적이 20여 명이 동쪽에서 들어와 충돌하므로 우리 군사가 일제히 사격하여 적 15명을 죽였다.
10시 경에 광주·나주·남평의 적 60여명이 북쪽에서 들어와 싸움을 걸기로, 우리는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적의 장수인 경무사(警武師)와 졸병 수십 명을 죽였다. 그리고 영암에서 들어온 적 10여 명은 이미 서남간에 매복한 우리 군사에게 패배를 당했다.
이번 싸움에 적을 잡은 것이 70여 명에 달했고, 우리 군사도 약간 명이 죽었는데, 그 중 드러난 이는 박여홍(朴汝洪)·박태환(朴泰煥)·박기춘(朴基春)으로, 여홍·태환은 박민홍(朴玟洪)의 좌·우익장이었고, 기춘은 본진 총독이었다.
능주(綾州) 풍치(風峙) 접전
기유 3월 11일. 장흥(長興) 한담리(寒潭里)에 유진하고 장대(將臺)에 비껴 서쪽으로 천기를 바라보니 적병이 오전 10시 경쯤 올 듯하므로 급히 군사를 재촉하여 풍치 바윗돌 사이에 잠복하게 하였다.
이윽고 12고을의 왜적 4백여 명이 팔방으로 포위하고 들어와 서로 어울려 격전을 벌여 왜병 백여 명을 죽였으나, 나머지 군사가 물러나지 아니한다. 나는 드디어 징을 쳐서 군사를 8문의 하나인 두문(杜門)방으로 끌어 들였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동요(童謠)가 나왔다.
‘심남일은 용마(龍馬)를 타고 산 밖으로 뛰어나갔고, 강현수는 풍운조화를 부려 공중으로 날아갔다.’
보성(寶城) 곰재(熊峙) 접전
4월 2일. 장흥(長興) 우산(牛山)에 주둔하였다. 이때에 능주 헌병 20여 명이 매달 5차례씩 장흥을 통과하므로 그들의 지나갈 때를 맞춰서 내외 생사(生死)문을 가설하되, 구성(九星)에 응하고 또 8문의 법을 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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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선봉장 강현수는 일등병 20명을 거느리고 두문(杜門)방에 매복하고, 모사(謀士) 염원숙(廉元淑)은 날랜 군사 20명을 거느리고 생문(生門)방에 매복하고, 후군장 노병우는 화포군 2명을 거느리고 휴문(休門)방에서 북을 치기로 했다.
오후 2시 경에 적병 15명이 북 울리는 소리를 듣고 곧장 충돌해 오니 각 방위의 복병이 한꺼번에 쏟아져 포를 터뜨려, 적 8명은 당장에 죽고 나머지는 도망해 달아났다. 그래서 대포 2자루와 기타 무기를 다 빼앗아 가지고 한담(寒潭)에 돌아와 술을 마련하여 북을 울리며 온 군사와 큰 잔치를 했다.
보성 천동(泉洞) 접전
5월 12일. 천동에 주둔하고 보성 창의장(倡義將) 안규홍(安圭洪)에게 통지해서 석호산(石虎山)에 집합하여 서로 병사를 의논하게 되었다.
그래서 중군장 안찬재(安贊在)와 통장 김도숙을 시켜 백리 밖에 있는 군량을 운반해 오게 하고 후군장 김성재(金聖載)와 호군장 강달주(姜達周)를 시켜 소를 잡아 군사를 먹이며 산상에 깃발을 휘날렸다.
보성의 왜적이 산상의 깃발을 바라보고 50명의 군사로 하여금 북을 울리며 싸움을 걸어오므로 여러 장수는 응낙하고 말을 달려 나가 접전하여 5명의 적을 쏘아 죽였다. 그리고 석호산으로 진군하여 안규홍과 더불어 적을 무찌를 계획을 진술하였다.
모사 염원수는 다음과 같은 시 1절을 읊었다.
이번에는 무난히 싸워 이겼다,
우리 두 진 기세는 웅장도 하군.
저 왜놈 없앨 날이 머지않으니,
하늘이 나라 위해 명장을 냈네.
이세창(李世昌)은 나와 말했다.
“적은 군사가 많은 군사를 당적하지 못하는 것은 이치의 당연이니 남·북도 의병이 합세한 연후라야 대사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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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에서 모두 그 말을 옳게 여겨 즉시 여러 의진(義陣)에 통문을 띄워 연합할 계획을 했는데, 이때에 본의 아닌 조서(詔書)가 한 번 내려 만사는 다 틀리고 말았다. 이 무슨 운명이냐. 하늘을 우러러 통곡한다. 나는 장차 어디로 가리오.
10월 20일 광주 담판
일본은 동양에 있어 하나의 동맹국으로서 우리 한국을 보호한다 일컫는데 무릇 보호라는 것은 나라를 안보해 주고 백성을 두호해 준다는 말이다.
일본과 청국이 화친하고 일본과 아라사가 싸움을 시작함으로부터는 비록 어리석고 무식한 농삿군 아낙네들도 너희 일본이 솥발처럼 동양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혹시나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는 격이 될까 염려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겉으로는 그럴듯한 명분을 빙자하고, 안으로는 도적의 심리를 품어, 통감부를 설치하여 우리 임금을 협박 견제하고, 우리 국권을 강탈하며, 마침내는 저 옛날 춘추(春秋)시대에 진(秦)나라가 우(虞)나라에게 길을 빌어 괵(虢)나라를 없애는 것 같은 술책을 써서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허위(虛位)만 지키게 한단 말이냐.
우리 3천리 강토와 우리 5백 년 종묘사직이 멸망에 직면하고 있으니, 무릇이 나라 백성 치고는 와신상담(臥薪嘗膽)하지 않는 자는 없다.
남일도 역시 이 나라 백성의 한 사람인지라 국가가 위급한 이때를 당하여 비록 전쟁에 대한 경력은 없지만 치솟는 의분심이 나로 하여금 편안히 집에만 들어 앉아 있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침내 앞뒤를 헤아리지 않고 많은 의병을 모집하여 가을바람에 칼을 짚고 일어나 적을 무찌르기로 한 바 깃발이 향하는 곳에는 한두 명쯤 잡아 죽인 공효도 없지 않았다.
아 ! 간신이 임금을 협박하여 선유(宣諭)가 갑자기 내리게 되니 남일은 이것이 바로 ‘천자를 끼고 제후(諸侯)를 호령한다’는 것임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신하의 도리에 있어, 전혀 항거만 하여 명령을 거역한 죄를 받을 수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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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의사들과 마주 대해 통곡하며 의병을 해산했던 것이다.
그리고 월출산(月出山)속으로 들어와서는 너희 군대와 한 번도 싸운 일이 없으며, 오직 서울 통감부나 일본 정부에 한 번 직접 담판하여 동양 평화의 본의가 어떤 것인가를 물어 보려고 했었다.
지금은 독한 매를 많이 맞아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니 필경에 나는 대의를 펴지 못한 채 사지가 찢기고 말 것인즉, 예전 얼굴로 지하에 가서 선왕을 모실 수도 없게 되었다.
무릇 세상에 태어나면 각기 제 임금을 위하는 것은 벌과 개미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하물며 인류이랴. 오직 우리 2천만 동포의 마음은 모두 남일의 마음이니 남일 한 사람을 죽인들 어찌 또 남일이 없겠느냐.
이 더러운 오랑캐놈들아, 빨리 나를 죽여 달라. 나는 죽으면 마땅히 사나운 귀신이 되어 맹서코 네 나라를 없애고야 말 것이며, 만약 나를 죽이지 않을진대 나를 일본 정부로 보내 달라. 거기 가서 이 충정을 이야기하고 죽는 것도 남일의 소원이다.
12월 15일 담판
국가는 신하와 백성으로 근본을 삼고, 신하와 백성은 국가를 하늘로 삼는 것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편안하고 나라가 튼튼해야 백성이 편안한 것은 정상적인 이치다.
만약 민생이 곤란하여 밥을 먹지 못할 경우에는 국가가 창곡을 내어 구호해 주고, 국가가 난을 당하면 신하와 백성이 몸을 희생하여 국가에 보답하는 것은 이야말로 만고에 바꾸지 못할 떳떳한 이치다.
지난 을미년 변란은 어찌 말할 수 있으랴. 우리 국모를 시해하고, 우리 강토를 빼앗고, 우리 백성을 괴롭히고, 우리 재원을 박탈하고, 우리 제도를 변경하고, 우리 군권을 마음대로 하고, 우리 형법을 고쳐서 우리 임금과 백성으로 하여금 수족을 놀릴 수 없게 만들었다. 이것이 과연 만국 공법이냐. 마관(馬關)조약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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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의 하는 짓으로서 너희 심장을 들여다 볼 수 있은즉, 이등박문의 죄상은 비록 만 번 능지처참해도 오히려 남음이 있고 살가죽을 벗겨서 북을 만들어도 역시 부족한 감이 있는데, 이런 놈과 어찌 이 하늘 밑에서 함께 살 수 있단 말이냐.
이 때문에 송연재(宋淵齋 ; 秉璿)선생은 석남(石南)에서, 최면암(崔勉庵 ; 益鉉)선생은 대마도(對馬島)에서 각각 순절하였고, 민충정(閔忠正 ; 泳煥)·조충정(趙忠正 ; 秉世)은 혹은 배를 가르고, 혹은 독약을 마셔 차례로 순절하였으며, 고의사광순(高義士光洵)·기의사삼연(奇義士參衍)·김의사준(金義士準) 등 여러분들은 모두 호남에서 적과 더불어 여러 번 싸우다가 마침내 적의 칼날에 넘어졌으니 ‘길이 영웅으로 하여금 눈물이 옷섶에 가득하게 한다’는 것이 유독 제갈양(諸葛亮) 한 분만이 아니다.
남일은 초야의 썩은 선비요, 글방의 얕은 재주로서 망령되어 여러 충신의 뒤를 따라 한 칼로 강적을 무찔러 먼저 국가의 원수를 갚고, 또 순절한 여러 어진이의 원한을 풀어 드리며 장차 중흥의 업을 도우려고 했었다.
뜻밖에 본의 아니신 황상의 칙명이 내려 의병을 해산하자, 그 사이에 포로가 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음으로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며 사기가 맥이 없고 가슴 속이 답답하다. 그러나 억지로 입을 열어 수응하는 것은 목숨이 아까와서 이러는 것이 아니라, 나의 4가지 포한을 말하려는 것이다.
나라 원수를 갚지 못하고 외래의 침략자를 쫓아버리지 못하고, 국내의 적신을 제거하지 못했으니 1가지 한이요, 늙은 어머니가 계시는데 끝내 봉양하지 못해서 죽어도 불효(不孝)의 귀신이 되겠으니 2가지 한이요, 죄 없는 백성들이 모두 사로잡히게 되어 아직도 감옥에 갇혀있는데, 그들의 온 종일 먹는 것은 5홉 곡식도 못되니 반드시 횡사하고 말 것이라. 애잔한 목숨을 건저 주지 못하고 가는 것이 3가지 한이요, 지하(地下)로 돌아가는 날에 선왕(先王)과 순절한 충신들이 물으시면 대답할 말이 없으니 4가지 한이다. 이 밖에는 오직 죽음이 있을 따름이다.
대구(大邱) 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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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은 일본 땅이 아니오, 네놈들도 한국 사람이 아니다. 나는 우리나라를 위해 일하고 네놈들은 네 일본을 위해 일하니 각기 제 임금을 위하는 것이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다른 사람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미루어 측량할 수 있다.’하였으니 네 마음으로 내 마음을 짐작할 수 있고 내 마음으로 네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네가 나를 대해 반드시 물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으며, 나도 역시 너를 대해 꼭 대답해야 할 까닭이 어디 있겠느냐. 그러나 네가 이미 물었으니 나는 부득불 소회를 낱낱이 말해야겠다.
대저 네 나라가 거짓 우리나라를 보호한다 칭하며 겉으로는 공화(共和)를 부르짖으나, 안으로 강도나 절도의 마음을 품고 우리 국재를 장악하여 우리 탐관오리를 유도하며 마침내 나라를 빼앗기를 마치 어린아이들 손에 든 물건을 빼앗듯이 하니 이것이 과연 만국의 공법이냐, 마관의 조약이냐. 그 심리가 너무도 험악하고 그 정상이 너무도 음흉하구나.
옛날 소동파(蘇東坡)의 말에 ‘오랑캐란 왕도(王道)의 정치로 다스려서는 안된다.’ 하였는데 오랑캐의 정치란 본시 이러한 것이냐. 네 놈들의 소위를 따지면 죄가 천지간에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
아! 남일은 4천 년 예의의 나라에 생장하고 5백 년 교육의 덕택에 젖었은즉, 다만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의를 알 따름이다. 지금 국가의 멸망이 조석에 임박했으므로 약한 자가 강한 자를 대적하지 못할 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옷소매를 떨치고 일어나서 한 번 외치자 사방에서 호응하였다. 그래서 군사를 몰고 다닌 적이 지금 수3년이었다.
마음인즉 적을 제거하되 풀 베듯이 하고, 부끄럼을 씻되 몸의 때 벗기듯이 하여 해내(海內)를 깨끗이 맑히고, 우리 국가로 하여금 길이 안락을 누리게 하려 했으나 마침내 이루지 못했으며, 동해물로 칼을 갈고 대판(大阪)에 창을 꽂고, 만 리 밖에서 한 번 결전하여 시체로 말가죽에 싸여 오는 것이 역시 나의 소원이었으나 이도 이루지 못했다.
이제는 만국 공판정에 나가서
‘남의 나라를 빼앗는 것이 죄가 되느냐, 제 나라 원수를 갚으려는 것이 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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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느냐.’
는 것을 한 번 물어 보고 싶은 생각뿐이다. 그래서 공론이 만약 죄가 나에게 있다고 한다면 비록 만 번 죽어도 달갑게 여기겠다.
아! 모든 일이 뜻과 같지 않아 하룻밤에 포로의 신세가 되어 광주감옥·대구감옥에서 해를 보내고 있으니 이것이 과연 무슨 죄란 말이냐. 제 나라를 위한 것도 죄가 될진대 남의 나라를 빼앗는 것은 무슨 죄에 해당하느냐. 대장부가 비록 너에게 사로잡혔지만 쥐 같은 네놈들과는 옳다 그르다 따지고 싶지 않으니 빨리 나를 네 임금에게 보내 달라. 네 임금과 한 번 담판하고 죽겠다.
[융희(隆熙) 1년 정미(丁未) 11월 1일 함평(咸平) 신광면(新光面)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무신(戊申)년 2월 13일 남평(南平)에서 군사를 집합했고, 기유(己酉)년 8월 26일, 능주(綾州)에서 사로잡혀 9월 2일 광주감옥에 갇혔다. 광주감옥에서 2차례 담판이 있었고 대구(大邱)로 이감되어 1차례 담판이 있은 모년 모월 모일에 순절하였음.]
시(詩)
정미년 거의할 때 느낌이 있어
초야의 서생이 갑옷을 입고,
말 달려 남으로 건너가네.
만약에 왜놈들을 못 없앤다면,
이 몸이 백사장에 죽고 말련다.
세류봉대(細柳鳳臺)에 유진하면서
봉서대(鳳捿臺)야 있다만 봉은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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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마(鐵馬)는 언제 용솟음칠고.
꾀꼬리는 날 저문 줄도 모르고,
능수버들 봄 바람에 노래만 불러.
고인동(古引洞)에서 군사를 해산함
장수랑 군사들은 눈물로 이별 짓고,
고인산을 떠나 가니 말조차 더디구나.
왜적을 없앨 날이 마침내 있으리니,
3년 동안 맹서한 일 부디나 잊지 마세.
감옥 속에서 옛 동산의 매화를 생각함
봄이 와도 매화꽃을 구경 못한다,
눈 속에서 얼마나 꽃이 피었나.
이제 나는 돌아갈 기약 없다만,
해마다 꽃이나 잘 피려므나.
광주 감옥에 이감되다
봄 가을 모르는 감옥살이라,
해 묵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네.
집안 생각 나라 근심 모두 다 눈물,
고개 들어 강산을 볼 수도 없어.
광주 감옥에서 강 무경에게
지난날 비바람 치던 이 세상에,
아우라 언니라 사생을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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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이감시켜 딴 데로 가니,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단 말가.
대구(大邱) 담판
5백 년을 내려온 예의의 나라,
하루 아침에 왜놈 세상 되단 말가.
이 몸이 차라리 죽고 말망정,
원수와 함께 차마 살 수는 없어.
맹서짓고 3년을 싸웠지만,
마침내 아무런 공이 없었네.
뜨거운 눈물을 어디 쏟으리,
장부가 나서 헛되게 가란 말가.
고국 강산을 영결함
해와 달 밝고 밝던 이 나라 강산,
어쩌다 먼지 속에 들어갔느냐?
맑은 날 못 보고 지하로 가니,
붉은 피 한에 맺혀 푸른 피 되리.
어머니를 생각함
어머님은 얼마나 늙으셨는지,
3년이 지나도록 뵙지 못했네.
나라도 못 건지고 몸만 죽으니,
천지간에 불효자란 것만 남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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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附錄)] 황제의 밀조(密詔)
아 ! 원통하다. 나는 죄악이 커서 하느님이 돕지 않으니 백성이 도탄에 빠졌다. 이 때문에 강한 이웃 나라가 틈을 노리고 역신(逆臣)이 권세를 우롱하니 4천 년 예의의 나라가 나의 대에 와서 하루 아침에 견양(犬羊)의 지역이 되었다. 나는 무슨 낯으로 성묘(聖廟)를 뵈옵는단 말이냐.
오직 나의 한 목숨은 족히 아까울 것 없으나 종묘사직과 백성을 위하여 이와같이 애통하는 ‘밀조’를 내려 전참정(前參政) 최익현(崔益鉉)으로 도체찰사(都體察使)를 삼아 7도에 보내는 것이다.
호서(湖西)는 충의군(忠義軍)으로, 호남(湖南)은 장의군(壯義軍)으로, 영남(嶺南)은 분의군(奮義軍)으로, 관서(關西)는 용의군(勇義軍)으로, 관동(關東)은 강의군(强義軍)으로, 해서(海西)는 호의군(扈義軍)으로, 관북(關北)을 웅의군(熊義軍)으로 하여 각기 의기(義旗)를 세우고 양가(良家)의 자제들은 모두 소모관(召募官)으로 등용하라.
그리고 각 군중의 인장은 모두 자유로 새겨 쓰고 관찰사나 군수로서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자 있으면 우선 파직처분을 내리며, 모두 마음을 단합해서 나가라. 경기 1도는 내가 그 군사와 더불어 사직(社稷)을 위해 순사(殉死)하려는 것이다. 쇄서(璽書)를 비밀히 내리는 것이니 짐작하라.
을사(乙巳) 11월 22일 밤 발급한다.
경기도 민경식(閔景植)
민병한(閔炳漢)
이정래(李正來)
민형식(閔衡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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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심남일전
심수택(沈守澤)은 본이 청송(靑松)인데, 청송백(靑松伯) 덕부(德符)로부터 대대로 벼슬한 이가 나서, 동방의 큰 성씨 중에 하나다. 중세(中世)에 함평(咸平)으로 낙향(落鄕)했다. 그 남일(南一)이란 것은 의병을 일으킬 때 스스로 지은 별호이므로 세상이 모두 남일이라 칭했다.
남일이 젊어서부터 비범하여 산업(産業)에 뜻을 두지 않고 항상 국가를 위해 몸을 던지고자 하던 차, 을사년 5조약이 체결된 뒤로 종묘사직이 위태롭게 되고, 간사한 적신이 발호하는 것을 통분히 여기고 장차 의병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하기로 했다.
마침 을사 11월 22일 밤에 대궐로부터 애통하시는 비밀 조서(詔書)가 내렸는데, 그 대략은 앞에서 본 바와 같다.
이때에 최면암(崔勉庵)이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기성재(奇省齋)·고녹천(高鹿川)이 차례로 일어나니 남일도 의기(義旗)를 들고 나서려고 했으나 모집에 응한 자가 얼마 없었다.
마침내 정미(丁未)년 12월에 함평(咸平) 신광면(新光面)에서 분연히 일어났으나, 군사의 형세가 고단하고 약하여 적과 대항하기 어려웠다.
무신(戊申)년 2월에 남평(南平)지방으로 가서 군사5,6백 명을 수합하여 진용이 약간 정비되자 즉시 각 고을 수령(守令)들과 각 고을 향교(鄕校)에 통고하고 드디어 왜적에게 싸움을 선포했다.
3월 7일. 강진(康津) 오치동(吾峙洞)에 유진하고 있는데 본군 헌병 수백 명이 곧장 들어와 싸움을 걸므로, 오전 6시부터 오후 10시까지 격전을 벌여 적병을 수 없이 죽이니 적이 후퇴하여 도망갔다. 이 싸움에서 무기를 빼앗아 왔다.
4월 15일. 장흥(長興) 유치(有峙)에 이르러 왜의 상등병 3명을 쏘아 죽였다. 이로부터 연전연승하여 무릇 적과 어울려 싸운 것이 전후, 대소를 합해서 15회 가량인데, 모두 왜놈의 혼을 날리고 잡아 죽인 수효도 수백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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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이다.
그중 큰 싸움으로 말하면 해남(海南)병참소를 습격하여 성적이 가장 드러났고, 또 영암(靈巖) 사촌(沙村) 싸움에 왜의 대장 금평산(琴平山)을 잡아 죽였다.
이로부터 군의 기세가 크게 떨쳐 여러 고을 적도(賊徒)들을 소탕할 만했었는데, 석정(石井) 싸움에서 마을 사람이 능주(綾州)헌병대에 밀통하게 되어 그 적이 밤을 타 습격해 왔으므로 군사를 많이 손실했다. 이것이 의병을 일으킨지 3년 만에 처음 당하는 실패였다.
대개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을 같이하고 사생을 초월하여 여러 번 공을 세운 자는 선봉장 강무경(姜武景)과 모사 권택(權澤)·염원숙(廉元淑)이요, 패전해서 순절(殉節)한 자는 후군장 최우평(崔羽平)등 10여 명이었다.
이때에 황상으로부터 의병을 해산하라는 칙명이 내리므로 부득이 군사를 돌려보내고 잠간 능주 풍치(風峙)에서 피신하다가 기유(己酉) 8월 26일에 왜적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9월 2일, 광주(光州)감옥에서 담판하게 되자 의기가 조금도 굽히지 아니하며 추상(秋霜)같이 호령하기를
“네놈들이 동맹국으로서 우리나라를 보호한다 일컫고 강제로 국권을 박탈하며 마침내는 종묘사직을 전복하니 우리나라 신민(臣民)은 만세라도 이런 심각한 원수를 잊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백면서생으로 의분심을 못 이겨 의병을 수합하여 더러운 오랑캐를 깨끗이 쓸어내고 우리 국권을 회복할 생각이었는데, 하늘이 바른 자를 돕지 아니하여 네놈들에게 잡히고 말았으니 오직 한 죽음으로 나라 은혜에 보답할 따름이다. 비록 그러하나 네놈들을 반 토막으로 짤라 죽이지 못하고 도리어 네놈들 손에 죽게 되니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다.”
하니 소위 왜적의 부대장이라는 자도 역시 혀를 내두르며 감탄하여 마지않았다.
광주감옥에 유치되자 날마다 강무경 등과 함께 술을 마시며 시를 지었고, 12월 15일에 2차 담판이 열리자 의기가 더욱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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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적은 남일을 대구(大邱)감옥으로 이감하여 끌어내서 문초하자, 남일은 말하기를
“네놈들이 나에게 바른 말을 듣고 싶으냐. 네놈들이 계속하여 갖가지 간사한 계교를 써서 우리 역신놈들을 꼬여 우리나라를 빼앗았으니, 네놈들 죄악이 너무도 많아서 장차 종자도 남지 않을 것이다. 나의 할 말은 이미 광주 담판에서 말했으니 그 기록을 보면 알 것이다. 나는 맹서코 네놈들과 이 천지에 같이 살지 않을 것이니 빨리 나를 죽여 달라.”
하였다. 마침내 살해를 당했으니 슬프다. 이 얼마나 장한 일인가. 죽던 날에 원근 인사들이 알건 모르건 간에 모두 놀라 탄복하며 친척을 여읜 것처럼 슬퍼했다. 남일의 아들 형제가 대구로부터 시체를 수습하여 선산에 장사하였으니, 그 효성도 역시 지극하다 할 수 있다.
작자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우리나라 의병이 옛날 임진년처럼 성한 때는 없었다. 그러나 임진년에 창의한 여러분들은 진작 벼슬을 지낸 분이거나 또는 유림(儒林)의 장석이었기 때문에 군사를 소집하고 관민을 호령하는 데 있어 오히려 의세가 되었으며, 또 관찰사나 수령이 모두 우리 지방관이라, 함께 서로 호응이 되어 비록 급하고 어려운 때일지라도 힘이 되기 용이했거니와 지금에 와서는 임진년과 또 큰 차이가 있다.
저 왜적이 우리 주(州)·군(郡)을 모두 점령하여 한 조각도 깨끗한 땅이 없으니 소위 지방관이란 자들이 거개 왜적의 앞잡이가 되어 의병의 소재처를 알기만 하면 기어이 앞장서서 모함하여 적에게 곱게 보이려는 터이라, 오늘날 창의한 여러분의 처지는 더욱 어렵지 아니한가.
저 최면암 같은 큰 절개는 온 나라 사람의 모앙하는 대상이 되었지만 순창(淳昌) 원의 모함을 입어 마침내 대마도에서 죽고 말았으니, 그 나머지야 말 할 것이 있으랴.
남일 같은 사람은 시골 구석의 한 농민이니 비록 문을 닫고 집안에 들어 앉아 그 몸을 보전하는 것도 안 될 것은 없는데, 다만 충의로서 분발하여 몸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선뜻 일어나 3년 동안 행군하면서 4,5백 명의 피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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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로 강성한 침략자를 대항하여 대장 한 놈과 수백 명의 졸병을 잡았으니 국가의 원기가 역시 장하다 하겠다.
필경 운수가 다 가서 사로잡히게 되자 수개 월 동안 감옥 속에서 칼날이 목에 닿아도 기운이 꺾이지 않고 하느님이 굽어보아도 부끄러울 것이 없이 깨끗이 순절하였으니 장차 천하 만세에 찬사가 있을 것이다.
아! 이야말로 우리 선왕의 사기(士氣)를 배양한 효과가 아니겠는가. 저 평일에 임금의 옷을 입고 임금의 밥을 먹으며, 편안히 앉아서 부귀를 누리던 자들은 국가의 위급한 때를 당하여 임금을 버리고 적에게 붙어서 돌아본 척도 않으니 이자들은 과연 무슨 심장이랴.
금성(錦城) 오준선(吳駿善)은 삼가 기록함
심남일창의록발문
옛 사람은 이와 같이 말했다.
“제갈양(諸葛亮)의 출사표(出師表)를 읽고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는 자는 인정이 없는 자라.”고
제갈양은 한(漢)나라 말기에 유비(劉備)를 만나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 보답하였으며, 다만 승첩을 못 거두고 죽었을 뿐이다. 승첩을 못 거두고 죽은 것만도 오히려 천추의 눈물이 있겠거늘, 하물며 우리나라 의사 심남일이랴.
장군은 제갈 양과 같이 알아주는 임금을 만난 일도 없으면서, 조국의 멸망을 통분히 여겨 초야에서 일어나 오합지졸(烏合之卒)을 집합하여 3년 동안 싸워서 닥치는 곳마다 적을 깨뜨리고 적병을 잡은 수효도 퍽으나 많았다.
이로부터 승세를 타 추격하면 왜적을 쓸어 낼 수도 있었는데, 하늘이 우리나라를 돕지 아니하여 본의 아닌 임금의 칙명이 내리자 부득이 의병을 해산하고 마침내 포로가 되어 순절(殉節)하고 말았으니. 아! 원통한 일이 아니냐.
염원숙(廉元淑)의 집록(輯錄)을 살펴보면 광주감옥에서나 대구감옥에서 담판할 적에 추상 같은 꾸지람과 일월 같은 충성심은 비록 옛날 장수양(張脽陽)·안상산(顔常山)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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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나을 수는 없었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저절로 머리칼이 솟아 눈물이 비 오듯 하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지금 장군의 자제 상국(相國)이 나에게 이 글을 교정해 달라고 또 한 마디 말을 붙여 줄 것을 원하는 것이다.
아 ! 나 역시 선왕의 양육을 받은 사람이 아닌가. 지금 누구나 다 풍파를 만난 배의 신세가 아닌가. 나 같은 것은 구차히 도피하여 늙어서 흰 머리가 되도록 죽지 않고 있느니, 나는 무슨 체면으로 이 기록에 글을 붙여 누를 끼친단 말인가.
공이야 말로 이미 천추를 넘어서 저 제갈양·장수양·안상산 등과 서로 수작하여 그 의(義)와 인(仁)에 극진한 것이며, 또 해가 되고 별이 되어 영원한 세대에 빛날 것이니, 문자의 기록이 무슨 경중이 되겠는가.
돌이켜 생각컨대 우리나라 의병이 지나간 임진년보다 성한 적이 없으나, 그 당시 여러 선렬들은 모두 지위가 있고 직책이 있었으며 각 지방관들도 모두 우리 사람인지라 군사를 소모하는데 있어서도 오히려 서로 힘이 되기 용이했지만, 오늘날은 온 세상이 모두 적이라 사방에 의지할 곳이 전혀 없는 현실이다.
공은 하나의 농민으로 맨주먹만 쥐고 일어나 간대에 기를 달고 몽둥이로 무기를 삼아 소를 몰아다 호랑이를 쳤으니 어찌 어려운 일이 아니냐. 그러나 분발하여 몸을 돌아보지 않고 포탄을 무릅써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만약 민족의 정기가 가슴 속에 충만하지 않았다면 감히 될 일이냐.
비록 행군하는 급박한 즈음에도 격문을 지으면 의기가 늠름하여 족히 왜적을 낙담시킬 수 있었고, 옥중에 갇혀 죽게 되어서도 시를 쓰면 사상이 열렬하여 옛사람의 절개에 부끄러울 것이 없었으니, 이야말로 영원히 전할 만한 것이니 어찌 의리를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가 되랴.
이 기록이 출세하는 날에는 반드시 칼을 가지고 없애려는 자가 있다는 것을 상국 자신도 알 것이니, 아직 정히 써서 감추어 두었다가 후세의 역사가에게 넘겨주면 당연히 충신전(忠臣傳)에 편입될 것이다. 영원한 장래가 있으니 한때의 침체로 효자의 한을 삼지 말기 바란다.
행주(幸州) 기동석(奇東奭)은 삼가 발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