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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상 글 >
순교자성월과 우리의 삶
대전 가톨릭대학교 총장
민 바오로(병섭) 신부님
'순교자(殉敎者)' 라는 말은
‘증거자(證據者)’ 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https://t1.daumcdn.net/cfile/cafe/99A1FB3359C27B8832)
그리스도교에서는 피로써 신앙을 증거한 사람을 가리킨다.
즉 순교자는 그리스도를 온전히 본받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려는 충정으로 자기의 생명을 바쳐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에 참여한 사람이다.
우리가 비록 피흘려 순교하지는 못하지만 순교자의 삶은 살 수 있다.
마지못해 하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따라 기쁘게 사는 모습으로 하느님을 증거하고,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와 쾌락보다 진선미의 근원이신 하느님의 뜻을 우선으로 여기자.
명예와 안일을 추구하기보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진리를 좇아 묵묵히 살아가고,
진실된 삶을 살기 위해서 당하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으로 감수하며,
이웃의 실수를 관대하게 용서하는 마음으로 사는 삶이 바로 순교라 하겠다.
순교자의 달에 그리스도교의 순교사를 자주 묵상하고,
순교성인들, 특히 한국순교성인들의 전기를 읽고 그 정신을 익힘이 좋다.
순교자들의 피로 축성된 이 땅에 사는 우리는 참으로 복되다.
천상에서 복을 누리고 있는 성인들이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기 때문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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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 영적지도신부 훈화 >
9월의 하늘을 바라보며...
글 : 윤 클레멘트 (양호) 신부님
<전주교구 소속 지도 신부>
어느덧 9월의 초순이 흐르고 중순으로 접어든다.
엊그제까지 더위가 머물렀는데 지금은 가을이다.
여름과 가을의 경계(境界)가 없듯이
우리 삶에도 시간과 세월, 젊음과 늙음의 경계선(境界線)은 없다.
9월의 하늘은 하루하루 파랗게 물들어가고
9월의 하늘을 이고 익어가는 벼들도 조금씩 황금색 물결로 흐른다.
가로수 은행나무 열매도 노랗게 익고
시골집 마당에는 빨간 고추가 가득 널렸다.
어린 시절 싸리대문 옆에 심어진 대추나무의 열매도 익어간다.
가을이 익어 가는 9월의 하늘을 바라보며
오늘은 활동과 멈춤의 시간들로 살았다.
병원 두 곳으로 가서 미사와 방문을 하고 인근의 한 성당을 잠시 들른 후 동생 가족들을 잠시 만나고 조금은 먼 거리를 운전하여 글라라 수도원으로 왔다.
점심은 어느 길가 작은 식당에서 자장면 한 그릇을 홀로 들었다.
오후 4시에는 글라라 수도원에서 저녁기도와 성체강복에 참석하고,
수녀님들의 고백성사(告白聖事)를 도왔다.
저녁을 먹고는 로사리오 기도를 드렸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들길을 따라 묵주알 넘기며 해가 진 하루를 봉헌한다.
마음속에 머물던 어둠, 그늘도 다 드리며 ...
이른 가을저녁 풀벌레 소리가 조용한 수도원 창가에서 자연 교향곡으로 들린다.
보름이 막 지난 환한 달빛이 수도원 뜰에 곱게 내린다.
오늘 하루를 활동과 멈춤으로 살면서 9월의 하늘을 바라보며 소망한다.
우리 살아가는 인생의 삶과 길을 부끄럽지 않게 살기를...
전주에서 금구, 김제, 익산으로 이어지는 벼들이 익어가는 호남평야를 바라보며 이른 가을의 들판에서 생각한다.
익어가는 성숙함의 길로 걸을 수 있기를...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계절은 바꾸어지고
창조주의 뜻은 자연의 신비 속에서 철마다 아름다움으로 새롭게 비추인다.
이 이른 가을의 하루를 살면서
나는 오늘도 9월의 하늘을 바라보며 마음속에 이는 나의 기도를 드린다.
많이 듣고 적게 말하며,
끝없이 받아들이고 용서하며,
항상 미소하고 이해하며,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게 하소서.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적게 부끄럽고 많이 성숙하며,
한없이 인내하고 들으며,
말은 절제하고 침묵을 사랑하며,
상처는 도무지 기억하지 않게 하소서.
자신을 내어주고 헌신하게 하소서.
오, 하느님,
아름다워가는 이 9월의 산하에서 오늘도 살아가는 이 누추한 생애가
당신께로 드리는 봉헌이게 하소서.
당신으로부터 오는 희망이 되게 하소서...!
- 신부님의 ‘영성의 물가’ 中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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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교구 사목국 가해 강론 자료 >
행복 선언 - 제 4부 -
d)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6절)
성서 언어에서, “주리고 목마르다”는 “어떤 것을 간절히 바란다”는 뜻이다. 하느님께서는 진정으로 가난한 이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사랑의 계획이라고 알고 있는 하느님의 계획에 순종하고 싶은 갈망을 넣어주신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은 내밀한 기쁨과 만족을 가져올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얼마나 지혜롭게 그리고 얼마나 강력하게 행동하셨는가를 발견하게 될 우리의 임종 때, 그 기쁨은 완전하게 될 것이다.
e)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7절)
자비롭다는 것은 다른 이들의 약점에 대하여 동정심을 갖는 것과, 남이 나에게 저지를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하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에서, 용서받기 위해서 용서하기를 요구할 때처럼 그렇게 엄격하신 적이 없다.(마태 6,15)
참으로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약점을 의식하고 있으므로, 용서해주기가 쉽다. 그는 정말로 행복하다. 그는 용서받고 구원받을 것이다.
f)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8절)
이 행복선언은 자주 잘못 이해된다. 여기서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순결과 무관하다. 그것은 오히려 “성실하다,” 곧바르다, 삐뚤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 이러한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 계획을 보여주신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적인 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이루려고 노력한다. 그들이 하느님을 훨씬 더 많이, 그리고 더 잘 앍게 될 때, 어떤 면에서 그들은 이미 하느님을 삶 속에서 본다. 그들이 이 행복선언을 완전히 경험할 때, 그들은 하늘 나라에서 하느님을 마주 보게 될 것이다.(1코린 13,12)
부유한 사람은 자신의 똑똑함과 엉터리 계획을 믿을 때,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그를 구원하려고 준비해놓으신 것을 보지 못한다. 그는 분명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g)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9절)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죄를 지어 잃었던 평화 – 하느님과의 평화, 자신과의 평화, 그리고 형제들과의 평화를 인간에게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다. 평화를 위해서 애쓰는 이들은 예수님께서 하셨듯이 행동한다.
그들은 “그분을 닮을” 뿐 아니라, 그분과 함께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이제, 우리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 – 즉, 하늘 나라에 머무른다.”(요한 8,35) 부유한 사람들은 워낙 탐욕스러워, 자주 불화의 근원이 된다. 그러나 참으로 가난한 사람은 언제나 공동체의 평화를 북돋운다.
h)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10절)
마태오는 이 행복선언을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확대하였다. 그는 정확하게, 박해를 받기 때문에 기뻐하라고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권유한다.
▶ 아무도 그들에게서 이미 그들의 것인 하느님 나라를 앗아갈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이 박해를 받고 있을 때도 그들의 슬픔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하느님께서 친히 어려운 시기에 위로자가 되실 것이다.
▶ 하늘나라에서 그들의 상급은 어떤 것이 아니라, 어떤 분 – 하느님 자신이시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를 소유하는 것이 실제로 뜻하는 것 - 하느님을 소유하는 것이다.
이미 행복선언 설명의 첫머리에서 말했듯이, 각 행복에 대한 주석을 다음과 같이 결론지을 수 있다.
여덟 가지 행복선언은 모두 첫째 선언 안에 포함된다.
오로지 참으로 가난한 이, 자신의 약점을 확신하기 때문에, 하느님께 완전히 신뢰하는 사람만이 온유하고, 자비롭고, 마음이 순수하고,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다.
그는 분명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옳은 것을 갈망하는 사람을 견딜 수 없어하는 이들은 틀림없이 그를 박해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매일 보다 확실하게 하느님 나라를 소유할 것이다.
그는 삶에서 이미 참으로 행복하고, 죽을 때 완벽하게 축복을 받을 것이다.
- 10월호에 제5부 연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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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2주일
2017. 9. 3
마태오 16, 21~27
♠ 복음 공부 : 베드로가 예수님의 정체를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고백했으니(16절), 이제 어떤 의미의 그리스도인지 설명이 필요하다. 그래서 공관복음에는 세 차례 수난예고를 실어 (16,21-23, 마르8,31-33. 17,22-23, 마르9,30-32. 20,17-19, 마르10,32-34) 그리스도는 수난하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임을 강조한다.
* 21-23절 : 수난과 부활을 첫 예고 - “그때부터” 는 새로운 단계를 시작할 때 사용하는 마태오의 전형구로 여기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의 시작으로 베드로의 고백을 받은 후, 비로소 당신이 걸어야 할 그리스도의 길(수난의 길)을 예고하신다. 여기서는 “예루살렘에 가시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되살아나다” 등의 4개의 부정사구가 걸린다. 예루살렘에 가시어 고난을 받는다는 내용은 둘째 수난예고는 없지만, 세 차례에 걸친 수난예고에 모두 나오는 핵심 전승이다. 예수님의 이 말을 듣고 베드로는 펄쩍 뛴다.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한 인간적인 시랑을 나타내는 베드로다운 인간의 행동이라 할 수 있다. 그러자 예수님은 돌아서서“사탄”이라 하시며 베드로를 크게 꾸짖으신다. 돌아서야만 했는데 이것은 베드로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고,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 깨서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게 만드는 그런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제자일지라도 단호하게 끊어야 할 십자가의 길이었다. 사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 당하시고, 부활하심은 초대교회에서부터 핵심적으로 선포된 우리 신앙의 핵심 주제다.
* 24-27절 : 예수님을 따르는 길 - 여기서 제자들은 열 두 사도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 모두를 지칭하는 말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온 몸과 온 마음’으로, 즉 ‘온 삶’으로 예수님과 일치하면서 그분이 가신 길을 뒤따라가기 위해 자아를 버리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하신다. 십자가를 지는 행위는 미완료 과거형으로 제시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행위를 현재형으로 제시함으로써 십자가를 지는 행위를 반복으로 수행하면서 현재에도 따르고 있어야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있음을 분명히 한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일시적으로 목숨을 보존하려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모든 것을 잃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아무리 부요하다해도 그것으로 생명을 얻지 못하고, 하느님께 의탁해야 영생도 지금의 삶도 보장받을 수 있다.
♠ 복음 요약 : 하느님의 길과 인간의 길(자아실현의 길)
열매를 맺기 전에는 사뭇 다른 점이 있는 것 같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자아실현을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실현을 소홀하게 여기다 보니 자기만을 중심으로 세상을 보게 되고, 이에 따라 옳고 그른 것을 결정하는 것이 문제다. 부모도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 그렇지 않으면 필요 없다는 듯 보인다. 신앙도 각자의 판단에 따라 판단한다. 무시무시한 세상과 가치를 향해 예수님은 외치신다.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예수님이 불운한 희생자가 아니라 갈등 안에 답이 있다. 인간의 길을 통해 하느님의 길이 실현된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를 숙고하도록 이끈다.
나의 목적지는? 그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내가 삶의 주인공으로서 의미를 찾고 고통스러운 길에 압도되지 않는 자세야 말로 예수님과 일치하려고 노력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신자가 되는 것은 예수님 뒤를 따르겠다는 것이며,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한다면 고통 저 넘어 하느님의 뜻이 있음을 희망하면서 예수님의 길에 방해가 되는 자아를 버리는 것이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갈라 2,20). 사도 바오로의 외침처럼 인간의 길을 통해 하느님의 길로 나아가는 자기실현을 말씀하고 계신다.
♠ 대화 방향 : ⑴ 나는 자기를 사랑하고 하는가? 그 사랑을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가?
⑵ 나는 살아가면서 고통을 적대시했는가 아니면 받아들일 마음으로 생활했는가를 성찰하고 나누어 보세요.
♠ 참고 문헌 : ▪ 마태오 복음 주해 (이우식 지음 / 바오로딸, 한남성서연구소 공동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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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3주일
2017. 9. 10
마태오 18, 15~20
♠ 복음 공부
- 18장이 전하는 공동설교에는 7개의 교회규범이 들어있다. 그 7개 중 이 단락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12-14절의 원칙을 구체적으로 적용한 사례인 동시에 공동체 성원들 간에 죄를 지었을 경우 다룬다는 점에서 21-22절과도 연결된다. 18,15절의 현 형태(루카17,3)는 어록의 영향을 받은 말씀이며 마태오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전승에서 따와 수록한 것이다
* 15-18절 : 잘못을 했을 때 단둘이 만나서 충고하라고 하는데 16~17절을 연관시켜 볼 때, 교회의 명예를 손상시킬 경우에 한해 충고하라는 것이며, 듣지 않을 경우에는 복수 증인을 택하라는 말씀이다. 유대인 사이에 통용되었던 관습이다(신명19,15). 또 다시 거절당했을 때 마태오가 소속한 시리아 지역교회로 데려가라 한다.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으면 ‘이방인이나 세관원처럼 여겨’ 추방하거나 파문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세관인들과 죄인들’을 친구(11,19)로 지냈음에 유의해야 한다. 교회당국이 최종적으로 죄인을 추방하고 파문하는 권한을 베드로에게 푸는 권한을 상기시킨다. 여기서 마태오는 이 권한을 제자들 모두에게 나아가 교회 전체에까지 확대시키고 있다.
* 19-20절 : 마태오는 자기 교회의 전승을 채집하여 여기에 수록하면서 죄인을 바로잡아주라는 규범은 “둘 이상 함께 기도”하라는 것이다. 죄를 범한 공동체 성원을 용서해 달라고 두 사람이 모아 기도하면 그들의 믿음과 사랑이 용서받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복음이다.
♠ 복음 요약 : 오늘 복음에서 신앙공동체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특별히 형제애에 손상시키는 죄를 말하면서 구성원 모두가 형제를 죄에서 돌이켜야 할 책무가 있음을 이야기 한다. 자칫 열심하거나 가르칠 책임이 있는 자들은 자기 행동을 합리화시키는 방편이 될 수 있으나, 복음은 우리 모두가 충고를 받아들일 수 있는 신앙의 형제들이 되라고 초대한다. 충고하기도 어렵지만 받아들이기는 더 어려운 듯 보인다. 삶 안에서 점점 충고하고 가르치는 것이 어려운 현실에서 우리 자신이 누군가에게 기다려주는 친구, 삶의 짐을 덜어주고 어려움을 함께 나누며 손을 붙잡고 기도해 주는 사람, 그 사람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모든 사람이 외면해도 나만은 곁에 남아 그의 편에 있는 사람이 되어주면 어떻겠습니까?
♠ 대화 방향 : 가정에서 자녀의 잘못을 어떤 방법으로 타이르며 교육하고 있으며, 무조건 용서하기보다 사랑과 인내로 충고하여 상대방이 받아들여 관계가 좋았던 경험을 나누어 보세요.
♠ 참고 문헌 : ▪ 200주년기념 신약성서 주해서 (분도 출판사)
▪ ② 대전교구 살아 숨 쉬는 공동체 (대전교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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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2017. 9. 17
루카 9, 23~26
♠ 복음 공부 :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 복음서는 본문가운데 예수님의 성전파괴를 예언하신 것을 기점으로 본다면 역사적으로 70년경으로 보며 기록한 이라고 한다. 루카가 바오로사도의 협조자로 볼 때에 바오로의 영향을 받아서 사도행전이 쓰여진 시기가 1세기로 보았을 때에 80~90년경으로 유대인들에게는 네로황제 이후에 가장 혹독한 박해를 겪은 유다인의 생활상을 반영했다고 여겨진다. 로마제국에 의해서 종교박해를 받았다고 하나, 로마제국은 본래 유다지역을 속령으로 두고 어느 정도 종교활동은 인정한 것 같아 보인다. 그러기에 유다인은 예수님을 신성모독 죄로 죽이고 싶었지만, 로마제국 지배 하에서는 내란죄로 밖에 죽일 수가 없어서 내란죄로 할 만한 활동을 한 적이 없는 예수님이 그 두 죄로 인하여 십자가처형을 받은 것은 지배자인 로마인들에게도 이해할 수가 없었던 일이다. 조선에서의 박해도 조선선비네에서도 금육하는 부류가 있어서 교리 측면에서 성리학과 부딪친다고 말하지만, 제사와 신주 문제도 문화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고, 오히려 조선양반들의 당파싸움의 희생으로 일어난 일이라 여겨진다. 오히려 오늘날 천주교회 내부에서 보수화 및 중산층화가 오히려 우려되는 바이다.
* 23절 :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 예수를 따르는 자들도 예수의 삶의 방식을 따라야 함을 말해준다. 첫째로 자기부정이 요구된다. 둘째로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 셋째로 이러한 자기부정과 십자가를 지는 삶이 지속성 있게 전개되어야 한다.
* 24절 : 목숨을 잃을 것이고 –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삶의 방식을 거부하는 자는 교회에 핍박과 순교의 시련이 올 때 육신의 생명은 보존할 수 있을지 모르나 최후의 심판 때 진정한 생명을 잃게 되고 새롭게 시작되는 하느님나라의 삶을 누릴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
* 25절 : 무슨 소용이 있느냐? -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은 온 천하를 잃게 되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도 잃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은 마지막에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 26절 : 나와 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 적극적 의미에서는 복음 증거시 다른 사람들의 부정적 반응을 의식(意識)하지 말라는 당부이며, 소극적 의미에서는 박해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말씀을 주셨을 것이다. 즉 예수의 부활, 승천 후 교회에 핍박이 닥쳐올 때 예수께서 가르쳐 준 삶의 방식이 무기력해보이며 기독교인들의 삶이 실패자의 모습처럼 사람들의 눈에 보인다하더라도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 복음 요약 : 103위 순교 성인들 :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하신 분들 중의 70명과 1846년 병오박해 때 순교하신 분들 중의 9명은 1925년 7월 5일에 복자품에 오르셨고,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하신 분들 중의 24명은 1968년 10월 6일에 복자품에 오르셨다. 그리고 이 103위 복자들이 함께 1984년 5월 6일 200주년신앙대회 본 미사에서 교황 요한바오로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오르신 것이다. 103위 중 성직자는 11명(주교 3명, 신부 8명), 평신도는 92명(남자 45명, 여자 47명)이며, 한국인이 93명이고 프랑스인이 10명입니다. 특별히 감동을 주는 순교자들을 꼽아 보면 다음과 같다. 하느님을 위해 동정을 지키며 살다 순교하신 유 요한과 이 누갈다 동정부부. 13세의 어린 나이로 용감히 순교한 유대철 베드로. 그 당시 사회 환경 속에서 숱한 제약을 받던 여자의 몸으로 맹렬한 활동을 하다 순교한 여회장 강완숙 골롬바. 선교사를 모시기 위해 5천리 북경 길을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아홉 차례나 왕래한 정하상 바오로. 16세에 장원 급제하여 임금과 뭇 사람의 총애를 받았으면서도 하느님을 알고 세상의 모든 명예와 영광을 헌신짝처럼 버리며 순교의 대열에 함께 한 황사영 알렉산더.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지혜 3,9)
♠ 대화 방향 : 오늘날은 과거처럼 박해시절이 아니기에 신앙으로 인하여 순교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본당공동체내에서도 그들이 살아온 길이 다르기 때문에 오는 여러 가지 갈등들은 존재하고 있다. 성서형제회를 통해서 말씀과 아나윔 정신으로 무장하고 있는 우리가 가장 기본으로 해야 하는 일들은 무엇이 있으며, 이와 같은 일들을 우리 주변 사람들과 살아가면서 경험한 일들을 나눠봅시다.
♠ 참고 문헌 : ▪ 보득솔(청년성서모임) ▪ 성경주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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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5주일
2017. 9. 24
마태오 20, 1~16
♠ 복음 공부
* 1~8절 : 하늘나라를 포도밭으로 비유하신다. 늦은 시간에 포도밭으로 간 사람들에게도 정당한 삯을 주신다고 하신다.
* 9~10절 : 포도밭 주인은 똑 같은 데나리온을 일한 시간에 상관없이 똑같이 주신다.
* 11~16절 : 하느님은 하느님 것을 마음대로 주신다. 삯은 구원과 은총을 말한다. 구원은 모두에게 열려있다. 아침 일찍부터 일한 사람들은 맨 나중에 온 사람들보다도 일하는 기쁨과 안정감을 누렸다. 하지만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서 있다가 온 사람들은 온종일 불안과 걱정에 시달렸을 것이다. ‘일을 해야만 가족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데...’ 하고. 그러나 주인께서는 똑 같은 품삯을 주신다. 하느님의 계산과 인간의 계산은 다르다.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되는 일이 있다.
♠ 복음 요약 : 세상의 시각으로 볼 때 포도밭 주인은 선한 것이 아니라, 자기 맘대로 불공평하게 품삯을 주는 부당한 주인으로 보기 때문에 하루 종일 일한 사람 입장에서는 억울함을 느낀다. 포도밭에서 온종일 일한 사람이 불행한가? 아니면 누군가 불러주기를 기다리며 온종일 서서 하염없이 기다린 사람이 불행한가? 하느님 보시기에는 아무도 불러주지 않아서 일용할 양식 값조차 벌지 못하고 하염없이 시장 바닥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구원을 갈망한 사람)이 비록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았더라도 훨씬 더 고생했다고 보신다. 다행히 아침 일찍부터 부르심을 받아서 기쁜 마음으로 포도밭에서 일한 사람은 오히려 행복한 사람이어야 함에도 (불러주시는 하느님에 달려 있는 것이지, 그 사람의 공로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시기와 질투로 나중에 부름을 받은 사람에 대해 우월한 태도를 보이면서 받기로 한 한 데나리온보다 더 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해대는 사람은 구원에 대한 감사함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심은 우리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다. 세상사람 중에 구원 받을 공로를 세운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저 감사하게 불러 주셔서 우리는 구원받고 감사의 삶을 사는 것이다. 반면에 자신의 공로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품꾼의 태도를 지녀서 항상 보상을 생각하며 행위를 억지로 지어낸다. 이런 사람에게는 구원의 감사함이 아닌 노역자의 수고스러움만이 있을 뿐이다.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더 많은 은총을 내려 주신다.
♠ 대화 방향 : 우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은 대화 보다는 침묵으로 혹시 아침 일찍부터 왔다고 더 많은 데나리온을 주시지 않는다고 불평한 적이 있는지 마음속으로 묵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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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 연수회 스케치 >
다시 찾은 천호에서 여름을 벗다...
안산 원곡동 세르브스 팀 FB
서기보 권 토마 (순)
+ 찬미 예수님
여름을 벗으려는 막바지 중부지방은 며칠 전부터 거센 소낙비가 내렸다. 당일은 언제 그랬느냐 듯이 하늘은 천호성지를 향해 열려있었다.
필자가 경상도땅으로 이사 간 후, 처음 천호로의 나들이는 그리 쉽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 어느 부부의 트럭을 얻어 탄 그는 무사히 성지에 도착했다. 성지에는 전주 팀이 미리 와서 오실 이들을 위한 점심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각 지역에서 모인 FB 가족들은 전주공동체가 마련한 공동식사에 초대되어 그늘에서 수박을 곁들여 풍성한 점심식사를 마친 후에 강당으로 들어가서 등록을 했다.
오후2시 정각 주모경으로 시작하고, 보니파시아 전국조정말씀봉사자는 FB연수회 안내와 일정을 설명해 주었다. 이어서 스테파노 차기봉사자 주관으로 각 지구별로 인사소개와 근황설명이 있었다. 광주에서 올라오시기로 한 도미니꼬사비오형제님은 개인 사정상 참가하지 못했지만, ‘현재가 기적’ 이라는 메시지로 연수회 참가자들을 격려해주셨다.
이문동 성당의 팜필로 형제님은 ‘복음의 기쁨’ 요약본을 교종이 주는 메시지로 해석해서 발표했다.
주제는 ‘베드로의 고백’ 이지만, 강의는 수녀님, 신부님, 그리고 주교님과 성지신부님이 해주셨다.
성지신부님을 제외하고는 창설자신부님이 가는 길에 대해서 공통된 내용을 지니고 있었다. 주님이 가신 길, 창설자신부님이 가시는 길, 그리고 우리가 가야하는 길 말이다.
우리는 각자 삶의 터전에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는지는 모를 일이다. 어쩌면 성지에 가까이 올 때까지 그런 전투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지만... 마치 어느 범죄인이 한 신성한 곳에 들어가면 어느 누구도 그를 체포해내지 못한다고 한다. 그런 것처럼, 마치 그런 느낌으로 우리는 이곳 천호성지 피정의 집으로 모여든 것이다.
3시 ‘자비심 기도’에 이어서 김 데레시아 수녀님의 강의가 이어졌다.
하느님의 길을 따르는 창설자신부님에 대한 말씀으로써,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한 자리를 할 것 같은데... 갑자기 목격하는 십자가의 길을... 인간의 일만 생각하는 베드로의 모습... 전통과 율법만을 앞세우는 그때 당시의 지식인들... 인간의 모습만을 생각하는 우리의 모습을 교차하듯 설명하셨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하는데, 그러면 과연 우리가 가야하는 길은... ? 성서말씀 중에 가장 많이 듣는 단어가 ‘아빠’, 그리고 ‘용기를 내어라.’ 라고 말씀하셨다. 목적지인 하느님사랑 이웃사랑으로 갈 때에 ‘하느님 일이 완성된다.’고 하고, 창설자신부님은 그 방향으로 나아가시는 것이라고 하셨다.
또한 ‘FB창립 50주년’을 앞두고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얼굴 붉히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하시며, 이제 FB도 좀 더 새롭게 변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호수 위를 걷다가 예수님께 손을 내민 베드로... 솔로몬왕이 달라고 하는 믿음의 지혜... 하느님께 손을 내밀면 예수님은 우리의 손을 잡아주신다. 이것이 50주년을 준비하는 우리의 마음이고 예수님 안에 머무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 밖의 여러 가지 말씀으로 창설자신부님이 가시는 길을 말씀하셨다.
우리는 늘 사랑타령 안에서 살아가지만, 조그마한 것도 참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이기도 하다. 창설자 신부님은 신학교 입학 전, 젊은 시절에 좋은 환경에서 사셨다고 한다. 그러나 그분은 어려운 길을 걷고 계신다. 이는 마치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그랬듯이 말이다. 주님의 길을 걷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가 마치 몸을 땅에 기대고 있지만 머리는 하늘로 향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뭔가를 되풀이해서 추구해야 하고, 작년에도 했고, 그 이전에도 해왔던 연수회를 여름날씨 속에서도 진행해가는 것이다. 사도바오로는 고린토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이렇게 써 내려간다. (사랑의 송가)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사도바오로는 로마에 들어가면 곧 죽을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이글을 남긴다. (로마서)
그는 여러가지를 주장하고 있지만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마도 우리도 마찬가지이기에 수난과 함께 주님의 길로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나 자신이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으로는 죄의 법을 섬깁니다. "
수녀님 강의 후 밖에 이미 이 빈첸시오(병호) 주교님이 오셨다. 우리는 문밖에서 주교님 주위를 둘러싸고 그분께 먼저 인사를 드렸고, 따가운 햇빛 속이었지만 단체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곧바로 주교님께서 연수회 축복미사를 집전해주셨는데, 미사강론 중에 ‘롯기’에 나오는 다윗 가문과 예수님을 이어주는 인간적인 혈통에 동원되는 이방 여인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우리가 먹는 캘리포니아산 쌀이 옛날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종자의 이음을 연결 말씀하셨다. 그리고 내 삶과 연결하여 생각하면 기적이라고 말씀하셨다. 미사 끝나고서도 지역별로 주교님과 기념사진을 실내에서 찍었고, 주교님과의 저녁식사를 한 후 배웅해드렸다.
7시 30분경, 천안에서 올라오신 정 아퀼레오(지풍) 신부님이 34년간 사목생활했던, 행복했던 지난 시간들을 여러 마당으로 나누워서 말씀하셨다. 오래 전 신부님이 보좌시절이나 본당 첫부임지에서 경험한 것들을 마치 지금 이 자리에서 일어난 것처럼 생생하게 말씀하셨다. 행복이란...? 참된 행복이란...? 그 귀한 언어를 설명하듯이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5장 포도나무의 비유를 들면서 불안전한 인간이 하느님 안에서 평화를 누릴 수가 있다고 하신다. 부모님으로 부터 “이제 내 아들이 아니다!” 라는 말을 들어가면서 신학교를 가게 된 계기에 대해서 소상하게 말씀하셨다. 신자가 전혀 없는 가정에서 친구의 영향으로 신자가 되고 사제의 길로 가셨던 것이다.
행복한 사람... 이것은 스스로가 만들어가야 하고, 예수님사랑 안에 머무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이것이 ‘창설자의 정신’이라 하시면서 ‘창설자가 걸어가고 있는 길’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사랑 안에 만들어져가야 하고 사랑은 선이 없다고 하신다. 대화가 아니라 사랑으로 소통해야 한다고 하신다. 이를 위해서 신부님은 신앙생활하면서 체험한 것들을 기록해 두면 이를 다시 되읽어보고, 자신 스스로가 신앙이 성장함을 느낄 수가 있다고 하신다. 예수님사랑 안에 머무는 삶 – 경험을 기록하고, 이를 자주 다시 읽고 노력하면 의욕이 생기게 된다. 또 이로 인하여 공동체 안에서 부터 퍼져나가기를 바란다고 하신다.
밤 8시 30분, 아주 짧은 시간의 연습으로 인해 완성도는 높지 않았지만, 서울 전주 안산 세 팀이 최대한 감성을 총 동원해서 성극을 연출하였다. 같은 주제의 복음말씀을 가지고 성극을 했는데 각기 다른 색깔의 성극이 주님께 봉헌되었다.
첫 번째 날의 일정이 마무리 되고, 각 팀 봉사자들의 회의를 가졌다.
둘째 날은 아침 일찍 기상하여 마당에서 간단한 체조와 스트레칭을 한 후, 뒷산에 있는 '가상칠언의 길'을 천호성지 수녀님의 안내로 다녀왔다. 그 이후 아침식사...
첫 강의는 천호성지 남 고스마(종기) 신부님이 하셨는데, 먼저 지난 묵상회 때의 강의를 회상시켜 주셨다. 탈출기 백성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그 백성을 가나안땅으로 보내는 감응을 말씀하셨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복음의 기쁨... 무관심의 장벽을 헐어버려야 한다 - 관계를 말씀하셨다. 도통 - 동양철학인 태극과 관련된 사상과 결부시켜서 여러 가지 예를 들어서 설명하셨다.
중식식사 이후, 정 아퀼레오(지풍) 신부님의 두 번째 강의가 이어졌다. 미술을 전공하신 신부님답게 칼라 - 빛에 대해서 화두를 끄집어내셨다. 공장의 벽도 색깔로 분위기를 다시 고쳐 잡는다고 하셨고
아픈 부위도 낫게 한다고 하셨다. 성서형제회가 나아가는데 방해가 되는 요소에 대해서 도 말씀하셨다. 지적인 것과 권력적인 것에 대한 교만, 나와 다름은 나의 적이라는 의식, 침묵, 새로운 것은 내적 성찰에서 나온다고 하셨다.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고 강조하셨으며, 그 밖의 여러 가지 말씀을 하셨다. 정 신부님께서는 파견미사도 집전해주셨다.
짧고 아쉬운 시간과 작별하는 시간이다. 먼저 신부님을 배웅해드리고, 우리들은 각자 출발한 곳으로 되돌아간다. 오늘 배우고 터득한 바를 생활현장에서 새롭게 하기 위해 서둘러서 떠났다.
안산팀 중에 지난봄에 오지 않았던 분들은 약 한 시간 동안 성지순례하였다.
어렵게 참석하시어 잠깐 머물고 가셨던 전주 공동체의 보나 자매님... 반가움을 채 표현하기도 전에 귀가하셔서 아쉬움이 많았지만, 이분은 우리 성서형제회 공동체의 보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그분을 모델로 열심히 올라가려고 생각했었다. 윤 클레멘트(양호) 신부님이 문정성당에 계실 때에 전주이외 지역에서 연수회나 묵상회 등에서 다른 지역에서 전주로 오신 형제들을 인도하셨던 일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저는 요번에 참석하신 약 40여명의 가족들... 하나 이상의 결실을 갖고 가셨으리라 여긴다.
그리고 새삼스러운 일이지만, 수녀님, 신부님, 주교님, 100독을 하신 아나스타시아 자매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정리하시고, 특히 외인임에도 영성체시 사제의 안수에 감동하는 모습은 새로운 활력이 되었다.
끝으로 모든 분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린다...
다만 저의 부족하고 욕심 많은 탓으로 생긴 것들을 나무라지만 마시고, 지켜봐주시기를 아울러 간절히 바란다. 사도바오로는 그의 동력자 디모테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이런 글을 남겼다.
“ 그대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신을 차리고 고난을 견디어 내며, 복음 선포자의 일을 하고 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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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I 재정 회계 보고 >
☧ 매월 FB본부로 보내주시는 의연금은 본당별로 보내지 말고, 각 팀별로 회계 정산하시어,
금액이 크든 적든 매월 꾸준히 보내주셔야 합니다.…….
✟ 2017년 7월 입출금 내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