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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5월30일(화)맑음
오늘은 단오. 앞 철에는 단오절 행사를 했다는데 이번엔 하지 않기로 하다. 단오절 행사란 선방 스님들이 소금을 담은 항아리를 지고 앞산으로 올라가 땅에 묻음으로써 큰 절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화재를 예방한다는 취지의 행사를 말한다. 불교적 의미를 띤 것이라기보다 전통문화적인 것이다. 명고스님이 돌아가신 속가의 아버님의 왕생극락을 기원하면서 점심공양을 낸다. 아름다운 날 맛난 공양을 받고 숲으로 돌아오다. 숲속의 오솔길은 언제 걸어도 안온하다. 아랸냐aranya는 야생과 숲을 의미하는 산쓰끄리트어다. 인도인은 전통적으로 인생 4주기를 말한다. 梵行期범행기, 家住期가주기, 林棲期임서기, 遊行期유행기. 林棲期Vanaprastha는 50세에서 60세까지다. 이 기간 동안 가업을 상속자에게 물려주고 세간사에서 서서히 물러나면서 숲으로 들어가 스승을 찾던지 명상공동체에서 수행적인 삶에 스며든다. 그러다가 60세가 되면 세속을 완전히 떠나 유행의 길로 나선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임서기는 입산하여 견습생활을 하는 기간이고 유행기는 그야말로 雲水僧운수승의 삶을 사는 것이다. 임서기를 뜻하는 vanaprastha바나프라스타는 雪山을 바라보는 나이라고들 한다. 사람이 쉰 해를 살게 되면 세상에 타고난 자기의 소명을 안다고 한다. 지천명知天命이다. 지천명에 이르면 땅만 보고 살다가 눈을 들어 눈 덮인 히말라야를 바라보게 된다. 그러면 유한자의 비애에 痛切통절하며 불사의 길을 찾아 설산을 올라야한다. 내 나이 벌써 예순, 숲에 들 적마다 떠날 때를 아는 철새가 된다. 바람과 구름도 넘기 힘들다는 설산을 넘은 철새가 있다. 그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비행을 감행한다. 오늘 나는 설산을 넘으려는 백조를 생각한다.
연잎에 떨어진 물방울은 잎을 적시지 못하고 또르르 굴러갈 뿐
깨어있는 수행자의 마음도 연잎과 같아 번뇌의 물방울에 젖지 않네.
2017년5월31일(수)맑음
오월의 마지막 날. 계절은 오고가도 숲은 하늘은 그대로. 물상이 변화무쌍해도 공간은 그대로다. 그렇다고 상대유한적인 것의 배후에 숨어서 이 모든 변화를 관조하며 목격하는 하나의 ‘그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이것은 형이상학자들과 초월적 실재론자들의 치명적인 결함이다. 그들은 무상한 것들의 배후에서 영원한 어떤 것을 찾아내 존재의 확실성을 추구하려한다. 그 결과로서 나온 것이 ‘궁극적 일자’, ‘참 나’, ‘불변의 실체’, ‘유일론-그것이 유물론이든지 유심론이든지 유신론’이든지간에. 상일주재의 일자를 설정하여 만물의 다양성과 무상성이 불러일으키는 불안을 해소하려고 들고 나온 개념이다. 그들은 왜 사물의 다양성, 복잡성, 무상성을 불편하게 여겨서 항상하며 변하지 않는, 그러면서 복잡다단한 개개의 현상을 산출한 모태가 되며 근거가 되는 것을 설정하려할까? 그렇게 하는 것이 지적 능력이 낮은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편하기 때문이다. 엄마나 아빠 같은 어떤 하나의 존재가 있어 이렇게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만물을 낳거나 만들었다고 생각하든지, 온갖 물줄기가 원천의 샘물에서 흘러나오듯 삼라만상이 하나의 근원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이해하기 쉬운가? 더구나 엄마아빠 같은 존재와 샘물 같은 근원을 찾아서 거기로 돌아가기만 하면 그것과 함께 영원히 존재할 수 있으니까 얼마나 위안이 되겠는가? 불교적으로 보면 그게 바로 자아의 영속성과 초월성을 확보하려는 술책이니, 아집에 다름이 아니다. 존재의 확실성, 자아의 영속성을 추구하려는 짓이다. 존재의 근원, 최초의 원인, 궁극의 실체, 포괄적 일자, 지적인 설계자, 우주적 관조자 등등 이런 개념들은 유치한 수준의 관념적 유희이다. 거기에 물들면 ‘이것 밖에 없다’느니, ‘오직 이것 뿐’, ‘이것만 알면 끝’, ‘이것만 믿으면 구원’이라는 손쉬운 가르침과 수행론에 빠지게 된다. 또 복잡다기한 현상들을 최초의 원인이나 基體기체(바탕이나 토대가 되는 실체)로 환원하여 이해하려 한다. 그리고 최초의 원인으로 돌아가거나(還元) 기체와 합일하는 것으로 과정의 완성을 꾀한다. 이러한 시도 또한 불교 안에서도 일어났다. 부처님께서 開示개시한 지견을 배우고 익히며, 佛知見대로 사유하고 실천하는 것이 수행이다. 이러한 생각이 떠오른 것을 정리해본다.
숲길에 산딸기가 빨갛게 익어가고, 두릅순은 거칠어져 간다. 올빼미가 우는 밤의 숲은 더욱 고적하다.
2017년6월1일(목)맑음
마음의 실상은 어떠한가? 이렇게 묻는 방식은 초기불교적인 방식이 아니다. 탐진치가 정화되면 저절로 정화된 마음의 경지가 드러날 것인데 뭐 하러 미리 그 경지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해줄 필요가 있을까라는 겸손함이 초기불교의 접근이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 마음의 본성에 대해 천착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수행의 결과로 나타날 마음의 본성에 대해 미리 알고 싶은 욕망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예비수행을 완성한 사람에게는 그런 법문을 들으면 효과가 있지만 그렇지 않는 수행자들에겐 희론이 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불성론, 여래장설, 진아론, 돈점논쟁, 선어록이 등장하여 수행이 언어유희적이며 지리멸렬하는 지경으로 빠지게 되었다.
마음의 實相실상, 진짜 모습 true nature of mind는 어떠한가? 초기불교에서 두 가지로 본다. 승의제로서의 마음은 닙바나, 열반이다. 탐진치가 완전히 소멸한 경지, 번뇌가 소멸하여 안온하고 평화로운 상태이다. 세속제로서의 마음은 무상하고 무아이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의 실상은 청정, 광명, 공성, 각성을 뜻한다. 이것을 경전마다 다양하게 설명한다. 무형상, 무실체, 八不中道팔불중도, 空寂靈知공적영지라고 하기도 한다. 선종에서 말하는 마음의 실상은 일착자一著者, 한 물건一物, 주장자, 진흙 소泥牛 등등으로 표현한다.
2. 문인보살이 오근과 오력에 대해서 물었다. 五根오근의 어원은 pancindriya=panca(다섯)+indriya(‘인드리야’는 힌두 신 ‘인드라Indra의 힘과 권력’이라는 어원에서 유래한 것으로 감각기능sense faculty, 인식주관)이다. 6根은 여섯 가지 대상을 취하여 의식을 낳게 하는 힘을 행사하는 여섯 가지 감각기능 즉 인식주관이다. 중생은 6근을 ‘자아’로 착각하여 집착한다. 중생이 집착하는 자아란 6근 즉 인식주관이다. 그런데 6근은 무상하고 주재성이 없어서(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즉 늙고 싶지 않아도 늙어야만 하고, 죽고 싶지 않은데도 죽어야하니까) 괴로운 것이다. 그런데도 중생은 6근을 붙들고 자기라고 여기면서 유지, 존속되기를 바란다. 이것이 我執아집atman-graha이다. 아집의 유지존속을 통하여 편리함을 도모하려고 일으키는 6근의 의지적 활동을 업이라 한다. 그런데 아집의 소멸과 멸진을 통하여 편리함을 추구하는 6근의 의지적 노력은 업이 아니라 수행이라 한다. 수행을 하면 타고난 6근 말고 새로운 개념의 5근이 생겨난다는 것이 초기불교의 가르침이다. 5근은 업으로 타고난 것이 아니라 수행함으로써 생겨나는 善法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신진염정혜라고 외우고 信根, 精進根, 念根, 定根, 慧根로 쓴다. 번뇌를 제압하고 청정한 상태로 이끄는 작용을 하며 성스러운 경지로 이끄는 힘이 있기에 根근, indriya라고 한다.
신근(信根) saddhindriya, 믿음의 기능
진근(進根) vīryindriya, 정진의 기능
염근(念根) satinīndriya, 기억, 깨어있음, 주의력, 주시력, 위빠사나의 기능
정근(定根) samādhīndriya, 선정, 사마타의 기능
혜근(慧根) pannindriya, 지혜, 반야의 기능
수행자는 이 다섯 가지의 기능을 개발해야한다. 이것이 수행자의 감각기능이며 인식주관이다. 수행자가 대상을 접할 때 믿음, 정진, 기억, 선정, 지혜라는 감각기능을 작용하여야 한다. 이렇게 정진해나가면 5근에서 5力이 생긴다. 다섯 가지의 힘은
신력(信力) saddhabala, 믿음의 힘
진력(進力) vīryabala, 정진의 힘
염력(念力) satibala, 기억, 깨어있음, 주의력, 주시력, 위빠사나의 힘
정력(定力) samādhībala, 선정, 사마타의 힘
혜력(慧力) pannabala, 지혜, 반야의 힘이다.
수행자여, 다섯 가지 기능을 개발하여 다섯 가지 힘을 갖추면 무적불패의 승리자가 되리라.
오후에 구름이 일어나 하늘이 흐려졌다. 바람이 서늘해진다. 비가 오려나? 숲 길가에서 산딸기가 익었다. 풀덤불 속에서 까투리가 놀라서 날아간다.
2017년6월2일(금)맑음
경진스님에게서 편지가 왔다: 좋았던 수행 경험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수행경험 조차도 무상하니 그에 대한 기억에 집착하지 말라. 이것이 무념(無念기억하지 않음)이 아니겠는가? 집을 떠난 사문은 모든 욕망에서 떠나니 집착에서 자유롭다. 안으로 사견을 가지지 않으며 밖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않는다. 오직 팔정도의 길을 갈뿐. 수행이란 無所得무소득을 지향한다는 걸 상기시켜주는 말씀이다. 池月지월거사에게서 소식이 오기를 우정에 대한 하이쿠俳句를 찾아달란다.
命二つの中に 生きたる櫻哉
いのちふたつのなかに いきたるさくらかな
이노치후다쓰노나까니 이끼따루사꾸라까나
우리 두 사람의 생애
그 사이
벚꽃의 생애가 있네
-松尾芭蕉 마쓰오 바쇼(1644~1694)作
2017년6월3일(토)맑음
내 가슴은 새 가슴
가슴 속에 새가 사네,
내 가슴은 새 둥지
가슴에서 새가 우네,
새가 노래한다고 하지
그건 슬픔에 찔려 피 흘리는 것인데
가슴이 뛴다고 하지
그건 심장이 고통으로 떨리는 것인데
...................................................
비가 안 온다,
가슴엔 비가 내리는데
대지가 메마르다
가슴속은 안개에 휩싸여있는데
무언가가 떨어진다,
바람소리, 종소리, 사람소리 그 위로 침묵이 덮인다,
소나무에서 솔방울 떨어져
대지의 가슴을 두드리고
하늘에서 별이 떨어져
연못에 꽃무늬를 그리네,
봄이 떨어지고 여름이 떨어지고
가을이 떨어지고 겨울도 떨어지니
시간이 사라진 거기 죽음이 누워 있구나.
광릉 숲 축제를 한다고 아침부터 온 도량이 떠들썩하다. 대형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 주차안내 호루라기 소리, 자동차 소음으로 인하여 오전 정진 한 시간만하고 쉬기로 하다. 사람들은 즐기기를 좋아한다. 모두 살만해지니까 주말만 되면 차를 몰고 어디론지 바람 쐬러나간다. 휴일 맑은 날 방에 가만히 있으면 손해 보는 것 같이 느껴 어디론지 달려 나간다. 그러니 남한 땅에 사람의 발길과 자동차 바퀴자국이 나지 않는 곳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사람들이 온통 밀려와 심산유곡의 은둔처나 적정처를 들쑤셔 놓으니 사슴 같고 독수리 같은 수행자가 깃들일 곳이 없어졌다. 전기가 들어오자 도깨비가 사라졌고, 차바퀴가 굴러 숲을 침범하니 정령이 물러갔다는 말이 있다. 은은하고 잔잔한 천연의 고요가 문명의 도구에 의해 깨어졌다. 문명화된 편리함을 추구하느라 자연의 조화를 깨뜨린 인간은 어떻게 정신건강을 유지해나갈 수 있을까?
피안에 이르고, 집착을 여의고,
할 일을 다 해 마치고, 번뇌를 여읜 님은
형장에서 풀려난 것처럼,
목숨이 다한 것을 기뻐한다. -<테리가타711>
이 세상살이를 귀양 온 듯이 살아간 고인이 있었지. 謫仙적선이라고. 수행자도 그렇게 산다. 세상에서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설칠 것인가. 이미 그런 세상을 떠난 것을 출가라고 하는데, 출가생활도 세상속의 일이라, 출가가 또 다른 세속이 되기도 한다. 세상에 빌붙지 말라. 세상에 잘 보이려하지 말라. 벼랑 끝에 선 호랑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는 말이 있다. 臨崖虎眼看임애호안간. 과연 그렇다.
2017년6월4일(일)맑음
푸른 물이 주루루 흐를 것 같은 하늘과 숲. 광릉 숲 축제 이틀 째.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들이 많이 왔다. 일주문 아래 주차장에 설치된 무대에서 공연이 펼쳐진다. 점심 공양하고 숲길을 걸으니 길옆에 가설된 무대에서 요정처럼 꾸민 아가씨들이 플루트를 연주하고 그 앞에 구경꾼들이 모여 앉아 감상하고 있다. 또 저만치 길을 가니 아이들이 나무 사이에 매단 그네를 타고 있다. 광릉수목원에서 일 년에 한번 벌이는 축제가 이름값을 하는 듯하다. 저녁이 되니 무대를 철거하는 소음이 들린다. 이제 행사가 끝났나보다. 절은 예전의 고요함을 되찾는다. 구름사이로 나온 반달이 해맑다.
2017년6월5일(월)맑음
<과학과 불교>-사사키 시즈카 지음-를 읽다.
남방불교의 체계적인 불교교과서를 <아비담마>라고 한다. 스리랑카에서 집대성된 <청정도론>을 비롯한 7대론서가 그것이다. 북방불교에서도 그에 대비되는 것이 있다. 카쉬미르와 간다라지방에서 흥왕했던 설일체유부의 <아비달마구사론>이 그것이다. 대승불교는 구사론을 토대로 이루어졌는데 후대에 와서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소홀히 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초기불교의 아비담마와 대승의 구사론에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이것을 잘 알아야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사이에 다리를 놓든지 말든지 간에, ‘하나의 불교’라는 큰 그림을 그리는 이해를 갖게 될 것이다.
구사론의 세계는 ‘정신’, ‘물질’, ‘에너지’의 삼원론이다. 이 세 가지가 서로 영향을 주면서 세상을 형성하고 움직인다. ‘나’라는 존재도 그런 요소의 집합체로서 임시로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여 불변의 실체는 찾을 수 없다. 정신과 물질은 서로 섞일 수 없는 독립적인 요소가 아니다. 그렇기에 정신이란 물질과 전혀 관계없이 별개로 존재하는 무슨 ‘魂혼’이나 ‘spirit’과 같은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기독교나 이슬람에서 말하는 영혼soul이 되거나 힌두일파에서 말하는 진아眞我나 아트만이 된다. 불교는 물질일원론이나 정신일원론, 정신물질 이원론이 아니라 心身相關심신상관 연기론이다. 그래서 정신과 물질을 초월한 ‘신’을 설정할 필요가 없다. 여기가 불교의 장점이 빛을 발하는 지점이다. 인간이 경험하는 온갖 고통과 애환은 모두 정신물질의 연기적 현상에 다름이 아니기에, 고통의 해결은 정신물질의 평정과 적멸에서 찾아질 수 있다. 그래서 정신물질을 초월한 ‘신’이란 존재를 개입시킬 필요도 없고, 정신이나 물질의 근원으로 환원한 그것을 붙들고 안심하는 방식을 택할 필요도 없다. 정신의 본질은 마음과 마음작용을 구성하는 40개 이상의 요소와 외부정보를 입력하는 감각기관이다. 사람은 여섯 개의 감각기관(안이비설신의)을 통하여 외부물질세계와 연결된다. 그래서 6근도 정신의 일부로 여겨진다.
그런데 왜 정신물질을 초월한 제삼의 절대적 존재를 상정하는가?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인간은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언제나 변하지 않고 내편으로 남아서 나를 지켜줄 것만 같은 어떤 것을 구하려한다. 정신과 물질은 모두 변한다. 그것을 붙잡아 영원히 변치 않는 나의 것으로 삼을 수는 없다. 그러면 물질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절대적 정신을 찾아 그것으로 영원불멸을 구하면 어떨까? 그것이 바로 절대정신, 절대관념론, 유심론, 심일원론, 心造萬有論심조만유론, 유식설 등이다. 또 한 가지 시도로 물질의 자연적 과정에 합일함으로써 영원불멸을 꾀하려는 유물론적인 환원이다. 이것은 중국의 도교나 기일원론, 과정철학이다. 또 다른 시도로 정신물질을 창조해낸 초월자를 상정하여 그에게 의지함으로써 영생불멸을 획득한다. 심일원론과 창조주론은 변화무쌍하고 불안한 세계에서 영원불멸하는 나의 존재를 확보하기 위함이다. 이것을 ‘존재론적 확실성(ontological certainty)의 추구’라 하자. 이것을 불교에서 ‘영원주의(常論)’라고 비판한다. 기일원론은 생명현상을 유물론적 과정으로 해체하여 물질과정으로 환원하기에 ‘허무주의(斷論)’라고 비판한다.
그러면 불교에서는 어떤 식으로 인생고를 해결하는가? 정신물질과정은 찰나에서 찰나로, 緣生緣滅연생연멸 하면서 굴러가는 닫힌회로(a closed loop)이다. 어떻게 이 악순환을 끊을 것인가? 여기에 초월자를 도입하여 他力的타력적인 구원을 찾는 것도 아니도, 유심론이나 유물론으로도 빠지지 아니하면서 해탈하는 법을 절묘하게 찾아내신 분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이시다. 정신물질과정을 유지, 존속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면 고통의 재생산이요, 그 반대로 소멸, 멸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고통의 소멸이다. 고통의 소멸, 다른 말로 하면 행복의 완성은 정신물질과정의 적멸이다. 여기에 불교체계 안에서 ‘정신물질과정의 적멸’이라는 법이 존재할 것이 요청된다. 이것이 바로 ‘택멸(擇滅, 산스끄리뜨: pratisajkhyā-nirodha, 빠알리: patisavkhā-nirodha)’이란 법이다. 택멸(擇滅)은 간택력(簡擇力)에 의해 획득되는 멸(滅, nirodha)을 뜻하는 택력소득멸(擇力所得滅)의 줄임말이다. 이것은 ‘절대로 어떤 작용도 하지 않는 것이 확정된 상태’이다. 번뇌가 가라앉아 다시는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 경지이다. 성자의 지위에 이른 분들의 정신내부의 평온함이다. 택멸은 하나의 존재라기보다는 ‘작용이 정지된 특정 상태’이며 수행의 최종목표이다. 택멸은 물질도 정신도 에너지도 아니며 어떠한 작용에도 관계하지 않는 不活性불활성 상태이다. ‘번뇌의 완전한 단멸’이기에 이는 ‘열반’의 다른 말이 된다. 불교수행이란 수많은 번뇌가 차례차례로 영원히 단멸되어 차차로 깨달음에 가까워져 가는 과정이다.
구사론에서는 이 세상 존재를 두 가지 차원으로 분류한다. ‘작용가능성이 있는 법’과 ‘작용가능성이 없는 법’ 전자를 有爲法유위법, 후자를 無爲法무위법이라 한다. 유위법은 정신, 물질, 에너지 세 가지로 분류된다. 무위법에는 택멸, 비택멸, 허공 세 가지가 있다.
여기에서 주목할 일은 불교수행의 목표가 열반인데, 이는 다른 말로 택력소득멸(擇力所得滅)이다. 간택력(簡擇力)에 의해 획득되는 멸(滅, nirodha)이란 뜻이다. 간택력은 무루의 지혜(無漏智 또는 無漏慧)의 식별력을 뜻하는데, 택멸은 무루의 지혜가 4성제를 개별적으로 간택하여 이에 따라 획득되는 멸이다. 이러한 멸은 곧 무루의 지혜의 간택력을 사용하여 모든 유루법(有漏法)의 속박을 멀리 떠남으로써 성취되는 해탈로, 곧 열반과 같은 말이다.
무엇을 ‘간택’하는가? 4성제를 간택한다. 어떻게? 고성제를 선택하여 사유한다. 그리고 3번 굴린다. 여기에 ‘고라는 사실이 있다.’ ‘고를 여실히 알아야 할 것이 요청된다.’ ‘고를 여실히 알았다는 확신이 생겼다.’ 똑 같은 방식으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에 각각 3번 씩 적용한다. 이것이 3전12행상이다. 간택의 결과는 열반의 증득과 팔정도의 완성이다. 또 간택이란 말이 시사하는 것처럼 사념처와 사정근을 含意함의한다. 어떤 법을 어떻게 념念할 것인가를 먼저 선택해야 수행이 이루어진다. 이미 생긴 선은 무엇이고 아직 생기지 않은 선은 어떤 것인가, 이미 생긴 불선은 무엇이며, 아직 생기지 않은 불선은 무엇인지 식별(간택과 같은 의미이다)해야만 사정근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7보리분법(7覺支)에서도 擇法覺支택법각지가 그 첫 번째이다. 위빠사나 수행의 모든 곳에 간택(식별)이 요청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그대가 일으킨 한 생각이 善인가 不善인가, 탐진치를 증폭하는 방향으로 가는가 탐진치의 소멸을 지향하는가, 해탈로 나아가는가 윤회로 나아가는가, 분명하게 분별할 것이 요청된다. 이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또한 念sati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선종에서
‘至道無難, 唯嫌揀擇; 지도무난 유혐간택’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나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라는 말을 한다.
또 無分別智무분별지를 이야기한다. 분별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불교는 선후의 순서를 중시한다. 먼저 배울 것과 나중에 배울 것의 순서대로 배워야 한다. 먼저 법과 비법을 간택해야 수행이 시작된다. 선과 불선, 개발해야할 것과 버려야할 것을 잘 식별할 줄 아는 것에서 수행이 시작된다. 그러한 수행의 기초를 다지고 난 다음에야 간택함을 꺼려라, 분별을 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의미를 띄게 될 것이다.
2017년6월6일(화)비
아침부터 하늘이 흐리더니 오후가 되자 가랑비가 뿌리기 시작한다. 밤이 되자 빗줄기 굵어지면서 낙숫물 소리가 밤을 밝힌다. 사방이 차분해진다. 숲속의 푸른 영혼들은 기쁨에 젖어 두 팔을 뻗어 하늘로 뛰어오른다. 먼지 묻은 마음이 가라앉아 고요해진다.
2017년6월7일(수)비
밤새 비 오다. 안개같은 비가 숲에 내린다. 마치 어린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듯 부드럽고 자상하게 내린다. 비안개에 싸인 산과 숲은 眞景山水진경산수를 그린다. 옛 문인들은 비를 친구에 비유했다. 오래된 친구는 舊雨, 지금의 친구는 新雨 또는 今雨라한다. 이는 두보의 시에서 연유한다. 두보가 병들고 곤궁한 시절 어느 여름 엄청난 빗속을 뚫고 한 친구가 문병 왔다. 그 때의 감흥을 시로 읊으면서 서두를 이렇게 썼다.
秋, 杜子臥病長安旅次, 多雨....常時車馬之客, 舊, 雨來, 今, 雨不來.
가을에 두보가 병들어서 장안에 있을 때 비가 많이 왔는데...늘 수레와 말을 타고 오는 손님이 있었다. 옛 친구는 비가 오는 것에 관계없이 찾아오는데, 새로 사귄 친구는 비가 오면 오지 않았다.
위 문장에서 ‘舊, 雨來, 今, 雨不來’의 구절에 나오는 舊雨를 오랜 친구(故交)라 하고, 今雨를 새로 사귄 친구(新知)라는 뜻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비를 친구에 비유했다는 게 얼마나 정다운 일인가?
명고스님이 사제인 玄津현진 스님은 산쓰끄리뜨와 빠알리어에 능통하다. 한 번은 12처에 대한 어원을 조사해달고 부탁했는데 다음과 같은 답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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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處처란 무엇인가?
①處처=ayatana(명사)=ayat(동사어근)+ana(명사를 만드는 토씨)
②12처=6내처+6외처
*‘눈’등을 ‘안(ajjhattika)’이라 하는 이유: 이것들에 대한 욕탐이 현저히 강하기 때문에
*‘형색’등을 ‘밖(bahira)’이라하는 이유: 이것들에 대한 욕탐이 다소 약하기 때문에
◉‘내처’는 육근에 들어와 자리 잡은 선입관적인 인식상태를 말한다. ‘이처’는 소리를 듣는 감각기관인 ‘귀’에 개입하여 선입관으로서 머무는 인식상태이다. 귀에 의해 소리가 들리어 ‘귀를 통해 소리가 들리는 구나’라고 인식되기 전에, 소리를 듣게 될 귀에 들어가(a-) 자리하여(-yatana) 밖에서 소리가 발생하면 발생된 소리가 안으로 들어와 ‘귀’라는 감각기관에 와 닿아 소리라는 것이 인식되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인식구조가 ‘이처’이다. 그렇게 여기는 ‘이처’ 때문에 ‘나’와 ‘세계’가 둘로 나눠져 실재한다는 견해가 일어나게 된다. 12처는 중생의 인지적 착각이다. 몸을 통해 들어오는 외부대상에 대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에 선입관으로서 이미 박혀 있는 선입관 즉, 잘못된 견해(邪見)이다.
◉‘외처’는 6경에 들어가 자리 잡고 있는 선입관적인 인식상태를 말한다.
‘향처’는 코를 통해 감지되는 냄새에 들어가 선입관으로서 머무는 인식상태를 말한다. 코에 의해 냄새가 맡아져 ‘코를 통해 냄새가 맡아지겠구나.’ 라고 인식되기 전에 코를 통해 감지될 냄새에 들어가(a-) 자리하여(-yatana) 내 밖에 존재하는 이 냄새는 곧 내 안으로 들어와 코에 닿음으로써 냄새라는 것으로 인식되겠구나. 그러므로 냄새는 ‘나’라는 존재의 밖에 존재하는 세계이며, 코가 곧 ‘나’라는 존재이구나라고 생각하며 냄새에 머무는 인식상태이다.
③육내처-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ajjhattika ayatana)
*눈(眼, caksus) -안처: 눈에 들어와 머물며 눈이 ‘나’라고 여기는 인식상태
*귀(耳, srota) -이처: 귀 귀가 ‘나’라고
*코(鼻, ghrana) -비처: 코 코
*혀(舌, lihva) -설처: 혀 혀
*몸(身, kaya) -신처: 몸 몸
*종합작용(意, mano)-의처: 종합작용 종합작용
④육외처-여섯 가지 밖의 감각대상(bahira ayatana)
*형색(色, rupa) -색처: 형색에 들어가 머물며 형색이 ‘세계’라 여기는 인식상태
*소리(聲, sabda) -성처: 소리에 소리
*냄새(香, gandha) -향처: 냄새에 냄새
*맛(味, rasa) -미처: 맛에 맛
*감촉(觸, sparsa) -촉처: 감촉에 감촉
*법(法, dharma) -법처: 법에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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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시사되는 점: 위빠사나 수행할 때 볼 때는 ‘봄’ 뿐. 들을 때는 ‘들음’ 뿐. 냄새 맡을 때는 ‘냄새’ 뿐. 맛볼 때는 ‘맛’뿐. 감촉할 때는 ‘감촉’뿐. 개념을 통해 사유할 때는 ‘개념’뿐. 이렇게 수행해야 ‘내 눈이 바깥의 형색을 보는구나.’라는 범부의 인식구조를 깨뜨릴 수 있다. 6근이 6경을 대할 때마다 6근을 ‘나’로 삼고, 6경을 ‘실재하는 외계대상’으로 삼게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중생의 버릇이다. 이렇게 되면 6근을 ‘나’로 삼는 버릇 즉 아견, 유신견은 갈수록 강화될 것이고, 6경을 실재하는 외계대상으로 여기는 버릇(이것이 법견, 소박한 실재론이다)도 더불어 강화될 것이다. 그러므로 눈에 무엇이 보일 때 단지 ‘봄’이라고 sati하라. 이것이 깊어지면 ‘봄’이라는 앎만 반짝 빛날 뿐, ‘내 눈이 무엇을 본다.’는 습관적인 사고방식이 점점 엷어질 것이다. 그 대신 무상, 무아, 고라는 삼법인을 체득하게 된다.
오후가 되자 비가 멎고 안개가 산과 숲에 자욱이 피어오른다. 비 소리에 잠겼든 새들이 다시 울기 시작한다. 산비둘기는 구구, 비비새는 비비거린다.
2017년6월8일(목)흐림
삭발목욕일. 포천에 있는 유황온천에서 목욕하다. 물폭포 밑에서 목과 어깨에 물세례를 맞다. 돌아와 쉬다. 화창한 날.
첫댓글 감사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