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년의 시간을 거슬러서 고교시절 은사님과 동무들을 만나는 날이다. 연일 계속되는 강추위가 날마다 기록을 갱신하더니, 급기야 최근에는 러시아나 핀란드 날씨에 버금가는 추위라고 한다. 그래도 뜨거운 우정을 나누어 온 옛 친구와 더불어 은사님까지 만나러 가는데, 그깟 한파가 대순가. 추위야 물렀거라. 악동들이 나가신다.
단발머리 시절, 우리는 학교를 대표하는 악동들이었다. 물론 껌 좀 씹던 언니들이거나 착한 친구들을 괴롭히는 등 나쁜 짓을 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무슨 일이건 열심이었던 '악과 깡'으로 뭉친 우리를 대신하여 부르던 귀여운 별칭이다. 그렇게 남다른 우정을 나누었던 우리 다섯 악동들은 최소한 일 년에 한 번이라도 만나려 노력하고 있다. 그동안 하고픈 것들은 모두 뒤로 미룬 채 달려온 지난날들이었지만, 이제 자식들도 모두 자라서 성인이 되었다. 아이들이 자기 길을 가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며, 우리들도 우리의 행복을 건사해도 되는 나이가 되었다.
거기에다 갱년기를 거치면서 몸은 점점 예전 같지 않다는 걸 느끼며, 하루라도 젊을 때 예쁜 모습을 보고 싶고, 예전에 수학여행에서처럼 하룻밤이라도 함께 수다를 떨며 밤을 지새고 싶은 나이가 되었다. 그래도 집을 비우고 어딘가를 간다는 건 아직 걸리는 것들이 꼭 하나씩 나타난다. 또한 자신만을 위해 살아온 세월이 아니었기에 아직은 식구들에게 조금 미안해지기도 한다. 그러기에 만남이 늘 순조롭지만은 않다. 언제나 망설이는 우리들 중에 그래도 가장 추진력이 있는 은이가 가끔 문자를 날리는 덕분에 오늘 같은 만남이 이어진다.
우리 다섯 악동은 가장 활발한 성격의 은이, 예나 지금이나 똘똘한 률이, 그리고 나와 키가 비슷해서 18,19,20번 나란히 번호를 이었던 현이와 숙이다. 우리들은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수록 서로의 속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다. 남편 앞에 자식 앞에 내놓지 못하는 고민도 털어놓고, 자식 걱정이건 부모 걱정도 함께 나누고, 남편 흉을 나누다 보면 시간이 후딱 지나버려서 늘 아쉽기만 하다.
그런 끈끈한 우정으로 뭉친 우리가 올해는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서 한 번도 못 만나나 싶었는데, 성격 급한 은이가 문자를 보내왔다. 담임 선생님 연락처를 알아내서 전화를 드렸더니, 같이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단다. 모두들 반가운 마음으로 연말 안에 보자고 하여 날짜를 급하게 정했다. 인사동 남도식객이라는 작은 선술집으로 약속 장소를 정하고 나니, 몇몇일 설렘으로 잠을 못 이루었다.
고등학교 1학년 말에 나는 서산의 고등학교로 전학을 했다. 그리고 이듬해 2학년 여름, 부모님이 돌연 고향인 제주도로 내려가시는 바람에 1년 반 정도 자취를 했었다. 그 시절 다섯 악동들은 나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소소한 고민거리를 나누는 건 물론이고, 친구 엄마가 김치를 해주셔서 얻어먹기도 여러 번, 주말이나 성탄절엔 친구 집에 가서 잠도 자고 새벽송도 돌았다. 그리고 수학여행이나 소풍 길에서도 우리는 늘 곁에 있었다.
그런데도 유난히 외로움을 많이 탔었던 성격에다, 혼자 남겨진 탓으로 나는 많이 힘들었다. 요즘 아이들이 겪는 중2병처럼 그때 전두엽에 무슨 이상이 있었나 보다. 선생님들의 관심을 받으려고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곤 했다. 자율학습 시간에 도망을 가기도 하고 수업시간에 엎드려 자거나 해서 자주 교무실에 불려갔다. 지금은 돌아가셔서 안 계신 국어 선생님께는 허벅지에 멍이 들도록 빠따를 맞아서 한동안 멍이 남아 있었다. 아마도 그때 입시 공부를 제대로 했다면 내가 꿈꾸었던 길을 쉽게 갈 수 있었을까. 늦게나마 나만의 꽃을 피우기 위해 먼 길을 돌아온 건 아닐까.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하여 자리에 앉아 있으니, 옛 추억의 교실과 교단에 서 계신 선생님의 모습, 떠들썩한 교실 풍경이 고스란히 떠오른다. 1학년 때에는 하얀 블라우스와 남색 치마를 입었고, 2학년 때부터 교복자율화로 사복을 입었다. 3학년 때에는 사복을 입고 머리를 짧게 커트했었는데, 단정하게 교복을 입었던 1학년 때의 모습에서 더욱 그리움이 묻어난다.
그 시절, 첫 부임으로 오신 담임 선생님은 수줍음을 많이 타셨다. 그런 선생님을 놀리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열아홉 소녀들은 장난을 많이 했었다. 옛 모습을 떠올리며 혼자 빙긋 웃고 있는데, 현이와 숙이가 들어왔다. 우리는 차가운 서로의 손을 잡아 녹여주면서 인사를 나누었다. 현이는 엊그제 혹을 하나 떼어내서 오기 어려웠지만 보고 싶어서 왔다고 한다. 눈망울이 붉어진다. 아프지 말자. 행복하자. 노래가사처럼 이젠 아프지 말고 행복하기만 하자. 꽃집 사장님 숙인 여전히 꽃처럼 예쁘다. 그리고 드디어 기다린던 선생님이 들어오신다. 예전 보다 볼살이 오르셨고, 흰 머리가 하나씩 보일 뿐, 어제 본 듯 그 모습 그대로이시다.
가장 멀리서 온 은이와 률이가 도착해서 인사를 나누고, 남도식객의 대표 음식인 묵은지 갈비찜과 파전이랑 육전 등을 시키고, 각자의 취향에 따라 음료수(?)를 시킨다. 우리는 선생님께 애정을 듬뿍 담아서 준비한 선물을 드렸다. 나는 그동안 발간한 두 권의 시집을 선물했다. 선생님은 내 시집을 펼쳐보시며, 깜짝 놀라시는 한편 자랑스러워하셨다.
선생님은 예전과는 다르게 수줍어하시기는 커녕, 어느새 친구가 되어 우리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신다. 예전에 우리들의 진학문제에 고민하셨던 것처럼 이제는 우리 아이들의 진로에 대해서 머리를 맞대고 진지하게 고민하신다. 직장에 다니느라 정보가 부족하여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조언을 해주지 못한 게 사실이다. 그런 우리에게 선생님은 오래 축적된 지혜의 문을 열어 주시니, 그 안에서 저절로 답이 얻어진다.
세월이 흘러서 같이 나이가 들어가는 사제지간이 되었지만, 가르침의 길을 걸어오신 선생님의 모습은 확연히 남다르신 데가 있다는 걸 느낀다. 게다가 우리도 잊었던 친구들의 이름과 특징들을 말씀하시는 데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제자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렇게 한 친구도 빠뜨리지 않고 다 기억할 수 있겠는가. 새삼 선생님의 애정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자리를 옮긴 찻집에서도 우리들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한참을 이야기 하는 동안 시간은 흐르고, 창밖으로는 희끗희끗 눈발이 날렸다. 카페 옆에는 참새들이 앉아서 무언가를 쪼아 먹다가 사람들이 지나면 포르르 나뭇가지 위로 올라갔다. 선생님 앞에서 수다를 떠는 우리들이 참새처럼 천진스럽다는 생각을 한다.
선생님은 우리들의 진한 우정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는 말씀을 남기고 자리를 일어나셨다. 아쉬운 마음으로 악수를 나누고, 멀리 사라지는 선생님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선생님의 어깨가 넓어 보인다. 마음이 따뜻하고 든든해진다. 문득 34년 전 졸업식을 하고, 교문 앞에서 사진을 찍던 우리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선생님도 우리들이 떠나는 모습을 이렇게 지켜보았으리라.
돌아보니 참으로 힘들고 긴 여정이었다. 그 길은 각자의 짊을 등에 지고 홀로 걸어온 길이었다. 그러나 이제 앞으로의 길은 함께 하리란 걸 안다. 힘들 때마다 손을 내밀어 주고, 외로울 때 마주앉아 내 이야기를 들어줄 친구들이 여기 있다. 그렇기에 우리의 내일은 외롭지 않을 거다. 얼굴엔 주름살이 깊어가고, 바람에 날리는 흰 머리가 서럽지만, 마음만은 학교 운동장을 달리던 여고생이 되어 살아갈 거다. 우리는 다시 다섯 악동이 되고, 우리들의 시간은 거꾸로 흐를 것이다.
첫댓글 선생님께는 다섯 악동이 있다면,
저에게는 다섯 손가락(모임이름-이석영, 박종욱, 김원열, 이성호, 최연호)가 있습니다. ^^
다섯손가락, 든든한 친구네요^^
용률이 현수? 남자도 모였어요?
여학생의 허벅지를 멍이 들도록 때렸던 국어선생님... 지금 같으면 구속감이네요^^
둘다 여친입니다
사랑의 빠따였다는걸 저는 알지요
그리운 선생님입니다
서산 오악동들이 수줍던 그 옛날 은사님을 찿아갔군요. 그저 아름다우면서 이 대낯에 술 생각이 나게 합니다. 오악동님들의 무한한 우정을 빌어봅니다.
낮술을 부르는 다섯 악동이네요.ㅎㅎ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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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의 차이일지도..
남자들은 집으로 여자들은 밖으로..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