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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약국을 경영하다가 이민을 생각하고 들어왔던 분이 있었는데, 교회에 왔습니다. 처음에는 열심을 내다가 교회에 빠지는 날이 있으면 심방을 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습니다.
그 분은 성경을 믿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소위 난해한 부분, 특별히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질문했습니다. 괜히 토론을 하다보면 자기주장을 하게 되고 관계가 틀어질까 바서 조심스러웠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선생님의 질문 의도를 제가 알게 되었습니다. 그 선생님은 그런 것으로 저를 난처하게 하고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에 정당화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질문을 해옵니다. 왜요? 시험하기 위해서(25) 입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려서 괴롭힐 수 있을까 하는 의도를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율법사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 당시 유대사회에서 엘리트입니다. 율법에 정통한 사람으로 사회의 지도층에서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법을 전공하거나 법조계에서 일하는 그런 사람으로 보면 됩니다.
이 율법사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이 질문은 아주 중요한 질문이지 않습니까?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기 전에 꼭 해보아야 할 그런 질문입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 이 질문을 다르게 설명하면 “내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이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어떻게 영생을 얻습니까?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어떻게 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대답해 보십시오. 스스로 질문해 보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율법사가 예수님께 질문을 던질 때에 그 의도를 우리 예수님이 아셨겠습니까? 몰랐겠습니까? 예,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십니다. 율법사의 사악한 동기를 가지고 질문을 시도하신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사에게 오히려 질문을 던집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26)
이것은 “너가 율법을 전공한 율법사이니 율법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한번 대답해 보거라”는 것입니다.
율법사가 무엇이라 대답합니까?
“네 마음을 대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27)
마치 초등학교에 가면 우리가 구구단을 외우듯이 이 구절은 유대인이면 누구나 외우고 있는 말씀입니다. 율법에 정통한 율법사가 아주 율법의 핵심을 정확하게 뽑아서 예수님께 대답했습니다. 백 점짜리 정답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네 대답이 옳다. 이대로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28)
이렇게 되면 율법사가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나와야 합니까?
“아이구, 선생님, 저는 머리로만 율법에 대하여 알았지만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자기의 꼬리를 내리고 물러나야 하는데, 율법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29절에 보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자기의 의로움을 다시 드러내려고 시도합니다. 누구에게요? 예수님에게 그리고는 다시 질문을 시도합니다.
율법사는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을 시험하여’ 질문을 시도했고, 대화 가운데서는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진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종착역은 어디이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이것이 교활한 인간의 실상입니다. 회칠한 무덤 같이, 겉은 화려하나 속은 썩어 냄새가 진동하는 무덤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 내가 가고 있는 길, 나의 계획, 나의 시도들을 돌아보십시오. 첫 단추가 바로 끼워져 있습니까? 지금 몰두하고 있는 일이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그 종착점이 과연 어디이겠습니까?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보는 것은 실패가 아닙니다. 더딘 것이 아닙니다. 용기가 필요하지만 멀리 볼 때에 그것은 잘한 일이며, 축복입니다. 때로는 잠깐 멈추어 서서 돌아보는 쉼의 자리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율법사는 자기가 의롭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다시 질문을 시도합니다.
“그러면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이때에 예수님께서 율법사에게 들려주신 이야기가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입니다.
어떤 유대인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당합니다. 입고 있던 옷은 물론이고 생명까지 위험한 지경까지 매를 맞고 거의 죽음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지나가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의 신음을 듣고 현장을 목격하지만 그냥 지나쳐 나가는데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서 생명을 구해주었다는 예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이야기 끝에 율법사에게 묻습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36)
율법사는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아예, 예수님!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좀 이상하게 대답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이다’라고 대답하지 않고 37절에 보면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합니다.
율법사은 왜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으로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을까요? 너무나 이야기 속에 이웃은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너무나 명확한 대답이 있는데, 왜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습니까?
민족적인 배경이 깔려 있습니다. 이웃은 좋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마땅히 대우를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율법사에게는 좋은 이웃이 될 수가 없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좋은 이웃이라고 입으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당시에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앙숙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개같이 여겼습니다.
역사적으로 북쪽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기원전 722년에 망합니다.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다스리기 위해서 혼혈정책을 썼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사람은 앗수르 사람과 혼인을 해서 순수혈통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남쪽 유대사람들은 더러운 피가 섞였다고 동족으로 여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인간 이하로 취급하고 멸시를 했습니다. 그러니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의 괄시에 이를 갈게 되고, 시간이 흐르자 서로 원수같이 지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사는 예수님에게 ‘이웃이 누구냐?’는 질문에 예수님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 후에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누구냐?’고 율법사에게 질문하자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자이니다’라고 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의 선한 이웃이 누구입니까? ‘자비를 베푼 사람,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자비를 베푼 사람이 좋은 이웃입니다.
자비(크리스토테스)는 다른 사람에게 대한 친절(goodness), 너그러움(gentleness)입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가운데 다섯 번째 열매입니다. 오늘은 그 열매의 여섯 번째 열매인 양선(goodness)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양선은 헬라어로 ‘아가도쉬네’라고 합니다. 헬라어에서는 자비와 양선 사이의 의미를 정확하게 구분하기란 어렵습니다. 영어로도 ‘착하다’ ‘좋다’는 의미의 ‘goodness'입니다. 그 어원이 ’다른 사람에게 기꺼이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이기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서신에는 자비는 하나님의 자비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반면에 양선은 사람이 선한 성품과 행동으로 이웃에게 선을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자비나 양선은 둘 다 성령의 열매입니다.
예수님은 자비를 행하는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임을 비유로 가르쳐줍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사에게 “너도 가서 이와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너도 가서 자비를 베푸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좋은 이웃으로 살아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나그네 삶을 살아가면서 교회식구들이 서로 좋은 이웃, 선한 이웃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아가 세상 가운데 강도 만난 사람처럼 죽어가는 뭇심령에 대하여 선한 이웃이 되었으면 합니다. ‘선한 이웃으로 살아가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1. 첫째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들려주시는 이야기 가운데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사람이 강도를 만나서 거반 죽게 되었는데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그 광경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의도적으로 피해서 갔습니다.
그렇지만 한참 후에 사마리아 사람이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강도 만난 자를 목격하고서는 어떻게 합니까?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33)
같은 현장을 보았는데 어떤 사람은 불쌍히 여기고 어떤 사람은 그냥 보고 지나쳐갔습니다.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육신적으로 그 현장을 보는 것은 동일합니다. 하지만 다른 점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 마음은 우리 주님이 가지신 마음입니다. 주님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의 소유자입니다.
주님은 벳세다 들녁에서 자기를 따라 다니는 큰 무리를 보시고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켜서 배불리 먹게 하셨습니다(막 5:31-44).
여리고성의 눈 먼 두 소경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불쌍히 여겨 달라’라고 청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져주시고 보게 해주셨습니다(마 20:34).
나인성에 살고 있는 과부가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잃어버렸을 때에 예수님은 그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울지 말라’ 하시고는 아들을 살려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배고픈 사람, 병든 사람, 죽음에 이르러 슬픔과 고통에 빠진 사람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를 만나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유대인을 보고서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피하여 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에 대하여 좋지 않는 감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대대로 원수처럼 지내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현장을 보고서 “꼴 좋다. 잘 됐다”라고 코웃음 치며 지나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의 감정, 민족적인 감정을 뛰어넘어서 불쌍히 여겼습니다.
몇 해 전에 일본 동북지역 지진이 터지고,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났을 때에 한국 사람들은 어떤 마음을 가졌을까요? ‘와, 안됐다’는 마음도 있지만 한편 언저리에는 조소하는 ‘잘 됐다’는 마음도 없지 않았겠느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민족은 과거의 아픔을 잊을 수는 없지만 미래를 위해서 오늘은 화해하고 서로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도록 훈련되어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정말 품어내기 힘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장 우리 가까이에도 평생 웬수들이 많습니다. 미운 마음이 들고 내 마음이 복잡합니다.
황창연 신부의 짧은 영상을 하나 보았습니다. 자기가 섬겼던 성당에 한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이 할머니의 남편이 젊었을 때에 바람도 많이 피우고 구타도 많이 했던 남편은 웬수였습니다.
삼식이가 된 늙은 남편과 집안에서 하루하루가 불편했습니다. 보기 싫었습니다.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웬수 같은 남편이 죽어서 장례를 마쳤습니다.
그날 신부님이 밤이 깊어 잠자리에 들었는데,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바로 남편 장례를 치룬 할머니였습니다. 그 할머니는 전화로 말했습니다.
“신부님, 잠을 잘 수 없습니다. 잠이 안옵니다. 웬수 같은 남편이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노래했는데, 막상 죽고 나니 남편이 사지를 못 사용해서 침대를 지켜주었을 때가 좋았습니다. 남편의 자리가 이렇게 클 줄을 몰랐습니다.”
신부님은 그 할머니를 위해 기도해주었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서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다면 우리에게 매치고 꼬인 인간관계가 풀리고 가까와져서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이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여, 불쌍히여기는마음을주옵소서”“주께서우리에게주님의마음을회복하게해주옵소서”
불쌍히 여기는 주님의 마음은 우리를 좋은 이웃으로 나아가게 할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선한 이웃으로 살아가기’에는 나눔의 희생이 따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그 다음에 어떻게 합니까? 34절을 보십시오.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이 가진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바릅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포도주의 알콜 성분이 살균과 방부제 역할을 했습니다. 기름은 연고와 같은 역할을 했기에 부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이 여행 중에 가진 것을 아낌없이 사용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지식과 경험을 총동원합니다. 그런가 하면 거반 죽어가는 사람을 자신이 타고 다니던 나귀에 태워 주막으로 데려왔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주막에 도착했을 때에 어떻게 했습니까?
“이제 내 임무는 끝났다. 나는 이 사람에게 너무나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인계하자”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는 환자를 돌보기 위해 자주 일어나느라 밤잠을 제대로 자지를 못하며 간호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그 다음날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두면서 ‘이 사람을 돌보아 달라’고 부탁합니다. 내가 다시 돌아올 때에 경비가 더 들면 갚아주겠다고 합니다.(35)
주막집에 지불한 두 데나리온은 노동자들의 이틀 품삯에 해당됩니다. 그 당시의 물가를 감안하더라도 며칠 간의 숙박비에 충분하리라 생각됩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돌보는 데에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주막 주인에게 어떤 손해를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책임집니다. 자신이 희생합니다.
“만약 비용이 더 들게 되면 돌아올 때 내가 갚아 주겠다”
생색은 내가 내고, 수고는 당신이 지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책임은 당신이 아닌 내가 끝까지 지겠다는 생각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11)라고 합니다. 선한 목자는 군림하므로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하므로 자신을 증명합니다.
선한 것은 내가 살아 과시되므로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알의 밀알이 죽으므로, 열매로 증명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인도에서 활동했던 앤서니 드 멜로라는 신부가 있습니다. 어느날 한 장사꾼이 그에게 와서 성공적인 삶의 비밀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고 청했습니다. 이때에 앤서니 신부는 말했습니다.
“날마다 한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시오.”
그리고는 말을 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당신 자신이라도 괜찮소이다”
그는 잠시 후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특히 그 한 사람이 바로 당신일 경우에 그렇게 하시오”
성공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자기 자신의 행복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자신이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진짜 좋은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이 행복하지 않고서는 좋은 이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이 필요합니다. 성령은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남을 행복하게 하는 자비를 베푸는 선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때에 수고할 수 있고, 희생도 가능케 되는 것입니다.
양선, 성령 충만으로 내가 먼저 선한 사람이 되어 선한 일을 행하는 이웃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찬송 / 사랑하는 주님 앞에(220, 2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