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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10월30일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수원] 깊이에로의 강요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 로마 8, 26 - 30
† 복음 : 루카 13, 22 - 30
★ 성령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신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성령의 인도와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성자와
같은 모상이 될 수 있다(제1독서).
★ 주님과 친교를 이루고 있다며 자부하는 사람들일지라도 불의를
일삼는다면 하느님께서 그들을 모른 체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 하지만 그 문은 좁다(복음).
◈ 오늘의 묵상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좁은
문은 들어가기 불편합니다.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들어가려는 마음을 갖지 않습니다. 그 반면, 넓은 문은 대접받는
사람들을 위한 문입니다. 그래서 그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 편하고
쾌적합니다.
즐거움에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파괴적인 즐거움과 창조적인
즐거움입니다. 파괴적인 즐거움은 쉽게 얻을 수 있는 즐거움입니다.
이를테면, 텔레비전 시청, 음주, 도박 등에서는 쉽게 즐거움을 맛볼
수 있으나 결국에는 그 즐거움이 바닥을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더
나아가 거기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다른 이들과 자기 자신에게 피해를
줍니다.
창조적인 즐거움은, 당장에는 하기 싫고 어려우며 귀찮은 데에서
시작합니다. 이를테면, 텔레비전을 끄고 고요히 기도한 뒤 촛불을
끌 때 얻는 즐거움, 산에 올라 정상에서 맛보는 상쾌한 바람의 즐거움,
텃밭을 가꾼 뒤 거기에서 얻은 채소나 과일을 이웃과 나누며 그들의
미소를 바라보는 즐거움, 어려운 사람을 도와준 뒤 돌아가는 길에
우러나오는 즐거움 등입니다. 이러한 즐거움은 오래 지속되며, 자신과
다른 이에게 힘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영원한 즐거움인 구원을 얻으려면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어떠한 즐거움을 맛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 매일 미사 -
◈ [청주] 있는 힘을 다 하여라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신부님
2013년 다해 10월30일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동쪽과 서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 루카 13,22-30
있는 힘을 다 하여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고에는 유명한 매장 패션밸리가 있습니다.
한국의 백화점이나 마찬가지인데 규모는 훨씬 큽니다. 한국은 땅이
귀한 까닭에 위로 치솟지만 미국은 땅이 넓은 탓인지 바닥에 넓게
펼쳐놓았습니다. 지진을 대비한 안배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고층빌딩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참으로 매장이 넓습니다. 동행한 분이 명품코너를
가리키며 아름다운 보석들이 있는데 아주 비싸다고 하시며 한번
구경하시겠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보석인데 어디서 보석을
찾습니까?” 했더니 “신부님은 왕자 병”이랍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아름답고 귀한 보석을 들여다보면 욕심이 납니다.
귀한 보석을 보는 사람들은 그 보석을 갖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무엇보다도 소중한 보석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하느님의 걸작품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귀한 보석입니다.
그러므로 이 보석을 아름답게 빛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가13,23)
하고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를 얘기하지
않으시고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가13,24)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지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약속된 미래는 오늘을 통해
오기 때문에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나의 보석을 잘 가꾸어야지 남이 만들어
놓은 보석에 마음을 빼앗길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써라’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방심하지 않고 주어진 기회를 최선을 다해 이용해야 합니다. 오늘
여기서 영원을 살지 않으면 결국은 마지막 날 울며 이를 갈 것입니다
(루가13,28). 지금 노력하지 않고 훗날 우정과 연줄에 매달려 호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예수님과
같은 고향 사람이나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 형제들이라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루가8,21참조).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요한사도는“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1요한 2,17). 라고 선언합니다. 사실,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되는 것은 한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있는 힘을 다하십시오. “끝까지 견디어 내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마태24,13).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시편126,3-6).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지금 힘쓰고 있는
하나하나의 수고와 땀을 헤아리십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내게 있어 가장 중요한것이 무엇인지
어제 어떤 신부가 제게 점심을 사달라고 왔습니다. 그래서 점심을
함께 하는데, 신경 쓰이는 한 가지가 있더군요. 바로 우산이었습니다.
우산을 꼭 움켜쥐고 다니는 모습이 영 어색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우산을 자주 잊어버려서요.”
하긴 어제 같은 날씨가 참 우산을 잊어버리기에 좋은 날씨였지요.
아침에는 비가 와서 우산을 가지고 나왔는데, 오후에는 우산이 없어도
될 맑은 날씨였으니까요. 문득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떤 장사꾼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툭 하면 우산을 잊어버리고 집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장사꾼의 아내가 아침에 이렇게
말했지요.
“여보, 제발 오늘만은 우산을 잃어버리지 말고 제대로 가지고
돌아오세요.”
이 말에 장사꾼은 오늘은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항상 이 우산을 움켜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너무나 피곤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깜빡 졸았지요. 그리고 내릴 때가 되어 깜짝 놀라 잠에서
깼습니다. 그러면서도 우산만큼은 절대로 손에서 놓지 않고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우산을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기뻐하는 순간, 이 장사꾼은 깜짝 놀랐습니다. 글쎄 우산은 제대로
가지고 왔는데, 글쎄 장사해서 번 돈을 넣어둔 가방을 그만 버스에
놓고 내린 것입니다.
우산을 잃어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우산과 장사해서 번
돈을 비교하면 어떤 것이 더 중요할까요? 사소한 것에 신경 쓰다가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들의 모습이 이럴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세상의 일들, 특히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일에
신경 쓰다가 정작 가장 중요한 하느님의 일에 대해서는 소홀하게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나중에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순간에,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세상의 일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이 사소한
일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것처럼 착각하고 있지요.
이렇게 사소한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로 중요한
것에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오늘 복음을 통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려는
넓은 문이 아닌 구원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힘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주님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주님께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향해서
나아가는 내 자신이 되어야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내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를 다시금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세상의 그 모든 것을 다 얻었다고 해도, 내 구원을 얻지 못했다면 헛산
것입니다.
두려움은 적게, 희망은 많이, 푸념은 적게, 호흡은 많이, 미움은 적게,
사랑은 많이 하라. 그러면 세상 모든 좋은 것이 당신 것이다(스웨덴 속담).
종이 자동차.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움직이지 못함에 그렇게 대단하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명품 구분법
어떤 신부님을 만났는데, 소위 명품이라는 평을 받는 가방을 가지고
계시더군요. 그래서 같이 있던 신부들이 “와~~ 이 가방 명품 아니야?”
라고 말하자, “이거 짝퉁이야. 얼마 전에 이태원에서 2만원 주고
구입했는데, 진짜랑 똑같지?”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명품인지 짝퉁인지 도저히 구별하기 힘들더군요. 그런데
인터넷을 보니 비가 오면 그 구분을 정확하게 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정확하게 말해서 우산을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갑자기 비가 오면
알 수 있다고 합니다.
- 그 가방을 머리에 이고 비를 피하며 달려가면 틀림없는 짝퉁!
- 그 가방이 비 맞을 새라 품에 꼬~옥 안고 뛰면 100% 명품!
또 하나의 명품가방 구분법은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 남자친구가 사주면 명품
- 남편이 사주면 짝퉁
과연 명품 구분법이 될까요? 그런데 이렇게 외적인 명품을 가지고
다니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세상의 명품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명품으로 주님께서 만들어 주신 만큼,
그 명품의 가치를 더 높일 수 있도록 스스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내 자신이 됩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 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이 삶안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013년10월30일 연중 제 30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루카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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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무병장수(無病長壽)하기를 바란다.
젊게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고 싶어한다는 뜻이다.
언젠가 미사 중 신자들에게 질문한 적이 있다.
“천국에 가고 싶으신 분들 손들어보세요.”
모두가 웃는 얼굴로 손을 번쩍 든다. 다시 질문한다.
“그러면 지금 가고 싶으신 분들 손들어주세요.”
모두 웃기만 하고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다.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낫다’는 속담을 재차 확인하는 순간이다.
죽고 싶지는 않다는 이야기다.
이는 아주 자연스러운 우리 모두의 마음이다.
이틀 전 성체를 모시고 잠시 묵상하는 동안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우리가 물리적인 사고를 피할 수 있고 또 늙지도, 병들지도
않는 몸을 가지고 있다 하자.
그러면 우리의 삶과 이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하는 생각이었다.
즉, 모든 사람이 죽지 않을 수 있는 몸을 갖게 되면 어떻게 되겠냐는
말이다. 그토록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무병장수를 이루게 되었으니
행복한 세상이 될 수 있을까? 과연 그럴까?
모르기는 해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여러 가지 상상이 가능하겠지만, 그 중 제일 비극적인 상상은 세상이
완전히 욕망덩어리로 변할 것이라는 것이다.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삶 속에서도 손을 놓기 그리도 힘든 욕망인데,
죽음이 전제되지 않을 수도 있는 삶이 각자에게 갖게 할 욕망의 깊이가
오죽하겠는가? 제어력을 잃은 욕망, 멈춤이 없는 이기심은 정말로
상상하기조차 싫은 비극적인 세상을 만들 확률이 너무도 높다.
어쩌면 그나마 우리가 욕망과 싸워 선한 삶을 살고자 하는 동기나
이유는 우리의 유한성에서 만들어지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불완전한
모습이 완전하신 하느님을 바라보게 하듯이, 죽음이 있기에
우리가 삶을 뒤돌아볼 수 있고, 용서를 청할 수 있는 은총이 허락되는
것이 아닐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 하셨다. 욕망과 이기심 그리고 끊임없는
유혹, 이 모든 것들을 안에서 복음적 가치를 실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기에 좁은 문이 되는 것이고, 그 좁은 문을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욕망과 이기심과 유혹이 원하지 않는 문, 그 문이 바로
좁은 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좁은 문이란 어려운 문이라는 뜻이다.
이 어려운 문을 들어가고자 하는 삶은 삶의 한계를 바라볼 줄 알고 인정할
때 허락되는 삶이다. 삶과 죽음이라는 한계를 넘어서는 세상을 희망하는
삶이 결국 신앙인의 길이다.
더러운 욕망이 아닌 참된 사랑으로 이루어진 생명의 나라가 하느님의
나라임을 우리는 믿고 있다. 그 나라를 들어가고자 하는 이는 많지만
들어가는 이는 적다 하셨다. 그만큼 어려운 길이라는 말씀이다.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늙음도 죽음도 은총이라는 신앙적 이해가 가능할 때 주어지는
삶이라는 것을 마음에 새겨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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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592140484141360&set=a.
504148986273844.117525.491783984177011&type=1&thea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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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춘천교구 김 현신 요셉 신부님이 담은 것입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서울]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2013년 다해 10월30일
오늘은 사제품, 부제품을 받는 신학생들에게 설문지를 나누어 주는
날입니다. 신학교에 입학해서 사제가 되기까지는 군 생활을 포함해서
10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내년 2월에 서품식이 있으니 이제
4달 정도 남았습니다. 설문지에 응답하면서 많은 생각들을 할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 아쉬운 마음, 설레는 마음, 두려운 마음이 함께 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사제와 부제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10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신학교에서 ‘건강,
지식, 성덕’을 쌓아온 신학생들은 이제 더 큰 세상에서 자신들의 꿈을
펼쳐 보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참 오묘한 것임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용문에 살
때의 일입니다. 서울 가려면 용문 역에서 기차를 타게 됩니다. 그때
우연히 어떤 자매님이 제게 서울 가는 길을 물어 보았습니다. 그분은
불교 신자였습니다. 저는 제가 서울 가는 길이기 때문에 제가 타는
기차를 타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명함을 드렸고, 그분은 나중에
제가 사제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투병 중에 있는 남편과 함께
수련장을 찾아왔습니다. 가족들 모두는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남편을 위해서 기도 드렸고, 집으로 방문해서 축성을 해 드렸습니다.
천주교 신자가 아님에도 그분들은 저의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함께 했습니다. 용문에서 서울로 온지 2달이 되었습니다. 어제
저는 그 자매님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남편께서 대세를 받고 하늘나라로
가셨다고 합니다.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하고 싶다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저는 기꺼이 장례미사를 해 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차역에서 만나는 짧은 인연을 통해서 한 영혼을 받아 주셨고, 그
가족들도 신앙 안에서 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예전에 맹인가수 이용복씨가 부른 노래가 있습니다. 제목은 어린
시절입니다.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고 다람쥐 쫓던 어린 시절에
눈사람처럼 커지고 싶던 그 마음 내 마음. 아름다운 시절은 꽃잎처럼
흩어져 다시 올 수 없지만 잊을 수는 없어라.” 하느님 나라는 이렇게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고, 추억을 마음에 담고 사는 사람에게는 결코
좁은 문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하늘나라는 사법고시 보듯이 공부를 해서 가는 곳은 아닐 것입니다.
박 태환 선수처럼 월등한 체력과 실력이 있어야 가는 곳은 아닐 것입니다.
삼성이나 현대처럼 엄청난 재력이 있어야 가는 곳도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뛰어나고, 능력이 있고,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더 좁게만 보이는 곳이 하늘나라일지 모릅니다. 하늘을 두려워하며
섬기는 사람, 가족을 사랑하고 돌보며, 이웃과 더불어 평화롭게 지내는
사람에게 하늘나라는 결코 좁은 문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구원의 문을 열수 있는 열쇠는 희생과 나눔입니다. 십자가와 사랑입니다.
믿음과 희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와 사랑으로 천국 문을
여셨습니다. 믿음과 희망으로 천국 문을 여셨습니다. 희생과 나눔으로
천국 문을 여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길은 편하고
좋은 길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길은 비록 좁고 험하지만 누구나
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제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앞자리로 와 하느님과 가까이
2013년 다해 10월30일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앞자리로 와 하느님과 가까이
성적순 키순 나이순 선착순 이러다보니 세상은 경쟁의 전쟁터지요.
상품 PR이 아니고 자신의 외모나 잘났다는 PR에만 입을 여는 세상.
힘자랑 옷 자랑 실력 재물 미모 권력 기술 등 아주 다양합니다.
가진 게 없고 매사 부족하고 못 생기고 가련하면 뒤로 처지라는 세상.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앞자리로 와 하느님과 가까이 있으라는 천국.
세상만, 영원세상은 무시? 둘 다?, 그래도 영원에 걸면 이득 아닐까요?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루카 13,30)”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깊이에로의 강요
2013년 다해 10월30일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 동쪽과 서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
복음 : 루카 13,22-30
< 깊이에로의 강요 >
이무석 교수에게 술만 마시면 우는 친구가 있다고 합니다. 평소에는
예의 바르고 조용하고 수줍어하지만, 술만 마시면 목소리가 커지고
주먹으로 옆 사람을 치기도 하고 어릴 때 강에서 물놀이하다 죽은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꺼이꺼이 울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친구들은 술에 취한 그의 모습을 더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평소에는 무척이나 마음을 터놓기가 어려운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왜 술을 마시면 용감해지는 것일까요? 뇌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합니다. 구피질(archipallium)과 신피질(neopallium)입니다.
구피질은 동물적 기능을 담당하여, 호흡, 혈압, 식욕 중추가 여기에
있다고 합니다. 특히 ‘감정’의 중추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분노,
쾌감의 중추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신피질은 생각과 판단을 주관하는
곳이고, 도덕적 판단이나 자기조절이 신피질에서 담당합니다. 인간의
인간다움은 사실 신피질의 기능 덕분인 것입니다.
그런데 술은 뇌에서 신피질의 작용을 둔화시켜 억제되어 있던 구피질의
감정들이 솟아나게 하는 화학적 작용을 일으킵니다. 평소에도 감정은
오르락내리락 하는데 그것을 신피질이 통제하고 있었다면, 술을 마시면
신피질의 그 통제력을 잃기 때문에 감정의 변화를 그대로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술을 마시고 평소와 아주 다른 사람이 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무척이나 억누르며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렇게라도 마음을 여는 사람은 술을 마시지 않았을 때 어려웠던
인간관계가 호전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을 여는 즐거움을
또 느끼고 싶어 합니다. 친밀감의 유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술을
마시고 나서 느끼는 친밀감은 마약과 같아서 자꾸 술의 힘을 빌려
관계의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이무석, 친밀함, 228-231]
그렇다면 도대체 술을 마시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나와 친해지려고
하는 이 사람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술이 깨면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이 사람은 또 누구인가요? 사람을 본다면 나는 어떤
상태일 때의 그 사람을 참으로 그 사람으로 여겨야 하는 것일까요?
아무래도 사람은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감정보다는 이성이, 이성보다는
마음이 그 사람의 본질에 더 가깝다고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이성보다는
감정이 더 빠르게 변하고, 마음보다는 이성이 더 쉽게 변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하느님이 머무르는 차원으로 그 안에서 성령의 도움으로 발생한
믿음이나 사랑은 절대 감정이나 이성으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절대불변이십니다. 그렇다면 나의 가장 나다운 것은 절대 변하지 않는
‘마음의 차원’인 것입니다.
얼마 전 어떤 분을 만났는데 냉담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성령기도회에서 성령이 뜨겁게 내려오는 체험을 해서 한 때는 열심히
했었는데, 사는 것이 바빠지다 보니 이제는 나가야 함을 알면서도
쉬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령기도회와 같은 곳에서 오는 하느님의
체험은 마음적 차원보다는 감정적 차원이 많습니다. 물론 좋은 강의도
많이 들으면서 정신적인 차원으로 하느님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감정적-이성적 차원의 영성을 영적인 차원으로 높여놓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빨리 끓어올랐다가 또 빨리 식어버리기 마련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과 함께 먹고 마시고, 길에서 말씀을
들었다는 이들에게 “나는 너희를 모른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감정적인 차원으로만 받아들이고 영적인 차원으로 모시지
못한 이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말씀을 들었다는
것은 미사에도 참여하고 성경말씀도 공부한 이들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그들을 모르신다는 것은 그만큼 변하기 쉬운
차원까지만 당신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마음까지 그분을 모시지
못하면 그분은 온전한 우리 자신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까지 그분을 모신 사람의 특징은 한 순간도 그분을 잊지 않고
그분 뜻대로만 살려고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또한 성령을
통하여 아버지를 당신 안에 모셨을 때는 당신 뜻대로 하시는 것은
하나도 없으시고 매순간 당신 마음 안에 계신 당신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뜻대로만 사셨습니다.
바다에도 표면은 정신없이 변하지만 깊이 들어갈수록 고요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깊어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이 변하지 않으려면
삶의 수준이 육체에서 머리로, 머리에서 가슴으로 깊어져야 합니다.
가슴은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고, 그 안에서 맺혀지는 열매는 하느님을
가장 닮았기 때문에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완전한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지막 날 그리스도께 “나는 너를 모른다!”
라는 말씀을 듣지 않기 위해, 매 순간 그분을 얕은 곳이 아닌 우리 가장
깊은 곳, 즉 우리 마음 안에 모시고, 그분의 뜻만을 따르는 삶을 살아갈
것을 결심해야 할 것입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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