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와 해탈
오늘 제게 주어진
법문의 주제는
‘윤회와 해탈’ 입니다.
이 주제는 설명 하기
조금 어려운면이 있습니다.
왜냐 하면
윤회와 해탈 이라는 용어는
종교적으로 쓰일 때와
진리로 쓰일 때의 의미가
조금 다르기 때문 입니다.
종교는 믿음이 중심 입니다.
진리는 무엇이 진리 인지
탐구해서 사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 해요.
오늘은 종교와 진리라는
두 가지 측면 에서
윤회와 해탈에 대해
이야기 해 보고자 합니다.
인도 전통 사상에서
사용된 윤회의 의미.
사람 들은 죽음을
두려워 합니다.
사실은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라
죽음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두려움이 생기는 거 예요.
이 두려움을
극복 하려고
예 부터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 놓았습니다.
그 중 제일 먼저 나온 발상은
‘안 죽고 영원히 산다’
는 것 이었어요.
그런데 그건 현실 에서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영생을
추구하는 흐름은
지금 까지도 끊임 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두 번째 발상은
‘죽기는 죽지만,
죽어서 좋은 데 간다’
는 것 이었어요.
죽어서 여기 보다
더 좋은 곳에 간다니까
두려움이 많이 줄어 들죠.
헤어짐은 아쉽지만,
더 좋은 곳으로 간다면
떠나는 사람도 덜 아쉽고,
보내는 사람도
덜 아쉽 잖아요.
그래서 죽은 뒤에 저 세상,
좋은 세상에 간다고
한 거예요.
그래서 천당 이나
지옥 같은 개념이
나온 겁니다.
그것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어요.
믿는 사람은
덜 불안 하겠죠.
이러한 내생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돼요.
그런데 이 보다
더 좋은 발상은
인도 사람들이 냈습니다.
죽어서 아무리
좋은 데 간다고 해도,
다시는 못 만나 잖아요.
그런데 인도 사람들은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난다’는
아이디어를 냈어요.
지금 헤어져도
환생해서 금방 다시
만난다는 얘기죠.
좋은 데 가기는 해도
먼 데 가 버리는 것 보다
이게 더 좋은 생각 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인도 사람들은
누가 죽었을때
많이 울지 않아요.
그리고 장례를
일찍 치릅니다.
죽은 시신을 오래 두면
다시 태어나는 데
지장이 있잖아요.
헌 옷을 벗고
새 옷을 갈아 입듯이
이번 생에서
사용한 육신은
불에 태워 버려야 해요.
그래야 집착이
끊어 지니까요.
그래서 장례도
오늘 죽으면 바로
그 당일에 치릅니다.
바로 가서
태워 버리기 때문에
인도 장례 문화에는
관 같은 게 따로 없어요.
인도 역사에서
윤회 라는 개념은
인도의 원주민인
드라비다족 으로 부터
시작 됐다고 합니다.
이후 드라비다 족을
침입 해서
현재는 인도의 주류가 된
아리안 족도
윤회 사상을 받아 들여서
인도의 전통 사상 이자
신앙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불교도 인도 에서
시작 했으니까
윤회 사상을
받아 들인거예요.
사람들은 윤회를 믿으면
불교 신자이고
안 믿으면 불교 신자가
아니라고 생각 합니다.
우리나라 에서는
윤회가
마치 불교의 독특한
사상인 줄 알지만,
인도에 가보면
윤회 사상은 인도의
전통 종교인 힌두교
사상 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윤회가 불교의
정체성은 아닙니다.
윤회에 대한 믿음은
부처님 에게서
처음 나온 이야기가 아니라
인도에서 고대 부터 전해진
전통 신앙 입니다.
부처님이 말한 윤회의 의미
그럼 부처님도
이러한 윤회에 대한
믿음을 가르치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더 본질적인 것을
탐구 하셨어요.
두려움이 왜 생길까요?
죽음 때문이 아니라
무지 때문에
생기는 거 예요.
우리는 왜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두려움을 느낄까요?
왜 낯선 곳에 가면
두려움을 느낄까요?
왜 사람은 죽는 것을
두려워 할까요?
부처님은
이런 두려움을 탐구하고
나아가
인간 고뇌의 근원을
탐구하고 탐구 했습니다.
결국
"무지" 때문에
두려움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이 무지(無智) 또는
무명(無明)이
타파 돼 버리면
두려울 일이 없어져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고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나는 신과 인간의
모든 굴레로 부터
벗어 났다.
무명은 타파 되었다.
이것을 고뇌의 최후라
선언 하노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져 버리니까
죽은 뒤 어떻게 되느냐는
관심의 대상이
아닌 거 예요.
이것이 믿음을 통한
종교와 탐구를 통한
진리의 차이점 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핵심 목표는
무명을 타파 해서
해탈 하는 거 예요.
종교 로서 불교는
좋은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것을 믿습니다.
이렇게 종교와
진리에 대한 원리는
약간 모순 되는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두려움을 전제로
한 상태 에서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거냐’에
대한 답을 찾으면
내생,
전생,
천당,
극락 얘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아예
두려움의 존재 자체가
없어져 버리면
그런 걸 얘기할
필요가 없어져요.
윤회 하지 않는다 든지
천국이 없다 든지
내생이 없다 든지
이렇게 단정 짓는
얘기가 아니라,
그런 생각을 일으킨
뿌리가 아예
사라져 버린 거 예요.
이것이 탐구를 통해서
진실을
발견 하는 것 입니다.
따라서 믿음을 두고 서로
우열이나 진위를
논하는 것은
어리 석어요.
이건 헌법에 보장된
우리의 권리인
종교의 자유를 부정 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도 ‘윤회’ 라는
용어를 썼지만,
인도에서 전통적 으로
사용 되던 윤회 라는
개념 과는 좀 다릅니다.
용어는 같지만
개념이 좀 달라요.
부처님이 말씀 하신 윤회란
무슨 뜻 일까요?
내가 바라는 바가
이루어져서
기분이 좋은 것을
행(幸) 이라고 한다면
내가 원하는 것이
안 이루어질 때도
반드시 있습니다.
그러면
불행(不幸)이 생겨요.
원하는 바가 이루어 져서
기분이 좋다면
그것이 안 이루어질 때
기분 나쁨이
필연적 으로 생기니까
우리의 삶은
행과 불행이 되풀이될
수 밖에 없습니다.
돈을 벌어서
기분이 좋았다면,
돈을 잃을 때
불행이 옵니다.
누군가를 만나서 기뻤다면
그 사람과 헤어질 때는
괴로울 수 밖에 없어요.
이처럼 락(樂)과
고(苦)가 되풀이
되는 것을
윤회 라고 합니다.
두 가지가
되풀이 되는 가운데
즐거움을 추구 하니까
고가 필연적 으로
따라오게 돼요.
그러니 고만
괴로움인 것이 아니라
락의 본질도
괴로움 입니다.
이걸 꿰뚫어 알아야
사성제(四聖諦)의
첫째 내용인
‘일체는 고다’는
진리를 증득(證得)
할 수 있습니다.
고락 중에서
고를 아는 게 아니라
락이 곧
고임을 알아야 ‘고 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 예요.
그런데 우리는
이게 고 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지금도 그 락에 매달려서
고의 과보를 계속 받습니다.
윤회 에서 벗어 나지
못하는 셈 이죠.
이 처럼 고와 락이
반복 되는
윤회의 뿌리는
바로 욕망 입니다.
욕망에 끌려 가지도 않고
거부 하지도 않고,
그러므로 욕망을 욕망 으로
다만 알아 차린다면
그게 바로 욕망으로 부터
자유로워 지는 것 입니다.
그러면 고도 락도
발생 하지 않아요.
고요 적정 합니다.
이것이 열반이고
해탈 입니다.
이런 관점 에서
우리 불교인들이
좀 더 수행하는 자세를
가지면 좋겠습니다.
전통적인 신앙을
버리라는 게 아니라,
전통적인 신앙을
갖고 있다고 하더 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더 비중을 두고
넓혀 나가자는
뜻 이에요.
담마,
즉 진리를 탐구 하는
자세를 통해
어떤 상황에 처하든
고뇌 없이
살아가는 삶 으로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미움과 원망이 생기는 이유
그런데 우리는 이런 수행을
안 하니까 자기를 낳아준
부모를 원망 하고,
자기가 낳아서 기른 자식을
원망 하고,
자기와 같이 사는
아내나 남편을
원망 합니다.
이건 좀 모순 아닐까요?
길 가는 사람은
미워 하거나
원망 하지 않으면서
날 낳아준 부모는
원망 하고,
이 세상 사람들 중에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골라서
선택한 게
아내와 남편 인데
정작 그 사람은
미워 하고 원망 하면서
길 가는 사람은
미워 하거나
원망 하지 않아요.
우리는 왜 이런
모순을 일으킬까요?
바로 욕망 때문 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하기 때문 이에요.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 지면
좋은 것인 줄 알고,
그게 안 되면 원망 합니다.
부모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만큼은
안 해 주는 거 예요.
자식이 문제가 있는 아니라,
내가 원하는 정도의
자식이 안 돼 주는 거 예요.
아내나 남편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정도의
사람이 안 돼
주는 거 예요.
여기에서 미움과 원망이
생겨 납니다.
그렇다면 왜
길 가는 사람은 미워
하지 않을까요?
그 사람 에게는
내가 원하는 게
없기 때문 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과 서로 상처 주는
삶을 살아 갑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는 것은
어리석어요.
여러분이 담마를
터득 하고 불법의
진실을 발견하게 되면
우선 내가 행복 하고,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게 됩니다.
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재 발견 해서
사람들에게 알리면
우리는 종교를 한 차원
넘어서서
인간을 행복 하게 하고,
속박 에서 해방 시키고,
세계에 불법을
다시 재현 할 수
있을 겁니다.
국회에 계시는
여러분이 이런 좋은
법을 만난 것을
기회로 삼아
수행정진에 더욱
매진해 주시길
바랍니다.
오늘 초대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 법륜스님 -
이 법문은 2022. 12. 7.
국회 내
불자 국회의원들 모임인
정각회 초청 강연 에서
설 하신 법문 입니다.
법문이 너무 좋아서
발췌 해 올려 드립니다.
첫댓글 좋은 법문 감사합니다
참 좋은 법문 올려줘 감사해요 우리가 공부하는 생사해탈 이군요, 열심히 공부해서 생사해탈 합시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