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러시아-CIS 학과가 매월 발간하는 '러시아CIS 토크' (Russia-CIS Talk)는 2024년 제 8호(Vol. 08, 2024년 8월 1일자, https://ruscis.hufs.ac.kr)에서 우리에게는 중요한 지정학적, 지경학적 공간인 러시아 극동지역의 역할 변화를 다뤘다. 문승원씨(석사과정, 러시아CIS개발협력 전공)가 쓴 '대러 제재의 역설:러-중 갈등의 진앙지에서 경협 전초기지로 변모하는 극동'이다. 소개한다/편집자
**본 칼럼은 저자 개인의 의견이며, 학과와 바이러시아(www.buyruaaia21.com)의 공식 견해와는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
◇러시아 극동의 쇠락과 동요
러시아의 동쪽 끝, 극동은 크램린의 아킬레스건이다. 극동은 자원의 보고이자 아시아로 향하는 전략적 관문이지만, 인프라 부족과 빈약한 재정 투입, 투자 유치 등의 어려움으로 경제가 만성적으로 취약하다. 이에 따라 2020년 하바로프스크와 2021년 블라디보스토크 등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2002년부터 2022년까지 극동연방관구에서 인구가 10% 감소한 것은 이 지역의 경제 환경이 얼마나 열악한지를 보여준다.
경제적 불안정이 계속되면 민심의 폭발로 인해 푸틴 대통령의 국정 운영뿐 아니라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 수행에도 지장을 초래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러시아는 경제 문제 해결과 전쟁 재원 조달을 위해 중국과의 협력을 절실히 필요로 하게 되었다. 중국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한국과 서방 국가 기업들의 철수를 기회로 경제력을 확대하고 태평양 진출을 위한 출구를 확보했다.
◇극동에서 부상하는 중국
1860년 북경조약 이전까지 극동의 연해(沿海)지역은 중국 영토였다. 그래서 러시아는 중국의 고토(故土) 회복의 야망을 경계했고, 극동에서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해 왔다. 한족(漢族)들의 경제활동을 제한하는 법을 제정한 것도 그 일환이다.
2021년까지 극동에서 러시아는 한국, 중국, 일본과의 교역량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고, 동아시아 국가들과 균형적인 협력을 모색해 왔다. 그러나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는 장기적인 경제 안보를 고려할 여유가 없어졌다. 전쟁 직후 서방 측이 가한 전방위적 제재는 러시아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푸틴 대통령은 서방이 러시아산 원유 구매 가격 상한제를 적용하면, 공급을 중단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도 중국과의 석유 거래량을 늘리는 위험 회피 정책을 펼쳤다. 러시아 에너지부에 따르면 2023년 아시아-태평양 지역(APR) 국가들에게 1억 9,300만 톤의 석유가 공급되어 러시아 전체 석유 수출의 82%를 차지했으며, 극동의 코즈미노 항구에서 중국으로 향하는 원유는 서방의 가격 상한선을 초과했다. 서방의 제재로 기존 에너지 거래 경로가 차단되자, 러시아는 극동에서 중국과의 거래를 늘려 경제적 안전성을 확보하려 했다.
◇고강도 제재에 맞선 러시아의 손실 회피 전략
러시아의 에너지 산업은 제재로 인한 손실을 줄이기 위해 구조적 변화를 단행했다. 그 기점(起點)은 2014년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병합과 그에 따른 서방의 대러 제재 도입 전후다.
러시아 정부는 2013년 후반 국영 에너지 기업 가스프롬 외의 기업들에게도 액화천연가스(LNG)를 수출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2014년부터는 중대형 LNG 생산 장비의 국산화와 수입품 세금 감면 등의 대응책을 도입했다. 또한 '광물 추출세'(MRET)의 과세 표준을 추출량으로 설정해 기업들이 수출량 증대에 따른 세금 부담 없이 우호 국가로 수출 방향을 전환할 수 있도록 했다.
2014년 크림반도 합병 이후, 서방의 표적형 제재는 러시아가 제재에 대한 내성을 키울 수 있는 자구책을 마련하도록 해주었다. 하지만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지옥 같은 제재'는 그 강도가 훨씬 높아, 러시아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금융, 에너지, 무역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국과의 전략적 연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 결과, 2023년 러시아와 중국 간의 교역액은 전년 대비 23% 증가해 2,401억 달러에 달했다. 러시아는 서방 시장에서의 경제적 이익 극대화보다는 제재로 인한 손실을 만회하는 데 집중해 왔다. 현재 이익이 서유럽과의 거래에서 얻는 이익만큼 크지 않더라도 실제 체감하는 경제 이익은 더 클 수 있다. 따라서 대러 제재의 결과를 평가할 때 경제적 절대값만을 비교하는 것은 잘못된 접근이다.
◇러시아의 중국 이탈 방지책
러시아는 자국의 앞마당인 중앙아시아 뿐만 아니라 본토인 극동에서도 중국의 적극적인 진출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생존을 위해 중국의 경제력 확대를 견제하지 않겠다는 크램린의 의중을 반영한다.
특히 2023년 러시아는 중국에 연해주의 항구 사용권을 넘기면서까지 물류비를 절감할 수 있게 해주었다. 연해주가 1960년대 중-소 국경분쟁의 중심이었던 민감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중국에 항구 사용권을 넘겨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 중국이 러시아의 특수 군사작전에 대해 중립을 포기하거나 경제협력을 중단할 가능성은 작다. 그럼에도 러시아는 중국의 이탈을 막기 위해 에너지 가격 할인, 기반시설 현대화, 정책적 규제 완화, 항구 사용권 제공 등의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있다.
서방의 고강도 대러 제재는 러시아가 중국을 대체 불가한 전략적 동반자로 인식하게 만들고 있다. 물론, 러시아 지도부도 극동 경제가 중국에 종속될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지만, 러시아는 경제적 불안을 해소하고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이러한 조치를 단행하는 상황이다.
◇급변하는 극동, 우리의 대응은?
러시아의 대중 경제협력 확대는 한국의 경제적 이익 축소와 안보 위협을 의미한다. 중국은 한국과 일본 기업이 떠난 공백을 메우며 일대일로(一帶一路) 프로젝트를 통해 영향력을 높이고 있다.
더 나아가, 러시아 극동의 주요 시설이 한-미-일 연대에 대항하는 군사 목적으로 사용될 가능성도 있다. 중국과 러시아가 태평양에서 정기적으로 해상연합훈련을 시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가능성은 현실로 다가올 확률이 더욱 커지고 있다. 중국의 러시아 시장 공략과 전략적 의도를 계속 주시해야 하는 이유다.
북극 항로의 관문인 극동에서 한국과 일본의 입지가 약화될 경우, 서방의 영향력 또한 축소될 가능성이 크다. 서방의 강도 높은 제재는 러시아와 특정 우호국 간의 협력을 촉진하여 한국의 국익과 안보를 위협할 수 있다. 한국 정부는 대러 독자제재에 신중해야 하며 국익 확보를 위해 너무 앞서 나갈 필요는 없다. 일본도 사할린 가스전(사할린 2 프로젝트)을 포기하지 않았다.
러시아 극동은 한국에게 중요한 지정학적, 지경학적 공간이다. 비록 한-러 관계가 어렵더라도 극동에 관심을 꾸준히 기울여 현상을 유지해야 한다. 어려울수록 전략적 요충지를 지키며 향후 상황이 개선될 때를 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은 민간 협력, 경제개발 경험 공유 사업(KSP), 유통망 구축, 인도주의적 활동 등을 통해 극동시장 재진입의 기반을 다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