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이능간(李凌幹)은 고려조의 문신으로 호는 송헌이다. 전북 남원에서 출생한 그는 충숙왕 7년 반전별감으로 원나라에서 상왕(충선왕)을 호종했다. 상왕이 죽자 재궁(梓宮)을 모시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그 뒤에도 몇 차례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충혜왕 때 정승에 오른다. 조적의 난 때 충혜왕을 시종한 공으로 영천부원군에 봉해짐으로써 영천을 본관으로 삼았다. 시조의 손자 이탕휴는 고려조에 한림학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역성혁명이 일어나자 자신이 살던 곳을 스스로 방화하고 자손을 고향으로 보낸다. 그는 자손들에게 과거를 보지 말 것을 당부했다. 관과 옷을 찢고 두문동에 들어가 일생을 마쳤다. 이타휴의 이분도 벼슬을 하지 않았다. 현금(玄琴)을 즐겨 “천묵묵지묵묵아역묵묵"이란 곡을 지었으며 이 때문에 스스로 호를 묵옹이라 했다. 전북 남원군 이백면 초촌리. 주천면 용담리, 전남 구례군 마산면 사도리가 집성촌이다. 전북 임실군 지사면 계동에 시조 이능간의 묘가 있다. 한편 영천이씨(寧川李氏)는 한글 본관은 같으나 한문 본관이 다른 또 다른 영천이씨(永川李氏)가 있다. 전혀 뿌리가 다른 성씨이지만 한글 본관이 같아 구분하기가 여간 쉽지 않다. 지난 1985년 경제기획원의 성씨본관별 인구조사에서는 각각 구분하지 않고 조사 발표했다. 당시 인구는 95,473명으로 나타났다. 2000년 현재의 인구조사에서는 두 성을 각각 나누어 발표했다. ▲영천이씨(寧川李氏)…94,491명, ▲영천이씨(永川李氏)…22,479명으로 두 성씨 간에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영천이씨(寧川李氏)는 대부분 전북 일원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반면 영천이씨(永川李氏)는 전국에 걸쳐 퍼져 있는데도 오히려 인구가 적어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