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831. 묵상글 들 (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 사랑도 잠드는 그런 밤은 아니올시다. 등 )
----------------------------------------------------
210831.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랑도 잠드는 그런 밤은 아니올시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바오로 사도는 어제도 희망이 없는 다른 사람들처럼 되지 말라고 하더니
오늘도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으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주님께서 '이방인들은 이렇게 얘기한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얘기한다'는 식으로 말씀하신 것과 같은 뉘앙스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을 깔보는 것은 아니지요.
다른 사람들보다 나아야 한다는 자극이요 도전이요 격려지요.
자꾸 제 얘기하는 것 같아서 얘기하는 것이 그리 흔쾌하지는 않지만
옛날의 저는 저 자신에게도 그리고 형제들에게도 다른 사람들하고
똑같을 거면 뭣하러 수도원에 들어왔냐는 태도를 강하게 견지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컸지요.
그러다가 이런 생각을 버리게 되었는데 이것도 하나의 욕심이고,
욕심 중에서도 고차원적인 욕심이며 교만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인이 되려고 하기보다는 성인들이 살았던 사랑을 살자고,
성인이 목표인 삶이 아니라 하느님이 목표인 삶을 살자고
목표 수정을 했는데 이런 좋은 이유 말고 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곧 특별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고 평범한 사람이 되자는 것인데
향상向上의 의지를 포기한 평범이요,
다분히 편안함에 안주하는 평범이었지요.
어제 아침에도 혼자 미사를 드리면서 저를 성찰하고 반성하는데
요즘 들어 자주 저를 내어주기보다 저의 만족을 먼저 생각하는
그런 삶을 많이 살고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문제를 만들거나 일을 벌이려 하지 않고,
성가신 일이나 상황을 피하려고 하는 것 등등.
이렇게 만족과 편안함에 안주하는 평범을 살기 시작하면
부지런히 움직이던 제가 활동을 멈추고 앉게 되고,
앉아 있던 저는 소파에 비스듬이 기대게 되고,
기대어 앉아 있던 저는 완전히 자리를 깔고 누울 것이고,
자리를 깔고 누운 저는 그만 잠에 빠지게 되겠지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밤에 나쁜 짓을 하거나
쾌락에 빠져 지내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밤이란 나쁜 짓과 쾌락의 시간만이 아니라
밤은 잠에 취해 있는 시간이기도 하잖아요?
밤에 깨어 나쁜 짓 하기 보다 잠자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잠을 잔다는 것은 오늘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듯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랑도 잠들고 좋은 일도 멈춘 상태지요.
죄 짓지 않기 위해 잠이나 자는 그런 소극적인 태도로는
사랑을 이룰 수 없고 무엇보다 하느님께 갈 수 없습니다.
육신의 잠은 좋은 것일 수 있지만, 영적인 잠,
그러니까 영이 잠들고 사랑이 잠든 그런 잠은 나쁩니다.
그러므로 오늘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우리는
썩어빠진 정신은 버리고 맑은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정신을 차리는 것은 오늘 복음의 더러운 영은 몰아내고
어제 복음의 주님처럼 영을 받는 것이니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대낮의 자녀로 살아야겠습니다.
----------------------------------------------------
210831.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 하느님 능력의 소유자
“등불 하나가 천년 어둠을 물리친다.” 는 옛 말이 있습니다. 빛을 가지고 있으면 어둠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빛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어둠에 대처할 수 없습니다. 물론 빛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 악의 세력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권능으로 물리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지녔으면서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이고 그분의 모든 것은 우리 안에 숨어있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이 숨 쉬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생명의 숨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빛을 선택하면 어둠이 물러나고 어둠을 선택하면 빛이 물러납니다. 그러나 사실은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빛은 어둠이 짙을수록 더 큰 빛을 발하게 됩니다. 더러운 영은 예수님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며 대항을 시도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주신 권위를 가지고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루카4,34. 35). 하시며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 내셨습니다. 그리고 분명 그 능력을 사도들을 비롯한 우리에게도 주셨습니다. 루카10장 17이하에 보면 제자들이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주신 능력을 인정하고 잘 관리하고 성장시켜야 합니다. 이미 주어졌는데도 알지 못하는 것은 내가 깨어있지 못한 탓입니다. 참 신앙인은 예수님의 권위에 힘입어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권위를 전합니다.
오늘 날의 시대는 너무나 시끄럽고 번잡하고 자극적입니다. 마귀들이 더는 일할 데가 없을 정도로 모든 삶의 자리를 점령했다고도 합니다. 유혹이 많고 번잡한 시대에 하느님의 권능을 잘 사용하기 위해서 먼저 침묵과 고독으로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세상이 시끄러울수록 침묵 속에서 절망과 혼란을 이겨내는 능력을 드러내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하느님께 복종하고 악마에게 대항 하십시오. 그러면 악마가 여러분에게서 달아날 것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야고4,7-8). 하고 말하였습니다. 알게 모르게 다가오는 어둠의 세력, 곧 하느님보다는 인간의 욕심을 부추기는 마음에서 자유롭기를 희망합니다. 세상에서 자유로운 힘이 바로 신앙에서 나옵니다.
20세기의 영성가 토마스 머튼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자신을 채울수록 텅 비어가니. 많은 것을 움켜쥐면서 나는 오히려 모든 것을 잃었다. 쾌락과 즐거움에 사로잡히면서 나는 오히려 실망과 분노와 두려움을 느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유혹은 달콤하지만 세상 것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결국 그 끝은 파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육의 관심사는 하느님을 적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로마,6-8). 우리가 하느님의 숨을 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고 결코 인간적인 욕심이나 인정에 매달리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210831.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오늘 <복음>은 “희년선포”에 이어, 메시아로서의 당신 “권위”를 드러내십니다. 곧 가르침과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의 치유를 통해서 ‘메시아의 권위’를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그들이 놀란 것은 구마치유가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곧 그분의 말씀의 권위였습니다.
마디 권위 있는 한 마디 “말씀”, 곧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루카 4,35)라는 말씀에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 내동댕이쳤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습니다.”(루카 4,35).
여기서 우리는 “한가운데”라는 부사는 우리를 하느님의 현존에로 데려다 줍니다. 이사야와 즈카리아 예언자는 말합니다.
너희 한가운데 계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는 위대하시다.”(이사 22,6)
“정녕 이제 내가 가서, 너 한가운데 머무르리라.”(즈카 2,14)
이미, 예수님께서는 앞의 희년선포 장면의 마지막 구절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4,30) 하시며 당신의 현존을 그들 가운데 드러내셨습니다.
사실, 인간은 악마의 혀에 속아 범죄 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악의 지배 아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와를 속였던 악마의 그 혀 놀림을 중지시고, 그에게서 쫓아내십니다. 곧 당신의 현존에로 회복시키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첫 번째 기적인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치유는 악마의 지배로부터 인간에게 자유를 되찾아 주는 구원의 표징이 됩니다. 희년선포와 마찬가지로 원죄 이전의 에덴으로의 복귀를 드러내줍니다.
사실, 악마를 쫓아내는 일은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히브리 구마자들도 그러한 일은 해 왔습니다. 사람들이 놀라워했던 것은 단지 악마를 쫓아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이 나가지 않는가?”
(루카 4,36)
그렇습니다. 그들이 몹시 놀랐던 것은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곧 말씀이 이루어지는 권능과 힘을 지니고 있었기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권위”(exusia)라는 단어는 ‘힘’이란 뜻으로, 발설된 말씀이 말씀한대로 이루어지는 힘입니다. 곧 예수님의 말씀에는 하느님의 힘이 실려 있어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말씀”이 예수님의 신적 권능, 곧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른 구마자들과는 달리,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면서 당신 스스로의 “말씀”으로 명령하실 뿐, 다른 누구의 이름을 빌어 쫓아내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이 바로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안에서 우리를 교란시키고 분열시키는 온갖 거짓의 혀 놀림을 멈추고, 어둠을 몰아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을 다름 아닌, 우리 주님의 “권위 있는 말씀”의 힘으로 되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루카 4,34)
주님!
진리를 알게 하소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는 자 되게 하소서.
진리를 따르며 받드는 제자 되게 하소서.
거룩함 안에서 제가 새로 나게 하소서.
제가 관계 맺는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이 빛나게 하소서!
주님이신 당신을 믿습니다. 아멘.
----------------------------------------------------
210831.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 성령을 받으신 예수, 악령을 쫓아내시다
나자렛 선언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실 수 있으셨던 비결은 성령을 받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일찍이 이사야가 예언자적인 상상력으로 선명하게 내다본대로, 성령께서는 가난한 이들과 잡혀간 이들과 눈먼 이들과 억눌린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심으로써 예수님으로 하여금 메시아로서의 역할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복음화의 공리입니다. 우리가 메시아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회복하자고 해도 이 공리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야 하고,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이 첫째 인간 존엄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고 둘째 그들도 더 가난하고 더 억눌린 이들을 돕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편에 서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메시아로서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마귀가 가만히 보고 있을 리 없었습니다. 그래서 반대자들을 부추겨서 그분의 복음 선포를 가로막는 적대자로 나서게 했고, 망설이는 군중의 마음을 찢어놓아서 무관심한 제3자로 구경하게 만들었습니다. 심지어는 심신이 허약한 사람에게로 들어가서 대놓고 방해를 일삼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자신이 마귀들렸음을 노골적으로 정체를 노출시킨 경우에라면 그 마귀를 쫓아내는 일쯤은 일도 아니었습니다. 아주 간단히,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는 명령 한 마디면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상대는 정체를 감추고 사람들을 물리적으로 갈라놓고 갈라진 사람들의 마음을 정신적으로 분열시키는 책동입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리사이 유다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느님을 믿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자신들보다 약하고 가난한 이들을 착취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서 더 약해지고 더 가난해지면 하느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 벌이라고 진단하면서 죄인으로 낙인을 찍었습니다. 사회적으로 힘 없고 경제적으로 가난하며 정신적으로 낙인찍여 소외되면 사람의 정신이 분열되어 마귀에 걸리기에 딱 알맞은 심신나약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에 마귀 들리고 몹쓸 병에 걸린 사람들이 그렇게도 많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이와 비슷한 풍조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가장 심각하고 뚜렷한 증상은 하느님의 존재와 역할을 무시하고 우습게 보는 풍조입니다. 종교가 보전하고자 하는 신성, 즉 하느님의 현존을 우스갯거리로 만들어 풍자하고 거룩함의 가치를 소홀히 하는 풍조가 그 다음입니다. 악령을 몰아내야 합니다.
----------------------------------------------------
210831.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조명언 마태오 신부님.
부부싸움을 자주 하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싸우는 것을 보고 자란 대학생 딸은 어떻게 하면 부모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까를 늘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어머니의 휴대전화를 보게 되었는데, 통화목록에 ‘ㅅㅂㄴ’이 있습니다. 좋지 않은 단어가 생각나는 약자였습니다. 그래서 이 약자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궁금해서 어머니에게 “엄마, ㅅㅂㄴ이 누구야?”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당연하다는 듯이 “응, 네 아빠지. 누구겠니?”라고 답합니다.
딸은 엄마 아빠가 자주 부부싸움은 하지만, 이렇게 욕을 할 정도로 사이가 안 좋을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아니, 아빠를 어떻게 ㅅㅂㄴ(시발놈)이라고 할 수 있어?”라면서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설마, 네 아빠를 시발놈이라고 하겠니? ㅅㅂㄴ은 서방님을 말하는 거야.”
약자의 정확한 뜻을 알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냥 평소에 봤던 글자에 맞춰서 추측할 뿐이지요. 그러다 보니 어머니에 대한 오해를 딸이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추측도 참 많았습니다. 특히 사람들이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모습을 예수님을 통해서 보게 되면서 여러 가지 추측을 합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예수님에 대한 신원을 알게 되는 것은 참으로 힘든 것 같습니다. 각종 표징을 보여줘도 또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전해줘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큰 소리를 지릅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 마귀의 말은 참일까요? 거짓일까요? 당연히 참입니다. 마귀들도 인정하는 예수님의 신원을 왜 사람들은 믿지 못했을까요?
마귀가 말했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의 모습이 어떠했을까요? 정상인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묘지 사이를 다니는 등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자신의 몸을 학대하는 것처럼 내동댕이쳐지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을 한 사람이 예수님의 신원을 정확하게 이야기한들 누가 믿겠습니까? 만약 당시에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던 바리사이나 율법학자가 말을 했다면 분명히 다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의 말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혼란을 줘서는 안 되기에 함구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는 방법은 주님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고,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숨어있던 주님의 신비가 이 세상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
사랑은 자신과 삶 그리고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도와준다(프랭크 오스타세).
--------------------
주님께 나아가기 위한 실천
어느 헬스트레이너가 몸매 관리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며 그 방법을 이렇게 말해 줍니다.
“매일 1시간씩 뛰거나 체육관에서 운동하면 됩니다. 그리고 이를 6개월에서 1년 동안 지속하십시오.”
이대로 한다면 어떨까요? 분명 멋진 몸매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모두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왜 멋진 몸을 만들기 힘들까요?
알지만 그렇게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방법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주님 뜻에 맞게 살면 됩니다. 하지만 실천하지 못하기에 주님 앞에 제대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도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주님께 나아가기 위한 어떤 실천을 하고 계십니까?
----------------------------------------------------
210831.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뉴저지에 있는 가정을 방문했습니다. 평화책꽃이라는 지면에서 책을 소개해 주시는 선생님의 집입니다. 작년 7월에 가기로 했는데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1년을 기다렸습니다. 정원에는 각종 허브가 있었습니다. 허브의 이름과 허브의 효능을 팻말로 적어 놓았습니다. ‘어성초, 신선초, 돌나물’도 보았습니다. 풀들의 효능은 항생, 항균의 기능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잎을 말려서 차로 만들었고, 나누어 주셨습니다. 3년 동안 요리를 배워서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요리를 배우니 손님이 오는 것이 걱정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손자들이 와도 걱정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니 손자들도 좋아했다고 합니다. 정원에는 허브의 향이 있었습니다. 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있었습니다. 지하에는 작은 공연장이 있었습니다. 음식을 먹은 후에 아름다운 음악을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남편과 함께 음악 봉사를 다닌다고 하였습니다. 선생님의 글은 아름다운 마음과 나눔에서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주변을 보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2달 동안 신문사에 머물면서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 주셨던 신부님이 있습니다. 저보다 24살이 많으신 신부님입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신부님을 통해서 실감하였습니다. 아픈 사람들을 도와주려는 열정은 나이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여러 마을을 다니면서 복음을 선포하셨던 것처럼 신부님께서는 뉴욕에 머물면서 보스톤에도 가시고, 워싱턴 DC에도 가셨습니다. 지금은 LA로 가셔서 아픈 사람들을 도와주십니다. 신부님의 따뜻한 마음과 아픈 사람을 도와주려는 열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신부님의 도움을 받고 기쁜 마음으로 돌아가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한국의 안동 교구의 성당이 화재로 전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미국의 교우분이 기꺼이 성당을 지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1년이 지났는데 한국으로 보낸 돈만큼 다시 생겼다고 합니다. 투자한 곳에서 딱 그만큼만 수익이 났다고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여러분이 이미 하고 있는 그대로, 서로 격려하고 저마다 남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허브로 차를 만들어 나누어 주시는 분, 음악으로 봉사하시는 분, 맛있는 음식으로 이웃을 기쁘게 하시는 분은 이미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80이 넘은 연세에도 지치지 않으시고 아픈 사람들을 돌보시는 노 사제는 이미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멀리 한국에 들려온 안타까운 소식에 기꺼이 도움을 주신 분도 이미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재물, 능력, 권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이웃을 위한 연민과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웃을 위해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희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8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권위를 따라서 이미 하고 있는 그대로 서로 격려하고 남이 성장 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좋겠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
210831.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권위 있는 삶, 깨어 있는 삶
- 악마들을 퇴치 합시다 -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시편27,1)
화답송 시편이 우리를 용기백배하게 합니다. “악마는 존재한다”, 우리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책명도 생각납니다. 일부 내용을 소개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군가는 ‘교황이 21세기에 악마에 대해 말하다니 옛날 사람이군요’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강조합니다. 악마는 존재합니다. 21세기에도 악마는 존재합니다. 악마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유혹합니다. 악마는 간교합니다. 악마와는 대화할 수 없습니다.
악마 앞에서는 단호해야 합니다. 모든 악마의 유혹은 ‘그래, 뭐 괜찮아’라고 말할 때 찾아 옵니다. 악마가 다가올 때 이렇게 말하면 큰 도움이 됩니다. ‘나는 너와 말하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만 듣는다’고 하십시오.”
정말 도움이 되는 현실적인 지혜로운 처방입니다. 작금의 현실을 보면 더러운 영들인 악마가 활개치는 세상 같습니다. 악마의 일은 분열시키는 일이요 주님이 하시는 일은 일치의 통합입니다. 어느 언론인의 현실 진단입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19년 발간한 ‘사회통합 실태 진단 및 대응 방안 연구’ 보고서를 보면, 국민이 인식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사회통합 정도는 10점 만점에 4.18점에서 2017년에 잠깐 4.50점으로 올라갔으나 2018년에 다시 4.17점으로 다시 떨어진 뒤 계속 그 수준을 맴돌고 있다.
한국사회는 지금 온갖 갈등의 화염이 들끓고 있는 무간지옥無間地獄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념갈등, 노사갈등, 빈부갈등 등 고전적인 갈등에다 정규직-비정규적인 갈등, 세대 갈등, 젠더갈등, 세대 안의 불평등 갈등등 갈등의 종류도 훨씬 늘어나고 심각해졌다. 갈등은 우리 사회의 통합을 저해하는 원인이자 그 결과로 작용해 점점 더 사회를 깊은 나락으로 빠트리고 있다.”
죄악이 만연된, 악마가 활개치고 있는 세상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예나 이제나 변함없는 정도나 양상의 차이일뿐 바로 인간사회의 부정적 현실입니다. 그러나 조금도 비관할 것은 없습니다. 심기일전心機一轉 초발심初發心의 자세로 통합의 길, 일치의 길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개인이든 사회든 삶의 목표를, 삶의 방향을, 삶의 중심을, 삶의 의미를 잃었을 때 어김없이 그 자리에는 악마들이 자리잡고 분열의 갈등을 일으키기 마련입니다.
사회통합지수 10점 만점에 그 반도 못되는 4.17점을 맴돌고 있다 했습니다. 그렇다면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통합지수는, 내 내적통합지수는 몇이나 될까요? 예수님이라면 10점 만점에 10점, 성인들이라면 8점이상이요, 오늘 복음의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은 0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엊그제 29일 불교 조계종의 대표적인 선사禪師이자 명예원로의원인 고우古愚 큰 스님이 경북 문경 회양산 봉암사에서 입적하였습니다.
큰 스님하니 얼마전 영화 대사중 스치듯 지난 말씀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센 사람이 되지 말고 큰 사람이 되라.” 산도 높은 산이 아니라 큰 산이, 깊은 산이 좋은 산이라 합니다. 참으로 내적통합을 이룬 성인이 큰 사람, 깊은 사람입니다. 지금도 생생한 불암산 닮기를 소망하며 쓴 짧은 시가 생각납니다.
-“아
크다
깊다
고요하다
저녁 불암산!”-
바로 고우 큰 스님도 그런 분이었습니다. 고우 스님은 고승들이 남기는 임종계 대신 “누가 물으면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간다’고 하라.”고 했다 하니 참 멋진 통합을 이룬 수수한 선승임을 깨닫습니다.
요즘 뇌과학과 심리학의 화두는 공감이라 합니다. ‘감정의 꽃’인 공감은 영어(empathy)로 ‘너의 마음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너와 내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네 처지가 되어 보는 것이 공감입니다. 참으로 내적일치의 통합적 인물이 그대로 ‘공감의 사람’입니다.
바로 내적일치의 통합적 인물의 최고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신 예수님입니다. 이런 삶에서 저절로 흘러 나오는 참 권위입니다. 권위주의는 배격해야 되겠지만 보고 배울 참 권위는 필수입니다. 혼돈과 무질서, 분열과 갈등의 현실은 바로 권위 부재의 현실을 반영합니다. 권위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참 권위는 밖에서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안의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옵니다. 이런 참 권위에 대한 응답이 절대적 신뢰와 사랑, 순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합니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권위 있는 예수님이, 예수님의 권위있는 말씀이 악마에 대한 유일한 처방임을 깨닫습니다. 권위 있는, 빛이신 예수님 앞에 더러운 영은 더 이상 숨을 수 없자 예수님을 고백하며 자신을 폭로합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악마와 대화하지 말라 했습니다. 하와는 악마와 대화하다 유혹에 빠졌습니다. 예수님 역시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단호히 대응하여 더러운 영을 쫓아 냅니다. 더러운 영은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지체없이 그에게서 나가니 완전 치유의 구원입니다. 그 무슨 악마도 권위와 힘을 지니신, 권위 있는 말씀을 지니신 예수님을 대적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악마에 대한 답은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유비무환이 지혜입니다. 처방의 치유보다는 예방이 백배 낫습니다. 바로 권위 있는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인 예수님과의 일치가 깊어질수록 건강한 내적통합의 일치의 삶이요 우리 또한 존엄한 품위의 삶에 권위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주님은 바오로 사도를 통해 우리의 주님과 일치된 복된 신원을 환기喚起시키며 깨어 있는 삶을 살도록 촉구합니다. 깨어 있는 삶과 권위 있는 삶은 함께 갑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같은 ‘깨’자 돌림입니다. 깨어 있을 때, 깨끗한 마음이요, 깨달음의 은총도 뒤를 잇습니다. 깨어 있음은 주님의 빛입니다. 깨어 있을 때 치유의 구원입니다. 깨어 있을 때 악마들은 침투하지 못하고 내재해 있던 악마들도 저절로 퇴치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의 일치가 우리를 깨어 있게 합니다. 우리 역시 주님을 닮아 권위 있는 삶을 살게 합니다. 혼자의 구원이 아니라 더불어의 구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살아 있든지 죽어 있든지 당신과 함께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셔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미 하고 있는 그대로, 서로 격려하고 저마다 남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 줘야 합니다.
이렇게 더불어 내적일치의 공동체를 이루어 빛의 자녀로, 낮의 자녀로 살아 갈 때 더러운 영들은 저절로 축출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안에 잠재해 있는 온갖 더러운 영들을 몰아내시고 우리 모두 권위 있는 삶, 깨어 있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 보는 것이라네.”(시편27,4). 아멘.
----------------------------------------------------
210831.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8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빛으로 이끄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루카 4,32)
나자렛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사람들이 놀랍니다. 당시 율법을 풀이해 주던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권위는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온 존재의 빛을 말씀에 실어 전하시기 때문에 감지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배움이 적고 덜 예민하고 그저 순히 사는 이라도 위선이나 허세, 자기 자랑, 오만은 대놓고 표현만 안 할 뿐, 기가 막히게 알아채기 마련이니까요.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루카 4,34)
나자렛에서는 육적인 교만으로 무지막지하게 변해버린 사람들이 예수님을 밀어내었다면, 오늘 회당 안에 있던 한 마귀 들린 이가 예수님을 밀어내며 외칩니다. 마귀도 안식일 율법을 준수하고자, 그리고 말씀을 듣기 위해, 또 공동체와 함께하기 위해 회당 예식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지요. 이 더러운 영은 열심하고 하느님을 잘 안다고 여기는 영적 교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자렛에서도 이곳 카파르나움에서도 마찬가지로, 예수님 말씀을 듣고 보통의 군중은 놀라움을 표현하며 경탄합니다. 놀라움은 인생에서 마주치게 되는 창조주의 온갖 섭리 앞에서 인간이 갖기 마련인 순수하고 겸허한 반응입니다. 반면 육적으로 교만했던 사람이나 더러운 영은 당신과 우리가 무슨 상관이냐며 예수님과 자기들 사이의 단절을 선언합니다. 상관 없다는 말은 건드리지 말라는 뜻도 될 겁니다.
주님의 영 안에 머무르는 이에게는 놀라움이 자연스레 경탄과 경외로 이어지고 감사와 믿음, 의탁으로 열매를 맺지요. 반면 더러운 영은 경악과 경계, 거부로 더 소란스러워집니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에너지에 악은 더 산만하고 거칠고 시끄러워집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루카 4,35)
예수님께서 그 가련한 사람에게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영혼을 빛으로 끌어내시려 결심하신 이상, 이제 소외와 무관심과 적대감을 조장하는 악은 침묵하고 떠나가야 합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언젠가 닥칠 주님의 날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고 낮의 자녀입니다. ... 그러므로 ...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1테살 5,5-6)
주님의 날은 누구에게나 도둑처럼 갑자기 덮칠 것이지만, 깨어 있는 영혼은 언제라도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깨어 있는 이는 게으르고 나태하며 냉소적이고 공격적인 더러운 영에게 자신의 영혼을 내어주지도 넘기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형제이고 이웃이며 서로서로 긴밀히 상관이 있음을 아는 이는 연대성 안에 생생히 깨어 있습니다. 아무리 미소하고 작은 존재라도 그 안에서 창조주의 섭리를 발견해 놀랄 줄 아는 이는 경외하고 감사하면서 나날이 성장하지요.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그는 어둠에게 자신을 내어주지 않고 빛이신 분께 단단히 내린 뿌리를 거두지 않습니다.
"서로 격려하고 저마다 남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1테살 5,11)
사도는 깨어서 주님의 날을 맞이할 모든 신자들에게 함께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제시합니다. 심판이나 단죄가 아니라 격려로, 끌어내리고 무너뜨리는 질투가 아니라 신뢰와 기다림으로 서로를 성장시키는 지혜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빛 가운데 머물러 있기를 바라시기에 시시각각 엄습하는 더러운 악들에게 '조용히 하고 그에게서 나가라'고 엄히 명령하십니다. 그러니 삶의 그늘에서 실의와 좌절, 분노과 무관심의 유혹이 손짓을 해도 힘을 다해 말씀의 빛 안에 머무르시길 기원합니다.
그분께서 빛이시니 그분 안에 있는 이는 빛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말씀의 빛이 우리를 더욱 건강하고 밝고 맑은 영혼으로 성장시켜 줄 것이니, 서로 격려하며 함께 깨어 주님의 날을 기다립시다.
8월 한달도 말씀 안에서 수고하셨습니다. 말씀이 여러분을 맑고 깨어있게 하고 여러분을 성장시켜 주셨으리라 믿습니다.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210831.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루카4,32)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신 다음, 갈릴래아의 가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몹시 놀랍니다. 예수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권위'는 '사람들을 이끄는 힘'을 의미하는데,
'예수님의 권위'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권위입니다.
이 권위와 힘 앞에 더러운 영들이 복종합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더러운 영들이 내 주위를 맴돌면서 호시탐탐 나를 노리고 있기 때문에, 또한 내가 항상 간직하고 있어야 할 권위입니다.
예수님께서 간직하고 계셨고, 또 내가 간직해야 할 권위와 힘은 하느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재물이나 지식과 같은 세상 것으로부터 오지를 않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예수님의 권위는 성령 안에 머무는 사람들,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들, 말씀 안에 머무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나 자신의 모습을 먼저 성찰해 봅니다.
나는 얼마나 하느님의 사랑과 말씀 안에 머물러 있는가? 하루의 삶 속에서 이 시간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가?
8월의 마지막 날 복음묵상글을 준비하면서, 부족한 모습을 하느님 자비에 맡겨드리면서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다짐, 그래서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권위와 힘으로 말을 하고, 사목을 하고, 세상을 바라보아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주님의 날이 마치 밤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1테살5,2-5)
무더운 여름이 지나가고, 이제 가을입니다.
독서하기에도 좋고, 묵상하기에도 참 좋은 계절입니다.
8월의 마지막 날을 잘 정리하고,
기쁘게 새로운 '9월 순교자 성월'을 맞이합시다!
----------------------------------------------------
210831.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나자렛의 회당에서, 구원이 당신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선언하신 다음,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으로 내려가시어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치유 기적을 본 군중과 목격자들은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권위와 힘이 있다.’라며 몹시 놀랍니다. “이 권위는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도유되신 데 기인하고 성경 본문을 어떠한 인간적 전통에 의지하여 해설하지 않으시고, 하느님께 직접 말씀을 받아 가르치시는 데서 성립된 것입니다”(박영식, 『루카 복음 해설 2』, 112면). 여기서 예수님과 같은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은 우리 자신에 대하여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받은 세례성사에서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예식으로는 물을 붓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세례성사의 핵심은 ‘성령’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하는 말씀과 비둘기 모양의 성령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셨습니다(마태 3,16-17; 루카 3,21-22 참조).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에도 똑같이 성령께서 내려오시어 머무르십니다. 우리가 성령의 거처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머무르시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그 성령께서 내게서 떠나지 않으시기에 우리에게 인호가 생깁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머무르시는 성령께서는 무엇을 하실까요? 성령께서는 우리를 예수님께 인도하십니다. 예수님과 하나 되게 하시고, 예수님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아가게 하시고자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이렇게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랑의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길은 죽을 때까지 걸어야 하고, 죽어야 비로소 완성됩니다. 예수님의 ‘세례’와 ‘죽음’이 대비되듯이, 이 사랑의 길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그 사랑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완성하고자 끝까지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
210831.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정말 그 말씀은 신기하구나.
나자렛에서 설교하신 다음 예수님은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안식일에 가르치셨다. 새로운 창조는 옛 창조가 끝나는 때인 안식일에 시작되는 것을 보여주신다. 예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 주심으로 당신의 ‘말씀’에 ‘권위’가 있음을 나타내셨다. 마귀들이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34절) 말하지만, 예수께서는 조용히 하라고 꾸짖으신다. 그것은 마귀가 진실을 말해도 거기에 귀 기울이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더러운 마귀가 들린 사람을 치유해주신다. 그 마귀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즉시 알아본다. 예수께서 거기에 함께 계신다는 것을 견디지를 못한다. 예수께서 가지신 능력은 인간뿐 아니라 마귀의 힘을 능가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느님을 거역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을 멀리하려는 그 악의 세력은 하느님의 권능을 견디어낼 수 없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 앞에 마귀들도 예수님의 명령에 꼼짝 못 하고 떨어져 나갔다. 이것을 본 군중들은 그것을 새로운 가르침, 지금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새로운 가르침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놀란 것은 조용하고 간단한 말 한마디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다는 것이다. 여기에 그들이 생각하는 지도자들 즉 그들의 스승들과 다른 크나큰 차이가 있음을 보았고 놀랐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면에서도 새로운 권위 있는 가르침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예수님은 여기서 볼 때,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보내신 당신의 아들임을 이러한 권능을 보여주심으로서 계시하신다. 그러나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마귀들이 그분을 알아보는데도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분을 올바로 믿고 따르고 있는가? 주님의 권능을 참으로 믿고 우리의 구세주로 고백하고 있는가? 성찰하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신앙인이면서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과 같이 되지 않도록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의 은총은 항상 우리에게 베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보는 것은 우리의 깨어있는 신앙의 눈이다.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느끼기 위해서는 우리가 항상 하느님 안에 있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즉 깨어있는 삶이 될 때 언제나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삶이 될 때 우리는 하느님 안에 한 형제자매인 우리의 이웃들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자세로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실천하면서, 또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장이 되고, 우리 자신도 이웃 안에서 주님을 알아 뵙고 사랑해 드릴 수 있는 우리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삶으로 우리의 말과 행동이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참된 가르침이 되고 권위 있는 말씀이 될 것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하느님 자녀의 삶이 아닐까?
----------------------------------------------------
210831.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루카 4, 34)
신앙의 기쁨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참기쁨이다.
예수님과
마주하는
은총의 기쁨을
우리가
누리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을
만나는 시간이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신
참된 권위이시며
참된 영광이시다.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의
현존이 바로
살아있는
권위이다.
예수님의
인격과
권위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
사람이
되어오신
예수님의
인격 안에
사람을
온전케 하는
권위가
들어있다.
복음은
예수님의
권위를
드러내고
권위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를
치유하신다.
마귀를 내쫓는
권위또한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은총이다.
우리를
속죄와
구속으로
이끄시는
권위이다.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가르치신다.
예수님의 권위는
하느님의 강력한
뜻이시다.
우리는
예수님의 권위에
속한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권위는 능력을
드러내고 능력은
우리를 진정한
삶으로 이끄신다.
회개와 치유로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권위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8월의 끝날이다.
우리의
무능함을
절실히 깨닫는
은총의 8월이었다.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신앙의
시간이다.
----------------------------------------------------
210831.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의 힘>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루카 4,31-32).”
여기서 ‘권위’ 라는 말은, ‘하느님의 힘’을 뜻합니다.
그래서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다.” 라는 말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하느님의 힘을 느꼈다.” 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카파르나움 사람들도 예수님이 나자렛 출신이며,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고 목수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는 말씀을 하시자 ‘몹시’ 놀랐습니다.
(이야기의 전체 내용을 보면,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놀랐다는 말만 있고,
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말은 없습니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나자렛 사람들보다는 예수님에 대한 편견이 적긴 했지만,
그 편견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닌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권위’를(하느님의 힘을) 느낀 이유는 단순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하느님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말로 복잡하게 설명할 이유가 없습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 앞에
‘율법학자들과 달리’ 라는 말이 있습니다(마르 1,22).
당시의 율법학자들은 사람들을 가르칠 때,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려고
옛날의 유명한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는 방식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는 말에는 힘이 없었습니다.
또 그들은 대부분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마태 23,3)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위선자들이 하는 말은,
듣는 사람들이 그가 위선자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힘을 잃어버립니다.
<말에 힘이 없는 경우들을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하느님 말씀을 전하지는 않고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경우.
그 경우에, 그 말에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2) 믿음도 없이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경우.
사도행전을 보면, 믿음도 없으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려고 시도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사도 19,13-14).
그때 그들은 마귀들로부터 심하게 역공을 당했습니다(사도 19,15-16).
믿음이 없으면 힘도 없습니다.
강론을 하거나 글을 쓰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3) 강론을 하거나 묵상 글을 쓸 때 남이 한 말을 인용하는 경우가 흔히 있는데,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려는 속셈으로 그렇게 하는 경우가 많고,
그것은 믿음이 없거나 부족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일이 될 뿐입니다.
따라서 그런 말이나 글에 힘이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4) ‘말’과 ‘삶’이 다른 경우.
그것은 ‘위선’이라는 죄를 짓는 일이 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그 말에는 당연히 아무런 힘도 없습니다.
말씀을 전하려면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한 번에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사도들의 말(설교)에도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힘은 예수님에게서 온 힘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설교를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예수님에게서 오는 힘을 받아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설교를 했고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가 무엇인가를 얻으리라고 기대하며 그들을 쳐다보는데, 베드로가 말하였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그러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가 즉시 발과 발목이 튼튼해져서
벌떡 일어나 걸었다(사도 3,5-8ㄱ).”
“거기에서 베드로는 애네아스라는 사람을 보았는데, 그는 중풍에 걸려
팔 년 전부터 침상에 누워 있었다. 베드로가 그에게 말하였다. ‘애네아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고쳐 주십니다. 일어나 침상을 정돈하십시오.’
그러자 곧 애네아스가 일어났다(사도 9,33-34).”
“...... 바오로가 돌아서서 그 귀신에게,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에게 명령하니 그 여자에게서 나가라.’ 하고 일렀다.
그러자 그 순간에 귀신이 나갔다(사도 16,18).”
신앙인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일은 사실상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곧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요한 13,20).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 그러자 모든 사람이 몹시 놀라,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하며 서로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루카 4,33-37).”
여기서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라는 말은,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가? 더러운 영들이 복종하고 떠날 정도로
저이의 명령에 하느님의 힘과 권위가 들어 있으니...” 라는 뜻입니다.
마귀는 하느님의 명령에만 복종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귀가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한 일은,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힘을 가지고
계신 분”, 즉 “하느님과 같으신 분,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하느님의 힘을 ‘느껴서’ 놀랐고,
그 다음에는 그 힘이 실제로 마귀에게 작용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놀랄 일이 아닌데,
그분을 사람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몹시 놀랄 일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알고 있었고,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복종하지 않으면 지옥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든 저항하려고 했습니다.
“조용히 하여라.” 라는 예수님 말씀은, “아예 말을 하지 마라.” 라는 뜻이고,
마귀가 하는 말은 한 마디도 들을 가치가 없음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
210831.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 머무는 삶 ♣
오늘날 우리는 촘촘한 그물망과도 같은 관계 속에 살아간다. 각자가 인간적으로나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나 사회생활을 하려면 관계를 떠나 살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관계를 맺으며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가? 인간은 독립적이면서도 의존적인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상호의존하면서 우리는 어디에 뿌리를 두고 관계를 맺고 있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선교활동 중심지인 카파르나움에서 말씀만이 아니라 마귀를 내쫓는 행위를 통해서 권위를 드러내신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성서와 조상들의 전통을 근거로 율법을 가르치고 추상적인 사변에 머물렀던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하느님 체험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체험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셨다.
마귀는 귀신들의 우두머리로서 옛 사람들은 인간을 괴롭히는 존재로 보았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실 때,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자가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하고 크게 외쳤다(4,34).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거라.”(4,35) 하고 꾸짖으시자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마귀에 들린 이에게서 나갔다.
‘더러운 마귀의 영’은 하느님의 뜻 저 반대편에 있는 실재요 움직임이다. 마귀의 특징적인 태도는 하느님과의 관계 단절이다. 마귀는 자신이 속한 더러운 사탄계에 계속 머물려고 하며 예수님의 개입과 간섭을 거부한다. 이렇듯 마귀의 움직임은 관계 단절이다. 관계를 맺으나 하느님의 선이나 자비와는 무관한 악의 세계와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힘을 얻는다. 문제는 정작 하느님은 거부하면서도 하느님의 피조물인 인간의 길을 가로막는 것이다.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사랑이신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사랑의 원천이신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며 그분의 말씀의 진리에 따라 행동하고,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을 드러내는 것이다. 바로 그곳이 하느님 나라이며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우리다운 태도가 아니겠는가!
나는 무언가를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할 때마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있음을 의식하는가? 그저 생각 없이 말하고 움직임으로써 하느님의 사랑, 정의, 진리와는 무관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볼 일이다. 반드시 고의가 아니더라도 하느님과의 관계를 도외시한 채 살아간다면 그런 나 자신이 ‘더러운 마귀의 영’에 들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과의 단절, 그분의 말씀과 무관한 삶은 결국 스스로를 소외시킴으로써 빛이 아닌 어둠을, 생명이 아닌 죽음을 참 기쁨이 아닌 비참함을 가져다 줄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거부한 채 살아가는 인간 사회의 병리적 현상에 개입하심으로써 사랑의 권위를 드러내신 것이다.
우리도 하느님과의 성사적 관계 안으로 초대하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행동방식을 따라가자. 그분과의 관계 깊숙이 들어가 그 안에서 삶의 축제를 벌이도록 하자! 나아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더러운 마귀의 영들’인 거짓과 인권유린, 사회적 차별과 온갖 불의, 인간의 탐욕과 자본의 우상화가 불러오는 부당한 경제체제와 구조적 가난에 예수님처럼 사랑으로 개입하며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관계로 바꿔나가도록 하자!
----------------------------------------------------
210831.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2017년 9월 5일
사도 바오로의 서간에서 주옥과 같은 내용을 박해 받고 있는 교우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초대교회의 공동체에서는 주님의 재림에 대한 사상이 고조된 분위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주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몇 차례 종말론적인 표현을 하셨지만 바오로 서간에서
‘주님께서 오시는 날이 도둑처럼 언제 올지 온다’라는 사실을 재확인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도는 교우들에게 격려와 위로의 글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1테살 5,4-5)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미 주님 부활의 빛을 받아 빛의 자녀가 되고 어둠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께서 오시는 때를 준비하며 깨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하느님께서 이미 교우들이 심판을 받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차지하도로 정하신 사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살아 있든지 죽어 있든지 당신과 함께 살레 하시려고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9절)라는 사도의 말씀은 교우들에게 큰 위로와 힘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의 당부대로 교우들은 서로 격려하고 저마다 성장할 수 있도록 배려와 희생을 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교우들이 박해를 받으며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지만 오히려 그 시험들이 공동체가 서로 일치하며 성장하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임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향과도 같은 카파르타움에 가십니다. 그곳 회당에서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께서 권위 있게 가르치시는 것을 보고 저마다 놀랍니다.
그런데 마침 회당에 더러운 악령이 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큰 소리로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루카 4,34)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라고 이르시며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꾸짖으십니다.
그러자 마귀는 악령들린 그 사람을 사람들 한가운데로 내동댕이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다치지를 않은 것이지요.
회당에서 그 광경을 목격하던 사람들은 놀라며 저마다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36절)라고 서로 말하는 것입니다.
루카는 이러한 놀라운 사실이 주위로 소문이 되어 퍼져 나갔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박해 받는 초대 교회의 공동체에서 주님의 재림사상이 긴박하게 다가 오는 것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기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셨지만 그 후의 역사가 2천년이 흘렀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갔으면 사람들 중에 ‘주님의 재림이 이루어지기는 하는거야?’라고 자문하는가 하며 휴거(携擧, the rapture)사상에 확신을 갖는 사람은 ‘몇년 몇월 몇일에 틀림 없이 종말이 오고 구원받는 사람들은 들어높여진다.’라는 말을 매스컴을 타고 퍼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하느님 만이 아시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재림을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단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은 이미 시작된 것이지요. 그렇지만 아직 완성되어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교회는 ‘이미 믿는 이들 안에서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고 성장되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하지요.
종말과 함께 해석하기가 어려운 것이 있다면 바로 ‘마귀’ 또는 ‘악령’의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옛 적에는 정신적 분야가 단순해서 정신병을 앓는 사람도 싸잡아서 ‘마귀가 들렸다.’라고 정의를 하곤 했습니다.
현대에서 마귀의 존재에 대해서 특히 신학에서도 은근히 설명을 회피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 교우들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정신병을 갖고 마귀라고 한 것이 아닌가요? 마귀가 있기는 있는가요?’ 종말을
해석하는 것처럼 이것에 대한 설명도 단순하지도 쉽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정신세계와 구분하는 ‘악의 세력’ ‘악마의 세계’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올바르게 길을 가려고 하지만 어둠의 세력인 마귀는 인간의 의지를 흐려 놓고 유혹을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복음에서 주님께 대항하는 마귀는 주님의 신원에 대해서 일반 사람들보다 더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악의 세력은 결국 인간에게 행복과 평화를 주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통해서 사람을 흔들어 놓듯이 자유까지도 제압하는 것입니다.
악의 세력은 동화에 나오는 귀여운 마귀의 모습이 아니라 ‘군대’ ‘군단’이라고 표현하는 막강한 힘을 갖고 무력한 인간을 파멸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사람들은 마귀의 존재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 한마디로 마귀를 쫒아 내신 사실은 당시 사람들에게도 놀라운 일인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고 오직 하느님만이 악의 세력을 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만이 인간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
210831.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신앙 고백에는 반드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생활이 뒤따라야만 합니다!
때로 말씀을 선포할 때 주저주저할 때가 있습니다. 자신감도 없고 어색하고 난감해서 차라리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에 권위나 무게가 없을 때입니다.
심각한 죄 중에 있을 때 그렇습니다. 누군가와 깊은 갈등 속에 있을 때 그렇습니다. 제가 선포하는 말씀과 구체적인 삶 사이에 너무나 큰 괴리감이 있을 때 그렇습니다.
그런데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말씀 한 마디 한 마디에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선포하시는 말씀 가운데는 헛된 공약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선포하시는 말씀이 그 자리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 앞에 사람들은 환호하고 박수를 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루카 복음 4장 31~31절)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말씀이 권위로 가득 찬 이유는 말씀에 행동이 반드시 동반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하느님 아버지의 능력을 받아 하신 말씀이었기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 앞에 마귀들조차도 굴복하고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그날 회당에는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권위로 가득 찬 예수님 말씀 앞에 찍소리 못하고 물러나며 그분께 대한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루카 복음 4장 34절)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하늘과 땅을 뒤흔들 능력을 소유한 강력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분의 꾸지람 앞에 하늘의 기둥들이 뒤흔들리며 놀라네. 당신의 힘으로 바다를 놀라게 하시고 당신 통찰로 라합을 쳐부수셨네.”(욥기 26장 11~12절)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부정한 영의 신앙 고백을 수용하지 않으시고 거부하시고 경멸하시며 크게 꾸짖으셨습니다. 신앙 고백에는 반드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생활이 뒤따라야만 합니다.
오늘도 능력으로 가득한 하느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내 안에 깊이 간직하며, 그 말씀을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천하며, 그 힘으로 이 하루를 기쁘게, 기꺼이 살아내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
210831.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나는 어떤 권위?: 몽둥이-논리-피>
오늘 복음은 ‘권위’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회당에서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을 낫게 하는 것에서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영’에 관련된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구조는 ‘육체-혼-영’으로 되어있습니다. 육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권위가 있고, 혼(생각)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권위가 있으며, 영(마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권위가 있습니다.
권위란 상대를 나의 뜻대로 움직이게 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따라서 누구나 권위를 가지고 산다고 믿을 텐데 우리는 인간의 어디까지 움직일 수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권위 있는 사람인지, 없는 사람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가장 낮은 단계의 권위. 사실 권위가 없을 때 사용되는 권위입니다.
소위 ‘폭력’이라고 하는데 몸을 움직이는 데 사용됩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설득할 머리도 없고 그저 힘만 있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권위입니다.
궁예는 바닥에서 시작하여 후고구려를 건국한 훌륭한 인물이었습니다.
궁예는 폭군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미륵불이라 자처하며 부처와 같은 수준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 옛날 원효는 나무아미타불만 외워도 불법을 다 알 수 있다고 하였느니라. 그러나 그보다 더 좋은 주문이 있노라. 그대들은 모두 외울지어다. 집에 있을 때나 일할 때나 잘 때나 일어났을 때나 모두 외울지어다. 옴마니 밤매훔을 외울지어다. 이것은 석가도 알았고 나도 알았던 불경의 모든 것이니라. 이 주문이 그대들을 이 지옥에 땅에서 극락으로 이끌 것이니라. 옴마니 밤매훔, 옴마이 밤매훔….”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누구인가?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어!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는가 말이야!”
한 신하가 기침을 하며 말합니다.
“소인이옵니다. 폐하.”
“참으로 딱하구나. 짐이 지금 관심법을 하고 있는데 어찌 기침을 할 수 있느냐, 이 미련한 것아.”
“송구하옵니다, 폐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가만해 보니 네 머리에는 마군이(불도를 방해하는 온갖 번뇌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가 가득 찼구나. 여봐라. 저자 안에 있는 마군이를 때려죽여라!”
이렇게 신하뿐만 아니라 여인들까지도 철퇴로 죽이는 일이 빈번하였습니다.
왜 폭력을 쓸까요? 말로 안 되기 때문입니다. 왜 말로 안 될까요? 설득시킬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자녀에게 폭력을 쓴다면 그것은 말로 설득할 논리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자기 힘으로 누군가를 움직일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 문제입니다.
다른 권위는 논리로 설득하는 사람입니다. 역시 자기 힘으로 누군가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폭력을 쓰지 않고 논리적인 설득력을 사용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설득력도 항상 한계를 지닙니다. 사람은 실제로 머리를 따르지 않고 마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컬투쇼에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요즘 유행한다는 부모교육을 두 시간 동안 들은 엄마가 아이들에게 윽박지르지 않고 ‘… 구나’라는 말을 해야 한다는 실천방법을 터득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유치원에 다녀온 아이가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으려 하자, “너 배가 아주 고팠구나. 그런데 손을 먼저 씻어야겠지? 손을 씻고 먹으면 더 맛있겠구나.”라며 설득하는 투로 말했습니다.
항상 이렇게 아이를 설득하며 지내던 그날도 “친구와 싸웠구나. 친구와는 사이좋게 지내야지. 왜냐하면….”이라고 하는 순간 아이는 귀를 막고 이렇게 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해. 그만해! 그냥 때려. 그럼 그냥 할게!”
우리가 머리로 이해한다고 그것을 다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죄를 안 지어야 하는 것을 몰라서 죄를 지을까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이 바뀌어야 바뀝니다. 그래야 이해하려 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을 바꿀 줄 아는 힘이 가장 큰 힘입니다.
마음엔 무엇이 살까요? ‘욕구’가 삽니다. 우리를 조정하는 것은 이 욕구입니다. 그런데 욕구는 ‘본성’입니다. 태어날 때 부여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세속-육신-마귀의 본성을 타고났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바꾸는 방법은 새로 태어나는 수밖에 없는데, 새로 태어나려면 새로운 부모가 주는 ‘양식과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그 양식과 가르침을 성체와 말씀으로 주셨습니다. 따라서 가장 큰 권위는 나의 욕구를 바꿔줄 양식과 말씀을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을 새로 태어나게 하려면 그보다 더 높은 하느님 본성이 필요합니다.
예전에 방영된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임금이 있어도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을 지닌 미실이라는 여인의 캐릭터가 굉장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자신을 치려는 임금과 많은 군사 앞에서 그녀는 화랑들을 이끌고 나옵니다. 그녀가 화랑을 관장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임금과 군사들 앞에서 ‘낭장결의’(화랑들이 화장하고 죽음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세우는 일)를 하고 할복하자 임금과 군사들은 칼을 집어 던집니다. 미실의 ‘권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미실은 당시 귀족의 아들들을 자신의 한 마디에 할복할 수 있게 만들었을까요? 그 이유는 미실이란 여인이 그들을 위해 죽어줄 수 있는 사람이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드라마라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권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 피가 곧 성령입니다. 그 성령으로만 우리 마음을 새로 태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권위가 있으셨던 이유는 당신의 피를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정치적 권위를 얻으려고 경선도 하고 상대를 공격하기도 하며 노력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권위는 사람의 마음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는 권위입니다.
먼저 생명이 아닌 십일조라도 기쁘게 내어놓을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권위가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권위의 시작일 것입니다.
피는 흐름입니다. 인간 본래의 본성은 소유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흐르게 할 수 있다면 이미 영적인 권위를 지니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는 자녀에게 소유하도록 가르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세상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놓는 사람으로 만드는 사람입니까?
----------------------------------------------------
210831.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실까요?
기도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돈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명예가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성공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알고 그분을 향한 신앙생활에는
조심할 부분, 지켜야 할 부분이 많아져
더 고단한 삶이 될 수도 있습니다.
때론 사람들에게 종교에 심취한 사람이라 손가락질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느님께 묻고 싶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우리 신앙이 성장하는 여정입니다.
나에게 어떤 분이지 깨닫고
그분께 어떤 믿음을 가지고 희망을 향해야 하는지,
스스로 찾아가는 가운데 우리는 고백하게 됩니다.
아! 이분이야 말로 참된 행복의 근원이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시구나!
세상이 주는 기쁨과 즐거움이 스쳐 지나가는 성질이라면
하느님이 주시는 기쁨과 즐거움은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을 변화시키며
삶의 긍정적인 요소를 발견하도록 이끌어주는 성질입니다.
자연히 우리의 삶을 행복으로 인도하며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가도록 도와줍니다.
그렇기에 신앙 여정을 걷는 이들을 바라보며
주변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지켜보게 됩니다.
그의 삶을 믿음을 증명하고
그의 행복으로 주변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을 바라보며
나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답을 찾아갈 수 있기를,
그리하여 하느님 안에서 참된 행복을 발견하여
오늘 그 기쁨을 이웃에게 전할 수 있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
210831.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권위와 힘은 과연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마치 주일에 사람들 앞에서 강론을 하시는 것과도 흡사한 장면이 처음에 나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많이 놀라워합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지식이 풍부해서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회당에서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에게 그 영을 쫒아내시는 과정을 보시면 마귀도 결국 항복을 하고 나가게 됩니다. 마귀의 영이 나가게 된 것도 단지 예수님께서 조용히 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하신 말씀 이외에는 그 어떤 물리적인 행동도 없으셨습니다. 결과는 마귀의 영이 손을 들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와 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복음은 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권위와 힘’이 있어서 나갔다고 하는 내용은 누가 그 원인을 밝혔는지 한번 보시면 예수님께서 스스로 말씀을 하신 게 아니었습니다. 바로 고을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사람만 이야기한 게 아니였습니다. 서로 말하였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단순히 어떤 사람만 인정을 하는 수준에 있다는 게 아니고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인정을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과연 예수님의 말씀에서 권위와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게 우리가 세상에서 말하는 권력과 같은 물리적인 힘이었을까요? 마치 국회의원과 같은 세상 권력을 가진 권력자의 힘과도 같은 힘 말입니다.
실제 예수님은 그런 권력을 가진 위치가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런 위치에 계셨더라면 과연 마을 사람들이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하고 말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저 마을에 있는 한 평범한 청년으로 예수님을 바라봤을 겁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예수님의 모습에서는 요즘 말로 하면 애송이의 말처럼 치부하고 말았을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던 것입니다. 참으로 묘한 일입니다.
우리의 지난 역사를 한번 보시죠. 5공화국을 지낸 대통령과 다른 대통령을 보면 같은 대통령을 하며 한 국가를 통치했어도 먼 훗날 역사는 어떻게 평가를 할지 모르지만 굳이 먼 미래까지 갈 필요가 없습니다. 현재의 역사에서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다른 대통령에 비해 다르게 평가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서 국민들로부터 정당성을 받는 데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통치 시절에는 워낙 막강한 독재 권력이라는 힘 때문에 국민은 그 힘 앞에 당당히 맞설 수 없었던 것입니다.
대통령은 주권자인 국민이 선출합니다. 그런 힘을 국민이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받게 되었을 때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을 행사하게 됩니다. 실제 이런 힘을 주는 것은 국민이기 때문에 말장난 같은 말이지만 실제로는 권한을 부여한 사람이 더 높은 위치에 있게 되는 논리로 본다면 당연히 국민이 더 높은 위치에 있어야 되는 게 이상적으로는 맞습니다.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에는 단순히 하나의 자연인 신분이었지만 당선이 되는 순간부터는 대통령 신분의 효력이 발생하게 됩니다. 우리가 대통령에게 권한을 부여한 순간부터는 신분 구조가 달라지게 됩니다. 국민이 권한은 부여했지만 오히려 이젠 역으로 우리가 그 힘에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이건 이치로는 맞지만 어찌 보면 조금은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장이 어떤 자기 직원을 고용했는데 그 직원에 사장이 굴복해야 하는 그런 상황으로 이해를 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재미있게 표현하자면 대통령은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국민이 갑의 위치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서의 막강한 권한을 국민으로부터 위임을 받았다고 해서 막강한 제왕적인 힘을 발휘할 수는 없습니다. 대통령도 헌법이 보장하는 내에서만 권한을 행사해야 합니다. 그 권한 밖의 힘을 남용하면 아무리 대통령이라는 막강한 권력이 부여됐어도 헌법에 의해 탄핵의 조건이 되면 탄핵이 됩니다. 대통령도 대통령이기 이전에 헌법이라는 국가 최고 상위법에 구속되는 것입니다. 법으로 보장된 권한 범위 내에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해야만 그 힘이 통치 권한으로서 힘이 있는 것이지 권한을 넘어서면 국민의 저항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권위에 힘이 있는 것도 마치 이와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국민을 위해 충실하게 봉사를 하라고 국민이 대통령에게 그에 맞는 권한을 부여한 것처럼 낮은 자세로 국민을 섬길 때 그때 국민은 대통령이라는 위치에서 가지는 힘과 권위를 인정해 주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국민이 바로 그 자리를 박탈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힘과 권위가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말씀 그 자체의 힘으로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삶 그 자체가 드러내시는 모습이 예수님 말씀에 권위가 있다는 것을 대변하는 것이지 단순히 말씀 그 자체로써만의 힘만으로는 부족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에 힘과 권위가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
====================================================
210831.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cpbc TV. 매일미사
https://youtu.be/KlurjyMH6dk 32:33
2021. 8. 31.
cpbc TV_가톨릭콘텐츠의 모든것
이병철 안드레아 신부 (가톨릭 스카우트 서울지구 지도) 집전
====================================================
----------------------------------------------------
----------------------------------------------------
210831.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제1독서(1테살5,1~6.9~11)
"주님의 날이 밤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2)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4)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5)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6)
여기서 '주님의 날' 즉 '헤메타 퀴리우'(hemeta kyriu)는 사도 바오로의 서간에서 '그리스도의 날'이라는 다른 표현으로 사용되는 말이며(필리1,10; 2,16), 구약에서는 '야훼의 날', '주님의 날'로 표현되는 말이다.
이 날은 주님을 대적하는 악인에게는 심판의 날인 반면에 주님을 사랑하는 의인에게는 구원의 날이다.
사도 바오로가 구약의 '야훼의 날'이라는 표현을 끌어와 사용하면서 '하느님의 날'이라고 하지 않고, '주님의 날' 또는 '그리스도의 날'이라고 표현한 것은 종말의 그 날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다시 오실 것(마태24,30)을 확인해 줌과 동시에 그 종말의 심판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관이 되신다는 사실을 말해준다(마태25,31~46).
그리고 이 구절은 주님께서 시간적으로 밤에 재림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밤에 도둑처럼 온다'는 말은 사람들이 방심하는 밤에 도둑이 예고도 없이 침입하는 것처럼, 주님의 날도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는 때에 도래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사실은 원문의 '호스 클렙테스 엔 뉙티 후토스 에르케타이'(hos klleptes en nykti hutos erchetai)에서 '호스 ~후토스'(hos ~hutos; as ~so)라는 표현으로 잘 드러난다.
'호스'(hos)는 '~처럼'이며, '후토스'(hutos)는 '그와 같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도둑'(klleptos; 클렙토스; a thief)이 밤에(en nykti; 엔 뉙티; in the night)
오는 것과 같이 그처럼'이라는 뜻이다.
즉 '밤'이라는 시간이 강조된 것이 아니고 밤에 오는 '불예측성'이 강조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마태오 복음 24장 44절에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도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으며, 묵시록 16장 15절에도 '보라, 내가 도둑처럼 간다'는 말씀이 나온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4)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5)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6)
사도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1서 5장 1~3절에서 주님의 재림이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불시에 올 것을 밝힌 데 이어서, 테살로니카 1서 5장 4~5절에서는 빛에 속하며 어두움에 있지 않는 성도들에게는 주님의 재림이 결코 갑작스럽게 오지 않을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테살로니카 1서 5장 4절의 '있지'에 해당하는 '에스테'(este)는 현재 시제로서 어두움에 있지 않은 상태의 지속성을 나타내준다.
또한 '어둠 속에'에 해당하는 '엔 스코테이'(en skotei)에서 '엔'(en)은 '~안에' (in)라는 뜻의 전치사로서 영역의 안쪽을 말한다.
그 영역은 바로 '어둠'에 해당하는 '스코테이'(skotei)인데, 이것의 원형은 '스코토스'(skotos)로서 구약 히브리어의 희랍어 번역성서인 70인역(LXX)에서 히브리어 '호쉐크'(hoshek; 창세1,2)의 역어로 쓰인 단어이다.
본래 자연 상태의 어둠을 뜻하지만(마르15,33; 사도2,30), 본절에서는 비유적 의미로 쓰여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 것, 하느님의 영을 받지 않은 상태에 있는 것, 하느님을 적대하는 자리에 있는 것, 드러난 진리를 배척하는 자리에 있는 것 등을 의미한다.
'빛'과 대조되는 개념으로서 '어둠'에 대한 비유적 표현은 신약의 곳곳에 나타나 있다 (요한3,19; 사도26,18; 로마13,12; 2코린6,14; 에페5,8).
'그 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덮치지는'이라는 의미로 번역된 '카탈라베'(katallabe)의 원형 '카탈람바노' (katallambano)는 장소와 관계되어 쓰일 때에는 '뒤에서'라는 뜻의 전치사 '카타' (kata)와 '덮치다'라는 뜻이 있는 동사 '람바노'(lambano)의 합성어로서 본절에서는 '위에서 내리덮치다', '엄습하다'라는 강한 의미로 쓰였다(요한8,3; 12,35).
따라서 도둑이 한밤중에 자고 있는 사람의 집에 갑자기 들이닥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인간이 이 세상에서 행사한 선악들에 대해 심판하실 주님의 날이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매우 갑작스럽게 돌발적으로 엄습할 것이지만, 믿는 이들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를 전달한다.
한편, 테살로니카 1서 5장 5절의 '빛'(포토스; potos)과 '낮'(헤메라스; hemeras)는 동일한 개념을 전달하는 것으로서 후반절에 나오는 '밤'(뉙토스; nyktos)과 '어둠'(스코투스; skotus)의 반대 개념이다.
테살로니카서 1서 5장 5절의 '빛의 자녀'는 빛이신 하느님을 닮은 자들을 가리키며, 바로 하느님의 뜻인 '거룩'(1테살4,3)의 길에 서 있는 성도들을 말한다.
또한 '낮의 자녀'란 영적으로 깨어 근신하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을 의미하는데, 사도 바오로는 '빛의 자녀'와 '낮의 자녀'라는 반복된 표현을 사용하여 성도들의 영적이고 도덕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에서 '밤'(뉙토스; nyktos)은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무감각한 상태를 말하며, '어둠'(스코투스; skotus)은 빛이신 하느님께로부터 소외된 상태,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하느님을 모시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마지막으로 테살로니카 1서 5장 6절에 '잠들지'라는 '카튜도멘'(katheudomen)의 원형 '카튜도'(katheudo)는 비유적으로 자신의 구원에 무관심하고, 다가오는 심판의 날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영적 무감각한 상태를 의미한다.
또한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에 해당하는 '알라 그레고로멘 카이 네포멘' (alla gregoromen kai nepomen; but let us be alert and self-controlled)에서 '깨어 있도록'에 해당하는 '그레고로멘'(gregoromen)의 원형 '그레고류오' (gregoreuo)는 영적 측면에서 '정신을 차리고 주의하다'라는 비유적 의미인데(마르13,35; 사도20,31; 1코린16,13; 1베드5,8; 묵시3,3), 이러한 상태는 의지적인 노력이 수반되어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맑은 정신으로'에 해당하는 '네포멘'(nepomen)의 원형 '네포'(nepo)는 본래 '술 취하지 않은 상태'를 나타내는 동사인데, 비유적으로 심령이 고요하고 침착하며 냉정을 유지하는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이 두가지 상태는 모두 '빛과 낮의 자녀'에게는 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모습이지만, '밤과 어둠의 자녀'에게는 부자연스럽고 실천하기 힘든 어려운 요소들이다.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루카 4,31-37)
3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 카파르나움(나를 위한고을, 성전) 곧 자신을 위한 자기 의로움으로 지은 그 헛된 신앙이 있는 곳에, 하늘의 구원의 의로움인 참 가르침을 주신 것이다.
32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 오늘 독서(코린토1서2,10ㄴ-16)에서 말씀하셨듯이 하느님의 영께서 알려주신 그분의 지혜, 그 권위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말, 뜻이 아닌 아버지의 말씀만 하셨다.
(요한12,49) 49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 말씀의 권위~ 말씀 안에 숨겨있는 하느님의 뜻인 구원의 힘, 능력, 그 권위를 느꼈던 것이다.
(에페1,11) 11 만물을 당신의 결정과 뜻대로 이루시는 분의 의향에 따라 미리 정해진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몫을 얻게 되었습니다.
= 창조주의 뜻대로 그 하느님의 결정과 뜻을 따르는 신앙을 사는지?~ 하느님의 규정(계명)을 사람의 규정과 교리로 만든 그 신앙은 구원의 권위가 없는 것이다.
하느님의 규정은 나무 하나의 희생(탈출15,25) 곧 십자가의 대속, 그 예수님의 죽음으로 얻는 용서, 구원, 하늘의 생명이다.
3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34 “아!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 예수님을 하느님의 거룩하신 능력의 하느님으로만 알고 섬기는 그 종교 행위를 한다면 그것은 나와 상관없는, 곧 구원의 권위가 없는 신앙이 된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의 뜻인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그들의 죄값으로 십자나무에 달려 희생 제물로 죽으러 오셨던 것이다.
우리의 죄로 죽으신 구원자, 나의 주인 되시는 그 주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로마3,25) 25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사람들이 이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시어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 예수님의 대속 그 의로움과 상관없는 자기 의로움의 그 카타파르나움(나를위한 성전)이 마귀 들렸다는 것이다. 그 카파르나움의 의로움은 하늘이 아닌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라 하셨다.(루가10,15)
사람이 의롭게 착하게살아야 되는 것 맞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희생, 그 의로움에는 구원의 권위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앙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3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
= 우리의 삶에서 내동댕이쳐지는 시련이 일어나지만 구원에는 지장이 없다는 것이다. 마귀의 해꼬지도 하느님의 허락이 있어야 일어나는 것이다.(욥1,12 2,6참조) 모든 일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다.
(로마8,28) 28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 자기 의로움으로 교만했던 욥을~ 사탄의 온갖 시련을 통해 하느님의 지혜, 그 의로우심을 깨달아 하늘의 의인으로 만드셨듯(욥기42,1-6참조)~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 喜怒哀樂을 통해 善, 救援을 이루신다.
36 그러자 모든 사람이 몹시 놀라,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하며 서로 말하였다.
=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뜻, 그분의 지혜로 말씀을 받아 간직한다면 그 하느님의 말씀이 일하시기 때문에 사탄 마귀는 힘을 못쓰게 되는 것입니다.
(1테살2,13) 13 우리는 또한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37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 하느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뜻을 위한 기적의 예수님으로 , 소문으로만 퍼져나간다. 우리는 그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성당에 나왔다.
그래서 반드시 성경 말씀 속에 하느님의 뜻, 지혜를 깨닫는 신앙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문 그대로 사람의 규정과 교리에 맞춘 신앙을 산다면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신앙을 사는 것이다..(마르7,7참조)
성경의 구약은 물론 신약의 말씀안에 그리스도 예수님으로 얻는, 하느님의 구원의 약속 그 말씀을 찾아 깨닫고 믿고 간직하는 것입니다.
(루가11,24-26) 24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그때에 그는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말한다. 25 그러고는 가서 그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자기 의로움으로 예수님의 의로움이 치워진,그 정돈인 상태) 26 그러면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에페1,7)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 말씀을 깨달아 마음에 간직하는 것, 신앙인이 반드시 해야 할 실천, 실행인 것입니다. 아멘.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복음(루카4,31~37)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34)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드러나신 후에 출신지인 나자렛도 존귀한 지명이 되었다(사도3,6).
그러나 아직 예수님의 메시야로서의 활동이 드러나지 않았던 때에 나자렛은 유다인에 의해 경멸받던 지명이었다(요한1,46).
따라서 마귀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께서 나자렛 출신이라는 사실을 크게 떠든 것은 예수님의 권위를 실추시키려는 의도가 역력한 것이며, 이것은 갈릴래아를 대표할 수 있는 큰 도시였던 카파르나움 고을 사람들에게 충분히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간교하고 사악한 방법이었다.
'아!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마귀들린 사람의 화두에 있는 감탄사 '에아'(ea; Ah!)는 신약 성경에서 여기에만 유일하게 쓰인 독특한 용어이며, 두렵고 위협적인 존재이신 예수님의 출현으로 인해 자신의 입지가 위협을 받게 된 마귀의 놀라움과 두려움, 혐오감과 적대감 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원문의 '에아, 티 헤민 카이 소이'(ea, ti hemin kai soi)는 'Ah, what do you want with us?'(당신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라는 뜻이며, '에아'(Ea; Ah!)를 굳이 번역하자면 '우리들을 홀로 두소서'(Let us alone)라는 뜻이다.
이것은 예수님과 더러운 마귀의 영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므로, 우리를 괴롭히지 말라는 뜻이다(여호22,24; 판관11,12; 1열왕17,18).
또한 여기서 더러운 마귀의 영은 자신들을 가리켜 '저희'(우리)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이 표현에 대해 마귀가 마귀들린 자와 자신을 복수 위격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고, 마귀의 영에 들린 사람의 입을 빌어 말하는 마귀가 하나가 아닌 여럿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이것은 문법적으로 의문문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고 조롱하며 자신을 방어하는 투의 문장으로 보아야 한다.
영적으로 상당한 지력을 지녔던 마귀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사탄의 권세를 꺾어서 죄와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고통당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다(마르코2,10; 1요한3,8).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는 메시야가 오시면 모든 악한 영들을 멸망시키실 것이라는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
여기에 해당하는 '호 하기오스 투 테우'(ho hagios tu theu; the Holy One of God)는 루카 복음 4장 33절의 '더러운 마귀의 영'('프뉴마 다이모니우 아카타르투'; pneuma daimoniu akathartu; an unclean devil spirit)과 대조되는 개념으로서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정학하게 드러내는 표현이다.
이것은 구약 성경이 하느님께 대해 사용한 '거룩하신 분'(이사40,25; 57,15)이라는 표현과 초대 교회에서 예수님께 대해서 사용한 '거룩하신 이'(사도21,27; 3,4; 4,27)라는 표현과도 통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에 사람들은 아직 예수님께서 메시야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상당한 수준의 영적 지각력을 갖추었던 마귀들은 이미 이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예수님 앞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자는 예수님을 '안다'고 소리친다.
여기서 '압니다'에 해당하는 '오이다'(oida; I know)는 능동태 완료 동사이다.
그 사람 안에 들어 있는 마귀는 예수님을 알되, 예전부터 그리고 능동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영적 존재인 마귀는 예수님께서 육화(강생)하시기 이전부터 알고 있었으며, 자신의 직접적인 지식으로 알고 있었다.
예수님께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그 지식에 기초하여 정확한 고백은 했지만, 본질적으로 부정하고 더럽고 악한 존재인 마귀는 거룩하시고 정결하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지 않을 뿐 아니라 순종하지도 않기 때문에, 결국은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인 것이다.
오늘날도 적지 않은 신학자들을 비롯해서 많은 신앙인들이 이러한 마귀의 지식과 유사한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연구와 배움을 통해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잘 알고 있지만, 그러나 그들 중에는 예수님을 믿지도 순종하지도 않는 자들도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지식이 어떻게 그를 구원으로 인도하며 영신적 유익을 주겠는가?
야고보서 2장 19절에는 '그대는 하느님께서 한 분이심을 믿습니까?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마귀들도 그렇게 믿고 무서워 떱니다.'라고 나온다.
그리고 잠언 1장 7절에도 '주님을 경외함은 지식의 근원이다. 그러나 미련한 자들은 지혜와 교훈을 업신여긴다.'라고 나온다.
우리는 신앙이란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고, 주님을 경외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님께 대한 올바른 지식과 앎을 기초로 해서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경배하며, 마음으로부터 영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고 예수님의 인격을 닮도록노력해야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