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합의 비전을 제시한 프리드리히 2세
김장수 지음|서양근대사총서 7|153×224×22 mm(하드커버)|360쪽
32,000원|ISBN 979-11-308-1803-0 93920 | 2021.7.2
■ 도서 소개
독일 통일의 기반을 닦은 계몽군주, 프리드리히 2세
김장수 교수(가톨릭관동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의 『독일 통합의 비전을 제시한 프리드리히 2세』가 푸른사상사 <서양근대사 총서 7>로 출간되었다. 강력한 대외정책을 추진하며 독일 통일의 기반을 닦은 계몽군주로서 프로이센을 일약 강국으로 거듭나게 한 프리드리히 2세의 정치적 업적과 역사적 위상을 소개한다.
■ 목차
∎ 책머리에
제1장 프로이센의 절대왕정 체제
1. 독일기사단에서 프로이센 대공국으로
2. 프리드리히 빌헬름
3. 프리드리히 1세
4.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제2장 젊은 시절의 프리드리히 2세
1. 프리드리히 2세의 어린 시절
2. 국외로의 탈출 시도
3. 알가로티와의 만남
4. 엘리자베트-크리스티네와의 결혼
5. 볼테르와의 만남
6. 프로이센 국왕이 되다
제3장 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위계승과 프리드리히 2세의 대응
1. 마리아 테레지아의 등극
2. 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위계승에 대한 반발
3. 프리드리히 2세의 제안
4. 오스트리아의 대응
제4장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1. 제1차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2. 제2차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3. 제3차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7년전쟁)
제5장 말년의 프리드리히 2세
1. 개혁정책의 가속화
2. 영토 확장 정책
3. 생의 마지막 순간
∎ 나가면서
∎ 참고문헌
∎ 찾아보기
■ 저자 소개
김장수
한양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베를린 자유대학교 역사학부에서 석사 및 철학박사를 취득했다. 저서로는 『Die politische Tätigkeit F. Palackýs』 『Korea und der‘ Westen’ von 1860 bis 1900』 『Die Beziehungen Koreas zu den europäischen Großmächten, mit besonderer Berücksichtigung der Beziehungen zum Deutschen Reich』 『프란티셰크 팔라츠키의 정치활동』 『독일의 대학생 활동 및 그 영향』 『서양의 제 혁명』 『비스마르크』 『중유럽 민족문제』(공저) 『유럽의 절대왕정시대』 『주제별로 들여다본 체코의 역사』 『주제별로 살펴본 서양 근대사』 『체코 역사와 민족의 정체성』 『슬라브 정치가들이 제시한 오스트리아 제국의 존속 방안』 『후스로부터 시작된 종교적 격동기(1412~1648)』 『19세기 독일 통합과 제국의 탄생』 『메테르니히』 『오스트리아 최초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 등이 있다. 프란티셰크 팔라츠키의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와 19세기 오스트리아 제국의 민족 문제를 다룬 많은 논문도 있다. 현재 가톨릭관동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이며 한국세계문화사학회(구 한국서양문화사학회) 명예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 출판사 리뷰
독일 동북에 위치한 소국, 프로이센의 2대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1740년 사망함에 따라 프리드리히 2세가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수차례 전개된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랑스 등과의 전쟁에서 승전고를 울리며 프로이센을 일약 강국으로 끌어올렸다. 합리적인 국가 통치를 수행함으로써 프로이센의 국력을 크게 신장시키고, 유럽을 대표하는 강대국으로서의 입지를 세운 것이다.
이 책에서는 우선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왕국의 등장으로부터 시작하여, 강력한 군사력을 토대로 한 국력 강화와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인 선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프리드리히 1세에 대해 살펴본다. 이어 문학적·철학적·음악적 소양이 뛰어났던 프리드리히 2세의 성장 과정과 학문적 활동을 다루었다. 왕세자 시절, 프리드리히는 부친과 심각한 갈등을 빚으며 국외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친우가 처형당하는 사건도 있을 정도였다.
국왕이 된 프리드리히 2세는 강력한 대외정책을 추진하며 독일 통일의 기반을 닦은 계몽군주로서, 프로이센의 무지한 신민들을 계몽시키고 품행과 도덕도 교화시키고자 했다. 그의 저서 『반마키아벨리론』은 국가와 신민을 위해 봉사하는 군주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프리드리히 2세는 국왕으로 즉위한 직후 사법제도의 개선을 시도했고, 신민들의 부담을 경감시키는 등 계몽을 위해 갖가지 개혁 정책을 실시했다. 대외적으로는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왕위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3차에 걸쳐 벌어진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과 제1차 폴란드왕국 분할, 바이에른 상속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고 프로이센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전쟁 이후에는 내정에 집중하며 이후 프로이센 중심으로 이루어진 독일 통합의 기반을 다졌다.
이 책에서는 약소국 프로이센을 강대국으로 거듭나게 한 프리드리히 2세의 역사적 위상을 소개하며 아울러 그가 실시한 개혁의 내용과 개인사도 상세하게 살펴본다.
■ 책머리에 중에서
국내 서양 사학계, 특히 독일 사학계는 오스트리아보다 독일의 통합 과정에서 주역을 담당한 프로이센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프로이센에 대한 국내의 연구 현황은 예상과는 달리 그리 활발하지 못한 것 같다. 그리고 프로이센의 기원이나 성장이 독일사 서술의 한 장(章)으로 국한되는 경우가 많으며, 그중에서도 특정 인물, 즉 비스마르크에 치우치는 경우도 많다. 물론 프리드리히 2세가 계몽 절대왕정 체제를 확고히 구축한 것과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취득한 슐레지엔 지방으로 프로이센의 국제적 위상이 크게 증대된 것 등이 간략히 언급되기도 한다. 이렇게 간단히 취급되는 프리드리히 2세는 18세기 유럽 근대사에서 적지 않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는 이 인물에 관한 연구가 미비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 인물에 대한 논문들이 생각과는 달리 그리 많지 않은 것과 그의 생애 및 활동을 다룬 저서 역시 거의 출판되지 않은 데서 확인할 수 있다.
프리드리히 2세의 계몽 절대주의 정책과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의 승리는 독일권에서의 권력 구도뿐만 아니라 유럽의 질서 체제에도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따라서 우리가 18세기의 유럽사를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프리드리히 2세를 도외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를 위해 필자는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한 체계적인 서술이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그동안 가지고 있던 자료들과 최근에 구매한 전문서들을 토대로 이 인물의 생애 및 활동을 다룬 단행본을 쓰게 되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필자는 그동안 등한시된 프리드리히 2세와 프로이센에 관한 연구가 보다 활성화되기를 기대한다.
이 책에서는 우선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왕국의 등장과 성장을 다루도록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기에 적지 않은 역할을 담당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프리드리히 1세, 그리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이어 프리드리히 2세의 성장 과정과 학문적 활동을 다루고자 한다. 특히 성장 과정에서 제기된 부친과의 불화와 그 과정에서 야기된 국외로의 탈출 시도도 비중 있게 다루도록 한다. 또한 왕세자 시절부터 장당, 알가로티, 그리고 볼테르로부터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은 프리드리히 2세가 등극한 이후 추진한 개혁정책들의 내용 및 특징에 대해서도 언급하도록 한다. 아울러 프리드리히 2세가 국가의 위상 및 영토 확장을 위해 펼친 일련의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제1차 폴란드왕국 분할, 그리고 바이에른 상속전쟁을 다루도록 한다. 마지막으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이 끝난 후 프리드리히 2세가 마무리한 개혁정책의 내용과 말년의 그의 생활에 대해서도 거론하도록 한다.
■ 책 속으로
1730년 5월 작센 리자(Riesa) 근처의 차이타인(Zeithain)에서 개최된 행사 중 프리드리히는 친구인 카테(Hans Hermann v. Katte) 소위에게 부친의 지나친 학대 및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프랑스를 거쳐 외삼촌 조지 2세가 통치하는 영국으로 망명하여 거기서 아멜리아와 결혼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브륄(Heinrich v. Bruhl)로부터 아들의 탈출 계획을 보고받았고 그것에 따라 그는 밀고자인 브륄과 같이 궁전 집회에 참여했다. 거기서 그는 프리드리히의 탈출 계획을 거론하고는 아들의 머리채를 끌고 연병장으로 가서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심한 구타를 가했다.
(75~76쪽)
프리드리히는 두 번째 판본에서 인류의 보편적 도덕을 지향하는 변호자의 관점에서 마키아벨리 관점을 정면으로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올바른 통치자의 상도 제시했다. 그리고 그는 한 국가의 통치자는 자제력을 상실한 명예심, 불성실, 그리고 살인을 추구하기보다 고결한 자세 및 덕성을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군주는 신민의 복지를 최우선 과제로 설정해야 하며 선, 아량, 그리고 자비를 지향하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 이것을 통해 군주는 유일한 과제를 부여받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이 지배하는 신민의 행복을 위해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프리드리히는 ‘군주는 신민의 행복을 실천시키는 제일의 종복이다’라는 견해도 밝혔던 것이다.
(127~128쪽)
당시 프리드리히 2세는 주변국의 영토를 비합법적인 방법 및 수단, 즉 무력을 통해 강제로 빼앗아서 법적인 방법과 수단으로 영토 점유를 치장한 후 역사가들로부터 그 정당성도 부여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미화된 역사적 관점을 통해 자신의 영토 확장 야욕이 자연적 야생성에서 확인되는 규율이라는 것을 부각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프로이센과 같은 신생국이 가능한 한 빨리 강대국으로 성장하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도 강조했다. 당시 프리드리히 2세는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작성한 「정치적 유산」에서 거론된 슐레지엔 합병 방식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자신이 작성한 「정치적 유산」에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남계가 소멸할 경우, 작센의 슐레지엔 합병 가능성을 사전에 방지하고, 폴란드의 프로이센 종속을 강화하기 위해 슐레지엔 지방을 반드시 차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165~16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