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의 여인’(Iron Lady)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 1925~2013) 전 영국 총리가 2주 전 타계했습니다. 해가 지는 영국을 다시 일으켜 세운 ‘구국의 지도자’, ‘세기의 리더’를 기리는 추모 물결이 전 세계에 넘쳤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숙연해지지만, 대처에 대한 애도는 그의 철저한 애국심과 불굴의 정신에 대한 경외감의 발로가 아닌가 합니다.
지방 소도시 잡화상의 딸로 옥스포드대학을 나와 변호사(1953년) 하원의원(1959년) 교육부 장관(1970~1974년) 보수당 대표(1975년) 총리(1979~1990년)로 이어진 대처의 생은 자신의 말대로 ‘평생 전쟁을 벌이며 산’ 삶이었습니다. 1년을 끈 전국광부노조의 파업에 대해 “협상은 협잡”이라고 맞서 굴복시켰고, 아르헨티나와의 포클랜드 섬 영유권 대결 때는 “전쟁은 이기기 위한 것”이라며 끝내 승리를 이끌어냈습니다.
그의 정책은 당근이 아닌 채찍이었습니다. 1970년대 영국은 만성적 적자재정, 높은 실업률, 무거운 세금, 방만한 복지정책, 일상화된 파업으로 중환에 이르렀습니다. 대처는 복지 축소, 감세, 민영화, 노조와의 전쟁 등 대대적인 구조조정으로 이런 영국병을 치유했습니다. 복지에 안주하고 있는 국민에게도 “두 발로 일어서서 자신의 삶을 책임지라”고 꾸짖었습니다. 이른바 대처리즘(Thatcherism)으로 몰락상황의 영국을 건져냈습니다.
그러나 대처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립니다. 일간 가디언은 사설에서 “대처의 유산은 탐욕의 숭배와 공론의 분열”이라고 혹평했습니다. 칼럼니스트 오언 존스는 “대처리즘은 여전히 해로운 영향을 미치는 국가적 재앙”이라며 “영국을 서유럽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로 만들었다”고 비판했습니다. 영국 탄광노조는 “대처리즘의 이익은 소수에게만 돌아갔다. 그의 죽음과 함께 대처의 정책도 함께 사라지길 기대한다”고 불평했습니다.
‘빵과 장미’ ‘랜드 앤드 프리덤’ 등 노동자에 관한 영화를 주로 만든 켄 로치 감독은 “대처의 장례식을 민영화해서 경쟁 입찰에 부쳐 가장 싼 가격을 부른 자에게 넘기자. 그게 바로 그녀가 원했던 것”이라며 독설을 뿜었습니다. 대처 자신도 의회에서 왈가왈부하거나 세금을 축내는 것을 꺼려 국장을 사양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이념이나 주의는 타협이 안 되는 창과 방패의 관계인가 봅니다.
그런 현상을 접하고 보니 2천여 년 전 로마의 영웅 스키피오의 말년이 떠오릅니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Publius Cornelius Scipio ). 그는 카르타고군과의 전투에서 선친과 숙부를 잃은 스페인 전선에서 17세 때부터 종군한 명문 귀족 출신이었습니다. 스키피오는 북아프리카의 강국 카르타고와 알렉산더 대왕의 후예들이 다스리는 마케도니아, 시리아 왕국을 차례로 굴복시켜 지중해를 로마의 내해로 만든 최초의 패권자였습니다.
그의 공적은 참으로 화려합니다. 기원전 210년. ‘한니발(Hannibal) 전쟁’으로 불리는 제2차 포에니전쟁이 발발한 지 9년, 코끼리부대(오늘날의 전차부대에 해당)를 앞세운 채 알프스를 돌파해 온 한니발 5만 병력의 포위작전에 7만 명이 희생된 로마 최대의 패전 칸나에 전투 이후 6년째. 로마는 스키피오의 아버지 형제가 지휘하던 스페인 주둔 코르넬리우스 2개 군단이 궤멸하는 등 내우외환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습니다.
이때 24세의 스키피오는 용약 스페인전선 총사령관을 자원했습니다. 논란이 많았지만 군단을 지휘할 수 있는 자격 요건인 40세 이상의 집정관 또는 법무관 출신 장군이 한 사람도 없어 그는 원로원으로부터 승인을 받아냈습니다. 이듬해 이른 봄 전격 작전에 들어간 스키피오는 카르타고 세력의 스페인 거점도시 카르타헤나(일명 신 카르타고)를 단 하루의 전투로 점령했습니다. 승전보를 들은 로마는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습니다.
병력 수가 카르타고군의 절반도 안 되는 스키피오군의 전략은 속전속결의 기습작전이었습니다. 그는 기원전 208년 하스드루발(한니발의 동생. 이듬해 형과 합류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갔다가 전사) 군을 패퇴시키고, 2년 뒤에는 마고네(한니발의 막내 동생) 군까지 격파해 스페인 전역을 제압했습니다. 스페인을 30여 년간 지배해온 카르타고 세력을 북아프리카로 내몬 스키피오는 4년 만에 영웅이 되어 귀환했습니다.
29세가 된 그는 군인의 최고 영예인 개선식도 바라지 않고, 대신 북아프리카 사령관으로 보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13년째 이탈리아 반도 남부를 점거하고 있는 한니발을 본국으로 끌어내 결전을 벌이겠다는 결연한 의지였습니다. “제가 그 싸움에서 얻는 전리품은 칼라브리아 지방(당시 한니발 점령 지역)의 무너진 성채 따위가 아니라, 카르타고 그 자체가 될 것입니다.” 스키피오의 역설에 원로원은 그에게 시칠리아 군사령관의 대임을 맡겼습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기원전 202년 봄, 33세의 스키피오는 카르타고 땅 자마에서 45세의 한니발과 세기의 결전을 벌였습니다. 결과는 스키피오의 완승이었습니다. 자마 전투의 승리로 그는 16년 동안 10만 명 이상의 병사, 10명 이상의 집정관급 사령관의 전사와 함께 로마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공포에 떨게 한 한니발 전쟁을 종식시켰습니다. 이듬해 개선한 스키피오가 행군하는 연도는 백마를 탄 개선장군을 환영하는 인파로 넘쳐났습니다.
평화를 되찾은 로마 그리고 원로원은 34세의 그에게 ‘아프리카누스’(Africanus: 아프리카를 제압한 자)라는 존칭을 부여했습니다. 또한 원로원 의원 300명 가운데 가장 큰 영향력을 갖는 지위인 ‘프린키페스’(Principes: 제1인자)로 추대했습니다. 그 후 15년간은 스키피오의 전성기였습니다. 그러나 반란을 일으킨 마케도니아(기원전 197년)와 시리아(기원전 190년) 왕국을 굴복시키고 귀국한 그를 맞은 것은 호민관 두 사람의 고발장이었습니다.
고발 내용은 시리아로부터 받은 배상금의 사용처가 불분명하고, 17년 전 시칠리아 섬 사령관 시절 한니발이 점령하고 있던 본토의 도시 로크리 탈환 작전에 나선 것은 임지를 이탈한 월권행위이며, 시리아가 포로로 붙잡은 스키피오의 아들을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돌려보낸 데는 뭔가 흑막이 있다는 것 등이었습니다. 목구멍만 넘어가면 뜨거움을 잊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공금횡령(스키피오 사후 2년 뒤 무혐의로 판명됨)을 이유로 정적을 실각시키려는 세력의 배후는 변설에 능한 원로원 의원 마르쿠스 카토였습니다. 그는 농민 출신으로 스키피오의 코르넬리우스 가문과 대립관계에 있던 발레리우스 가문에 의해 발탁되어 순조롭게 출세한 ‘신인’이었습니다. 발군의 연설꾼인 카토는 당시의 ‘유력자’를 신랄하게 공격하고, 연설을 유머로 채색하여 청중을 매료시키는 달인이었습니다.
자존심이 강한 스키피오는 증인 심문 석상에서 울분을 토했습니다. “이 스키피오를 고발하는 자의 기소 이유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로마 시민에게 어울리는 행위라고 생각되지 않소. 스키피오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지금 나를 고발하는 자들도 고발할 자유는커녕 육신조차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오.” 그리고 며칠 뒤 로마를 떠나 동맹 시 나폴리 근처의 바닷가 별장으로 가버렸습니다. 카토가 득세한 로마에는 한 번의 눈길도 주지 않았습니다.
기원전 183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별장 은거 4년 만에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가족묘지가 로마 영토 안에 있다는 이유로 아피아 가도 연변의 선영에 묻히는 것도 거부했습니다. “배은망덕한 조국이여, 그대는 내 뼈를 갖지 못할 것이다”라는 유언과 함께. 우연이랄까, 세계 전사 상 스키피오와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던 64세의 명장 한니발도 그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외적이 사라진 로마는 새로운 영웅 율리우스 카에사르(Julius Caesar 기원전100~기원전44)가 등장하기까지 100여 년간 정적간의 동족상잔, 동맹 시(도시국가 로마와 동맹을 맺은 이탈리아 반도 내의 도시들) 반란, 세 차례의 노예반란 등 혼미와 자중지란을 겪었습니다. “강대국이라 할지라도 언제까지나 평화로울 수는 없다. 국외에는 적이 없다 해도 국내에 적을 갖게 되기 때문”이라고 한 한니발의 경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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