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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복지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
23: 1-13
1.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2.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정당한 증거를 하지 말며
3.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찌니라
4.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찌며
5.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삼가 버려두지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리울찌니라
6. 너는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공평치 않게 하지 말며
7. 거짓 일을 멀리하며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를 죽이지 말라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
8.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9.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정경을 아느니라
10. 너는 육년 동안은 너의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11. 제 칠년에는 갈지 말고 묵여 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로 먹게 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 너의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 할찌니라
12. 너는 육일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제 칠일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 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
13. 내가 네게 이른 모든 일을 삼가 지키고 다른 신들의 이름은 부르지도 말며 네 입에서 들리게도 말찌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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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가 인간답게 사는 것에 대하여 매우 관심이 깊으십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닮은 모습으로 산다는 의미입니다. 처음에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을 때,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닮은 모습으로 사는 것을 보셨을 때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타락하여 하나님을 닮은 모습을 잃어버린 채로 서로 미워하며 인간답지 못한 모습으로 사는 것을 보시며 안타까워하시고 슬퍼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신 뒤에, 당신이 심혈을 기울여 만드신 세상과 만물의 관리를 맡기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받은 사명에 충성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단이 찾아와서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의심을 심었고,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고 제 멋대로 살고 싶은 욕망을 넣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고 하나님을 등지고 이웃을 의심하고 미워하는 채로 제각기 악한 길을 가면서 불행에 빠져버렸습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간다는 말은 곧 지으신 하나님을 닮은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서로 배려하며 사는 것이 곧 인간답게 사는 것이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바입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하여 배려하며 살아가는 것을 요즈음말로 복지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복지에 대하여 매우 깊이 관여하십니다.
근년의 우리사회의 이슈는 복지 문제이고, 열린 정부는 분배우선, 복지우선 정책을 펴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복지국가, 즉 서로 배려하고 보살피는 사회가 되려면 정부가 강제로 법을 만든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이 지으실 때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으로만 가능해집니다.
스웨덴이나 영국 등 유럽의 복지국가들은 그동안 지급하던 복지혜택들을 축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이 변하지 않고 제도만 바뀐 복지는 결국 바닥을 드러낸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기를 원하실까요?
첫째, 언어의 정의를 이루라.
본문에,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라고 하셨습니다.
허망한 풍설이란 유언비어, 거짓말, 악한 말, 허망한 말, 파괴적인 언어 등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말은 자연의 소리와는 다릅니다. 바람소리나 천둥소리나 새 소리 등은 어떤 현상을 나타내는 소리일 뿐이지 그것에 어떤 명령이나 무엇을 만드는 능력은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의 말씀은 곧 창조의 능력이었습니다.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자 우주에 빛이 생겼고, “땅은 식물을 내라.” 하시자 땅에서 각종 식물이 돋아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명령이지 단순한 소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언어를 당신을 닮은 존재로 만드신 사람에게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글을 만들어 그 말을 남기고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말에도 권세가 있습니다. 사람이 말로 욕을 하면 상대방이 주먹으로 얻어맞지 않았는데도 마음이 아픕니다. 상대가 사랑을 고백하면 듣는 사람의 가슴이 따스해지고 힘이 납니다. 사람의 말은 소리가 아니라 의미이고 능력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복지, 즉 서로 잘 사는 사회가 되게 하려면 가장 먼저 무엇이 있어야 하겠습니까? 첫째로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을 다듬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 없이 쏘아댄 말이나 생각 없이 쏟아낸 남 이야기 때문에 상처를 받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내가 누구를 실컷 욕하고 비난해서 그의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해 있는데, 그에게 물질로 무엇을 도와준다고 도움이 되겠습니까? 복지의 첫 걸음은 말로 남을 해치지 않는 것이고, 따스한 말로 남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악하고 헛된 소문을 만들어서 퍼뜨리는 일은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내고 넘어뜨리는 악한 행위입니다. 나쁜 소문, 근거 없는 비난을 퍼뜨리는 것은 전염병을 퍼뜨리는 일보다 더 악합니다. 한 나라의 복지가 공중보건위생을 철저하게 해서 전염병을 막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면,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하고 낙심시키는 나쁜 소문을 막는 일은 전염병을 막는 일보다 더 급한 일입니다.
거짓말이나 유언비어가 횡행하게 되면 당한 사람의 마음만 상하고 맙니까?
그것은 나라 전체를 망칠 수가 있습니다. 정치인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상대당의 후보를 거짓말로 중상모략 하는 것은, 자격 있는 사람을 당선되지 못하게 하고, 자격 없고 악한 사람을 당선되게 만들어서 나라를 통째로 망하게 하는 일이 됩니다. 그러므로 ‘복지’ 하면 가난한 사람에게 세금을 덜 내게 해주고, 부자에게는 무거운 세금을 거두어서 대중교통비 싸게 해주고, 치료비 덜 들어가게 하는 정도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업수당을 많이 주어 일을 하지 않아도 생활 할 수 있게 하는 일을 복지라는 이름으로 확대해 왔는데, 그것은 사람들을 잘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게으름에 빠지게 하여 나라의 경제를 적자투성이로 만듭니다. 그러니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복지는 사람들이 서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허망한 풍설, 거짓말, 남에 대한 비난을 제거하지 않으면 어떤 사회도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가 없고, 어떤 나라도 복지국가가 될 수가 없습니다.
90년대에 서울대학교에서 “모든 질서와 주어지는 것은 거부하자, 거꾸로 생각하자, 그리고 우리가 다시 판단하자” 는 운동이 벌어진 적이 있습니다. ‘이혼이 왜 나쁘냐? 동성연애가 왜 비정상이냐? 간음이 왜 죄가 되느냐? 도적질이 왜 나쁘냐? 살인이 왜 죄냐?’ 라고 반문하면서, 모든 것을 뒤집어 보고 우리가 다시 판단하자고 했습니다. 기존의 질서와 가치관을 거부하고 각자 자기가 주체가 되어서 자기 판단대로 살자는 것입니다. 생각 없이 들으면 멋진말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선 악의 기준을 없애고, 하나님의 명령을 묵살해 버리고 우리가 주인 되어 살자는 것으로, 사람다운 삶에서 멀어지게 하려는 사상입니다. 그렇게 사는 곳에는 참된 복지가 없습니다.
완벽한 복지국가를 지향하고 시작한 공산주의 국가에 복지가 있습니까? 북한 땅에는 복지가 이루어졌습니까?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며, 하나님이 제정하신 기본질서를 존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복지의 기초입니다. 그것이 없이는 아무리 멋진 아이디어를 내도 진정한 복지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복지는 거짓 공약입니다. 그런 말로 현혹하는 정치인들을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말라.”(1) 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복지정책이 잘 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사회에 거짓말과 헛소문과 위증이 난무한다면, 그 사회가 살아남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인간의 복지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언어를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고, 어느 정당이 복지를 내세우고 있는데 그것이 진정인가를 알아보려면, 그들이 집권하려는 목적으로 상대방을 모략하고 거짓말 하는 사람들인가 아닌가를 보면 압니다. 말로 정의를 이루지 못하고, 말로 남을 배려하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로 행동으로 남을 배려하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허망한 풍설을 전하지 말라.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지 말라는 말씀들은 우선 그런 악한 언어들을 근절해야 인간다운 사회가 이루어지고, 그것이 진정한 복지가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그렇다면 허망한 풍설과 거짓을 철저하게 멀리 해야 합니다.
둘째, 정당한 판결로 사회 정의를 이루라.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살다 보면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거짓말 하는 사람도 생기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도 생깁니다. 그래서 재판관을 두어 잘잘못을 가리고 억울함을 풀어주게 되는데, 문제는 그 재판관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공정한 재판을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재판관이 재판을 공정하게 하지 못하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는데, 뇌물을 먹고 불의한 재판을 하는 경우도 있고, 부자가 나쁜 짓을 했을 것이라는 편견으로 가난한 사람의 편을 들어서 판결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으며, 다수의 압력을 느껴서 소수가 잘못했다고 판단해 버리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경우가 다 잘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의가 아니며, 그런 재판관 아래서는 복지사회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정당한 증거를 하지 말며” 2절의 말씀입니다. 수가 많다고 수에 눌려서 판결을 한다면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재판관이라도 다수의 위세에 눌려서 옳은 판결을 못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지난번에 헌법재판관들은 대통령 탄핵사건을 판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헌법재판관들은 다수의 민심이 두려워서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이 오늘 이 나라의 문제를 더욱 심화시킨 원인중 하나입니다.
아합 왕 때에는 모든 선지자가 아합 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왕이 원하는 예언만을 했습니다. 그런데 미가야 라는 선지자는 모두가 두려워서 거짓 예언을 하고 있을 때 혼자서 하나님의 말씀을 솔직하게 전하다가 학대를 받고 투옥되었습니다(왕상22:1-53). 예수님도 다수의 아우성에 굴복한 빌라도가 내린 판결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다수에게 굴복하는 것은 정의가 아닙니다. 다수편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닙니다.
또 하나의 왜곡된 생각은, 가난한 사람은 다 의인이고, 부자는 다 악인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정의로운 판단이 아닙니다. 3절에서 “가난한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라.”고 하셨고, 6절에서 “가난한자의 송사라고 공평치 않게 하지 말며,”라고 하셨습니다. 레19:15에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재판할지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민주세력이라는 사람들은, 부자는 다 불의한 사람들이고 가난한자는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불의한 사람이 부자가 될 기회가 많았음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게으른 가난뱅이도 있고, 착한 부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성경은 부자도 불의할 수 있다고 말씀하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무조건 편들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 있는 것과 없는 것, 그것이 의와 불의를 구분하는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노동자와 농민은 의롭다는 것은 성경과 반대되는 사상입니다. 나쁜 부자에게 빼앗겨서 가난하게 된 것은 동정할 일이지만, 게을러서 가난하게 된 것은 사실은 악한 것으로, 동정의 여지가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부자가 된 사람은 악이지만, 열심히 일해서 부자가 된 사람을 악인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가난하다고 멸시하거나 반대로 가난하다고 무조건 편드는 것은 정의가 아니고 그런 편견으로는 진정한 복지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재판관이 어느 한편에 치우쳐서 판결을 하거나, 혹은 시대정신이라는 것을 구현하기 위해서 판결 하는 것은 불의함입니다. 선과 악을 바르게 분별하여 밝힘으로 악이 심판받고 의가 드러나게 하는 공정한 재판관이 있어야 그런 사회가 복지사회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8절에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뇌물을 받으면 눈이 어두워져서 판단이 굽어지게 마련이고, 그러면 정의는 사라지고 맙니다. 뇌물로 승리한 사람은 앞으로도 세상을 그렇게 살게 만드니, 그 사람을 망친 것이고, 뇌물 먹은 재판관 때문에 패배한 사람은 가슴 아파 하면서 나중에 그 사람도 뇌물로 상대를 이기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진리와 정의가 사라질 것이니, 사람들 전체에게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정의가 하수처럼 흐르기를 바라시는 하나님께 씻지 못할 죄를 짓는 것이며, 그렇게 정의롭지 못한 세상은 당연히 망하는 것입니다. 부자나 가난 때문에 편견을 받는 사회가 아니라, 돈과 지위에 상관없이 공평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하나님이 바라시는데, 그것이 복지사회입니다.
셋째, 휴식과 재충전을 가지라.
완전한 복지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의 휴식과 재충전까지 배려하는 것입니다. 10절에는 안식년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레25: 3-7에도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논이나 밭에 농사할 때, 육 년 동안은 땅을 갈아서 곡식을 심어 거두고, 7년째 되는 해는 곡식을 심지 말고 놔두어서 땅도 힘을 회복하게 하고, 그 땅에서 자연적으로 돋아난 곡식은 이방인과 나그네와 짐승들이 거두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땅을 배려하는 말씀이 아니라 농사하는 사람과 나그네를 배려하는 복지차원의 말씀입니다. 네가 아무리 땅 주인이라 할지라도 6년 동안 농사 지어 먹었으면 감사하면서 한해는 묵혀 두어라. 그래서 가난한 사람과 나그네가 네 땅에서 난 곡식을 먹게 해 주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복지입니다.
땅도 해마다 연속해서 곡식을 심으면 산성화가 되어 소출이 줄고 병이 생깁니다. 나중에는 농사 못하는 땅이 됩니다. 그러므로 7년째는 그대로 묵혀 두어서 땅이 회복될 수 있는 기회를 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농부도 한 해 동안 쉴 기회를 주고, 땅도 힘을 다음해에는 더 많은 소출을 얻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이런 제도가 없다면 농사짓는 농부는 평생 쉴 기회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목사에게 주는 안식년도 이와 같습니다. 계속해서 설교하고 심방하고 성도들의 문제로 고민하고 걱정하며 살다보면, 목사도 속이 텅텅 비게 됩니다.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아야 하고, 누군가에게 배워야 할 필요가 절실해집니다. 신학교 겨우 몇 년 동안 공부한 것을 가지고 수 십년을 우려먹으며 재충전할 기회도 주지 않고 계속 일만 시키면, 그 목사님에게서 무슨 새로운 것이나 깊이 있고 은혜스러운 말씀을 얻어먹을 수 있겠습니까? 목사님들에게 안식년을 드리고 휴가를 드리는 것은 성도 자신들을 위해서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영국 교회는 목사님들에게 일 년에 4 주간은 어김없이 휴가를 준답니다. 안식년은 아예 1년 동안 쉬게 하고, 보통 해도에 4주간은 휴가를 갖게 합니다. 이스터 할리데이라고 해서 부활절 지나서 한 주간을 쉬게 하고, 여름에 두 주간 휴가를 드리고, 성탄절에 또 한 주간 휴가를 드립니다.
한국의 목사님들에게는 너무나 부러운 이야기입니다. 저야 여러분이 배려해 주셔서 안식년 대신에 해마다 한 달을 쉬며 충전하지만, 한국교회에는 그런 휴가를 전혀 갖지 못하는 목사님들이 95%가 넘습니다. 하나님은 땅에게도 일 년의 휴가를 주라고 하시는데, 성도들이 자기 목사님에게 평생에 한 번도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기회를 드리지 않는 것은 무지한 일입니다.
12절에는 안식일에 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육일동안 일하고 제 칠일에 쉬라. 그러면 소와 나귀가 숨을 돌리고 종과 그 자식들도 숨을 돌리리라.” 이 말씀 역시 인간의 복지를 위한 하나님의 완전한 처방입니다. 사실 이보다 더 좋은 처방은 인간이 낼 수 없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그동안 눈코 뜰새 없이 일했습니다.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서 죽어라고 일해야 했고, 조금이라도 쉬면 먹을 것을 얻을 수가 없으니 쉴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그 덕분에 우리나라가 최단시간에 최빈국에서 세계 경제 10위권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죽도록 일만 하며 살다 보니 한국 사람들은 휴가라는 개념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군대 간 아들이 일 년에 한 번 휴가를 왔기 때문에, 휴가는 군인이 집에 오는 것으로 인식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던 때부터 일주일에 하루는 꼭꼭 쉬는 제도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안식일입니다. 엿새는 열심히 일을 하고, 일곱째 되는 날은 일을 멈추고 숨을 돌리며 쉬라. 네 집에서 부리는 종들도 주일날에는 일에서 쉬게 해주라. 이게 복지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그냥 아무것도 안하고 쉬면 피곤이 풀립니까? 가슴이 채워집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날에 하나님 앞에 모이라고 하십니다. 교회에 가서 예배하면서 한주간의 삶을 돌아보고,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영육의 힘을 충전 받는 것이 몸과 마음이 새 힘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제정하신 1/7 휴식제도입니다.
그런데 쉬는 시간이 너무 많으면 또 문제가 됩니다. 일주일에 하루만 쉬라고 분명하게 정해 주셨는데, 요즘에는 주 5일 근무제라는 것이 시행되기 시작했습니다. 금요일 오후부터 이틀 반을 꼬박 쉬는 제도입니다. T. G. I Friday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Thank's God, I'ts Friday”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이 금요일입니다.”라는 말의 약자입니다. 들어보니까 굉장히 믿음 있는 사람들의 말 같지요? 천만에요, 사실은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는 의미는 없고, ‘진탕 술 마시고 노는 날이 돌아왔으니 신난다.’는 말입니다.
이 제도를 일찍 시행한 유럽을 보면, 젊은이들은 그 이틀반 동안에 교회에 가는 것이 아니라, 술을 진탕 퍼 마시고 광란의 춤을 추며 놀다가 월요일 아침에는 파김치가 되어서 직장에 나옵니다. 이틀 동안 심신을 푹 쉬고 온 것이 아니라, 밤을 새우며 술을 퍼 마시다가 오니 몸은 지쳐있고, 이틀 반이나 일을 하지 않았으니 손과 마음이 굳어서 월요일에는 일이 더 안 되고 피곤하기만 한 월요병이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생산성도 너무나 떨어집니다.
왜 이런 부작용이 생기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본래 설계하신 1/7휴식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를 위해서 변형시킨 2.5/7 을 쉬려하기 때문입니다.
소위 복지선진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직장을 잃은 사람에게 실직수당을 줍니다. 그런데 그 실직수당이 시시한 직장 다니며 월급 받는 것보다 낫습니다. 그래서 형식적으로 가끔씩 직장을 구하러 다니는 체만 하면서, 실제는 전혀 일하지 않고 실직수당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다보니 일하기 싫은 사람이 늘어납니다. 그러면 결국은 사회가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진정한 복지의 기본은 성경에 다 있습니다. 거짓말, 허망한 풍설을 말하지 말고 정직한 생활을 하는 것, 가난한 사람의 편을 들어 부자를 구박하는 정책을 펴지 않고 공정한 판단을 하고 빈 부 모두를 위해 정책을 펴는 것, 엿새 동안은 아주 열심히 일하게 하고 일곱째 날은 쉬면서 하나님 앞에 나가 경배함으로 영육을 충전시키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제정하신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복지입니다. 이것에 위반되는 모든 복지는 결국 복지가 아닙니다.
결론으로 13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이른 모든 일을 삼가 지키고, 다른 신들의 이름은 부르지도 말며 들리게도 말라.” 이 말씀들은 인간이 만든 규범이 아니라 하나님이 제정하신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법입니다.
그런데 왜 이 법을 말씀하다가 ‘다른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도 말라’고 하셨을까요?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게 되면, 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법을 상대적인 것으로 취급하고 자기들 생각으로 복지 법을 만들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복지를 한답시고 사람을 망가뜨리는 정책을 만들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너희 창조자요, 하나님만 인간을 제대로 아시기 때문에 진정한 복지사회를 건설하고 인간답게 살고 싶으면, 하나님만 섬기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배려하시는지, 하나님이 우리의 복지에 관하여 얼마나 관심이 많으신지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은 기독교의 경전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사용설명서입니다. 이 말씀을 모르는 채 정치를 하니 나라가 엉망이고 말씀을 모르면서 사람을 가르치니 교육이 도리어 사람을 망치고 이 말씀을 모르면서 결혼하니 가정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인간답게 살아서 자신과 남을 배려하는 사람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