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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13
요단을 건너라. / 조상호 목사
지구상에는 여러 나라가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 가장 비옥하고 풍요로운 나라 중에 한 나라를 꼽으라면 이웃에 있는 호주입니다.
그런데 이 호주가 개척될 당시의 역사를 보면 다음과 같은 감격적인 일화가 있습니다.
원래 호주는 1788년에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국 내에서 죄를 지은 사람들을 배에 싣고 와 수용하던 곳이었습니다. 뉴질랜드에는 영국의 뼈대있는 가문의 사람들이 이민 온 것에 비해, 호주는 영국에서 나쁜 짓을 한 죄수들이 이민을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국에서는 ‘담’, ‘칸막이’ 등의 의미를 가진 패널이라는 단어와 ‘식민지’라는 의미의 컬론을 합해서 호주를 ‘패널 컬론‘이라고 부르고, 해안 쪽에 작은 지역을 선정해서 그곳에 죄수들을 살게 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차츰 흘러가면서 인구가 늘기 시작하자 자연히 농토가 더 필요하고 살아가야 할 공간이 더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늘어나는 사람들에 비해 넓힐 수 있는 땅이 없었습니다. 남쪽은 사막지대입니다. 북쪽은 늪지대였습니다. 동쪽은 바다였습니다. 유일하게 갈 수 있는 곳이 서쪽인데, 서쪽에는 높은 산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이 산은 장벽산맥이라고 별명이 붙을 만큼 어느 누구도 넘어가 보지 못한 험악한 산이었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그 산을 올랐던 사람들 가운데 돌아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그런 산이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모여 있던 사람들은 절망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우리에겐 미래가 없지 않은가, 우리가 더 넓혀 살아갈 땅이 없는데 어떻게 더 살아가란 말인가?"
절망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때에 그들 가운데 세 사람의 청년이 산에 도전을 했습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만류했습니다.
"당신들의 용기는 좋지만 그 산을 올라갔다 돌아온 자가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 산을 올라갈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만류했지만, 그들은 “우리의 미래를 위해 이 산은 반드시 정복되어져야 한다”고 하면서 그 산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죽음의 고비를 수 차례 겪었습니다. 굶주림에 시달려 가면서 드디어 1812년 그들은 그 높은 산의 정상을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 산을 오르는 과정은 대단히 힘들었지만, 그들이 산꼭대기를 오르는 순간, 그들은 그들 앞에 펼쳐진 무한대의 가능성과 희망이 넘치는 넓은 대평원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것이 오늘의 비옥한 호주를 이루는 출발점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오늘 호주 지도와 호주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세 청년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높은 산 앞에서 절망했습니다.
비전의 땅 밟기를 포기했습니다.
오히려 비전의 사람들의 도전을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세 청년은 달랐습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었지만, 아무도 그 산을 올라갔다가 돌아 온 사람이 없었지만, 그들은 그 높은 산에 도전했습니다. 그리고 그 벽을 뛰어 넘었습니다.
여러분! 비전의 땅을 정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비전 성취는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장애물을 극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십시오. 그들이 비전의 땅인 가나안을 쉽게 정복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요단강을 건넌 후, 비전의 땅을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요단 건너기를 포기했다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비전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요단은 정복해야할 산이고 넘어야 할 강이었습니다.
물론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오랫동안 ‘요단강‘하면,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는 찬송가 가사 때문에 죽음과 같은 말로 사용되어왔습니다만, 요단강은 죽음이 아니라 우리가 비전 성취를 위해 통과해야 할 장벽입니다. 요단을 건너지 못하면 비전을 이룰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가지고 <요단을 건너라>는 제목을 가지고 함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요단을 건널 수 있을까요?
최선을 다해 준비하라.
요단을 건너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 준비해야 합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서는 건너지 아니하고 거기서 유숙하니라.”
비전의 사람 여호수아가 요단을 건너기 위해 맨 처음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는 Early in the morning,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서 다른 곳에서도 그가 아침 일찍 일어났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6:12)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니라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궤를 메고....”
또 (7:16) 말씀입니다.
“이에 여호수아가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그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그리고 이번에는 (8:10)을 보겠습니다.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백성을 점고하고...”
이러한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호수아는 아침 일찍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가 아침 일찍부터 일어났을까요?
그가 나이 들어 아침잠이 없어서 일찍 일어났습니까?
아니면 몸 관리하려고 운동하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까?
그가 무슨 이유로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까?
그는 이른 시간부터 일을 하기 위해서 일찍 일어났습니다.
여호수아는 요단을 건너기 위해, 비전의 땅을 정복하기 위해 일찍 일어났습니다.
그는 아침 이른 시간부터 비전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 준비했습니다. 물론 가나안은 이미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입니다.
(1:3)에 보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다”고 하나님께서 이미 여호수아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비전의 땅인 가나안은 여호수아에 의해 정복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할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전의 땅을 정복하기 위해 일찍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준비했습니다.
우리는 여호수아의 이러한 부지런한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월이 그렇게 길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부지런해야 합니다. 어제 오후에 점심식사 시간쯤 TV를 틀었는데, 바로 Sleepy Head라는 침대를 선전하는 광고가 방영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선전을 보고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 생각나지 않지만, 대충 이러한 형태로 광고가 진행되었습니다. 앞부분은 기억할 수 없고, 중간 정도가 되었을 때, 화면에 화장실이 등장하고 어느 한 부인이 화장실로 들어가는데, 6months라는 글자가 나옵니다. 이 의미는 일생동안 화장실에 들어가 있는 기간이 6개월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일생동안 전화하는 기간은 2년 정도이고,
일생동안 12년 동안 TV를 시청하며,
일생동안 잠자는 시간은 무려 26년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오랜 세월동안 눕게될 침대는 좋은 것을 사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광고였습니다.
인간의 평균 수명이 78년이라고 한다면 일반적으로 무려 26년 동안 잠을 잔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1/3을 잠자는 것으로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보통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위대하게 쓰임 받은 인물들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부지런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밀턴은 그의 위대한 저서 <실락원>을 완성시키기 위해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글을 썼다고 합니다.
또 감리교회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존 웨슬리는 60년 이상을 새벽4시에 잠자리에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또 일반사원으로 입사해서 회장의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의 인물이신 이명박집사님은 항상 새벽 5시에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는 그의 자서전 <신화는 없다>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현대라는 기업에서 나는 여한이 없이 일했다. 일하고 또 일했다. 현대에서의 27년. 20대 이사, 30대 사장, 40대 회장. 사람들은 나를 ‘신화의 주인공’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신화는 그것을 신화라고 명명하는 사람들, 즉 밖에서 보는 사람들에게만 신화일 뿐이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신화는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부지런한 사람이었습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이후 지금까지 5시간 이상 자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것은 어려서부터 5시만 되면 깨워서 가족 기도회를 갖던 어머니 덕분이었습니다. 결국 그러한 근면과 부지런함은 그룹 총수의 눈에 띄게 되었고, 후에는 회사의 최고 경영자의 자리에 오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부지런한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비전의 땅을 정복하려면, 비전을 성취하려면, 일찍 일어나 최선을 다해 준비해야 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올빼미가 되어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경우가 많은데, 삶의 패턴을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자도록 만드셨습니다. 밤에 자고 낮에 일하는 것이 순리입니다. 그것이 일을 효과적으로 하는 비결입니다. 일찍 일어나서 하루를 기도로 시작해 보십시오.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 힘드신 분들은 이명박집사님의 자서전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사람들은 내가 일찍 일어나는데 천부적인 능력을 타고났다고 하지만, 노력, 반복된 노력 이외의 비결은 없었다”
여러분! 비전의 땅을 정복하기 원하십니까?
비전을 성취하기 원하십니까?
세운 목표를 이루시기 원하십니까?
비전의 사람 여호수아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존 웨슬리목사님처럼, 이명박집사님처럼, 일찍 일어나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고 최선을 다해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영국 속담 “일찍 일어나는 새는 벌레를 잡는다”는 말처럼, 최선을 다해 준비한 사람이 비전의 땅을 정복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만을 바라보라.
요단을 건너려면 둘째로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2절과 3절을 보겠습니다.
“삼 일 후에 유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전의 땅을 정복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요단을 기필코 건너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언약궤를 보고 뒤를 좇아가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이 명령이 이해가 되십니까?
일반적으로 강을 건너려면 ‘배를 만들라’, ‘다리를 찾아 보라‘고 해야 하는데, 난데없이 ’언약궤를 보고 좇아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명령에는 큰 비밀이 있습니다.
언약궤가 무엇입니까?
언약궤 속에는 십계명을 적은 두 돌판과 만나 항아리,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 있습니다. 이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언약궤를 앞세우고 그 뒤를 따라갔습니다(민10:33~36).
또 행진을 하다가 쉬어갈 때도 언약궤를 진 한 복판에 세우고 그 주위를 둘러 진을 쳤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언약궤를 좇아가되, 그냥 좇아가는 것이 아니고 방법이 있습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궤를 좇아갈 때, 가까이 하지 말고 2000규빗 정도의 거리를 두라고 하십니다. 한 규빗은 손가락 끝에서부터 팔꿈치까지의 거리를 말하기 때문에, 2000규빗은 약900m 정도의 거리가 됩니다. 굉장히 먼 거리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900m나 먼 거리 뒤에서 언약궤를 좇으라고 합니까?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정만 60만명, 그러니까 부녀자와 어린아이를 합해서 적어도 200만명 이상의 엄청난 숫자입니다. 그런데 언약궤가 그들의 코앞에 있다면 앞에 있는 사람들은 그 언약궤를 볼 수 있지만, 뒤에 있는 사람들은 무엇을 봅니까?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기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의 뒤통수만 볼 수 있을 뿐, 언약궤를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언약궤와의 거리를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 뒤를 좇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명령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내가 앞장선다. 내가 너희들을 인도한다. 나를 보고 따르라.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시선을 다른 곳에 두지 말고 나만 바라보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신 메시지입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요단을 건너라, 주만 바라보고 비전을 이루라”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주님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양다리 걸치고 주님과 세상 양쪽을 곁눈질하고 있습니까?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C. S. Lewis는 유명한 이런 풍자적 얘기를 했습니다.
어느 날 고양이 한 마리가 런던을 방문했습니다. 루이스는 런던을 방문하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오는 고양이에게 물었습니다. 이 고양이의 이름은 푸쉬였는데 "푸쉬야, 푸쉬야 너 어디 갔다오니?" "예, 나는 여왕을 만나러 런던에 갔다오는 길입니다." 루이스는 고양이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푸쉬야 너는 런던에 가서 무엇을 보았니?" "나는 여왕님의 의자 밑에 있는 생쥐를 보았습니다." “푸쉬야 너는 런던의 아름다운 시가지와 엘리자벳 여왕이 사는 찬란한 궁궐과 엘리자벳 영왕님을 보지 않았니?” “아니요, 저는 여왕님의 의자 밑에 있는 생쥐만 보고 왔는걸요.”
여러분, 루이스의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어리석은 고양이는 런던에 그 아름다운 왕궁에 가서 엘리자벳 여왕이나 찬란한 궁궐의 그 아름다운 역사적인 사적을 본 것이 아니라, 겨우 여왕의 의자 밑에 기어다니는 생쥐를 보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주위를 보면 어리석은 생쥐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정작 필요한 핵심은 보지 못하고 곁가지만을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의 썩어져 없어질 것에 목숨 걸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비행기 한 대만 부딪혀도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극히 불완전한 것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핵심을 찾아야 하고, 그 핵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핵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14:6)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요10:14)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길, 진리의 길, 평화의 길, 구원의 길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진정으로 돌보는,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던지신 선한 목자이십니다.
앞으로도 우리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실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참 길이신 주님만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선한 목자되신 주님만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많이 있지만, 요단 도하 작전의 사령관이신 주님만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인도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요단을 건널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은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스스로 성결케 하라
요단을 건너기 위한 세 번째 방법은 먼저 성결해야 합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
지금 요단을 앞에 두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최대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요단 도하에 따른 실제적인 방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시 한번 이상한 명령을 내립니다.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그들이 원하는 대답은 이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러한 상황에 있었다면 우리 역시 그러한 대답을 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문제 해결책을 달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명령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략이나 방법에 관심을 두지 말라. 더 중요한 것은 너희들 삶이 거룩한가에 있다.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인가 아닌가 스스로 생각해 보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문제를 만나면 전략과 방법론에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 앞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방법이 아니라 성결입니다. 전략이 아니라 거룩입니다. 왜냐하면 성결과 거룩은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성결케 하시기 바랍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며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면 우리에게 닥친 문제는 아무 것도 아닌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서 나머지를 책임져 주실 줄로 믿습니다.
지구촌 교회 이동원목사님께서 <지금은 다르게 살 때입니다>라는 책에서 이러한 예화를 적은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남북 전쟁이 한참일 때, 아직도 북군이 남군에 비해서 전세가 불라할 때였습니다.
링컨의 참모가 링컨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각하, 하나님은 우리 북군 편에 계실까요? 남군편에 계실까요?”
이 질문을 받은 링컨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나는 그런 것 가지고 고민하지 않네. 내 고민은 하나님이 우리편에 계신가, 적의 편에 계신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나 하는 것이네.”
여러분은 하나님 편에 서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입니까?
우리가 성결하여 하나님 마음에 들면 우리 앞에 놓여있는 요단을 건널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비전의 땅을 정복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요단 도하 작전 세 번째로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나아가라
마지막으로 요단을 건너기 위해서는 믿음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6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일러 가로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나아가니라.”
또 8절을 보겠습니다.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언약궤를 메고 건너가라’, ‘요단을 건너가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요단강이 홍해 바다처럼 갈라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을 보면 홍해 바다를 건널 때 모세가 지팡이를 바다 위로 내밀자, 홍해 바다가 좍 갈라져서 그곳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전하게 건넜습니다.
그러나 여기 요단강에서는 달랐습니다. 지금 요단강은 메마른 강이 아닙니다.
15절에 의하면 요단강은 모맥 거두는 시기, 즉 얼음이 녹고 물이 많아지는 시기였기 때문에 강 언덕에까지 강물이 넘실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명령하십니다.
“앞으로 나아가라.”
강물이 출렁거리고 있는 요단을 무작정 건너라고 명하십니다.
그들은 이 명령에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제가 15절하반절과 16절상반절을 읽겠습니다.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명령을 내리신 이유가 있겠지, 주께서 우리를 위한 방법을 준비해 두셨을 거야" 하는 믿음으로 첫 발을 내딛은 바로 그 순간, 위에서부터 흐르던 요단 강물이 멈추기 시작했습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믿음의 역사인 줄로 믿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믿겠습니다”라고 말하지만,
주님은 뭐라고 대답하시는 줄 아십니까? (요11:40)에서 예수님께서는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두 단어의 순서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먼저 뭐 하라고 하십니까?
‘믿으라.‘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본다는 것입니다. 즉 믿으면 본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 없어도, 손에 잡히는 것 없어도, 귀에 들리는 것 없어도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될 줄로 믿습니다. 믿음으로 나아가면 요단을 건너게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루어야 할 비전이 있습니까?
정복해야 할 비전의 땅이 있습니까?
여러분 앞에 넘어야 할 산이 있습니까?
건너야 할 강이 있습니까?
오늘 비전의 사람 여호수아를 보십시오.
가나안의 정복자 여호수아를 배우십시오.
아무리 우리 앞에 높은 산이 가로막혀 있어도, 아무리 출렁거리는 강이 막고 있어도, 비전의 땅을 정복할 수 있는 비결이 여기 있습니다.
매일 매일 최선을 다하십시오.
주님만을 바라보십시오.
날마다 주님 마음에 합하도록 성결을 유지하십시오.
마지막으로 믿음으로 전진하십시오.
우리는 요단을 건너게 될 것입니다. 비전의 땅은 정복될 것입니다.
그 땅은 반드시 우리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비전은 반드시 성취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