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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녕 궤내기당은 굴 내부가 서북(乾)방으로 흘러 기운이 맺힌 좋은 이었지만, 폐쇄될 수밖에 없는 역사의 흐름을 비껴가지 못했다. | ||
어둠의 제전은 삶의 고난을 견디기 위한 방편
악마의 부정적 측면을 쫓아내는 제거 분위기
제주 칠성제·궤내기당 본풀이에도 담긴 의미
고대 페르시아 신화에서 아후라마즈다와 앙그라마이뉴의 싸움은 이후, 선신과 악령의 투쟁으로, 인간시대에 돌입해서는 인간의 내부에 들어온 선과 악의 갈등으로 표현된다. 혼돈의 시대 3천년, 아후라마즈다(빛, 陽)의 시대 3천년, 앙그라마이뉴(어둠, 陰)의 시대 3천년이라는, 절(節)과 중(仲)의 변화를 거쳐 짜라투스트라(인간)의 시대로 이행된다. 신화에서 보면 빛과 어둠 역시 삼천년을 단위로 일정한 주기를 이룬다.
빛의 신화 후에 진행되는 또 다른 신화
아라비아의 어느 사막에 미르타스라는 왕에게는 자하크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기백이 대담하고 용감했으나 아주 순진하고 단순했다. 어느날 안그라마이뉴가 귀족의 모습으로 자하크를 찾아와 권력에 대한 욕망을 부추켰다. 자하크는 안그라마이뉴가 시키는대로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어 마법을 배우면서 더욱 사악하고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안그라마이뉴는 그 다음에 요리사로 변신하여 자하크의 마음을 꼬드겨 왕궁의 요리장이 되었다. 이때 사람들은 열매나 곡식을 먹으며 소박하게 살았는데, 안그라마이뉴는 고기(살생, 희생양의 상징. 필자註)를 요리했다. 끼니 때마다 고기를 새롭게 요리해 바치니 자하크는 감동한 나머지 '왕의 두 어깨(권력의 상징. 필자註)에 입을 맞추는' 요리장의 소박한 소원을 흔쾌히 허락하고 말았다.
안그라마이뉴가 자하크의 두 어깨에 입을 맞추자마자, 자하크의 발밑에서 땅이 열리더니 안그라마이뉴를 집어 삼켰다. 그리고 어깨에서 검은 독뱀 두 마리가 튀어나와 쉭쉭 거렸다. 머리를 자르면 새로운 머리가 튀어나왔다(지배 권력에 대한 끊임없는 인간의 욕망을 상징. 필자註) 세상의 명의들이 모두 모여 치료했지만 뱀을 죽이지도 잘라내지도 못했다(근절하기 어려운 인간의 권력욕에 대한 상징. 필자註)
다시 안그라마이뉴는 명의로 변신하여 "뱀은 결코 죽지 않을 것입니다. 방법은 단 하나, 인간의 뇌(얼, 지혜)를 먹이십시오(인간의 靈性이 자라날 수 없게 하는 행위의 상징. 지배세력의 정신문화 말살의 예. 필자註) 그러면 차차 사라질 것입니다."라는 처방에 자하크는 날마다 젊은이 두 명의 뇌를 뱀에게 바치라 알렸다. 뱀들은 날마다 자라나고 세상은 두려움에 떨었다. 사람들은 노예처럼 움츠리고 미덕은 사라졌다. 대신 사악한 욕망이 판을 쳤다(지배권력을 위한 전쟁과 살육이 정당화되었다. 필자註).
자하크가 이란의 왕좌에 오르자, 이란 젊은이들은 뱀에게 목숨을 바쳐야했다. 이란 사람들은 절망에 가득 차 울었으나, 자하크는 조금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잠시드(아후라마즈다가 영성으로 점지한 인간시대 이란의 첫 번째 왕)의 두 딸에게 뱀을 보살피게 하여, 뱀이 뇌를 먹는 모습을 지켜보게 하였다. 백성들의 자하크에 대한 분노와 증오는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세상은 안그라마이뉴의 뜻대로 완벽하게 황폐해졌다.
훗날 다시 자하크의 후손과 잠시드의 후손이 만나 서로 사랑하게 되고, 사이에 아이를 낳아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비극적인 영웅의 서사시까지 탄생하게 된다. (인간세계의 윤회 상징. 필자註)
어두운 피의 제전, 지하세계의 군주형태
「신의 가면」에서 "호메로스 이전 신화 만신전의 주인공은 뱀신이었고, 제의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남성적인 체육경기(그리스 올림픽, 마야의 축구), 인본주의적인 예술(비너스 축제,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축제, 디오니소스축제, 아폴론 제전 등), 사교적인 즐거움(추수감사제, 신년하례제), 향연과 극장(무당의 춤과 노래를 통한 신명난 오락적 요소) 등에서 느낄 수 있는 쾌활한 정신이 아니라, 어둡고 공포가 가득한 정신이었다. 제물은 꽃 장식을 한 소가 아니라, 돼지와 인간이었다.
제물을 바치는 방향도 빛을 향하여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갔다. 제의의 분위기는 모두가 공유하는 축제의 분위기인 '너희가 주게 하기 위하여 내가 준다'는 소박한 정신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거의 분위기, 즉 '너를 떠나게 하기 위하여 내가 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언제나 악마의 부정적인 측면을 쫓아내게 되면, 건강과 행복, 비옥함과 열매가 자연스러운 원천으로부터 저절로 흘러나올 것이라는 관념이 결부되어 있었다". 제주의 경우 '칠성제' 가 그러하고, 궤내기당의 본풀이 또한 마찬가지로 그러했다.
여기서 이 받아먹는 존재의 모습은 '제우스메넬라키오스'라는 뱀신이었는데, 공교롭게도 김녕 궤내기당신의 이름 역시 본풀이에 나타난 바로는 '문국성'의 이름을 그대로 쓴다. 송당 본향당의 원조 백주또의 큰아들 거멀국 문국성, 신들의 제왕, 북두칠성의 영리한 별(靈性) 이름이 뱀신으로 뒤바뀌는 사례가 보인다.
알궤내기당 본풀이에서 보면 처음에는 문국성 본풀이로 이어지다가 중간에 은근슬쩍 뱀이 끼어들어 문국성이 갑자기 뱀으로 변해서 마을 사람들의 '돗제'를 통해 돼지를 제물로 받아먹는다는 스토리를 갖는데다, 심지어 윗궤내기(김녕사굴)당에서는 아예 인신(처녀)을 제물로 받아먹다가 서린 판관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게 되는 스토리가 전해진다. 이 부분은 그리스로마신화의 '미노타우로스'가 처녀 제물을 기다리며 미궁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어둠의 제전은 문맹의 세계에서 사람들의 삶의 고난과 세파를 견디기 위한 방편으로써의 주술적 거래였다고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인본으로 넘어가기 전 시대의 제의란, 삶의 두려움과 공포를 해결하는데 누군가에게 무조건 빌면서 달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도깨비 영감들이 마을 씨족의 조상신으로 좌정하기도하고, 누군가 신앙민들의 정체성 혼란을 유도했던 계책이었을 가능성도 있다(조수리 옛포제단의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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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혀 있는 김녕사굴 입구. 옛 명칭은 웃궤내기당이다. | ||
아름다운 영성, 인간의 몸을 위하여
신화에 나오는 뱀신의 형상은 악령, 혹은 어두운 세계의 분신으로 선택된 상징물이기도 하고, 끊임없이 새롭게 변화하는 주체(뱀이 허물을 벗듯이)의 상징물이기도 하고, 권력을 지탱하기 위해 냉정한 살육까지도 서슴지 않는 인간의 사악한 본성을 상징하기도 하고, 인간의 이성을 지배하는 지혜의 상징물로 진화하기까지 한다.
「탯줄코드」에서 김영균은 "인간의 간뇌는 뱀의 형상"이라 말한다. 그리고 "새끼줄의 어원 역시 뱀이 서로 꼬아진(陰陽의 교합) 모습"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음과 양은 태양과 달, 빛과 어둠, 하늘과 땅, 남자와 여자, 모든 것에 존재하는 암컷과 수컷. 물과 불, 혹은 모든 생물체 내면에 깃든 두 가지 이중적인 속성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면, '뱀은 뱀이고 신은 신'이지 '뱀은 신이 아니'라는 데 있다. 삿된 기운이 그에 준해 기거할 수 있는 몸 그릇으로 뱀을 선택한 것일 뿐이다. 또한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낸 허상이 제의를 통해 자신의 영기를 전해주어 뱀이 신 노릇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필자는 언급한 바가 있다.
사람의 내부로 들어온 신의 모습에서도, 인간의 속성 중 숨겨진 자아, 다른 하나의 측면이 더 있다는 걸 인간 짜라투스트라는 말을 한다. "육체는 하나의 거대한 이성이며, 하나의 의미를 가진 다양성이고 전쟁이며 평화이고 짐승의 무리이며 목자다" 그러면서 하늘(아후라마즈다)의 독수리와 땅(안그라마이뉴)의 뱀을 그는 친구라고 말을 한다.
인간은 하늘과 땅의 기운으로 이루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초인은 뱀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인정함으로써 그들을 친구로 만들었다(불교 신화의 예). 초인들이 싸웠던 건 부정적 관념, 삿된 기운이지, 어떤 형상를 의미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인간은 신을 알 수가 없다고 한 것이다. <끝>
고춘옥 시인/자문 고강필 백암풍수치료연구소 소장
동굴의 땅 위에 세워놓은 '오목 배꼽' '볼록 배꼽'
김녕 궤내기당-부정적인 신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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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녕리 본향 새당빌레 큰당은 인근 밭까지 넓게 펼쳐진 원구단이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축소되고 네모난 형태로 바뀌었다. 둥그런 구릉에 움푹 들어간 것이 인체의 오목배꼽을 닮았다 | ||
궤내기굴은 김녕 본향당굿의 '출발점'
'돗제'와 '멜굿'으로 안전·풍요를 기원
신당 복원시 본래 기능 회복에 힘써야
제주인에게는 '굿당'하면 떠오르는 낱말이 있다. 수령이 오백년쯤 되는 커다란 팽나무(좋은 기운이 서림을 뜻하는 표식), 오름에 둥그렇게 돌담으로 성역임을 표시한 신당(하늘과 연결된 땅의 통로 배꼽), 암궤(돌혈로 땅의 뼈대를 이루는 기운이 뭉친 곳), 동굴(땅의 자궁), 오방색(다섯 방위 기운인 오방신을 모으는 행위) 소매 깃을 단 옷을 입은 심방(天官, 무당), 춤(신을 기쁘게 하는 행위), 본풀이(사람의 근본이 하늘과 조상에게 있음을 풀어 알리는 심방의 사설), 굿거리 장단의 징소리와 북소리(천신을 부르는 행위), 쌀점, 산판점, 신칼점(단골들의 운수를 점치는 행위), 돌래떡(태양를 상징하는 접시만큼 넓고, 두껍고, 둥근 떡), 월변(달을 상징하는 돌래떡보다 작고, 얇고, 둥근 떡), 각변(땅을 상징하는 네모난 떡), 백시리(흰 쌀로 만든 시루떡), 큰대에 세운 깃발(천지월덕임앙조기-천지의 음덕을 상징하는 깃발, 시왕·十方位기운이 이 깃대를 타고 내려온다고 함) 등이 그것이다. 이것과 함께 펼쳐지는 제주도의 무속 풍경은 다른 지역의 그것과는 다르게 귀기서린 것이 아니라 살갑고 정겨우면서 같이 노는 풍경이다. 그러면서도 사뭇 경건하다. 그래서인지 제주의 어른들은 힘겨운 생계수단인 노동 이외의 모든 일은 '놀이'로 표현한다. '굿'도 역시 '경건한 놀이의식'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기록에 나타난 천신에 대한 신앙
「예기」에 따르면 천신에 대한 신앙은 일찍이 중국의 은(殷)나라 갑골문에서 그 기록을 볼 수 있다. 농경민족이었던 은나라 사람들은 자연환경과 천시(天時)를 주재하고 화(禍)와 복(福)을 내려주는 상제(上帝, 위에서 만물을 살피는 지상신)를 지고신(至高神)으로 믿고 점복(占卜)을 통해서 그의 의지를 알아내고 싶어 했다.
「주례」'대사악' 편에는 "동짓달에 땅 위의 원구(하늘을 본뜬 둥그런 구릉)에서 무악(舞樂)을 연주한다. 무악이 여섯 차례 연주되면 천신이 하강한다"는 기록이 있다.
「왕실의 천지제사」에 보면 천자가 한해에 거행하는 천제에는 동짓날 원구에서 우주의 양기(陽氣)가 시작되는 것을 맞이하여 상제에게 지내는 제사, 봄에 상제에게 곡식이 잘 여물어 풍년이 되기를 기원하는 기곡(祈穀)의 제사, 여름에 가뭄이 들면 상제에게 기우(祈雨)하는 대우(大雩)의 제사, 명당(明堂)에서 상제와 조상에게 올리는 추향(秋享)의 제사 네 가지가 있다고 한다.
이러한 원구제(당굿)가 구현하고자 하는 의미는 첫째, 거행시기로 보면 동지를 한 해의 양기가 처음 싹트는 기점이라 하여 만물이 시작하는 동지에 만물의 시조인 상제에게 나아가 제사를 지냄으로써 존재의 시초와 본원으로 되돌아가는 체험이자 자신을 새롭게 쇄신하는 경건한 의식이었던 것과 둘째, 제사 대상으로 보면 '하늘을 근본으로 삼아 천지운행의 도와 만물생장의 덕을 따른다'는 뜻과 함께 조상도 하늘과 함께 예배의 대상으로 삼아 신성과 분리하지 않고 존재의 시원으로서 받아들이고 있음을 나타낸다-신당에 천지자연과 북두칠성신과 당의 설립자와 조상신위가 같이 있는 이유다-
셋째, 원구제의 민본적 성격으로 보면 백성들의 안정되고 풍요로운 생활을 위해 농업신에게 풍년을 기원하는 것과 해신에게 풍어를 기원하는 의식이었다. 넷째, 제의 의식에 쓰이는 제단과 기물/제물들에 담긴 의미로 보면 '원구(圓丘)'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고 생각했던 고대인들의 우주관과, 하늘에 대한 제사는 높은 곳에서 지내야 한다는 동류상응(同類相應)의 제사관이 담겨 있다.
또한 흙으로 빚은 질그릇과 해와 달의 문양들(돌래떡, 월변, 절변의 모양)은, 모두 천지의 성품과 형상을 담은 것이라고 보며, 깨끗이 땅을 쓸어내고 제사를 지내는 행위는 자연과 생명의 질박한 바탕으로 지고한 존재와 대면하는 공경의 정신(敬天)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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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김녕 본향 성세기당은 암반이 나지막이 솟은 곳에 세워진 볼록배꼽 같은 당이다. | ||
김녕리 본향당과 설촌 유래
김녕리는 '궤내기'라는 어원-궤(동굴)+내/?(있는, 이루어진)+기(장소)-에서도 볼 수 있듯이 지질학적으로 용암동굴이 흐르는 궤 위에 설립된 마을이다.
궤내기굴에서 선사유물들이 발굴된 점 등으로 보아 그 연대가 기원전으로 추측되며, 이곳에서 천지(乾坤)신과 조상신에게 제를 올리게 된 것이 김녕 본향당굿의 출발점이라 한다. 기록으로는 고려시대 '김녕현'으로 처음 나타난다.
'김녕'이라는 마을이름의 유래는 바다에서 보았을 때 좌로 입산봉 우로는 묘산봉이 八자로 앉아 있고 '바지모를. '거커모를. '망모를' 이 능선을 이루었으며, 그 밑으로 신산, 새동산, 남?이 또 하나의 획을 이루었다. 조직된 선으로는 남문?(남쪽골)에서 하?래까지 길게 이어졌고 좌로 소여. 우로 한개코지가 점을 만들어 '金'자 형태를 띠었으며 산에서 바라보았을 때 '平'자를 이룬 모양이어서 '金寧'이라고 명명했다고 전한다.
풍수사 고강필에 의하면 "입산봉(삿갓오름)은 수형(水形)인데다가 분화구에 솟아나는 용천수가 있어 연지를 이루었는데, 이 용천수가 김녕마을 곳곳에서 샘솟는 용천수의 근원으로 볼 수 있다." 며 "묘산봉(궤살미오름)이 둥근 금궤형으로 옆에서 받혀주고 앞은 넓은 바다밭이라 김녕리의 재물(富)을 이루게 하는 요소"라 말한다.
이곳 토착주민들은 대다수가 어업과 해상업 종사자들이라 사계절을 풍랑에 대한 안전을 위해 풍어와 해상업의 풍요를 기원하는 천신, 북두칠성(해상업은 별자리를 보아 방위와 시간을 나타내는 바닷길을 찾았다. 서양의 경우 스텔라/항구의 별)과 해신(용왕)을 위한 제사를 올렸다.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희생제물로 올리는 궤내기당의 '돗제'와 해신제(멜굿) 그물코?가 그것이다.
김녕 본향 새당(神堂·?당>새당) 빌레 큰당은 한라산에서 출발한 용맥이 입산봉(동남방)에서 동쪽으로 휘어감아 굽이치며 둥그런 구릉 중앙에 오목하게 들어가 (하늘과 통하는 땅의 오목배꼽) 바다쪽 서북방으로 기운이 맺힌 당이라 하르방(乾/男)당이라 할 수 있다.
이곳은 원래 당이 설립 되던 당시에는 김녕교회 입구의 맞은편 쪽이 당올레로 보였으나 지금은 밭을 경작하고 있고, 현재는 그 반대편(서북방)으로 출입구를 만들어, 정작 제단이 있어야할 곳으로 들어와 북북동/축(丑)방으로 기도하는 절름발이당이 되어버렸다(조수리 옛 포제단의 예). 대제일(祭日)이 1월 13일인 것으로 미루어 3신위(乾·坤·震)-오행으로 동쪽 木의 수(數)로 마을의 태동, 본향으로서의 기능과 해신당의 기능까지 하고 있다-를 모시는 당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동김녕 본향 성세깃당은 용맥이 입산봉 남(丙午)방에서 흘러들어온 나지막이 솟은 구릉(하늘과 통하는 땅의 볼록 배꼽)인데 주변을 개발과 함께 도로를 내면서 암반(땅의 뼈)을 깎아버려 이곳을 본향으로 하는 동김녕 마을 기운이 허약해질 우려를 낳고 있다.
전형적인 해신당으로 제일(祭日)도 8일(震, 木, 東)이라 여드렛당이라고도 불리우며, 어업과 해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필수적으로 다녔던 당이다. 해서 제단이 동쪽으로 향해야함에도 옛날 본래의 형태와는 달리 지금은 동남(巽)방으로 틀어져 있어 주객전도의 문제(조수리 옛 포제단의 예)가 일어나 외지인에게는 친절하나 토박이들에게는 인심이 사나워지는 형국과 함께 이곳 여자들이 물질하면서 악착같이 살아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제주신당을 문화재로 지정, 복원할 때도 그 의미만 되새길 것이 아니라 신당의 본래기능을 회복하도록 방향과 모양, 청결을 유지하는데 거듭 힘써야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