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여성수필에 나타난 정체성 연구
Ⅱ. 80년대 여성 언술의 특성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여성문학은 남성과 다른 경험을 가진 여성의 경험을 드러내기에는 남성 위주의 인식에서 나온 어휘나 문체가 자연스럽지 못하여 새로운 여성의 어휘와 문체로 쓰여질 것이다. 차옥덕은 여성학 강의에서 남성 언어와 다른 여성 언어의 존재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즉 남성과 다른 경험, 쌓여 있는 분노와 불만을 가진 여성에게 갑갑증과 불편을 벗어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사용하고, 규정하는 주체 자체가 되어 만들고 사용하는 언어와 언어행위의 실현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여남이 해방된 세계관을 지향하는 실천문학으로써 여성문학은 지배자의 시각을 대변하는 여타의 권위주의적 논리와 언어를 일시에 버릴 것을 요청받는다. 우리가 지금까지 익숙해온 언어의 변혁을 꾀하지 않고 ‘여성주의 시각’에 편승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80년대는 여성학적 이론의 보급으로 유교적 가치관이나 가부장적 질서에 관한 질문을 담고 있는 수필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다. 여류작가의 대거 등단으로 인한 여성적 글쓰기가 문단의 화제가 된 바도 있으나, 이는 비단 글쓰기에서 여성성의 발현이라는 영역 확장의 의미만을 지니지는 않는다. 구술되고 있는 문체적 내용에서 기존의 가부장제 중심의 가치관이나 도덕관념 혹은 사회 질서에 대한 문제의식에 더 주목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여성 특유의 유형화된 언술 특성 속에서 억압된 여성의식을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회에서 남성 언어와 여성 언어가 다르다. 크게 보면 우선 목소리가 다른 연유로 인해 모음과 자음값이 다르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어휘의 모양새가 다르기도 하다. 여성과 남성의 성적인 차이가 언어의 차이를 가지고 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이러한 차이를 역사적으로 여성 차별의 결과라 분석하기도 한다. 사물은 그것을 표현해 주는 언어를 갖고, 언어는 그것이 지시하는 사물을 갖는다. 여성의 언어는 냄새를 맡을 수 있고 먹을 수 있는 육체의 언어를 지향하게 된다. 언어는 이미 주어진 사회적 리얼리티를 반영하는 매개물이 아니라 리얼리티 그 자체를 구성하며 또한 주체의 언어 속에서 구성되어진다는 후기 구조주의자들의 주장은 현재의 지배적인 남성의 언술 밑에 억눌려 잠재해 있는 여성의 언술에 대한 환기와 자각, 그리고 언어와 언술에 있어서의 혁명 없이는 여성해방이란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하게 했다.
여성적 글쓰기는 현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가능성을 담보한 과정상의 글쓰기다. 아직까지 그 잠재력이 현실화되지 않은 하나의 이론이며 ‘남성적 글쓰기’를 대체하기보다는 그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대안적 글쓰기인 것이다. 때문에 역사적 존재로서의 여성의 조건과 여성의 위치, 그리고 여성 주체성의 문제 등에 관한 근본적인 성찰을 담고 있어야 할 것이며, 여성만의 특징적인 스타일, 어조, 구문, 의미들을 담보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페미니즘 이론이 집중적으로 부각되기 전 70년대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여성수필들은 여성적 삶의 고발성을 폭로하는 데 주력했는데, 페미니즘 의식이 수필작가들 속으로 주입되기 시작하는 80년대 이후 여성 정체성, 여성의 언어에 대한 탐색과 물음에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은 페미니즘의 영향이라 하겠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여성수필은 남성중심주의적 사고가 어떻게 우리 사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으며, 여성의 삶이 어떻게 제한적이고 억압적이었는가를 보여주는 데 주력했다. 그러나 80년대 이후의 여성수필들은 과거에 비해 ‘여성됨’ 혹은 여성 정체성, 여성의 언어에 대한 탐색과 물음에 훨씬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제 우리 여성수필은 여성이 어떻게 억압되어 왔는가의 차원에서 억압된 여성으로서의 삶과 경험이 어떤 다양하고 개성적인 글쓰기를 생산해내고 있는가의 차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성중심의 거대 담론 내지는 합리주의가 해체되면서 주변으로 밀려났던 타자로서의 ‘여성’과 ‘여성 몸의 언어’가 새롭게 부상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여성주의 수필의 정체성과 방향을 점검해 보고자 하는 차원에서 여성작가들의 텍스트 속에서 그려지는 여성적 언술의 특성은 무엇인가 하는 점과 그러한 언술로 발화하는 여성 수필가들의 텍스트는 어떠한 현실 인식과 작가의 내면을 재현하며 어떠한 가치와 이상을 재현하는가 하는 점에 초점을 둔다. 이런 여성의 언어를 첫째, 침묵이나 독백의 언어가 중심이 되는 내적분열의 언어, 둘째, 서간체, 아이러니의 언어가 중심이 되는 통합 지향의 언어, 셋째, 대화와 구술의 언어가 중심이 되는 열림 지향의 언어 등으로 대별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러한 막힘․풀림․퍼짐의 여성 언어들은 남성들의 논리적인 언어 규칙에서 벗어나려는 여성들의 저항을 나타낸다는 차원에서 전략적 언술로 볼 수 있다.
모든 문학은 구체적인 언어를 통해 표현되므로 언술 특성에 대한 논의는 불가피하다. 쇼러는 ‘스타일이 곧 주제’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주제가 언술 특성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언술 구조가 주제를 결정할 만큼 문학작품에 있어서 언술구조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 언술의 분석은 남성의 언술 행위 안에서 작용하되 끊임없이 그것을 어떻게 해체하느냐와 남성의 언어를 가져오되 어떻게 ‘다르게’ 사용하려고 노력하느냐, 그리고 누가 더 많이 사용하느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향은 곧 ‘무엇을’ 말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말하고 ‘왜’ 그렇게 말하느냐 하는 점을 문제시한다는 측면에서 여성적 글쓰기의 양상을 규명하는 작업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