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3일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22-30 22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23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는데, 24 유다인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26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29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우리는 하느님의 명함입니다.
예수님을 둘러싼 유다인들의 모습은 위협적입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이 고발할 핵심에서 언제나 벗어나서 빙빙 둘러서 얘기한다고 지금 솔로몬 주랑에서 묵상 중에 계신 그분을 둘러싸고 다그칩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답변할 것인가'가 그들의 관심입니다.
방송에서 '몰래 카메라'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몰래 카메라를 설치하고 어떤 출연자를 완전히 속이고, 그 반응을 몰래 찍어서 잘 속으면 성공하였다고 좋아하는 프로그램입니다. 나는 그 프로그램을 보면 은근히 화가 납니다. (그 프로그램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건 순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사람을 속이는 것을 왜 재미있어할까? 물론 본심은 아닐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을 골탕 먹이는 것이 그것도 엄청나게 골탕을 먹이는 것이 그렇게도 재미있을까? 출연자들의 반응을 통해서 잘 속고 있다고 좋아합니다. 외국에서 시작한 몰래 카메라를 우리도 흉내를 내는 것도 싫고, 많은 돈을 들여서 속이는 것으로 인간의 진심을 도출한다는 것도, 교육적으로도 그렇게 좋은 방법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나중에 모두 밝힌다고 하여도 진심을 떠보려는 유다인들의 모습처럼 그렇게 느껴진답니다.
지금 도처에 몰래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답니다. 사람들을 감시하고, 도청하고, 보안을 핑계로 유리 집에서 사는 것처럼 은밀한 자유를 빼앗고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 앞에서는 몰래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아무도 진심을 감출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연출하면서 그런 실험을 한다면,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자신을 열어놓고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항상 손해를 보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에게 협박조로 묻습니다. 교활한 책략이죠. 메시아냐? 아니냐? 메시아라고 한다면 이스라엘의 정치적 희망을 일으키려는 혁명가라고 로마에 고발할 구실이 되는 것이고, 메시아라는 호칭을 거부하신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신망을 잃을 것이며, 메시아도 아닌 주제에 메시아처럼 가르쳤다고 백성들을 선동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메시아'라는 말은 입에 올리지도 않으십니다. 몰래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 그들의 속셈을 아신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아니지만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당신이 하신 일들을 통해서 당신을 증언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갑자기 우울해집니다. 내 삶을 통해서 나는 크리스천임을 증언하면서 살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내 행동과 말과 생각이 하느님의 자녀로 살고 있는지를 증언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솔직하게 큰 격차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세례를 받는 순간 우리는 하느님의 명함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명함이 되었음에도 항상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증언하지 못하고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행적과 기적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착한 목자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니 예수님 우리 안의 양들이 아닌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우리 안의 양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영광이면서도 참 어려운 일입니다. 몰래 카메라가 있을 법해서 내 마음을 닫고 사는 것이 버릇이 되어 있어서 주님께도 내 마음을 닫고 삽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이 마음을 열지 않는다고 성화를 부립니다. 오늘 유다인들처럼 그렇게 살면서 주님께도 협박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지 못합니다.
왜 유다인들은 주님을 믿지 못할까요? 그들은 주님의 빛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빛이신 주님을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이 반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너무도 세상적인 존재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에 마음이 온통 가 있으니 어떻게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또한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기 때문에 주님의 초자연적인 신성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편견과 선입견에 의해서 모든 것이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그들을 나무랄 처지가 아닙니다. 바로 그들의 모습이 지금 내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양들이라면,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주님이 영원한 생명을 주심을 알고 있으면서 주님께 찰떡과 같이 궁합이 맞아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의 자녀이고, 그분의 품에 행복하게 살고 있는 어린 양이랍니다.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면 우린 결국 유다인들처럼 품 밖에 있게 되고, 이리와 사자의 먹잇감이 되는 것입니다. 호시 탐탐 흩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야수의 입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먹잇감이랍니다.
아버지께서 위대하시니 그 품에 들어 있는 우리도 위대하고 소중한 존재랍니다. 그래서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고, 짐승의 먹이로 내 놓을 수 없는 소중한 존재랍니다. 아버지와 주님이 본질적 동일성(本質的 同一性)이 있기 때문에 하나인 것처럼 우리도 주님과 본질적으로 하나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부정하고 자꾸만 벗어나려고 합니다. 이 버릇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주님께서는 지금 이 부족하고 철모르는 나를 위대하고 소중한 존재로 이끌어 주십니다. 그래서 나는 위대하고 소중한 존재가 되었답니다. 그런데 나는 자신을 자꾸만 내려 깎고 낮추어서 부자관계의 인연을 끊으려고 한답니다. 부자관계의 회복이 회심이며, 회개랍니다. 하루빨리 그 회심에 몰입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답니다. 기도해 주십시오. 미꾸라지 같은 나를 위해서....
하나 되기를 항상 염원하시는 주님! 당신의 품 안에서 언제나 머물며, 당신 안에서 사랑으로 행복하게 하소서. 철모르고 자꾸만 당신을 벗어나려는 이 어리석음에서 철들게 하시고, 무거워져 진득하게 당신 안에 살게 하소서. 미꾸라지 같은 저를 당신의 소금으로 껍질을 벗고 다소곳하게 당신 손에 잡히게 해 주소서. 주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