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진년 설날이 되었다. 이제 내 나이 74세다. 어엉부엉 나이만 먹어간다. 뭔가 하나도 성취 못하고 가는 인생이 서글프다 느껴졌다. 며느리를 보고 나서 시가에 대한 스트레스를 줄여주려고 이번부터 차례를 지내지 않기로 하니 마땅히 할 일이 없어졌다.지난 일년 재미를 붙였던 풍수유튜브에 매진하기로 하면서 나도 지기를 탐지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겠다 다짐했다.
내가 풍수에 입문한 지 40년 되고 15년간 심취하다 손을 놓은 지 25년 되었는데 새삼 다시 재도전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유튜브가 매개역할을 했다.여기 가면 이말 하고 저기 가면 저 말하는 밑도 끝도 없는 형기풍수에 환멸을 느끼면서 풍수의 풍자도 버렸었는데 지기 풍수를 접하면서 대구에 계시는 선생님과 인연 되었다.
풍수도 이제 과학이 되어야지 이 사람 말이 다르고 저 사람 말이 다르다면 그게 무슨 학문이냐는 반감이 쌓였다. 자고로 과학이라면 누가 발표한 이론이건 논문이건 반복적으로 재현되고 같은 결과가 나와야지 그렇지 않으면 단순 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나의 주장이다. 딱 사기 치기 좋은 게 지금까지의 풍수였다. 그런데 지기 풍수는 10년 전 결과나 지금 결과가 같다는데 신빙성이 가는 풍수이론이다. 다만 누구나 쉽게 지기를 감지할 수 없다는데 맹점이 있지만 수련만 하면 불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그래서 올 한 해는 지기를 감지하는 원년이 되겠다고 목표를 세웠다.
설연휴에 특근 신청을 했다고 둘러대고 예비간산을 가기로 했다. 서병수 서범수 형제국회의원과 이후락 선영을 확인하고 오기로 계획을 잡고 출근하던 시간에 맞춰 차를 몰았다.아홉 시가 안되어 울주군 범서읍 사연리에 있는 서 씨들 산소에 도착하고 인터넷상에 알려진 지번으로 올라가니 다른 산소들이었다. 허탈한 심정으로 다시 마을로 내려오니 설날이라 성묘객 차림의 일행과 스쳐 지나가는데 예의 서병수의원과 그들 형제 조카들이었다. 안면이 있던 터여서 풍수공부하려 선영에 올랐다가 허탕치고 내려왔다고 하니 조부산소에 성묘 가는 길이라며 따라오라 하는 바람에 졸지에 동행하게 되는 행운을 얻었다. 지난밤에 원을 세웠더니 이런 운을 주는구나 하고 따라 나셨다. 백년풍수연수소 자료에 표시된 산소지번의 백호등이 조부모가 계시는 산소였다. 성묘길에서 대충 수인사를 하고 자료에 없는 증조모 산소 위치와 워낙 넓은 비알에 있는 고조부모 산소위치를 알아내고 성묘일행과 헤어졌다.되는 자손은 뭔가 달라도 다르다고 감복하며, 운 좋게 부모에서 고조부모까지 원세트로 답사를 끝내고 30분 거리에 있는 이후락 씨 산소로 향했다.
이후락씨 선영은 울주군 웅촌면 석천리에 있는데 내가 풍수에 미쳐 15년간 돌아다닐 때 파묘한 부친 구광터를 간산한 적이 있었는데 ‘백년풍수’ ‘참풍수’ 등 카페에 있는 내용을 종합하면 석천리에서 남양주시 진접읍 사능리로 이장하였는데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이후락 씨가 신군부 시절 부정축재자로 몰려 몰락하면서 부모산소를 다시 고향으로 재이장하였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렇다면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다 싶었다.
과연 카페내용대로 조부모산소 앞 단에 부모산소가 모셔져 있었다. 이 무슨 곡절인지, 풍수가 과연 있는 건지 없는 건지 풍수학인의 한 사람으로서 자괴감이 들었다. 이런 게 풍수의 폐해다.
'지종학풍수카페’에 소개된 스토리를 보면 풍수박사학위가 있는 박시익 씨가 장용득 선생을 사부로 모시고 있던 시절 명당기운을 몸으로 실감해 보려고 명당이 있다는 사능리에 있는 그 산을 어렵게 매입하고 그 자리에 움막을 치고 퇴근을 하면 그곳에서 명당체험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박 씨를 수상하게 느낀 마을 주민이 간첩으로 신고하게 되는 곤욕을 치렀다고 하는데, 그 소문이 한창 권세를 부리던 이후락 씨 귀에 들어가고 대권까지 넘보려는 욕심이 생겨 그 자리에 모친을 모셨다 한다. 석천리에 있던 부친도 같은 장소에 모셨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부친산소를 이장하고 얼마 안 되어 이후락 씨는 추락하고 만다.그 후 어떤 생각으로 부모산소를 다시 고향 선영으로 모셔왔는지는 자세한 내막은 모르는 일이다. 단지 양주로 옮겨간 산소가 좋은 영향을 주지 않고 나쁜 결과만 초래했었다는 추론을 가능하다고 본다. 이게 풍수가 무서운 것이다.
명당 감별능력이 희박한 형기풍수를 하는 소위 하남학파라 일컫는 장용득 선생 제자들의 실력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결과임은 틀림없어 보인다.
부친 구광터는 아직 보존되어 있었다. 예전에 갔을 때는 서예가 김충현 선생이 쓴 비문이 큰 비석에 세워져 있었는데 비석은 간데없고 잡초만 무성하게 인생무상함만 보여주고 있었다.만약 이 구광터가 명당이다면 충분히 공부할 수 있는 분야가 지기 풍수라는 데는 의심이 없다.
그래야만 형기수풍수를 버리고 지기풍수로 전환한 보람이 있을 것이다.이걸 규명하려고 올 한 해 매진하려고 한다. 영화제목인지 책제목인지 ‘미쳐야 미친다’는 말처럼.
첫댓글 선배님 설은 잘 보내셨지요. 귀한 글 남겨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