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손톱
신달자
한번쯤은 할켜서 앙칼진 여자의
성껄머리 보여 주고 싶었다.
가라 가라 몸 안에서 떠 밀려
드디어 손 끝에 다달아
세상 앞에 드러난
세상을 향한 나의 저항
그러나 체질적으로
저항은 조금만 길어도 불편해
가위를 들여 대 잘라 버린다.
그것도 잘 다듬으면
날카로운 펜촉으로 도약
몸 안에 오래 고인 진한 울화 배어나
이 세상 어느 벽보판에 붉은 글씨 하나
남길 수 있거나
중심없이 흔들리는 세상을 겨냥한
화살촉으로 키워도 좋으련만
시원하게 입 한 번 떼지 못하고
묵묵히 고요히 목이 잘린다.
콕 찍어 피 한 번 내지 못하고
으윽하고 소리 한 번 치지 못한 채
유순한 침묵으로 굳어 잘리고 마는
그러나 미지의 세상을 향해
멈추지 않고 자라나는
여자의 숨은 반란.
29.슬픔
신달자
슬픔을 가지고 논다.
분칠을 벗긴 슬픔
마알갛게 씻은
슬픔은 예쁘다.
다정한 슬픔
소리없는 슬픔
빈 주머니 속에서도
만지작거리며 가지고 노는 슬픔
양식보다 더 풍성히 쌓여
슬픔은 부족하지 아니하다.
나는 슬픔에게 교태를 부린다.
슬픔은 나를 기르며 지배한다.
늙지도 않고
새로운 힘으로 태어나는 슬픔
눈물도 아닌
철망도 아닌
치욕도 아닌
오늘 슬픔은 예쁘다
슬픔을 갖고 놀며
슬픔을 잊는다.
30.여자의 사막
신달자
주저앉지 마라 주저앉지 마라
저기 저 사막끝
푸른 목소리가 있으리니
왼손이 오른손에게
오른손이 왼손에게
타이르고 다시 타이르는
마지막 한순간의 절대의지
발가락이 타들어가는
죽음의 전선을 건너
오직 닿아야 할 곳은
그대 두손이 잡히는 곳
떠나지 마라 떠나지 마라
내 몸의 절판이 모랫벌에 묻힌들
그대 앞에 당도하는
이 생명은 꺼지지 않아.
31.오래 말하는 사이
신달자
너와 나의 깊은 왕래를 말로 해왔다
오래 말 주고받았지만
아직 목이 마르고
오늘도 우리의 말은 지붕을 지나 바다를 지나
바람 속을 오가며 진행 중이다
종일 말 주고 준 만큼 더 말을 받는다
말과 말이 섞여 비가 되고 바람이 되고
때때로 계절 없이 눈 내리기도 한다
말로 살림을 차린 우리
말로 고층 집을 지은 우리
말로 예닐곱 아이를 낳은 우리
그럼에도 우리 사이 왠지 너무 가볍고 헐렁하다
가슴에선 가끔 무너지는 소리 들린다
말할수록 간절한 것들
뭉쳐 돌이 되어 서로 부딪친다
돌밭 넓다
살은 달아나고 뼈는 우두둑 일어서는
우리들의 고단한 대화
허방을 꽉 메우는 진정한 말의
비밀 번호를 우리는 서로 모른다
진정이라는 말을 두려워하는
은폐의 늪 그 위에
침묵의 연꽃 개화를 볼 수 있을까
단 한 마디만 피게 할 수 있을까
단 한마디의 독을 마시고
나란히 누울 수 있을까
32.커피를 마시며
신달자
견디고 싶을 때
커피를 마신다.
남보기에라도
수평을 지키게 보이려고
지금도 나는
다섯번째
커피 잔을 든다.
실은
안으로
수평은커녕
몇번의 붕괴가
살갗을 찢었지만
남 보이는 일도
무시할 수 없다고 해서
배가 아픈데
아픈데
깡소주를
들이키는 심정으로
아니
사약(死藥)처럼
커피를 마신다.
33.허수아비 1
신달자
혼자 서 있는 허수아비에게
외로우냐고 묻지 마라
어떤 풍경도 사랑이 되지 못하는 빈들판
낡고 해진 추억만으로 한세월 견뎌왔느니
혼자 서 있는 허수아비에게
누구를 기다리느냐고도 묻지 마라
일체의 위로도 건네지 마라
세상에 태어나
한 사람을 마음속에 섬기는 일은
어차피 고독한 수행이거니
허수아비는
혼자라서 외로운게 아니고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외롭다.
사랑하는 그만큼 외롭다
34.헌화가
신달자
사랑하느냐고
한마디 던져 놓고
천길 벼랑을 기어오른다
오르면 오를수록
높아지는
아스라한 절벽 그 끝에
너의 응답이 숨어 핀다는
꽃, 그 황홀을 찾아
목숨을 주어야
손이 닿는다는
그 도도한 성역
나 오로지 번뜩이는
소멸의 집중으로
다가가려 하네
육신을 풀어 풀어
한 올 회오리로 솟아올라
하늘도 아찔하여 눈감아버리는
캄캄한 순간
나 시퍼렇게 살아나는
눈맞춤으로
그 꽃을 꺾는다
35.화장
신달자
속이 비었나봐
화장이 진해지는 오늘이다.
결국은 지워 버릴 속기(俗氣)이지만
마음이 비어서 흔들리는
가장 낮은 곳에 누운 바람이
붉은 연지로
꽃이 핀다
아이섀도의 파아란
물새로 날아 오른다
안으로 안으로 삭이고만 살던
여자의 분냄새
여자의 살냄새
대문 밖을 철철 흘러나가
삽시간 온 마을 소문의 홍수로
잠길지라도
진해버려
진해버려
쥐 잡아 먹은 듯
그 입술에 불을 놓아 버려
결국은
색과 향이 있는
대담한 사생활은
그저 이것 하나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