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평강을 그에게 강 같이!(사66:10-14)
갈등
1. 오늘 본문은 다섯 절에 불과합니다. 이 짧은 말씀 가운데 반복되는 말씀들이 보입니다.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예루살렘이란 말씀입니다. 여덟 번 나옵니다. 14절을 제외하고 절마다 나옵니다. 두 번째로 많이 나오는 말씀은“기뻐하라, 즐거워하라”입니다. 여섯 번 나옵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에 무슨 좋은 일이 있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선포하였을까요? 10절,“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라 다 그 성읍과 함께 즐거워하라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성과 함께 기뻐하라.”
이사야는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 그 성과 더불어 기뻐하고, 예루살렘을 슬퍼하는 자들도 다 그 성과 함께 기뻐하라고 선언했어요.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은 누구이고, 예루살렘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은 누구였을까요?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경험한 자들이에요. 2절,“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는 사람”입니다. 늘 하나님의 임재를 추구하며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잊지 않고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예루살렘을 위해 슬퍼하는 자들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슬퍼하고 회복을 기도하는 자들이에요.
2. 이스라엘이 즐거워할 것은 이어서 11절 하반절,“젖을 넉넉히 빤 것 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라.”이사야는 예루살렘을 어머니로 비유하여 말씀하였어요. 이 표현이 아주 적절해요. 어머니의 젖을 충분히 먹은 아이는 다른 음식을 먹지 않아도 배부릅니다. 충분한 모유는 아이에게 영양과 질병으로 보호하는 기능까지 합니다. 이사야는 아이가 모유를 넉넉히 먹고 만족하며 즐거워하는 것처럼 즐거워하라고 선언했어요.
히브리어 원문에는 영광이란 말이 없습니다. 우리 말 번역이 King James Version 영어 번역을 따라서 영광의 풍성함으로 번역하였습니다. 모유를 충분히 먹음으로 풍성함이 넘치니(overflowing abundance) 즐거워하라는 선언입니다. 14절 전반절에는,“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과 같으리라.”이스라엘이 기뻐하는 날이 이를 텐데, 그들의 쇠했던 뼈가 다시 봄에 연한 풀이 무성해지는 것처럼 회복될 것이라고 전했어요. 이스라엘이 이렇게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되는 실상-실제는 무엇이었을까요?
갈등 심화
3. 다섯 절에 불과한 오늘 본문 가운데 세 번째로 많이 나오는 것은 위로한다는 말씀입니다. 네 차례 나옵니다. 11절 전반절,“너희가 젖을 빠는 것 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어린 아이는 배고픔을 참고 이기지 못해요. 바로 울고 보챕니다. 이번에 선교지 순회 사역을 하며 로마에서 우간다를 가는데, 옆 좌석에 우간다인 어머니와 어린 딸이 앉았어요. 서로 인사를 하고, 내가 한국인 것을 알고 자기도 서울에서 오는 길이라고 했어요. 엄마 이름은 에스더였고요. 한국교회의 도움으로 세브란스 병원에서 심장 수술을 하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아이가 어리니까 엄마가 데리고 한국까지 다녀오게 되었어요.
에스더 자매가 한국교회에 너무 감사하다고 하면서 귀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처음에는 인사를 해도 인상을 찌푸리고 웃지를 않았어요. 왜 그러냐고 엄마에게 물으니, 애가 배가 고파서 그렇다고 했어요. 비행기가 이륙하고 얼마 안 되어 기내식이 나왔습니다. 어렵게 달랬던 아이가 잠들었다가 음식을 먹고 힘이 나자, 저를 보고 씩 웃는 것이에요. 이 모습이 압권이었어요.(사진 영상으로!) 애가 완전히 달라졌어요. 그래서 제가 사진을 찍고 sns에 소개해도 되냐고 엄마에게 물었더니, 흔쾌히 허락을 했어요. 교회 단톡에서 이 아이 사진을 보셨지요? 이 아이는 젖을 먹는 때는 지났고, 밥을 먹고 배고픔이 사라지자 만족감이 금방 나타났어요.
4. 13절에는 위로하다는 말이 세 번이 나옵니다.“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아이에게 결정적인 상황에서 위로는 오직 어머니입니다. 아버지가 아이에게 아무리 잘해도, 결국은 엄마가 눈에 보여야 해요. 동서고금 어디에서나 변치 않는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로할 것이라고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셨어요.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이사야가 선언했는데,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받을 위로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실마리
5. 이스라엘이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은 70년의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때입니다. 이사야는 66장으로, 성경에서 두 번째로 많은 분량의 말씀입니다. 시편이 150편으로 가장 분량이 많고요. 이사야는 내용상 세 부분으로 나눕니다. 1-39장은 포로 전-예루살렘이 바벨론에 멸망하기 전 예언, 40-55장은 바벨론 포로 기간중의 예언, 56-66장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 예언입니다. 내용이 세 가지로 분명하게 나눠지니까, 구약 신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제1 이사야, 제2 이사야, 제3 이사야 등으로 불러요.
진보 신학자들은 저자를 세 명으로 봅니다. 이들은 주로 이성적으로만 성경 연구를 하니까 그래요. 우리는 굳이 저자를 셋으로 보지 않아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에, 이사야를 통해서 그가 죽은 후 보지 못한 상황까지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세상 나라 가운데 멸망하고 70년이 지나서 재건한 사례는 세계사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유일한 사례에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다시 1900년 동안 나라없이 세계를 방랑하다가 1948년 다시 나라를 재건했지만요. 이스라엘이 두 차례나 나라가 멸망하는 아픔을 당하고도 재건한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어요.
6. 이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탈무드의 위대함이니 유대인들의 위대함으로 이야기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나라를 재건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고 선언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불쌍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신 것을 어머니 모티브로 말씀합니다. 어머니는 자식을 포기하지 않고 살리려고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가르치고 온갖 필요를 채워줘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지키지 않고 우상숭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온갖 불의를 버리지 않다가 끝내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멸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깨달으라고 바벨론을 회초리로 사용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이 깨닫도록 회초리를 대는 것과 같았어요. 어머니는 내가 너를 때리는 이유를 말합니다. 감정으로 때리는 것이 아니다. 네가 맞고 이제부터는 사람 구실을 하며 살라고 말해줘요.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을 바벨론을 통해서 때리시며 깨닫는 기간을 주셨어요. 그들이 죄를 지은 만큼 죄수가 복역을 하듯이, 70년간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갖은 고생을 했습니다. 70년이 차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하고 나라를 재건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의 기쁨과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7. 1945년 8월15일 일제로부터 광복을 맞은 우리 민족과 같은 큰 기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해방의 기쁨을 맛보게 하시며 그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이것도 역시 어머니 모티브로 말씀하셨어요.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가기 전에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된 것입니다. 그들이 죄의 값을 치르고 귀향해서 예루살렘에서 받은 위로는 심히 큽니다. 직접 겪어본 사람이면 더욱 이 위로의 가치를 알 수 있어요. 13절에, 세 번이나 위로를 선포합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로할 것이라고요.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약속했고, 그 약속이 주전 6세기에 실제 이뤄졌습니다.
복음 제시
8. 오늘 본문에 귀한 복음이 선포되었습니다. 12절,“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같이, 그에게 못 나라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같이 주리니.”이 말씀은 문자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선포된 희망적인 메시지입니다. 하지만, 내용을 보면 종말론적인 비전이에요. 이 땅에 평강과 영광이 넘치는 것은 우리의 메시야-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의 일입니다.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시고, 주님만이 우리에게 참된 평강을 주십니다. 뭇 나라의 영광이라고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은 번역을 했는데(개역개정), 히브리어 원문에는 영광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뭇 나라-열방의 부를 시내같이 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뤄지지 않았어요.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를 통해서 세계에 이뤄져 왔어요.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진 나라들마다 하나님께서 이 약속의 말씀을 그대로 이루셨습니다.
기대
9. 하나님의 사랑은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임합니다. 이단인,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모성을 이야기하며 교주인 장길자를 어머니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죽은 남편 안상홍을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불러요. 기가 막힌 일입니다. 여기에 미혹의 영-사탄이 가세하여 사람들이 빠지게 합니다. 하나님은 성이 없어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인격성을 이해하도록 부르는 칭호에요. 오늘 본문과 같이 어머니의 사랑 이야기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게 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어머니 하나님은 없어요. 속지 말아야 합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크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보다 크십니다. 세상 부모-어머니는 자식을 버리기도 합니다. 부모가 철이 들지 않아서, 또는 부모가 너무 어려서 아이를 낳는 경우 그렇습니다. 최근에 미혼모나 젊은 연인들이 아이를 낳고 버리는 일이 있어 안타까워요. 언론에 자주 보도가 됩니다. 세상 부모의 사랑은 이처럼 불완전합니다. 시27:10,“내 부모는 나를 버릴지 몰라도 여호와는 나를 맞아 주실 것입니다.”그래도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온전한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이기에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렇게 말씀합니다.
10. 우리에게 참 평강과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은 어머니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어머니는 부분적인 역할을 할 뿐이에요. 이스라엘과 같이 우리가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를 하거나 불의를 행하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오늘날 이 두 가지 문제에 아주 취약합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무당을 찾으면 결코 안 됩니다. 무당을 찾는 자들-볼 것은 보아야 한다는 이들과 어울리지도 말아야 해요. 불의를 행하는 것에 민감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는 숫자에만 관심, 이것에는 둔감합니다. 이것에 민감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멸망하고 포로로 붙잡혀간 것 같이 죄의 값을 치르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옛날 이스라엘 이야기만이 아니에요. 오늘도 그대로 적용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배우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아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죄에서 떠나지 않으면 환난을 주십니다. 환난을 겪고도 깨닫지 못하면, 다시 회개할 기회를 얻을 수 없어요. 코로나 기간을 이제 벗어나고 있나요? 이 기간에도 회개하지 않고 돌이키지 않으면 그 사람-그 가정-그 교회-그 민족에게는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안전하십니까? 우리 가정은 어떻습니까? 우리 교회-한국교회는 어떻습니까? 대한민국은요? 이 시간 다 같이 일어나서 찬양하며 기도합니다.(오늘 찬양은 다 와서 찬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