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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 신학
1.시작하는 말
⌜하나님 나라⌟의 나라는 천지창조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고 각자의 선악과 정의로 나라를 세운 사람들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는 짓밟혔다. 사람들은 영웅들이 세운 제국의 노예가 되어 비참하게 살면서도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외면한다. 그러나 그런 시대의 흐름속에서도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열망과 기다림으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 회복을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 성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의 공생애는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는 말씀으로 시작되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도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고 사도행전 1장 3절은 증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꿰뚫는 주제는 단연코 ⌜하나님 나라⌟이다.
예수께서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통해서 들려주시는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살펴보기로 한다.
2. 성서 본문 : 마태복음 20장 1절 ~ 16절(개역한글판)
천국은 마치 포도원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으니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또 제 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제 육시와 제 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제 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 지라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일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 가지 삯을 주라 하니
제 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거늘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3. 본문의 줄거리
줄거리는 포도원 농장 주인이 새벽부터 일꾼들을 찾아서 일을 시키고 품삯을 지불하는 것이다. 포도원을 가진 농장의 주인이 아침 새벽에 일군(一群)의 무리들과 품삯을 한 데나리온에 계약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냈다. 그는 그 후에도 계속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에 적당한 값을 주겠다며 그리고 오후 5시에 일군(一群)의 무리들을 포도원에 들여보냈다. 심지어 그는 하루의 일이 마감되기 한 시간 전에도 일군(一群)의 무리를 포도원에 들어 보낸다. 그리고 6시에 품꾼들에게 늦게 들어온 순서대로 품삯을 지불하였는데 노동 시간을 불문하고 모두에게 한 데나리온씩 지급하였다. 주인은 맨 나중에 이른 아침에 온 일꾼들에게도 계약대로 한 데나리온씩 지급하였다. 문제는 여기서 터져 나왔다. 그들은 주인이 12시간 노동을 한 자기들에게 관용을 베풀어 더 많은 품삯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였으므로 한 시간만 일한 삯꾼과 자신들을 동일하게 취급하는 주인을 불의하게 생각하며 불평을 터뜨린 것이다. 그러나 주인은 계약대로 이행하였음을 상기시키며 “내가 불쌍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을 너희가 악하게 보느냐?” 고 반문한다. 주인은 나중에 온 자들이 비록 짧은 시간 동안 일을 하였지만 절박함으로 최선을 다하여 일하였고 그들은 비록 먼저 왔어도 대충 일하였으므로 늦게 온자나 다름없다고 하였다.
4. 본문의 배경
배경은 포도원 안과 장터이다.
포도원은 장터로부터 떨어진 곳에 있으며 포도원을 만든 주인의 것이다. 그러나 주인은 혼자 일하지 않고 사람들을 사서 일을 시킨다. 그러므로 포도원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며 일하며 보람을 느끼는 곳이고 동시에 생계가 보장되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포도원 일꾼으로 부름 받은 자의 성실성과 헌신, 책임과 열정, 감사와 사랑이 드러나는 곳이며 주인과 품꾼의 관계, 품꾼들과의 관계, 품꾼과 포도나무와의 관계가 맺어지는 생명이 어우러지는 장이다.
장터는 생계에 필요한 것들과 사치품들이 거래되는 곳이다. 물건뿐만 아니라 사람의 노동력도 거래가 되고 섹스와 도박, 술과 유흥도 곁들여진다. 진짜와 가짜가 거래되며 사기와 속임수도 따른다. 돈이 모이므로 깡패도 건달도 있고 거지들이 모이고 구경꾼들도 모인다. 장터에는 도매, 중매, 소매하는 다양한 상인들의 자본이 있고 그 곳에 물건을 대주는 농부와 수공업자들이 있고 물건의 판매와 관리를 위해 고용된 일꾼들이 있다. 그리고 장터에는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하루살이들이 있다. 날마다 노동을 팔아야하는 일꾼들이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술 한 잔으로 밥을 대신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새벽부터 인력시장에 가서 자기들을 데려갈 주인을 기다린다. 대부분의 인력들이 6시에 나가고, 7,8시가 되면 인력시장은 문을 닫는다. 호명 받지 못한 일꾼들은 어깨가 처진 채로 장터를 배회하고 빈속에 외상술을 마시거나 외상으로 국밥을 먹고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장터에서 배회한다.
포도원은 계속 일꾼을 필요로 하는 곳이고 품꾼들은 같은 일을 하며 차별 없는 인건비를 받는 곳이다.
장터는 다양한 일꾼들이 공존하는 곳이며 천차만별의 사람값이 존재하며 사람이나 일이 없어서 사람 축에 들어가지 못하는 벼랑 끝에 서있는 실업자들, 떠돌이들이 있는 곳이다.
5. 본문의 등장인물
등장인물들은 많으나 크게 셋으로 압축된다. 집주인과 품꾼 그리고 청지기이다.
집주인은 포도원의 소유주이며 일꾼을 찾아서 일을 시키며, 일꾼들에게 노임을 지불하는 사람이다. 그는 부지런하고 연민이 많아 하루에도 몇 차례씩 장터를 돌며 노동에서 제외된 하루살이들을 찾아 포도원에서 일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평범하지 않은 주인이다.
품꾼들은 장터 인력시장에서 포도원 주인을 만나서 하루 품팔이로 고용된 사람들이다. 새벽에 주인을 만난 사람들은 한 데나리온으로 하루 품삯을 계약하고 일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9시 12시, 오후 3시와 5시에 들어온 사람들은 계약 없이 적당한 인건비를 주겠다는 주인의 말을 믿고 일하러 온 사람들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사회 보통 사람들이 가족들과 함께 하루를 먹고 사는데 필요한 경비가 1데나리온이었다. 빵과 포도주, 우유와 야채 등 주식과 부식을 사는데 필요한 비용이었다. 그래서 당시 품꾼들은 하루 노동비로 1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최선의 인건비로 생각하였다. 집주인의 포도원에서 일을 한 품꾼들로 늦게 농장에 들어와 일한 사람들은한 데나리온을 은혜로 감사로 받았으나 처음에 한 데나리온에 계약을 하고 들어온 사람들은 주인의 처사를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며 원망하였다.
청지기는 집주인의 재산과 사업 관리인으로 주인의 뜻대로 노임을 지급하는 충실한 자이다.
6. 본문에 나타나는 포도원 주인의 파격 행위
포도원 품꾼의 비유의 주인의 파격적 행위는 다섯 가지 행위로 나타난다.
이는 세상의 장터와 다른 가치와 차원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보여준다.
첫째는 주인이 품꾼을 찾으러 직접 돌아다닌 행위다.
이는 대농장을 가진 집주인으로서 품위 있는 행위가 결코 아니다. 아래 사람들이 할 일인 것이다. 예수님 당시 대부분의 농장의 주인들은 재산 관리와 품꾼을 고용하는 일을 청지기들에게 위임하였다. 그러나 포도원 품꾼의 집주인은 청지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직접 일꾼을 찾으러 인력시장에 나간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겸허한 통치 주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애정, 특별히 세상의 주류사회에서 존재의 값어치가 없는 날품팔이들, 작은 자들, 고아와 과부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지하고도 가절한 관심을 나타낸다. 품꾼을 직접 찾으러 다니는 주인은 사람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둘째는 주인이 품꾼들을 찾아 장터를 직접 수시로 방문한 행위이다.
이는 농장을 경영하는 주인으로서 품위 있는 행위가 아니다. 이 주인은 위계질서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엉터리 경영자이다. 경영자는 시간과 생산의 질로서 노동자와 관계를 맺는다. 경영자는 정한 시간에 작업을 시작하여 정한 시간에 작업을 끝내며 모든 품꾼들이 처음부터 함께 일하도록 하며 역할을 분담시켜 책임감을 가지고 일하게 해야 된다. 그러나 이 주인은 그런 경영의식 자체가 없으며 주인 중심으로 품꾼을 채용하는 것이 아니라 품꾼 중심으로 품꾼을 채용하고 있다. 체통머리가 없게 새벽부터 오후 5시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다니며 종일토록 장터 변두리에서 노는 자들을 불러서 이야기를 나누며 포도원으로 보내는 것은 세상의 상식에서 벗어난 일이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일이며 이를 위해서 주님께서 세상에 오셨음을 말한다. 하나님은 일꾼들을 찾아다니는 주인처럼 당신의 자녀들의 구원과 해방을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는 분이시다. 주님은 일어버린 자녀들을 찾기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오신 분으로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하나님 나라를 전하러 성과 촌을 두루 다니셨다.
셋째는 근무시간이 다른 일꾼들에게 같은 노임을 지불한 파격적인 행위이다.
다섯 차례에 걸쳐서 포도원에 일꾼들이 투입되었다. 가장 많은 투입은 이른 아침에 되어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품꾼들이 그 후에 네 차례나 투입되었기 때문에 제 시간대로 일한 사람들보다 늦게 투입된 사람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은 나중에 온 자들에게는 당신의 자비로운 마음으로 한 데나리온을 지불하고 먼저 온 자들은 계약의 정의에 의하여 한 데나리온을 지불하였다. 주인은 실로 품꾼들에게 필요한 하루 생활비인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에 포도원의 존재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동일한 사랑,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 받은 인간의 동가(同價)를 말하며 구원은,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 결코 인간의 노력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이 들어갈 자격이 없음에도 하나님의 자비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는 세리와 죄인들이 은혜로 가는 곳이다.
넷째는 먼저 온 자들의 원망에 단호하게 대처한 행위다.
나 같으면 먼저 온 일꾼들에게 몇 푼을 더 주어서 그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사람의 기분을 살피며 비위를 맞추고자 하는 세속에 찌든 내 생각과 예수의 생각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먼저 포도원에 온 자들이 누구인가? 그들은 아마도 모세의 율법을 받은 자들이요. 성전의 제사를 맡은 유대인들을 의미할 것이다. 그들은 그 받은 것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포도원에 일찍 들어와서 수고한 기득권자로서 노고가 인정되지 않음에 마음이 상하였다. 그들은 모두 함께 한 목소리로 주인의 불공평, 불의에 대하여 지탄을 하였다. 주인의 편애와 차별에 대하여 항의를 한 것이다. 종일 수고하고 더위를 견딘 자신들과 한 시간 일을 한 품꾼을 어떻게 같은 취급을 할 수 있느냐며 그들에게 지불되는 돈의 절반을 자기들에게 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태도다. 그러나 늦게 와서 일한 자들에게 한없이 자비로운 주인이 가장 먼저 온 자들에게는 냉정하였다. 몇 푼의 돈을 더 주어서 그들의 불평을 무마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은 그들에게 내 돈으로 내가 선을 베푸는 것을 너희들이 악하게 본다고 꾸짖었다. 실로 그들은 자신들과 맺은 약속대로 한 데나리온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이 불평할 이유가 없는 것이고 나중에 온 자들에게 하루를 살 수 있는 돈을 준 것은 순전히 주인의 자비이므로 시비의 걸 일이 아니고 같은 날품팔이의 친구로서 기뻐하며 주인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먼저 온 자로서 기득권 의식을 가지고 시기와 질투하며 주인에게 도전을 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주인은 기득권 의식으로 주인의 권리를 침해한 그들의 악함과 위선을 단호하게 품삯을 가지고 물러가라고 하였다.
이는 인간의 성품, 인간의 의로서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들이 없다는 뜻이다. 먼저 믿었다고, 많은 일을 했다고 하나님 나라의 기득권, 우선권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나중에 믿었다고 소외되거나 공로가 없다고 배제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은혜로 받는 다는 뜻이다.
다섯째는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역설의 선언이다.
나같으면 이른 아침에 온 일꾼의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지 않을 것 같다. 굳이 품꾼들 앞에서 한 쪽을 비판하고 한쪽을 칭찬하는 평가를 해서 원망을 살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람의 처세술이고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는 나와 수준이 다르다.
16절의 말씀은 얼핏 생각하면 포도원 품꾼의 비유와 전혀 상관이 없는 말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자세히 음미를 하면 이른 아침에 온 품꾼들과 나중에 온 품꾼들에 대한 주인의 평가임을 알게 된다. 나중 된 자는 나중에 포도원에 투입된 품꾼들을 의미한다. 먼저 된 자는 이른 아침에 투입된 품꾼들이다. 이들은 모두다 하나님 나라를 섬기라고 부름을 받은 자들이다. 결론은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는 일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수고한 시간보다 일하는 사람의 중심, 애정과 순수을 보는 분이라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당연히 자기들의 것이라고 이해를 하였다. 그런 유대인들을 향하여 주님은 돌로도 아브라함의 후손을 만들 수 있다고 하며 회개를 촉구하였다. 유대인이라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리 먼저 왔어도 진실성과 열정, 희생과 헌신, 감사와 순종이 없는 형식적이고 의무적인 섬김과 봉사는 늦게 왔어도 진실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감사와 열정을 쏟아 붓는 헌신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공로와 기득권과 자기 의를 자랑하는 먼저 온 자는 겸손하며 진지한 나중 온 자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 나라는 기득권이나 공로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사모하는 자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걸림돌이 되었듯이 오늘날 신앙생활의 연조와 공로를 자랑하는 사람들에게도 걸림돌이 될 것이다.
7. 본문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 신학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포도원의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을 향하여 열려 있다.
포도원 주인은 세상을 향해 포도원을 개방하였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자신 스스로 가 선악의 기준이 되어 있으므로 장터의 가치에 눈이 멀었다. 장터에서 밀려나면 정치, 경제 영광과 명예 모든 것을 잃게 되므로 사람들은 장터의 노예가 되어 장터를 떠나지 못한다. 심지어는 장터에서 설 자리를 잃은 자 마저 장터를 떠나지 못하고 기웃거리고 있다. 밀려난 자들은 빈익빈, 부익부, 부정과 부패한 세상에 분노하며 끼리끼리 의기투합하여 떼강도가 되며 의적이 되기도 한다. 패배한 사람들은 장터를 넘나들며 거사와 폭동으로 장터를 전복을 꾀하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포도원 주인은 이런 장터의 생리, 복수 심리를 알고 있으며 장터의 사고에 세뇌되고 습관에 길들여져 살 길이 없음에도 포도원으로 돌아오지 않는 죄인들, 실패자들, 굶주리는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을 안타까이 여겨 직접 찾아 가서 포도원으로 초청한다. 장터 변두리에서 서성거리는 사람들은 다 초청을 받았으나 그중의 일부 사람들만 들어와서 포도원이 사람답게 일하며 살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이라는 사실을 경험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된 자가가 된다.
오늘날에도 하나님 나라는 인류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다.
하나님 나라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들 모두에게 열려 있다. 나라와 민족, 사상과 이념을 떠나서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다. 죄악과 도덕, 율법과 종교를 떠나서 모두에게 열려 있다. 예외는 스스로 하나님을 자처하며 하나님을 거부하는 자, 대적하는 자,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자, 하나님을 인간의 발명품으로 모욕하는 자들에게는 열려져 있음에도 그들은 영적 교만으로 스스로 문을 닫는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배타적인 종교라고 말하는데 결코 하나님은 배타적이지 않다.
하나님은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시는 분이다. 결코 폐쇄적이지 않다. 십자가상에서 강도의 말을 듣고 그에게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는 주님께서 어떻게 폐쇄적이 될 수 있는가? 포도원 주인이 계속 품꾼을 찾는 것처럼 하나님은 국가 이기주의와 과학만능주의 속에서 영적으로 죽임당한 자녀들을 찾으신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시대와 사회의 희생양을 향해 문을 열어야 한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는 아래로 내려가는 성육신 질서, 운동이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포도원 집주인은 부자로서 안일하게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에 속한다. 아마 그는 재산 관리인을 비롯하며 평상시에 포도원을 관리할 수 있는 종들을 거느리고 있을 것이다. 비유에 나오는 절기는 아마 많은 일꾼이 필요한 포도 수확 시기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주인은 일꾼들을 초모하는 일에 직접 나서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그는 당시 사회의 일반적인 부자들과 다르게 직접 장터로 내려간다. 이른 아침부터 9시, 12시, 3시 그리고 오후 5시까지 무려 5차례나 장터에 갔다. 주인은 일꾼을 찾으면 그들을 데리고 포도원에 가서 일을 맡기고 먼저 온 품꾼들이 일하는 것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장터로 나오는 일을 반복하였을 것이다. 하루 종일 포도원과 장터 사이를 왕복하며 품꾼을 찾으려 애쓰는 주인의 초조하고 애타는 얼굴이 보인다. 그가 자기 이익, 포도 수확을 위해서가 아니라 품꾼들을 찾기 위하여 장터에 갔다는 사실은 오후 6시에 모든 품꾼들에게 같은 한 데나리온의 월급을 지급한 것에 확실하게 드러난다.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는 명령하고 지배하며 군림하는 위계의 질서 속에 있지 않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성육신 질서에 속한다. 예수님은 누가 큰 자인가를 서로 다투는 제자들에게 마가복음 9장에서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고 마태복음 20장에서는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으며 자신이 세상에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고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나라⌟ 는 내려가고 섬기는 질서 속에 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본질적으로 내려가고 섬기는 질서이었는데 하나님의 성육신 사건으로 말미암아 하향의 운동으로 철저하게 자리매김을 하였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하나님 나라의 운동과 질서 선상에 있는 교회는 겸허히 자기를 비우고 내려가고 섬기는 운동과 질서 속에 있다. 교회가 지역사회 또는 대중들과 역사 속으로 내려가는 것은 생명을 살리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며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사랑을 힘입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종교 조직으로서 기독교가 강성하여 교권이 강화하며 위계질서가 계급화 된 것은 교회가 스스로 자신의 부패와 변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교회가 세력을 과시하며 부귀영화를 탐하는 것은 성육신과 십자가를 외면하고 부활 승천의 영광만 강조하는 것인데 이는 본질의 왜곡이다. 명령하고 지배하며 군림하는 교회와 교권의 위계질서는 예수의⌜하나님의 나라⌟에 설 자리가 없다.
셋째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자비로 가난한 자들의 삶이 보장되며 평화를 이루는 공평한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는 공평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공평한 예우를 통하여 모두가 함께 질적으로 충만하며 고양된 삶을 사는 것이 목적이다. ⌜하나님 나라⌟는 모두가 재산을 평등하게 소유하는 공산사회가 아니고 치우침이 없는 예우와 존중을 받으며 함께 어우러지는 성숙한 인격사회이다. 하나님의 자비로 불평등한 소유를 극복하여 물질로 우상이나 노예가 되지 않으며 주님의 식탁에서 함께 먹고 마시며 나누고 섬기며 함께 평화롭게 사는 것이다.
이른 아침에 장터에 온 사람들은 주인과 계약에 근거해서 포도원에 왔고 계약에 근거하여 한 데나리온을 노임으로 받았다. 그러나 나중에 온 사람들은 주인의 자비로 포도원에 와서 일하였고 그의 자비로 한 데나리온의 노임을 받았다. 먼저 온 품꾼들은 수고의 대가를 받은 것이나 나중에 온 자들은 주인의 자비로 말미암아 수고한 것보다 몇 배나 더 많은 노임을 받았다. 주인이 모든 품꾼들에 동일한 품삯을 준 것은 품꾼들을 향한 그의 사랑이다. 주인의 사랑은 공평한 품삯으로 사회정의를 이루며 함께 부자와 가난한 자 모두를 평화롭게 사는 세상으로 초대한다.
사도행전 3장은 영적으로 성숙한 인격적인 사회를 보여준다. 다 함께 성령을 체험한 예루살렘교회의 교우들은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 그들은 사랑하므로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를 이루었다.
오늘날에도 질적으로 영적으로 충만한 ⌜하나님 나라⌟는 우리에게 계속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보다 사회주의가 말하는 공평한 물질 분배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자비로 주어지는 공평한 세상,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보다 법과 이념, 강력한 통치로 만드는 평등 세상이 바로 눈앞에 바로 펼쳐질 것 같은 착각 때문이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공평과 공정을 그 어느 시대보다 열렬하게 추구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빈익빈, 부익부의 악순환과 부정과 부패에 분노, 저항하며 아직도 법과 유물론 철학으로 공평과 공정의 평등사회를 이루고자 치열하게 노력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이끌어온 공산주의 운동으로 러시아, 중국, 동구 유럽 어느 곳에서도 이상사회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여전히 진보사회주의 이념이 법제화 되고 정책을 세워지고 그런 사람들이 정권을 잡으면 마치 평등사회가 구현될 것이라는 기대 심리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인들 또한 마찬가지로 평등사회, 정의사회 구현을 이념과 정치에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는 법의 힘으로 물질을 분배하는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한 사랑의 논리이며 자발적이며 인격적이며 하향적이다. 이는 사람이 “자신만을 위한 존재”에서 “타인을 위한 존재”로 가치관과 의식이 전환되는 성숙성, 영성의 문제이다. 유한으로 무한을 깨닫는, 일점으로 우주를 품는, 피조물로서 창조주를 의식하는 존재의 문제이다. 우리가 간절하게 열망함에도 불구하고 공평한 세상, 평등사회, 정의사회는 인간의 법과 정책으로 구현될 수 있는 태생적 한계가 분명하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영적으로 성장하여 세상의 공평과 평등사회 구현에 기여하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에서 걸림돌이 되고 있다. 교회가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고 정당과 정권 편향의 시녀가 되어 양쪽 그룹에 속한 세상 사람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 교회가 진정으로 공평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기를 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깊은 탐구와 묵상과 더불어 정당과 정권을 지지하며 갈등하고 충돌하며 서로 적대하는 에너지와 열정, 시간 낭비를 멈추고 서로를 먼저 인격적으로 예우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넷째 ⌜하나님 나라⌟는 나중 된 자가 공동체의 일원으로 환영받으며 새로워지는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는 고정된 나라가 아니다. 먼저 된 자들이 자신들의 희생과 봉사를 자랑하지 않으며 기득권으로 편을 가르거나 위세를 부리지 않는다. 먼저 된 사람들이 나중 된 사람들을 공동체 일원으로 받아들여 영적으로 함께 성숙하며 이웃을 지향하고 낮은 자리, 가난한 사람들을 지향하는 역동적인 에너지로 끊임없이 변화하며 새로워진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는 날마다 구원받으며 성숙해지는 사람들의 기쁨과 감사의 에너지가 충만하다.
장터에서 늦게까지 빈들거리며 놀던 사람들이 포도원의 품꾼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늦게 들어온 만큼 최선을 다한다. 가족들을 위해 빵을 살 수 있도록 자신들을 품꾼으로 불러준 주인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거친 일들도 마다하지 않는다. 날이 어둑해졌을 때 주인의 부름을 받고 나아가 놀랍게도 하루 온전한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 그들은 너무 놀라서 혹시 주인이 실수로 잘못 준 것으로 의심하였다. 주인은 흥분하고 당황한 그들을 격려하며 초대하였다. “당신들은 늦게 왔지만 처음에 온 일꾼들 못지않게 열심히 일 하였소. 내일도 와서 일을 해줄 수 있겠소?” 그들은 자신들을 인정하고 포도원 공동체 일원으로 받아준 주인이 너무 고마워 최선을 다해 포도원을 섬기기로 다짐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된 자가 되었다.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된 그들은 자비로운 주인을 배우며 자신들을 받아준 주인과 먼저 된 자들처럼 그들 뒤를 이어오는 나중 된 자들을 겸손히 받아들였다.
⌜하나님 나라⌟는 실로 나중 된 자들의 끊임없는 포기와 죽음, 변화와 성숙으로 에너지가 충만해진다. ⌜하나님 나라⌟는 마지막까지 그 어떤 인간도 포기하지 않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나라이기에 그 어떤 사람도 거부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중 된 자가 저절로 먼저 되지는 않는다. 나중 된 자가 죽음과 해체의 과정을 수용하고 다시 태어나는 변화를 통하여 에너지를 발휘할 때 ⌜하나님 나라⌟는 확장되며 새로워진다.
오늘날에도 ⌜하나님 나라⌟는 나중 된 자들이 와서 위로받으며 새 사람으로 거듭나며 성숙하는 나라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교회들이 먼저 된 자들의 교회로 셋업 되어 석회되고 계급화 되어 하나님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 먼저 된 자들의 교권 장악과 교회 공동체의 독점은 영적 혁명과 개혁, 인격적 성숙과 변화를 방해하며 따라서 교회의 역동성, 사랑의 활기, 나눔과 섬김의 에너지를 제한한다. 오늘날 영적 활기가 사라지고 곤궁해진 교회들이 회개하며 개혁하기보다도 장터의 원리와 권력, 심리학을 이용하여 교회 조직과 위계질서를 강화시킨다. 사람들이 교회가 확고한 조직과 엄청난 물질을 소유하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 봉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는 영적인 무지이며 물질에 대한 착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직과 물질이 인격, 영성, 가치 지향성, 인격적 관계성을 가질 수 없는 비인격체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다.
교회가 나중 된 자들을 공동체 일원으로 받아들여 새로워지지 않는 한 21세기 교회는 과학만능주의와 국가이기주의에 예속되며 몰락과 감소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교회도 살고 교회가 세상을 살릴 수 있는 길이 있다. 먼저 된 자들이 나중 된 자들을 환영하여 그들로 하여금 교회를 계승하며 갱신하며 개혁하며 섬기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교회 안에, 교우들 속에 ⌜하나님 나라⌟가 살아 움직이며 신생하는 에너지를 뿜어내게 하는 것이다.
8.에필로그- 하나님 나라는 지금도 다가오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신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를 크리스천이 된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궁금해 하였다.
혹자는 죽어서 가는 나라를 말하고 혹자는 내적인 안정, 영적 평화, 마음의 평화를 말한다. 혹자는 말씀의 통치를 받는 개인의 영적 영역을 말하고 혹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라 말하고 혹자는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라고 하고 혹자는 지금 여기에 임재해 있다고 하며 혹자는 먼 훗날에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 에 이 모든 내용이 두루 포함되고 있어서 어느 한 가지 개념만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조심스레 말씀을 살피며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 나라⌟에 초청받은 자, 공동체의 일원으로 ⌜하나님 나라⌟를 사는 동안 구체적으로 살고자 한다.
금번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통하여 예수께서 보여주신⌜하나님 나라⌟를 묵상하였다. 거듭 읽고 질문하며 대답하는 중에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을 향하여 열려 있고, 아래로 내려가는 성육신 질서, 운동이며, 하나님의 자비로 공평을 이루며 샬롬을 온전히 이루는 나라이며 나중 된 자들이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더 왕성해지며 새로워지는 나라임을 깨달았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진지한 표정, 열띤 음성과 단호하고 절박한 몸짓이 느껴졌다. 낙오 되고 아웃된 인간들의 회복과 치유를 바라는 주님의 뜨겁고 애절한 마음이 오늘도 우주에 넘쳐흐른다. 들을 귀 있는 자가 듣고 볼 수 있는 자가 본다.
2025년 2월 28일 금요일 진시
우담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