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쟁의 틈에서 별 볼일 없었던 현종(顯宗)
효종이 죽자 외아들인 현종(顯宗)이 19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15년간 재위했다.
아버지 효종(孝宗)이 봉림대군 시절 청나라에 인질로 가 있을 때 태어났기 때문에 조선에서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왕이다
성격이 원만하고 조용했으며, 소심 했던 현종(顯宗)은 재위기간 내내 서인과 남인이 벌이는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예송논쟁(禮訟論爭)에 휩싸여 치적을 남기지 못했다
그래도 훈련별대를 창설하고, 대동법을 호남 전역에 확대 실시하는 등 나름대로 노력을 하다가 34세로 요절했다
♡ 기해예송(己亥禮訟) ♡
예송(禮訟)이란 효종이 승하하고 나서 상복 입는 기간을 두고 서인과 남인이 2차례에 걸쳐 논쟁한 사건을 말한다.
상복입는 기간을 두고 다투다니 지금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논쟁이지만 17세기 조선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임진왜란 이후에 양반들은 그들의 약해진 권한을 회복하기 위해 예학(禮學)을 보급하고 족보학(族譜學)을 강조하는 분위기 형성에 여념이 없었다.
즉, 양난 이후 신분제의 변동이 생기고 양반 내부에서도 한양 양반과 지방 양반간에 구별이 생기자 양반(兩班)들은 특권의식을 강화 해야 했다.
양반이 평민과 다른게 있으니, 그게 바로 예(禮)와 족보(族譜)였다
이런 가운데 상복(喪服)은 예를 표현하는 의식으로 매우 중요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의 옷이란 단순히 더위와 추위를 피하고 멋을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유교의 덕(德)을 담은 하나의 예(禮)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당시의 예송논쟁은 현종의 아버지인 효종의 정통성과 관련해 더욱 뜨거워졌다
현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 당시 왕실 최고의 어른은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장렬왕후)였다.
자의대비는 인렬왕후의 뒤를 이어 15세에 인조와 혼인을 했고, 효종보다 5살이나 어렸다. 때문에 예송논쟁(禮訟論爭)이 발생했을 당시에도 37세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자의대비는 왕실 최고의 어른이자 효종의 어머니이며, 현종의 할머니였다.그런 그녀가 상복을 얼마 동안 입어야 하는가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대립한 것이 기해예송(己亥禮訟) 이다.
효종이 승하하자 자의대비의 상복기간에 대해 서인들은 1년만 입을 것을 주장했다.
사대부(士大夫)들은 장남 이하의 아들에 대한 상복은 1년을 입었는데,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이므로 사대부(士大夫)의 법도대로 1년짜리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남인들은 이에 대해 반발해 효종이 비록 둘째 아들이지만, 엄연히 왕이었으므로 왕(王)과 사대부(士大夫)를 같이 볼 수 없다며 3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옛 예(禮)는 비록 잘 알 수가 없으나, 시왕(時王)의 제도를 상고 한다면 1년복이 맞을 것 같습니다."
- 현종실록 1권(서인의 주장) -
"효종이 인조의 둘째 장자(長子)로서 이미 종묘를 이었으니, 대왕대비께서 효종을 위하여 재최(齋縗) 3년을 입어야 할 것은 예제로 보아 의심할 것이 없는 일인데..." - 현종실록 2권(남인의 주장) -
그렇다면 현종(顯宗)은 서인과 남인 중에서 누구의 손을 들어줬을까? 당시 집권 세력인 서인의 편을 들었다
♡ 갑인예송(甲寅禮訟)♡
기해예송(己亥禮訟) 이후, 효종의 아내이자 현종의 친어머니인 인선왕후가 승하했다.
서인과 남인은 또 다시 자의대비의 상복기간을 두고 대립하니 이로써 2차 논쟁인 갑인예송이 일어났다.
서인은 인선황후가 차남의 아내란 이유로 9개월을 주장하고, 남인은 왕(王)의 아내라는 이유로 1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번에 현종(顯宗)은 누구의 손을 들어줬을까? 또다시 서인의 손을 들어줬을까요?
이번에는 남인의 손을 들어줍니다. 사실 예송은 단순히 옷을 몇년 입느냐는 예법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장자(長子)가 아닌 둘째 아들로 왕위에 오른 효종의 정통성을 신하들이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대립한 문제였던 것이다.
결국 현종(顯宗)이 두번째 예송에서 남인의 손을 들어 준 것은 권력이 강했던 서인(특히 송시열) 을 견제하기 위한 방도가 아니었을까?
이런 쓸데없는 예송 논쟁(禮訟論爭) 같은 것이 조선을 중병에 들게하여 병원(病原)이 골수에 침투함으로써 조선은 회생 가능성이 거의 없어진 상태였다.
재위중 서인에게 질린 현종(顯宗)은 정권을 서인에게서 남인으로 바꾸려는 와중에 그만 죽고 말았다
이로써 서인과 남인의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 얼음과 숯의 성질이 정반대이어서 서로 용납하지 못한다)의 관계를 해소하지 못한 채 현종은 아들인 숙종에게 숙제를 넘겨 주었다.
조선의 왕(王)들은 왕비(王妃) 이외에도 많은 후궁을 거느리면서 여러 여인을 취했다.하지만 조선의 27명 중에서 유일하게 후궁도 없고, 게다가 왕비도 단 한명만 둔 왕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현종(顯宗)이다.
그렇다면 현종은 조선 최고의 애처가이자 로맨티시스트였을까?
물론 두 사람의 금슬이 좋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의 성격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더 설득력이 있다.
실제로 명성왕후(明聖王后) 는 자기 아들이 왕위에 오르고 난 뒤 조정의 일을 자주 간섭한 나머지 남인들의 거센 비판을 받기도 했다. 아마도 아내의 바가지가 무서워서 후궁을 들이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현종(顯宗) 의 비(妃)인 명성왕후는 효종대에 활약했던 서인 김육(金堉)의 손녀이다.
김육(金堉)은 인조 때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효종 즉위 후 충청도 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는 성리학에 조예가 깊으면서도 선진문물에 관심이 많아 1653년부터 '시헌력'을 시행했다.
또한 수레와 수차의 개발에 힘썼으며 상평통보 주조를 통해 화폐경제가 뿌리내리도록 하여, 실학의 선구자라는 평을 듣는 명재상이었다.
같은 서인이었지만 김육(金堉)과 송시열 사이에는 갈등이 컸다. 김육은 현실주의를 추구하는 '한당(漢黨)'이었고, 송시열은 명분과 원칙만 추구하는 '산당(山黨)'으로 둘은 서로 대립했다
당파는 선조때 부터 결성되었으나 치고 박고, 서로 죽여야 직성이 풀리는 당쟁의 하일라이트는 현종(顯宗)을 거쳐 숙종대에 절정에 이르게 된다
1683년 서인은 송시열의 노론과 박세채의 소론으로 나뉘고, 노론은 다시 한당과 산당으로 나뉘었으며, 남인은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분화되었다.
한당과 산당은 김육과 송시열의 갈등에서 비롯되었고, 청남과 탁남은 유배중인 송시열에 대한 처벌문제에 있어서 강경파는 허목의 청남(淸南)이 되고, 온건파는 허적의 탁남(淸南)이 되었다.
당쟁이 더럽다고 중간에서 관망이나 하는 사람은 양쪽의 타깃이 되어 사문난적(斯文亂賊) 소리를 듣거나 역모에 얽히기 십상이었다.
분위기가 이러니 누구든 출사를 하려면 어디 한 군데 줄을 대지 않으면 출사가 불가능했고, 그 바람에 아무도 당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 임금도 없고, 백성도 없는 당쟁 때문에 조선에는 왕 같은 왕이 세종(世宗)과 정조(正祖)를 빼고는 더 이상 나올 수도 없었고 쓸 만한 인재들은 당쟁의 와중에서 모조리 살육을 당해 조선은 몰락의 관성을 멈출 수 없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