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시작 2 (3)
"아주 먼 곳일 수 있고 가까운 곳일 수도 있지. 그러나 너를 이 세상에 버린 죄책감 때문에 지금 이 시간에도 가슴을 쥐어뜯으면서 속죄를 하고 있다. 그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럼 아버지의 신분은?" "너의 아버지의 신분은 다른 사람들 앞에 드러내 놓고 나설 수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단다. 찬준이가 너의 아버지의 입장이 된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거야. 더 자라서 왜 아버지가 너를 버렸는가를 생각한다면 말이다. 만일 너의 아버지에 대한 18년 전의 비밀을 공개한다면 그 사람의 생명도 이 미 끝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지." 윤찬준이 물었다. "생명이 끝나다니요?" "사람이란 육체적인 생명과 정신적인 생명이 있단다. 그러니까 살아 있긴 하지만 이미 정신적으로는 죽은 사람이나 다를 바 없다.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너의 아버지는 과거에 대한 보속으로 한시도 편한 날이 없이 그렇게 살다 죽을 것이다." 윤찬준이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투로 물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많은 죄를 졌습니까?" "너를 이 세상에 내보내기 위한 죄라면 이해가 될 테지" "그럼 제가 아버지의 불륜의 씨란 이야긴가요?" "불륜이라면 불륜이지. 하느님도 용서 못할 불륜‥‥‥ 그러나 네가 그 불륜의 씨를 받아서 태어났다는 건 너 자신으로서는 감사하게 생각해야 된다. 이제 아들인 네가 아버지를 용서해 주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아저씨는 누구에요" "나는 너의 아버지와 친구 사이다. 내가 너를 만나는 것도 마지막이다."
사내는 아버지가 주는 돈이라고 알라며 지갑에서 1백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꺼내 건넸다. 생전 처음 받아 보는 거금이었다. "복잡하게 생각지 말거라. 그리고 용기 잃지 말고 살거라. 너는 누구보다 훌륭한 아버지를 두었다. 다만 그 아버지가 잠깐 실수를 했을 뿐이야." 윤찬준은 사내가 떠나고 나서 며칠 동안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사내가 말한 출생의 비밀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그러다가 문득 주간지에 얼마 전에 게재된 총 맞아 죽은 어떤 여자의 일이 떠올랐다. 한강변에서 새벽녘에 총성이 울리고 한 여자가 죽었다. 그 여자의 신분은 고급 콜걸로서 정계와 재계에서 잘 알려진 여자였다. 그 여자에게는 다섯 살 난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누구인지 몰랐다. 그 사내아이는 어머니의 성을 땄다. 다만 죽은 여자만이 그 아이의 아버지를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 여자가 관계하여 출생한 아이는 따라서 그 아버지가 정계나 재계에서 잘 알려진 굵직한 인물임에 분명했다. 그 여자는 왜 총에 맞아 죽었는가? 그것은 이렇다. 그 여자는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자신이 낳은 아이의 아버지 가 누구란 것을 발설하고 다녔다. 이에 그 당사자가 자신의 위상 이 손상될까 봐 타인을 시켜서 그 여자의 생명을 앗은 것이다. 자신의 위상을 보호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했고, 여기에 한때 좋아했던 여자는 그 생명이 하찮게 보였을 것이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당시의 국무총리인 모씨라는 설도 있고 또 재계의 누구라는 이야기도 나돌았다. 이른바 가진 자의 교만과 오만, 그리고 위선이었고 횡포였다. 그 아이의 아버지라는 사람은 세상을 속였지만 하늘과 땅, 그리 고 자신의 양심을 결코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윤찬준은 혹시 자신의 아버지 역시 정계나 재계에서 이름난 인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신분을 밝히기 꺼려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혹시 자신의 몸에 남들이 꺼려하는 불치의 병이 있는 사람이 아닐까? 언젠가 책에서 보았던 소록도 사람들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자신의 병인 나병을 꺼려해 아무도 몰래 소록도로 들어온 사 람 가운데 가족과 연락을 취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 야기였다. 그렇다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병 환자인가? 그러나 아닐 것이다. 스님? 어머니는 비구니? 어쩌다가 같은 절에서 눈이 맞아 불륜의 씨앗을 낳아 그 속죄로 잠적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구니와 비구승이 만나는 경우는 드물다. 성직자? 목사라면 떳떳이 신분을 밝힐 수가 있지만 그건 아니다. 그럼 가톨릭의 신부(神父)? 그러다가 문득 생각나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어느 해의 성탄절이었다.
윤찬준이 있는 고아원으로 찾아와 그를 개인적으로 불러 선물 을 한 아름 안겨 준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사복을 입었지만 목을 감싸는 로만칼라를 하고 있었다. 로만칼라는 목에 두르는 하얀 띠로서, 로마 가톨릭 소속 신부들의 정장이었다. 그는 대뜸 상대가 신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신부는 윤찬 준에게 이것저것을 물었다. 고아원 생활이 어떤지, 음식은, 학교 진학 문제는 등등 꼬치꼬치 캐묻는 것이 자신에게 무척 관심을 갖는 듯했다. 그는 반백의 머리를 추켜올리면서 그에게 정감 있는 눈길을 주었는데, 그 눈총이 무척 따뜻했다. "나는 미카엘 신부다. 혹시 여기서 생활하면서 어려운 점이 있다면 솔직히 이야기해 다오 내가 도울 수가 있으니까." 그 사람의 나이는 40대 후반이나 50대 초반이었다. 그 사람의 얼굴은 온통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인자한 웃음, 홍안의 미남, 그러나 웬일인지 얼굴 한구석에 고뇌의 그림자가 엿보였다. 그때 윤찬준은 그가 남이 아닌 것 같은 인간적인 정을 느꼈다. 그 동안 인근 교회나 성당의 봉사 요원들이 성탄이나 부활절 이면 가끔씩 찾아와 선물을 나눠 주곤 했었다. 또 동회나 구호 단체에서 찾아와 라면이나 과자 봉지를 안겨 주고 기념 촬영을 하자고 했지만 그렇게 달갑게 생각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선행을 광고하려는 것 같았다. 그들은 기념 촬영을 한 사진을 교회 안팎에 붙여 놓고 자신들의 행위를 선물 이상으로 남겼다. 그런데 미카엘 신부만큼은 달랐다.
이 세상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것 같은 생부, 그 생부의 눈길 같아 친근감을 느꼈던 것이다. 핏줄이 땡긴다는 말이 이런 경우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그러나 상대는 독신으로 일평생 살아가야 하는 성직자이다. 윤찬준은 순간적으로 미카엘 신부가 친아버지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미카엘 신부는 느닷없이 윤찬준에게, "이제부터 나를 아버지라고 불러라. 내가 너의 아버지가 되어 줄 테니까. 그 동안 얼마나 괴로웠겠니?" 그는 그 말에 너무 감동이 되어서 눈물까지 흘렸다. "아버지라고 불러도 되겠어요? 정말이에요?" "그럼, 신부는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니까 말이다. " "그럼 지금부터 아버지라고 부르겠어요." "그래라. 내가 틈틈이 찾아올게." 윤찬준은 그때의 일을 기억해 보았다. 그러나 미카엘 신부는 그 후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미카엘 신부는 '신부는 모든 사람의 아버지'라는 말을 했고, 내가 너의 아버지가 돼 주겠다는 말도 했다. 그 말은 특정인의 아버지가 아닌, 만인의 아버지란 뜻이 되겠고, 너의 아버지가 돼 주겠다는 말은 윤찬준의 아버지라는 말과 같았다. 윤찬준은 미카엘 신부의 이야기 중 그 후자 쪽을 생각해 보았다. 자신의 친아버지일 수도 있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었고, 자신을 찾아와 출생간의 비밀을 넌즈시 귀띔해 준 그 40대의 사내가 간 후, 그는 아버지 찾기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이다. 그는 미카엘이란 영세 명을 갖고 있는 신부를 찾아보았다.
윤찬준은 가톨릭 회관으로 찾아가 담당자에게, 미카엘이란 본명을 갖고 있는 신부가 몇이나 되느냐고 물었다. 담당자는 왜 그러느냐고 했다. 윤찬준이 그 말에 대답했다. "아버지를 찾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아버지? 누구 아버지?" 담당자는 윤찬준을 이상한 눈으로 보았다. "제 아버지요." "학생 아버지가 미카엘이란 본명을 갖고 있는 신부님이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친아버지인가?" "예." 담당자는 윤찬준이가 머리가 돌거나, 아니면 미카엘이란 신부가 자식처럼 데리고 있다가 사목지를 옮기는 바람에 헤어졌거나 둘 중의 하나로 생각했다. 그러나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고 대답했다. "아마 열 명쯤 되지," 하면서 미카엘이란 신부가 있는 성당을 알려 주었다. 자신을 찾아온 미카엘 신부의 나이가 40대 후반으로 보아서 서울 D본당의 신부 같았다. D본당의 신부 이름은 김형곤이었다. 그러나 성씨는 구태여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신의 성씨는 원장의 성시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한 달 후, 그의 고등학교 졸업식이 있었다. 그는 틈을 내 D본당의 미카엘 신부를 찾아가기로 작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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