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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723
4월7일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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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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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nZ6tv42lE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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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은 건너갑니다>
그 유명한 엠마오 복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한때 예수님으로 인해 잘 나가던 제자들, 예수님과 함께 하는 행복한 미래를 꿈꾸던 제자들이었는데, 다들 ‘이제 뭐해먹고 살아야 되나?’하며 낙담해 있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지 않은 엠마오라는 마을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말마디 그대로 잘 나가다가 미끄러져 낙향하고 있었습니다. 믿었던 예수님, 그래서 자신들의 미래를 걸었던 예수님, 마지막 보루이자 희망이었던 예수님께서 저리도 맥없이 돌아가셨습니다.
귀향길에 나선 제자들의 발걸음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깨에 힘이 완전히 빠졌습니다. 터덜터덜 맥없이 걷고 있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 표현에 따르면 침통한 표정으로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두 제자 사이로 예수님께서 슬쩍 끼어드십니다. 그리고 자상하게 인생 상담을 시작하십니다. 갑작스레 끼어드신 예수님의 출현에 두 제자는 꽤나 당혹스러웠습니다. 물론 아직 그분이 예수님이신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두 사람 사이에 들어오신 예수님이셨기에 두 제자는 별 거부감 없이 스스로를 무장해제 시킵니다. 일말의 경계심도 의구심도 없이 오랜 친구처럼, 편안한 스승처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최대한 거부감이나 부작용이 없도록 그들에게 당신 자신을 열어 보이십니다.
이윽고 날이 저물어 어느 집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예수님께서는 성목요일 만찬석상에서 하신 똑같은 모습으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셨습니다. 그러자 그제야 제자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우리와 동행하기를 원하시는 예수님, 우리의 귀향길에 함께 걸으시는 예수님, 우리의 인생길에 슬그머니 끼어드시는 예수님, 우리 구차스런 살림살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시는 예수님, 참으로 은혜롭고 마음 따스한 풍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상심하고 낙담한 두 제자들 사이로 끼어드심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건너가게 만드십니다. 무지에서 깨달음에로,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흐릿함에서 명료함으로, 오류에서 진리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건너가게 만드십니다.
우리에게도 보다 확실한 부활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건너감입니다. 건너가기 위해 또한 필요한 작업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깨달음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걷은 인생 여정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어느새 끼어드십니다. 그리고 적극 개입하십니다. 그리고 초대하십니다. 보다 큰 사랑에로, 보다 깊은 깨달음에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매일의 삶이 부담이요 스트레스가 아니라 매순간이 은총이요 꽃봉오리라는 것을 깨닫는 것, 그것이 바로 부활을 통해 가능합니다.
내 형제와 이웃이 고통과 십자가가 아니라 날 성장시키는 은총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 그것은 바로 부활을 통해 가능합니다.
수도원의 높은 담이 나를 가두는 장벽이 아니라 내게 날개를 달아주고 나에게 참 해방을 주는 성벽임을 깨닫는 것, 그것은 바로 부활을 통해 가능합니다.
“부활은 건너갑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재물을 섬기는 삶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이기적인 사람에서 베푸는 사람으로,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에서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건너갑니다. 이 건너감의 끝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 부활입니다.”
- 전숭규 아우구스티누스 신부님 묵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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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GNeSVbqQ9D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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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신약의 주제는 나의 십자가다>
오늘 복음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내용입니다. 이들은 여인들의 증언을 들었음에도 믿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동행하시며 ‘성경’을 뜨겁게 설명해 주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경은 ‘구약성경’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구약에서 어떤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일까요? 바로 구약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설명해 주십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들은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를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틀대로 국가를 재건해 줄 다윗과 같은 메시아 상으로 읽었습니다. 그러니 아담이 갈비뼈를 내어놓는 것이나, 아벨이 피를 흘려야 하는 이유나, 바위의 옆구리가 뚫려야 하는 것, 구리뱀이 장대에 들려야 하는 것 등의 내용이 메시아의 수난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는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성경을 가슴 뜨겁게 설명해 주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자신들 숙소에 초대합니다. 그리고는 그분이 빵을 떼어 나누어주실 때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알아봅니다. 이 덕분에 그들은 자신들이 체험한 그리스도를 제자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교회에 머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교회에 머묾’은 신약성경의 주제입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을 파견하셨듯이, 당신은 교회를 파견하시며 교회를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머물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제자들이 낯선 예수님을 자신들의 집에 맞아들였기 때문에 그분을 알아보아 교회로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 머무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그러하셨듯이 우리도 이웃을 그리스도처럼 맞아들이는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구약의 주제가 ‘나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이라고 한다면, 신약의 주제는 ‘그리스도를 위한 나의 죽음’입니다. 이 방향에서 벗어난 해석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점점 벗어나게 만듭니다.
영화 ‘미나리’(2021)에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어떤 점에 초점을 맞춰 읽어야 하는지 상징적인 내용이 있어 소개합니다.
미나리는 한 한국 가정이 미국에 정착하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미나리가 어디에서나 잘 정착하는 모습과는 다르게 이 가정은 아직 미국에 정착하기 어려워하며 큰 위기를 겪습니다. 이 힘든 상황에서 아내는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어머니를 미국으로 초청합니다.
아이들은 좀처럼 할머니를 할머니로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이들은 할머니를 가뜩이나 힘든 자신의 집에 민폐를 끼치는 사람 정도로만 인식합니다. 그래서 손자는 할머니에게 자신의 오줌을 물이라고 속여 먹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가진 재산을 다 딸에게 주었고 아이들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문화적 차이로 할머니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었을 뿐입니다. 막내 데이빗이 다쳤을 때는 잘 치료해주고 잠자기 무서울 때는 안아줍니다.
할머니가 병에 걸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황에서 피와 같은 1년 농사를 태워 버렸을 때, 아이들은 도망치고 싶은 할머니를 떠나지 못하게 막습니다. 이 모습은 마치 그리스도를 떠나지 못하게 막는 엠마오의 제자들과 같습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영광보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보아야 합니다. 사실 그렇게 보려 한다면 구약의 모든 내용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예언입니다. 모든 내용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발견할 수 있어야 신약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됩니다.
구약성경이 손자 데이빗의 눈으로 할머니를 바라보는 것이라면, 신약성경은 할머니의 처지에서 보아야 합니다. 할머니는 이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1년 농사를 다 태워버리는 큰 실수를 하게 됩니다.
할머니는 자신도 모르게 함께 머물러야 할 가족의 반대 방향으로 걷습니다. 그 가족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라 머물 힘을 잃은 것입니다. 그러나 손주들이 할머니의 앞을 가로막습니다. 한 가족에 머물 힘은 내가 그 가정을 위해 공헌한 것보다 ‘자비’에 있습니다. 물론 할머니가 먼저 그 가족에게 자비를 베풀었기에 가족도 할머니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저 할머니라는 것만으로도 그 가족에 머물 자격이 있습니다.
신약의 목적이 교회에 머물게 함인데 교회에 머물려면 내가 교회에 공헌한 것보다 바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내어주시는 자비 때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지만 내가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 줄 모를 때는 그 자비도 믿지 못합니다. 신약의 새로운 계약이란 이 자비의 계약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그리스도처럼 대할 수 있을 때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우리를 교회에 머물게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어떠한 시선으로 읽어야 하는지 일깨워줍니다. 성경을 아무리 읽고 묵상해도 이 초점을 잃으면 구원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유다인들처럼 구약에서 메시아의 수난을 찾아내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에게 자신들의 오줌을 마시라고 가져다줄 수밖에 없습니다.
죄의 용서가 있는 교회에 머물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할까요? 나의 능력이 아닌 하느님 자비에 맡겨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엠마오의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주지 않으셨으면 그 자비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이웃을 위해 그리스도처럼 빵이 되지 못할 때 새로운 계약상 그 사람은 진정으로 교회에 머물 힘을 잃게 됩니다. 성체 성혈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체 성혈은 나도 그런 사랑을 베풀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우리는 모두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같습니다. 다시 그리스도 공동체에 진정으로 머물기 위해 ‘구약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찾아내려고 노력’해야 하고 ‘신약성경에서는 나도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아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을 통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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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24,13-35 : 엠마오의 제자들
두 제자가 길을 가며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 이야기는 예수님의 죽음과 유대인들의 불의한 짓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분의 죽음을 슬퍼하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은 모르고 있다. 그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시어 함께 걸으시면서 다정하게 말을 건네신다. 그분을 알아볼 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17절)
주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뒤, 당신의 두 제자가 길을 걸으며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시고 물으신 것이다. 제자들은 눈으로 그분을 보았지만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스승님께서 그들과 함께 길을 가신다. 그분이 바로 길이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 길을 걷고 있지 못했다. 그분은 그들이 길을 벗어나 헤매고 있음을 아셨다.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18절) 그리고는 예수님께 일어난 일을 모두 말해 주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좌절과 상처를 감추지 않고 곧장 의사이신 그분께 모두 털어 놓았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21절) 예수님의 십자가형은 그들의 모든 바람을 수포로 돌아가게 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그 일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하려고 성경을 풀이해 주신다. 그들이 실망한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미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예언자들에게 이르기까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풀이해 주셨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그들은 그 가르침을 듣고 마음이 불타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빛을 알아보지는 못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구약의 말씀을 설명하신 다음에야 그들의 눈을 열어 주시어, 당신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임을 알게 하신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을 때 성령의 작용으로 마음이 타오른 것이다. 그들의 마음을 타오르게 한 불꽃은 예수님께서 풀이해주신 성경말씀의 불길이다. 믿음은 그치지 않고 사랑의 불길을 일으키며, 그 불길이 지금 제자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
떼어진 빵 조각이 눈을 열어주는 열쇠다. 엠마오의 식사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의 최후의 만찬을 재현하는 것인 동시에 성사로 주님의 부활을 기리는 교회의 성찬례가 시작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축복이 담긴 빵을 떼어 나누는 행위가 이루어질 때마다 그 안에서 당신을 드러내신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서 사라지신 것은 이제부터 말씀과 성찬 안에서 믿음으로 당신을 모실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오늘도 빵을 떼어 나누는 가운데 알아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빵을 떼어 나누면서 그리스도를 알아보았다. 그 빵은 우리가 매일 먹는 빠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축복을 받아 그리스도의 몸이 된 빵이다. 두 제자가 주님을 알아보게 한 것도 그 빵이었다. 빵을 떼어 나누는 가운데 그분께서 그 자리에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성체성사임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성체성사로 그분을 알아봄으로써 하나가 됨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오늘 복음 역시, 이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기쁨을 체험하고 그 기쁨을 다른 제자들과 나누기 위해 얼마나 서둘렀는가를 볼 수 있다. 즉 예루살렘까지 ‘30리 길을’ 서둘러 되돌아갔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주님께 대한 체험을 이웃과 나눌 수 있을 때 완전히 자기의 체험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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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눈이 가리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가까이에서 함께 걸으시는데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왜 눈이 가리어 알아보지 못할까요? 가려 있는 우리의 눈은 언제 열릴 수 있을까요? 집으로 돌아가고자 할 때는 절망하거나 실패하였을 때입니다. 엠마오로 걸어가는 제자들은 과월절을 예루살렘에서 지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워 주실 줄 알았던, 그래서 자기 생애를 내맡겼던 분의 죽음 앞에서 제자들의 눈이 가려집니다. 그렇게 걷던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무슨 일이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믿고 따랐던 예수님, 말씀과 행동에는 힘이 있어 마치 모세를 보는 듯하였고,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시켰듯이, 그분께서 로마 점령군에게서 구해 주시리라 믿었는데, 그래서 이스라엘을 함께 다스릴 줄 알았는데, 그만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렇게 성경 전체에서 흐르는 수난과 영광에 대하여 들은 제자들은 지금까지 영광만 누리고자 하였던 자신의 욕망의 길과 죽음까지 내어 주시는 예수님의 수난의 길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눈을 가리던 비늘이 떨어져 나갑니다.
성경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온 생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까지에 이르는 사랑, 이 고단하고 힘든 사랑의 길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야 마음이 타오르고 눈이 열립니다.
과테말라에서 고통받는 아이들과 함께 사는 한 신부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언제 집으로 돌아가고 싶냐면, ‘내가 아이들한테 어떤 마음으로 함께하고 일했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지?’ 하는 생각이 들 때예요. 그때마다 예수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 사랑이 고난받는 것인 줄 몰랐니? 고난 다음에 영광이 온다고!’ 힘겨움이 찾아올 때, 이 단순한 이치를 왜 자꾸만 잊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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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엠마오로 가는 길은 ‘실망’과 ‘포기’의 길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은 ‘믿음’과 ‘희망’과 ‘기쁨’의 길입니다. 엠마오로 갔던 두 제자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간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 두 제자는 예수님 덕분에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루카 24,19-24)
여기서 “기대하였습니다.”라는 말은, “기대했는데 실망했다.”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예수님에게 걸었던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직접 들었고,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로 믿었고,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허망하게도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이신 분”이 십자가형을 당한 일 자체도 충격적이고 실망스러운 일이었지만, ‘당하는 모습’이 너무 무기력했다는 점도 크게 실망하게 된 이유였을 것입니다. 십자가 수난 과정에서의 예수님의 모습은 ‘하느님의 힘’을 전혀 보여주지 못하는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는 말은, 두 제자가 생각하고 있었던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로마제국의 식민 지배에서 해방시켜 줄 정치적인 메시아였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두 제자는 로마제국이 예수님 앞에 굴복하는 것을 보기를 희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희망하고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일이 전개되었습니다. 두 제자의 ‘실망’은 여러 가지로 해석됩니다.
1)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긴 했지만, 메시아이신 분이 무기력하게 죽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실망했을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진짜로 메시아이신 분이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면, 십자가 수난을 당할 때, 아니면 수난을 당하기 전에, 하느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박해자들을 제압하셨어야 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실망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3) 두 제자는 자신들이 직접 체험한 ‘예수님의 힘’을 ‘하느님의 힘’으로 믿었는데, 예수님께서 ‘그 힘’으로 로마제국을 굴복시키지 못하고, 힘없는 모습으로 수난을 당하시는 것을 보고서 실망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4)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 때문에, 그들은 “우리가 체험한 ‘예수님의 힘’이 ‘하느님의 힘’은 아니었나보다.” 라고 생각하면서 실망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떻든 두 제자는 예수님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가, 십자가 수난과 죽음 때문에 크게 실망했고, 그래서 예루살렘을 떠나서 엠마오로 갔습니다.>
주일 아침에 있었던 일도 두 제자에게는 기대와 실망이 반복된 일이었습니다. 두 제자는 여자들이 전하는 ‘예수님 부활 소식’을 듣고서 “예수님께서 정말로 부활하셨을까?” 라고 기대를 했는데, 무덤에 직접 가서 확인한 사도들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다시 실망했습니다. (두 제자는 부활에 대해서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지, 실망감도 그렇게 크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에게,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설명해 주시는데(루카 24,27), 아마도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의 이유와 의미를 설명해 주셨을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명하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신의 수난과 죽음은 힘이 없어서 당하신 일이 아니라, 인류 구원을 위한 속죄 제물로 당신을 바치신 일이라고 설명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들이 전해 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진실이라는 것도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두 제자는 나중에 이렇게 말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 이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그들의 ‘실망과 포기’가 ‘새로운 믿음과 희망’으로 바뀌었음을 나타냅니다. 두 제자가 완전히 변화된 때는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주실 때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루카 24,29-31)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루카 24,33-35)
두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마음이 열렸고,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눈이 열렸습니다. (그들은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양들을 먹이시는 목자이신 분’, ‘생명의 주님이신 분’의 모습을 보았고, 그 모습에서 바로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두 제자가 당신을 알아보자마자 사라지셨을까? 그 이유를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중요한 점은 두 제자가 전혀 놀라지 않았고, 기쁨에 가득 차서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확신한다면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든지 안 보이든지 그것은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두 제자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간 것은, 새로운 믿음과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 차서 신앙여정을 다시 시작했음을 뜻합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참된 신앙인으로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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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코로나19 이후의 국제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각 나라가 봉쇄조치를 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코로나19 초기에 대부분의 나라는 봉쇄조치를 취했습니다. 코로나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봉쇄조치는 코로나19의 확산을 막는데 큰 효과는 없었습니다. 백신의 개발이 늦어지고, 코로나19의 전파가 더욱 확산되었다면 봉쇄조치는 더 길어졌을 겁니다. 미국의 주도로 코로나19를 잠재운다면 제2의 ‘PAX AMERICANA'가 시작될 수 있다고 합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국제질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재편되었습니다. 중국의 주도로 코로나19를 잠재운다면 ’PAX CINICA'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중국은 코로나19 초기에는 혼란이 있었지만 코로나19를 일찍 종식시켰기 때문입니다. 미국과 중국은 북한의 핵문제에 대해서는 협력(Cooperation)하고, 무역에 대해서는 경쟁(Competition)하고, 인권과 가치에 대해서는 분쟁(Confliction)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미국도, 중국도 코로나19를 종식시키지 못한다면 코로나19를 효과적으로 대처한 나라들과 국제적인 연대와 협력을 이루어내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을 ‘PAX UNIVERSALIS'라고 합니다.
강한 군사력, 정치력, 경제력으로 국제사회의 질서를 유지했던 적이 있습니다. 역사는 당시를 ‘PAX ROMANA'라고 부릅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All the roads lead to Rome.)’라는 말이 있습니다. 2,000년 전에 로마는 예술, 문화, 건축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로마는 종교적인 통합을 이루었고, 교회는 로마의 제도와 법을 받아들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로마가 이루어놓은 길을 따라서 전해 질 수 있었습니다. 정치와 종교를 통합한 로마는 인류의 문명을 한 차원 높일 수 있었습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 않았다.(Rome was not built in a day.)’라는 말도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던 로마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끊임없는 노력으로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위대한 업적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끈질긴 노력 끝에 얻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When in Rome, do as the Romans do)’라는 말도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유연하게 사고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뉴욕에 오면 뉴욕의 법과 질서를 따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예전과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바로 ‘PAX CHRISTIANA'입니다. 삶의 중심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온 백성은 그가 걷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는 것을 보고, 또 그가 성전의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 자선을 청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경탄하고 경악하였다.” 그렇습니다. 사도들은 돈도 없었습니다. 힘도 없었습니다. 문화적인 역량도 없었습니다. 조직과 제도도 없었습니다.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있었습니다. 그것이 박해를 이겨내는 힘이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힘과 세상의 가치가 교회에 들어오면 언제나 갈등과 분열이 있었습니다. 웅장하게 건축된 성전은 교회를 지켜주지 못하였습니다. 완벽한 제도와 교리가 교회를 지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헌신했던 신앙인들이 교회의 주춧돌이 된 것입니다.
오늘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길 위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우리들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돈이 없어도, 힘이 없어도, 명예가 없어도 우리는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예전에 좋아했던 성가 ‘엠마우스’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서산에 노을이 고우나 누리는 어둠에 잠겼사오니
우리와 함께 주여 드시어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주님의 길만을 재촉하시면 어느 세월에 또 뵈오리이까?
누추한 집이나 따스하오니
주님의 이집에 모셔 들이면 기쁨에 겨워 가슴 뛰오니
길에서의 이야기마저 하시며
우리와 한상에 자리하시어 주님의 빵을 떼시옵소서.
가난한 인생들 소원이오니
밤바람 차갑고 문풍지 떠나 주님의 음성이 호롱불 되고
주님의 손길은 따스하오니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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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엠마우스 (Emmaus)>
부활 대축일이 지난 첫 월요일이 되면 본당의 신부님, 수녀님, 사무실 직원들이 함께 ‘엠마우스’라고 일컫는 짧은 휴가를 가곤 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것처럼, 주님 안에서의 부활 체험을 하고자 하는 소망을 담고 있는 여정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작은 동네 엠마오를 향해 부활하신 예수님은 두 제자들과 함께 걸으시면서 성경 말씀을 풀이해주셨습니다. 또한 저녁이 되어서는 빵을 떼어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모습 안에서 미사 중에 성경 말씀을 듣고, 성체를 받아 모시고 있는 우리들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일상의 우리의 삶에 소리 없이 다가와 함께해주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올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곳은 바로 우리 삶의 한가운데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환경이,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곳, 만날 수 있는 대상들입니다.
또한 그곳이, 그리고 그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할 수 있는 곳, 전할 수 있는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엠마오’는 멀리 있는 곳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곳,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마음 안에 자신의 ‘엠마오’를 떠올려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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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신 이야기를 다룹니다. 루카는 메시아에 대한 실망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열렬한 믿음으로 점점 나아가는 인물들의 심리를 매우 정교하게 전개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만나려고 어떤 여정을 걸어야 했을까요? 오늘은 성경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묵상해 봅니다. 무엇보다 먼저 성경은 예수님께서 당신에 대한 믿음에 이르게 하시려고 열어 주신 길입니다. 두 제자는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걸으셨지만, 그분을 알아채지 못하였고 동시에 예루살렘에서 며칠 동안 일어난 모든 일을 그분이 모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두 제자는 실망하였습니다.
그들이 기대하던 메시아 희망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의 무덤 속에 감추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메시아 희망은 제자들에게 널리 퍼지기 시작한 빈 무덤과 심지어 천사들이 여인들에게 일러 준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소식들조차도 다시 불러일으킬 수 없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성경에 대한 이 그리스도론적 해석은 예수님에 의해 시작된 길이고, 사도행전이 전하는 사도들의 설교에서 볼 수 있듯이 초대 교회가 따르던 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엠마오의 두 제자와 어떤 점에서 다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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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아마 우리 모두는 실망과 절망에 빠져 본 적이 있을 것 입니다. 가던 길을 중단해버릴 만큼, 희망이 꺾인 적도 있을 것 입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버릴 만큼, 믿었던 바가 의혹과 불신으로 바뀌어버린 적도 있을 겁니다. 오늘 <복음>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과 예수님께서 동행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루카 24,16)
그들은 자신들의 희망과 믿음이 무너졌다고 여긴 까닭에 절망하고 슬퍼했기에,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걸으면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들의 희망과 믿음이 깊어져야 하고, 변화되어야 하고, 정화를 받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먼저 말을 건네십니다.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루카 24,17) “무슨 일이냐?”(루카 24,19)
그들은 먼저 그분에게서 일어난 일이 무슨 일인지를 깨달아야 했습니다. 사실, 실망과 절망에 빠질 때가 가장 위기의 순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기회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실망하고 절망에 빠지고 슬퍼질 때, 바로 그때가 우리의 희망을 내려놓아야 하고, 우리의 믿음을 내려놓아야 할 때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뜻이 아니라, 우리의 뜻과 생각이 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눈이 가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눈이 가려져 있음을 깨달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눈이 열려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요한 20,25)
그렇습니다. 알아야 할 바를 제대로 알아야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믿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성경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설명해주시고,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주십니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루카 24,31)
여기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보는 믿음의 눈이 열리는 세 과정을 봅니다. 그리고 이는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렉시오 디비나)의 세 과정에 비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이 열리게 되고(open mind), 가슴이 열리게 되고(open heart), 우리의 뜻이 바뀌게 되는(open will) 과정입니다. 곧 말씀에 대한 개방과 말씀의 수용과 말씀으로 말미암은 변형입니다. 말씀을 듣고서 지성을 동반하여 깨달아 알아듣고, 알아들은 바를 마음으로 받아들여 믿으며, 믿는 바를 그분의 뜻에 따라 실현함으로서 변화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외적인 눈이 열리고, 속눈이 열리고, 영의 눈이 열리고, 마침내 그분을 뵙게 되는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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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루카 24,16)
주님!
곁에 함께 걸으시건만,
당신을 알아 뵙지 못한 저를 용서하소서!
길동무가 되어 주시건만,
곁에 없는 것처럼 무시하였음을 용서하소서!
제 안에서 숨 쉬시며, 함께 걸으신 당신을 알아보게 하소서.
뼈 속 깊이 계시고, 입술에 가까이 계시고,
발등에 등불이신 당신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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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들은 눈이 가리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다."(루카24,16)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예수님의 두 제자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간직한 채로,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약11km) 떨어져 있는 엠마오라는 곳으로 무거운 발길을 옮깁니다.
그런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가가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눈이 가리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대화하면서 아니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들의 눈이 조금씩 열립니다. 마침내는 식탁에서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주실 때, 그 빵을 먹고 그들의 눈이 완전히 열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고, 그들은 서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24,32)
볼 수 있는 것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하느님을 믿는 이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굳게 믿고 따르는 이들은 보이는 것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 곧 본질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좋았다."라고 감탄하신 하느님의 창조물을 바라보면서 하느님을 볼 수 있고, 하느님의 숨결을 느낍니다. 특히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인 너를 바라보면서 하느님을 봅니다. 그러니 말과 행동으로 너를 함부로 대하지를 않습니다.
이것이 믿는 이들의 참모습이요, 믿음의 결과인 은총이고 기적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믿는 이들 안에서 일어나는 은총과 기적에 관한 말입니다. 말씀과 빵의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과 온전하게 하나가 될 때 기적이 일어나고, 그 힘으로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오늘 복음과 독서는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사라지고 말 것과 탐욕에 눈이 멀지 말고, 말씀과 성체 안에 머무는 자녀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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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 너머 그분>
루카 24,13-35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안식일 다음날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 너머 그분>
봄 그 너머
그분 계시니
보지 못함을
고백할 때에
그분 본다네
앎 그 너머
그분 계시니
알지 못함을
고백할 때에
그분 안다네
함께 그 너머
그분 계시니
함께하지 못함을
고백할 때에
그분 함께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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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아이가 목청껏 울고 있습니다. 얼굴까지 새빨개지면서까지 말입니다. 이때 주변의 이목을 강렬하게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기 엄마는 서둘러 구석으로 가서 아기 기저귀를 갈아줍니다. 그 뒤에 이 아기는 어떠했을까요? 방긋방긋 웃으며 자신이 지금 기분 좋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아이가 왜 울었는지를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아이는 이런 표현을 한 것이 아닐까요? “저 지금 굉장히 불편해요. 저 좀 도와주세요.” 그리고 불편함이 사라지자, “저 너무 기분 좋아요.”라면서 웃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불편함을 울음으로 외친 이 아기의 행동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우선 잘한 것일까요? 잘못된 것일까요? 자신의 무력함을 알리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오히려 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는 이 아기처럼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불편함, 어려움을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어려움을 언제까지 고백해야 할까요?
당연히 해결될 때까지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간절하게 기도로서 고백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거나 해결되지 않았을 때 쉽게 주님의 반대편에 서서 불평불만으로 터뜨립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주님께서 도움을 주셔도 깨달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의 자세는 끝까지 주님께 고백하는 모습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두 제자는 슬픔에 젖어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미리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셨지만,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것에 실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절망과 의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자, 더는 주님 앞에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이 옆에 계셔도 부활하신 그분을 알아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할 것 없이 주님을 찾고 주님과 함께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결코 나의 청원이 들어줄 때만 알아볼 수 있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고통과 시련의 순간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는 지혜와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끝까지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남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향수를 뿌리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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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먼저 제대로 보세요>
여전히 코로나로 인해 자영업자들이 매우 힘들다고 하지만, 더 어려운 시간을 겪은 곳은 종교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 개신교 측에서 확진자가 많이 나와서 개신교 쪽에서도 스스로 “자기들의 모습이 부끄럽다”라고 말합니다. 일반 사람들에게 사람을 살려야 하는 종교가 사람을 죽이는 종교처럼 비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종교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의 비판이 더욱 커졌습니다.
열심히 성당에 다니는 어머니에게 딸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성당에 왜 나가요? 교회가 얼마나 부패했는데요?” 그러면서 어머니가 성당에 가지 않게 하려고 교회의 세속적인 모습, 상업적인 모습들을 계속 말하면서 열심히 비판했습니다. 한참을 듣던 어머니는 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 뭐 눈에는 X 밖에 안 뵌다더니, 넌 어째서 그런 것밖에 못 보니? 난 예수님 한 분만 보여서 다른 것은 전혀 보이지 않더라.”
교회의 실망스러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실망스러운 모습이 교회 전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보지 않고서 교회 전부를 봤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비판을 하기 전에, 나는 예수님을 제대로 보고 있었는지를 먼저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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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그분이 먼저 알려주셔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은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무슨 특별한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나를 위한 사람이 내 옆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사할 뿐입니다. 마음에 있는 얘기는 기회가 되면 할 것이고 지금은 묵묵히 있는 것이 좋습니다. 큰일을 치르고 난 후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침묵 속에서 주님의 뜻을 찾는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지금은 입을 다물 때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오늘은 할 말을 잃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무기력하게 죽었으니 모든 기대와 희망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참히 돌아가시고 더더욱 그 시신까지 없어졌으니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은 이제 예루살렘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늘과 같은 스승이 힘없이 사라졌으니 거기에 있다가는 어떤 불똥이 튈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서둘러 그 자리를 떠야 했습니다. 사실 무덤이 비었다는 것은 ‘고난을 겪은 다음에 자기 영광 속에 들어가리라’는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었지만, 그것을 알기까지는 아직 눈이 뜨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큰 실망과 좌절만이 더하였습니다. 실망이 큰 만큼 기쁨이 크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동행하시면서 성경 말씀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음에 뜨거운 감동을 일으키고 결정적으로 제자들은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낌새를 알고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습니다. 지금 당장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지만,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깨우침이 남아있었는가 봅니다. 나그네를 묵어가라고 붙들었으니 말입니다. 일찍이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천사를 대접’(창세18,1-15). 하는 기쁨을 차지했습니다.
제자들은 마침내 나그네와 함께 식탁에 앉게 되었고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알아보기가 무섭게 그들에게서 사라지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이 알 것을 알았으니 더는 거기 남아계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또한 제자들도 가던 길을 되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하였고 거기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 뵙게 된 일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결국 주님께서 먼저 알려 주셔야 그분을 알 수 있고, 우리도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눈이 뜨인다는 깨우침을 얻게 됩니다. 성경 풀이를 듣고 마음이 타올랐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나그네를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가? 를 배우게 됩니다. 마음을 재빨리 움직일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믿는 마음’, ‘듣는 마음’이 필요한 때입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청하지 않고 ‘듣는 마음’(1열왕3,9)을 청한 이유를 함께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삶의 절망 한가운데에서도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하였던 제자들처럼 주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시련과 고통의 어두움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우리와 동행 하십니다. 다만 내 아픔이 커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할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나와 동행하시면서 마음을 열어 주시고 뜨겁게 해주시지만 지금 당장은 눈이 가려져서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꼭 붙잡으십시오. 어둠 속에서도, 절망 가운데에서도 주님을 붙잡으십시오.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붙잡기만 하면 언제든지 함께 묵으십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예레1,8) 미루지 않는 사랑에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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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아름다운 삶>
-예닮의 여정-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확실한 것이 세월이요 죽음입니다. 아무도 나이들어 늙어감을 막을 수 없고 때되어 맞이하게 되는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파스카의 봄이 지나면 곧 여름이 되고 신록과 더위는 한층 더해질 것입니다. 모두가 다 지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지금 여기서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을 만나며 기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저와 순교복자수녀회 진천 ‘무아無我의 집’ 피정집과는 인연이 참 깊습니다. 제 마음의 고향집 같이 참 푸근하고 편안합니다. 태령산 중턱의 옛 사제관을 그리며 2년만에 도착한 무아의 집, 피정집과 사제관은 상전벽해, 완전히 변해 있었습니다. 끊임없는 회개의 내적혁명을 통한 내적변화도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비탈이 사라져 평평해 있었고 사제관 자리에는 예수 성심상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축복 가득한 분위기의 새 건물의 피정집에서, 사제관에서 역사적인 첫 피정을 갖게 되었으니 참 감사합니다. 다 변화해도 내 순수한 ‘마음의 고향’과 ‘예수님’만은 영원했으면 좋겠습니다. 삶은 변화의 여정입니다. 참 많이 강론 주제로 택했던 ‘여정旅程’이란 말마디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참 아름다운 삶-예닮의 여정-’입니다. 누구나의 소망이 참 아름다운 삶이며 우리의 영원한 구원자이자 도반이신 파스카의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깊어가는 아름다운 예닮의 삶일 것입니다.
죽음은 ‘무無’에로의 환원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낳아 하느님이 집으로 돌아가는 ‘귀가歸家의 여정’입니다. 제 즐겨하는 묵상이 인생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해 보는 것이며, 일년사계로 압축해 보는 것입니다. 제가 2000년 8월말 이곳 무아의 집 피정집에 피정지도차 왔을 때 52세의 시점을 일일일생, 일년사계로 확인해 보니 오후 2시쯤의 초가을 같고, 21년 후인 2021년 4월 지금은 73세 오후 4시쯤의 초겨울 같다는 생각에, 아버지 집으로의 귀가 시간이 가까워졌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듭니다.
이처럼 삶의 여정을 일일일생, 일년사계로 압축해보면 내 삶의 시점이나 지점이 확연히 드러나 환상이 걷힌 본질적 삶을 살게 될 것이며, 하루하루 주어지는 하느님 선물에 찬미와 감사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요즘 예수님 부활 대축일후 말씀의 주제는 대부분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과의 만남에 관한 것입니다. 사실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과의 만남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영원한 고질병인 무지無知와 허무虛無에 대한 유일한 답도 우리 삶의 영원한 목표目標이자 방향方向이며 중심中心이자 의미意味이신 예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파스카의 예수님이 빠진 삶은 살아도 참으로 사는 것이 아닌 완전히 유령같은 헛것의 삶입니다.
참 삶은 예수님을 날로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면서 참 나의 실현입니다. 바로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오늘 루카복음 말씀과 제1독서 사도행전 말씀의 배치가 참 고맙습니다. 예닮의 여정에 결정적 가르침과 깨달음을 줍니다.
엠마오 도상의 여정이 상징하는바 우리 예닮의 여정입니다. 엠마오 도상의 여정중인 두 제자들과 함께 한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셨지만 이들은 눈이 가려 함께 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우리와 늘 함께 하신 임마누엘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지만 우리 역시 눈이 가려져 있다면 만날 수 없습니다.
하여 성경 말씀공부에 미사전례 참석입니다. 바로 오늘 루카복음은 미사전례의 구조를 보여줍니다. 제자들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고백에서 보다시피 복음의 전반부는 미사로 하면 ‘말씀 전례’에 해당되고, 후반부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자 그분께서는 사라지셨다’는 내용은 미사로 하면 ‘성찬전례’에 해당 됩니다. 그러니 매일 미사를 통한 주님과의 만남이 예닮의 여정에 얼마나 결정적 도움을 주는지 깨닫게 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엠마오 도상의 여정은 예닮의 여정에 근본적 요소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기도하라’, ‘공부하라’는 기본적 가르침에 환대의 영성입니다다. 미사 공동전례기도에 항구하고 성경 말씀 공부에 항구하며, 만나는 이웃을 따뜻한 마음으로 환대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이 환대를 통해 예수님을 만났듯이 우리 역시 일상의 크고 작은 이웃 환대를 통해 주님을 만납니다. 온전한 영육의 균형잡힌 건강을 위해 ‘기도하라’, ‘공부하라’에 이어 ‘일하라’, ‘운동하라’ 꼭 둘을 추가하고 싶습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주신 참 좋은 선물이 파스카의 예수님과 만남의 선물입니다. 바로 예닮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한 기쁨과 감사의 삶자체가 이웃에겐 최고의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를 통해 파스카의 예수님을 선물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의 결정적 모범이 예수님의 최측근 제자들이었던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이를 치유하는 다음 대목은 읽을 때마다 늘 신선한 충격에 감동을 줍니다.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나서, “우리를 보시오.”하고 말하였다.’ 눈맞춤의 '아이 컨택트'를 시도하는 베드로의 사랑입니다. ‘그가 무엇인가를 얻으리라고 기대하며 그들을 쳐다보는데, 베드로가 말합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그러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가 즉시 발과 발목이 튼튼해져서 벌떡 일어나 걸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였다.’
얼마나 아름다운 살아있는 장면인지요! 파스카의 예수님과 하나된 베드로야 말로 최고의 영적 부자이자 자유인입니다. 베드로를 통해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과 만남의 선물로 치유의 구원에 새롭게 부활한 태생 불구자입니다. 주님은 친히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과 하나된 우리의 영육을 아픔과 병을 말끔히 치유해주시며, 예닮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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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1)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을 통해 미사의 흐름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루카 24,15)
예수님의 사랑의 제사인 미사에 참여하기 위해 마음을 모은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미사는 주님 현존의 잔치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루카 24,16-17)
예루살렘에서 겪은 실패 체험으로 낙담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질문을 통해 그들 마음의 고통을 끌어내어 주십니다. 마치 미사가 시작되면 구원의 신비에 합당하게 참여하기 위해 참회의 시간을 가지면서, 주님 앞에 나서기 죄스럽고 부끄러운 모습, 죄악과 걱정, 근심을 그분께 내보이며 자비를 청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루카 24,19)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미사 때 우리가 바치는 신앙 고백과는 달리 그들의 신앙 고백은 아직 불완전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수난과 죽음의 희생을 잊은 자기본위적인 기대였기에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믿고 희망한 대로의 결과를 손에 쥐지 못했지요. 그래서 침통하고 낙담했습니다.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루카 24,27)
이는 말씀의 전례를 떠올리게 합니다. 독서자의 입을 통해 선포되는 내용이 곧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지요.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루카 24,29)
제자들이 예수님을 붙듭니다. 그들이 혼자서 더 멀리 가시려는 듯 보이는 예수님을 자신들의 거처와 식탁에 초대합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이 열리고 더 관대해진 듯 하지요. 미사의 봉헌 예식에서 우리는 은총을 얻은 바를 주님께 정성껏 바치고 또 가난한 이웃과 기꺼이 나눕니다. 손을 내미는 마음이 곧 봉헌이지요.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루카 24,30-31)
예수님께서 빵을 나누어 주실 때 제자들이 그분을 알아봅니다. 빵은 그분께서 내어 주시는 당신의 몸입니다. 우리도 미사 때 성체성사를 통해 주님을 모시면서 그분의 현존을 누리지요.
"그러나 그분께서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루카 24,31)
예수님께서 사라지십니다. 하지만 두 제자의 심장과 영혼, 존재 안에 깊이 각인되시지요. 미사 때 성체께서 우리 안에 들어 오심으로써 당신의 형체는 사라지지만, 우리 안에 녹아들고 흡수되어 우리가 되어 주십니다. 우리가 영한 성체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 길이 남아 우리가 그분과 하나되고, 종래에는 그분이 되게 해 줍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
엠마오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빵을 받은 뒤에야 뒤늦게 깨닫습니다. 말씀의 식탁과 성체성사는 각각 그 자체로도 완전하지만, 서로를 더욱 풍요롭게 합니다. 그리고 진심을 다해 두 식탁에 온전히 참여하는 이들의 지혜와 통찰을 강화하여 주님의 마음을 깨닫게 해 줍니다.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루카 24,35)
이제 파견과 선포의 때입니다. 예루살렘이 두렵고 깨진 꿈에 실망해서 고향을 향하던 이들이 가던 길을 돌이켜 수난의 도성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만난 예수님을 다른 제자들에게 선포하지요.
이는 미사를 마치며 세상으로 파견되는 우리의 소명이기도 합니다. 축 처진 어깨와 복잡한 마음, 무거운 발걸음이나마 주님을 향해 말씀과 성찬에 식탁에 참여하는 이는 은총으로 변모되어 그 사랑을 선포하는 이가 됩니다. 오늘 엠마오 제자들이 체험했듯, 미사는 곧 파견의 잔치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파견받은 이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사도 3,6)
구걸하는 이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물질적인 희사를 바랐지만 그들이 가진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습니다. 파견된 이는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지요. 그리고 이 나눔은 그에게 당장의 육적인 양식이 아니라 건강을 되돌려 줍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한때의 두려움과 무지와 의혹을 딛고, 주님 이름에 의지해 주님의 능력을 전하는 진정한 사도로 거듭납니다. 미사를 마치고 파견되는 우리가 비록 가진 것 없고 능력 또한 미소해도, 우리가 가진 오직 하나 예수님의 이름이 지닌 무한한 능력을 믿으며 담대히 나아갈 때 반드시 그분께서 일하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어쩌면 우리의 영적 여정 안에서 엠마오 제자들과 예수님의 만남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다가와 동행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거룩하고 역동적인 깨달음의 여정을 충만히 걸으시길 기원합니다. "무슨 일이냐?" 하시는 예수님께 눈과 귀, 마음을 활짝 열고 우리 마음을 쏟아놓읍시다. 그분께서 격려하시고 도와주시고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아멘.
오늘도 역시,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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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엠마오의 두 제자>
예수님을 열심히 따르던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무참하게도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맙니다. 설마 무슨 기적이라도 일으키시겠지 기대하였는데 끝내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이 두제자는 더이상 예수님의 제자공동체에 머물러야 할 이유를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성소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모두가 다 허사였습니다. 그래서 실망하여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를 떠나 고향으로 터덜터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요즘 성소위기로 힘들어하는 형제들 때문에 가슴이 아픕니다. 수도생활, 성직생활에 대해 더이상 희망을 찾지 못하고 좌절감에 사로잡혀 떠나가려 합니다. 이들이 어떡하면 되돌아올 수 있을까 수많은 궁리를 해 보아도 딱히 답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소는 우리 각자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소의 위기를 겪던 두 제자는 다시금 성소를 되찾아 제자공동체로 되돌아옵니다. 그리고는 다른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노라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성소를 살아갑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되는데... 부활이 왔지만 성소의 위기를 겪고 떠나는 형제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못 만났나 봅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들은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까요? 이들은 그저 특별한 은총을 입었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을까요? 물론 그렇겠지요?
하지만 이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밖에 없었던 요인도 있지 않을까요? 무엇보다도 이들은 성소에 대해, 삶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고민은 꼭 필요했습니다. 그러한 고민이 있었기에 예수님 편에서의 성서 말씀에 대한 해석과 빵의 나눔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고민이 풀리면서 눈이 열리게 된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가 성소의 위기를 겪게 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 성소에 대한, 삶에 대한 진지한 구도자적 질문입니다.
그 다음으로 성서말씀에 대한 묵상이 필요합니다. 성서말씀을 통한 깨달음이 없이는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식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사성제와 성체성사입니다. 성체 안에 살아계시는 그분과의 만남입니다. 이러한 방법 없이 성소의 위기를 올바로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기쁘게 살아갈 방법이 없습니다. 인간적인 고민과 다른 사람의 수많은 조언마저도 이 세 가지와 함께 하지 않는다면 성소의 위기를 극복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는 신바람나는 삶을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오늘도 성소의 위기를 겪고 있는 성직자, 수도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가가시어 성서의 말씀을 깨우쳐 주시고 성체성사 안에서 당신을 뵈올 수 있는 은총을 주시어 기쁘게 자신의 성소를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해 본다.
아~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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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김홍언신부님의 영성의샘물♡
♥<먹는 것>은 죽은 음식이 생명이 되는 <파스카 의식>?
식사를 하는 행위는 죽은 음식이 살아나서 우리 생명이 되기에 소위 파스카(Pass over)의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죽음을 건너뛰고 지나간다고 하는 의미이기에 파스카의 행위라고도 볼 수 있다. 식사를 하는 행위는 죽은 음식이 우리 몸으로 살아나는 부활의 의미가 담겨 있다. 그래서 음식을 먹는 행위는 <생명의 잔치>이고 죽은 것이 살아서 몸이 되기에 부활의 잔치고 되지 않을까. 비물질적인 음식물이 우리 몸의 살과 피가 된다는 현실이 완전히는 같지 않지만 성찬의 잔치와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식사시간은 엄숙한 시간이기에 하나의 행사를 넘어 의식儀式의 행위가 인류가 존재하는 곳에는 항상 있었다. 크게는 국가적 개천절, 해방일 등 정식 의식을 치른다. 소극적 의미에서 생일잔치, 제사 행위, 환갑, 결혼 등등 공동체적 사회적인 통합과 화해와 일치를 가져다준다.
음식을 먹는 행위에는 생명의 존엄성에 감사와 일상생활의 틀을 깨는 귀한 의식을 치르듯이 음식물을 주신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파스카의 생명의 의식을 거행하듯이 해야 하겠다.
-김홍언 신부, <영성 노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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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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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0m1UWrVZeMk&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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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루카 24, 31)
부활하신
주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오히려
단순하고
소박한 우리
일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난다.
거꾸로
뒤집어 보면
우리 일상은
그야말로
놀라운
신비이다.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차고 넘치는
주님의
사랑이다.
내어주시는
주님 사랑이
바로
부활이다.
사랑에도
쉼이 필요하다.
멈추었다
가는 쉼도
길을 가는
여정 안에
참으로
소중하다.
부활은
특별하지
않다.
특별하지
않기에
특별한 것이다.
우리의
보는 눈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길에서 주님을
다시 만난다.
나누시는
말씀과
나누시는
빵 안에
부활이 있다.
말씀과 빵의
따뜻한
초대이다.
따뜻한 초대가
따뜻한
부활이 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이다.
사랑은
엠마오의
저녁처럼
주님과 함께
편히 쉬는 것이다.
동행과 휴식
사이에 다시
타오르는
마음이 있다.
마음이
있는 곳에
부활이 있다.
눈이 열리는
것이 부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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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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