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모든 부모님이 저와 같은 심정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아들들은 나라에 대한 의무와 봉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벗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놓은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습니다.” 폴 F 브레임 저, ‘위대한 장군 밴플리트’ 중에서
1952년 4월4일 8군사령관 밴플리트(James A Van Fleet) 장군의 아들 지미 중위가 B-29 폭격기를 조종, 북쪽으로 출격했다가 실종됐다. 그해 부활절 밴플리트 장군은 한국전쟁에서 아들이 실종된 모든 부모에게 위와 같은 위로전문을 발송했다.
한국전쟁 3년 1개월 2일 동안에 미군은 전사 및 실종·부상 등 총 13만7250명의 사상자를 냈다. 참전 미군 중에는 미군 장성들의 아들 142명이 포함됐는데, 이중 35명(25%)이 전사 또는 부상했다.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아들 존(John Eisenhower), 워커 8군사령관의 아들 샘(Sam Walker), 클라크 유엔군총사령관의 아들 빈 대위도 최전선에서 싸웠다. 해리스 미 해병 제1항공사단장은 장진호 철수작전을 항공지원하고 있었는데, 그의 아들 해리스 소령은 미 해병 제1사단 7연대 3대대를 지휘, 아버지의 항공지원 하에 장진호를 돌파하다가 하갈우리에서 전사했다.
밴플리트 장군은 ‘전쟁의 세기’라 일컬어지는 20세기를 야전군인으로 살다 간 전쟁영웅이다. 그는 한국전쟁 기간 중 2년을 8군사령관으로 전선에서 싸웠고, 바로 그 전선에서 사랑하는 외아들 지미를 바쳤다.
그는 아들을 잃고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부대지휘에 만전을 기했고, 참모들이 전투기 100여 대를 투입해 사체수색활동을 벌이자고 건의해도 작전에서의 승리만을 생각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처럼 그는 확고한 사명감과 불퇴전의 결의를 보여 주었으며, 특히 대부대는 물론 소부대의 여하한 전투에 있어서도 완전한 승리를 거두는 것을 모토로 정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 보병 중대장으로 참여한 바 있고, 육군 대령으로 예편한 브레임(Paul F Braim)교수가 2000년에 발간한 밴플리트 장군의 전기 제목 역시 ‘필승의 신념’(The Will to Win)이었다.
밴플리트 장군의 전공과 업적을 각별히 기억하는 것은 북한군의 기습남침시 준비 안된 전쟁으로 고군분투해야 했던 우리 군을 훈련과 전력보강을 통해 오늘날의 정예군으로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그는 8군사령관으로 취임한 직후부터 소수병력으로 적과 어려운 전투를 계속하면서도 한국군 사단을 9주간씩 교대로 재훈련시킬 만큼 한국군의 전력향상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특히 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증편하려는 계획은 당시 미국 내에서도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장군은 52년 말 당선된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간곡히 건의해 이를 관철했다. 아이젠하워와 밴플리트 장군은 웨스트포인트 동기생이었다.
이렇게 해서 한국군이 20개 사단으로 증편되자 한국군의 중추 역할을 담당할 기간장교단을 양성하기 위해 웨스트포인트를 모델 삼아 4년제 육군사관학교를 설립하는 데 결정적 공헌을 했으며, 전역 후에는 모금활동을 전개해 육사에 도서관을 지어 기증할 정도로 한국군 발전에 끝없는 관심을 보였다.
〈국방부 군비통제관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