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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14일 재의 수요일
제1독서 : 요엘 2,12-18
제2독서 : 2코린 5,20─6,2
복 음 : 마태 6,1-6.16-1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2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3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4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5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6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16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17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18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약속은 맺을 약, 묶을 속, 즉 단단히 묶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그 관계가 헐거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임에 참석할 사람 몇몇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안 오는 것이냐?”라고 물으니,
“조금 늦는다”라는 문자 메시지가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인해 약속 자체가 많이 헐거워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휴대전화가 없을 때는 연락이 되지 않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약속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너무 쉽게, “미안, 급한 일이 있어서…. 조금 늦어.” 식으로
메시지를 보내면 그만입니다.
약속이 헐거워 짐은 관계 역시 헐거워지게 됩니다.
실제로 몇 차례 약속 시간에 늦는 친구를 보면서 아예 약속을 잡지 않게 되지 않습니까?
주님과 우리는 많은 약속을 합니다.
죄짓지 않겠다. 열심히 살겠다. 가정에 충실하겠다. 사랑하며 살겠다 등등….
그런데 그 약속이 헐거워진 것이 아닐까요?
너무 쉽게 약속을 깨고 “다음에는 꼭 지키겠습니다.”라는
말을 한 뒤에 또 다른 약속을 만듭니다.
이렇게 약속을 지키지 않아 주님과 헐거워지는 관계가 되면,
결국 전혀 상관없는 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재의 수요일을 맞이하여 머리에 재를 얹으면서 사순시기를 시작합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시간,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얼마나 큰지를
다시금 묵상할 수 있는 거룩한 시간입니다.
이 시기에 우리는 많은 약속을 주님께 하게 됩니다.
이렇게 죄를 많이 지으며, 주님 뜻과는 정반대로 나아가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서 다시 주님께로 향하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그런데 이 약속이 그냥 입에서만 맴도는 공염불이 될 때가 많습니다.
약속이 계속 헐거워지면서 주님과 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재를 얹으면서 사제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또는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 삶이 영원하지 않음을 기억하면서 이제는 주님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삶은 다른 이들에게 칭찬받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칭찬받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선과 기도와 참회를 겉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모두 갚아 주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 노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약속이 헐거워지도록 하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과의 약속을 통해 더욱 주님과 단단한 결속을 맺을 수 있고,
주님 안에서 참 기쁨과 행복의 삶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은혜로운 사순시기가 되길 기도합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사순시기가 시작되는 오늘 <제1독서>에서는 ‘회개’를
<제2독서>에서는 ‘화해’를, <복음>에서는 ‘의로움’에 대한 말씀을 들려줍니다.
<제1독서>에서 예언자 요엘은
‘옷이 아니라 마음을 찢고, 단식하고, 울면서, 마음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께로 돌아오너라.”(요엘 2,13)라고 말하며,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과 화해하고 은혜로운 구원의 날을 맞이하라.’고 말하며,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들처럼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자선과 기도와 단식하지 말고,
숨어 계신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는 몸과 옷을 찢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는 뉘우침이며,
자신을 드러내는 의로움이 아니라 하느님에게로 ‘돌아옴’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회칙 <신앙의 빛>에서,
‘회개’를 “주님을 향해 거듭 되돌아가는”(13항) 것으로,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에 우리 자신을 맡기며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거듭해서 기꺼이 변모되려”(13항)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회개’가 첫째는 ‘지속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며,
둘째는 ‘새로운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 지속적인 회개의 삶을 수도승들은 ‘제2서원’으로 하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속적인 회개는 부르심에 대한 끊임없는 응답으로 지속됩니다.
이처럼, ‘회개’는 ‘뉘우침’이라는 내적 현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옴’이라는 외적 실행을 요청합니다.
곧 마음만 찢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행동의 요청이요,
‘새로운 부르심’에 대한 삶을 불러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 하여라.”(마태 6,1)
이는 의로움의 본질이 하느님 앞에 놓인 처지, 곧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임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사람들 앞에 드러난 행동이나 결과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 생각을 보십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의로운 생활의 중심은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인정받고 칭찬받고 보상받고자 했습니다.
혹 우리도 그러고 있지는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혹 우리도 기도나 봉사나 사랑을 통해서도 그럴 수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나의 경건함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면, 말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있다면 말입니다.
진정, 우리는 겉모양이 그리스도인인 것이 아니라,
뼛속에서부터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늘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마태 6,6)의 현전을 마주하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마태 6,6)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희는 어둠이 아니지만 어둠과 놀면 어둠이 되고 말 것입니다.
저희는 빛이 아니지만 빛 앞에 머무르면 빛의 옷을 입게 될 것입니다.
저희는 천사는 아니지만 하느님 앞에서 노래하고 하느님을 섬긴다면 천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는 마귀는 아니지만 마귀의 영을 따라 산다면 마귀 같은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하지도 않은 선을 행한 것처럼 과시하지도,
저지른 악을 가리고 숨기며 거짓으로 치장하지도 말게 하소서!
마음의 단식으로 당신을 섬기고, 기도로 마음이 순결하게 하소서!
늘 빛이신 당신 앞에 머무르고, 당신의 영으로 차오르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오늘은 재의 수요일입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주님의 수난과 고통, 십자가와 죽음을 기억하는 사순시기를 지내게 됩니다.
오늘 사제는 성지(聖枝)를 태운 재를 축성하고 이마에 바르는 예식을 하게 됩니다.
재가 지닌 상징적인 의미는 다양합니다.
우선 재는 불로 태워진 것, 즉 단련의 과정을 거친다는 의미를 지니는데,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열정으로 자신을 태우고 새로 나야 함을 의미합니다.
또 재는 남김없이 모두 타 버림으로써
순수한 인간 존재의 본래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우리를 일깨웁니다.
아울러 새로운 성장과 생명을 위한 거름으로서의 재를 받음으로써
사순시기 동안의 노력을 통해 부활의 새 생명을 향해 나아갈 것을 촉구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마에 재를 바를 것입니다. 그리고 사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아,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시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
신앙생활의 핵심은 잘못된 삶의 방향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기쁨을 믿고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풀잎 끝에 달린 이슬과 같으니,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만을 믿으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흙이라는 말은 그 어원이 ‘겸손’과 같다고 합니다.
사순시기에 우리는 좀 더 겸손하게 살 것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겸손함은 세상의 유혹을 이기는 강한 무기입니다.
겸손은 근본적으로 끊임없이 하느님의 정의 밑에 서 있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그리고 흙과 같은 사람의 태도입니다.
겸손은 "기름진 땅"이라는 라틴말(Humus)에서 나왔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며,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통해서 사순시기를 지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오늘부터 교회는 ‘사순시기’를 시작합니다.
사순시기는 40일 동안 주님의 수난과 고통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수난과 고통은 바로 죄를 지은 나를 위한 수난과 고통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주님의 수난과 고통은 나의 구원을 위한 속죄의 행위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왜 40이라는 숫자일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성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성서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정화와 단련’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40이라는 숫자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기도와 침묵’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하였을 때에 비를 내려서 벌하셨습니다.
노아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큰 배를 만들었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을 배에 태웠습니다. 그리고 비는 40일 동안 내렸습니다.
이때 40이라는 숫자는 하느님의 정화를 의미합니다.
모세는 40일 동안 기도하면서 하느님께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지냈습니다.
이때 40이라는 숫자는 기도의 시간입니다.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단식하면서 기도하였습니다.
이때 40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새로운 일을 위한 준비의 시간입니다.
교회는 성서의 이와 같은 40이라는 숫자가 가지는 의미를 받아들여서
주님의 부활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40일을 마련하였습니다.
교회는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4가지를 실천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희생입니다.
희생의 방식은 다양할 것입니다. 하고 싶은 것을 참는 것도 희생입니다.
먼저 손을 내미는 것도 희생입니다. 양보하는 것도 희생입니다.
신앙은 희생이라는 밭에서 피는 꽃입니다.
둘째는 기도입니다.
교회는 ‘십자가의 길’을 할 것을 권고합니다.
본당에서도 사순시기 금요일에는 십자가의 길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본당에서 마련한 사순 특강에 참여하는 것도 기도입니다.
셋째는 단식입니다.
단식을 하는 의미는 몸과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기보다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단식을 통해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자선입니다.
본당에서는 사순 저금통을 나누어 주기도 합니다.
교구는 ‘사랑으로 열매 맺는 신앙’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신앙은 나눔으로 결실을 맺기 때문입니다. 선을 베풀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하였습니다.
2024년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나의 허물과 잘못을 정화시키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희생, 기도, 단식, 자선을 통해서 주님의 수난에 함께 동참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이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리키는 숫자이다.
하느님께서는 노아 홍수 때 40주야 동안 폭우가 내리게 하여 심판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400년을 종살이하였으며,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전에 40 주야를 단식과 기도로 지냈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에 도착하기까지 40년이나 걸렸다.
예수께서도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40 주야를 광야에서 기도와 단식으로 준비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오늘 시작되는 사순절도 오늘부터 시작하여 부활 때까지 주일을 제하고 세어보면 40일이 된다.
교회가 이렇게 사순절을 제정한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순절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으로 차지하신
영광스러운 부활의 기쁨을 누리고 그분의 영광에 우리도 참여하기 위하여
그분의 수난에 우리가 참여하는 시기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로 돌리는 회개와 보속의 시기이다.
이럼으로써 우리 자신이 진정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사랑받는 자녀들이 되어
그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시기이다.
그래서 교회는 오늘 “재의 예절”을 거행한다.
이 재의 의미는 회개와 보속, 죽음과 겸손을 잘 보여준다.
우리가 머리에 재를 받는 것은 우리 죄로 인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및 부활에
참여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보속 하겠다는 약속의 표시이다.
이 재의 예절은 우리가 우리의 죽음을 미리 묵상하게 한다.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이것은 우리의 현세적인 삶의 종착점인 죽음을 생각하게 함으로써
이기적인 생활과 그럼으로써 하느님을 멀리 떠난 삶에서
회개와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으로 돌아서게 하는 데 있다.
죽음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어떤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죽음을 맞을 것인가를 알며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게 될 것이다.
이 재는 한 줌의 흙이다. 우리가 죽어 땅에 묻히면 한 줌의 흙이 된다.
그 자리에는 아무런 형체도, 권세도 명예도 볼 수 없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재를 교만과 명예의 자리인 머리에 얹음으로써
인생무상과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고 겸손하라고, 자신의 본 모습을 찾으라고 하는 것이다.
겸손하지 못하면 회개와 보속의 실천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선을 행하지 말라고 경고하시면서
자선과 기도, 단식에 관한 세 가지 본보기를 알려주신다.
자신의 덕을 내보임으로써 사람들의 칭찬을 얻으려 하지도 말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넘치게 기도하면서 자기의 신심을 자랑하지도 말라고 하신다.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2절).
내가 하는 일을 떠벌이지 말라는 뜻이다.
인간의 찬사를 얻으려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은 신앙의 자세가 아니기 때문이다.
친절한 행동은 자체가 나팔이다. 숨겨야 할 것은 그런 행동이나 장소보다도 베풀려는 뜻이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3절).
이 말씀 역시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인데,
할 수 있으면 우리가 선을 베풀 때, 베푸는 손조차도 그 사실을 모르게 하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오른손은 의인과 의로운 행위를 뜻하고 왼손은 죄인과 죄가 되는 행동을 의미한다.
어떤 일이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이루어지려면,
의인인 오른손은 왼손이 하는 일을 몰라야 한다.
우리가 충실하고 신심 깊게 행하기 위해서는 죄인들 앞에서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6절).
우리의 기도는 인간에게 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어디에나 계시며 우리가 말하기도 전에 들으시고
마음의 비밀을 이미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그분께 기도하면 우리는 큰 상을 받을 것이다.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6절).
사람들에게서 상을 받으려 하는 자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또 다른 상을 받을 수는 없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16절).
교회도 또한 이 시기에 극기와 절제를 통하여 이웃에게 선을 베풀어 그리스도를 닮고,
어느 때보다 기도를 많이 하여 은총을 받고자 마음을 모으는 때이며,
예수님의 부활 영광을 우리도 누리기 위해 속죄하도록 초대하고 있다.
이 사순시기를 통하여 우리가 더 하느님의 자녀로서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 더 가까이
반영억 라파엘 신부
부활의 기쁨을 준비하는 사순절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부활의 영광이 없다면 그 믿음은 헛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몸소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부활의 희망을 안겨주셨습니다.
따라서 부활의 기쁨이 큰 만큼 거기에 걸맞은 준비가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을 자선과 기도, 단식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선할 때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기도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하라.”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이 모르게 할 때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일상의 삶이건 신앙의 삶이건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해합니다.
좋은 평판을 받기를 기대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면의 힘을 길러 그런 것에 민감해하지 말라고 가르침을 주십니다.
내적인 힘이 있으면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단식은 자신에 대한 절제와 극기의 상징입니다.
그냥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한 부분입니다.
단식 함으로써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겪으신 배고픔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그 순간부터 배고픈 이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애정을 느끼며
온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돕는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내가 허기져 봐야 굶주린 이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됩니다.
기도는 내 삶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알게 합니다.
기도 함으로써 하느님과 통교하게 됩니다.
마치 전등이 발전기와 연결됨으로써 빛을 발하듯
기도는 우리를 하느님과 연결시켜 줍니다(구엔 반 투안).
“기도는 심장과 심장의 만남입니다”(마더 데레사).
사실 기도는 사람들이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안에 살려면 호흡하듯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습니다(샤를 드 푸코).
자선은 단식과 기도의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기도의 열매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풀어야 합니다.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하고 또 민첩하게 해야 합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누가 보든 그렇지 않든 자선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입니다.
“자선으로 씨를 뿌리면 열매는 천국에서 넘치도록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저함이 없이 베푸십시오.
주님께서는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 하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기도와 단식, 그리고 자선은 서로를 보완해 주고 있습니다.
어느 하나가 빠지면 다른 것이 불완전해집니다.
그러므로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재의 수요일을 맞으면서 기도하고 단식을 지켰는가?
그렇게 하셨다면 그 희생을 누구를 위해 사용하려고 마음먹었는가?
사실 아침을 굶고 나니 배가 고파요. 그래서 점심을 평소보다 더 많이 잡수셨어요.
그렇게 한다면 알맹이가 빠진 것이지요.
평소에는 굶어도 굶었다는 생각도 없이 지나치는데 사순절이 되면 유난히 배가 고파 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해요.
그러면서 하루 세 끼 식사는 꼭 챙겨 드시려고 하거든요.
오히려 너무 바빠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바빠서 제 길을 걷지 못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내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리고 자선은 베풀면 베풀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아쉽고 아까운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시면 하실수록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나중에 한꺼번에 좋은 일을 하겠다고 하시는 분은
평생 그렇게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일상생활의 작은 일에서부터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이제 행동할 때입니다.
사순시기에 행동한다는 것은 또한 멈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기도 안에서 멈추고,
사마리아인처럼 다친 형제나 자매가 있는 곳에서, 멈추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의 사랑입니다.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이웃의 육신 곁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 멈추는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기도와 자선과 단식은 관계없는 세 가지 행위가 아니라,
우리를 짓누르는 우상들과 우리를 구속하는 집착을 쫓아 버리는,
개방과 자기 비움의 단일한 행위입니다.
그렇게 할 때 위축되고 외로웠던 마음이 회복될 것입니다.
속도를 늦추고, 그런 뒤에 멈추어 봅시다!”(프란치스코 교황).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자선은 사랑을, 기도는 신뢰를, 단식은 겸손을...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미사 전례 중에는 참회의 상징으로
재를 축복하여 머리에 받는 예식에서 ‘재의 수요일’이란 이름이 생겼다.
이 재는 지난해 주님 수난 성지주일에 축복하여
십자가에 끼워 두었던 나뭇가지를 태워 얻은 것이다.
오늘부터 사제는 회개와 속죄의 상징인 보라색 제의나 예절 영대를 착용한다.
복음 후 강론이 끝나면 사제는 재를 축복하여 자신도 머리에 받고,
이어 신자들의 머리에 얹으면서
“사람아,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창세 3,19 참조)라고 말한다.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해 보자.
내가 흙에서 와서 다시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거늘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흙밖에 되지 않는 내가 이렇듯 살아있는 생명으로 느껴진다는 사실이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겠는가?
사순절을 시작하는 첫날에 봉독 되는 복음은 산상설교의 중반부이다.
예수께서는 산상설교의 첫 부분을 통하여 도래한 하느님 나라에 통용될
새로운 ‘의로움’을 조직적으로 선포하셨다. (6개의 대당 명제: 5,21-48)
대당 명제는 구약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으로 피력되었으며,
이 새로운 해석은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을 깨뜨리고 율법의 참된 정신을 밝히는 것이었다.
이는 곧 법의 형식논리를 넘어 법의 정신을 추구하는 것이며,
구약의 가장 중요한 십계명의 범주 안에서 계명 자체를 사로잡는
계명 정신에 기반을 둔 새로운 ‘의로움’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 요구는 하느님의 完全性을 닮아가는 것(48절)으로 요약되었다.
오늘 복음에는 慈善과 祈禱와 斷食이
무엇보다 중요한 신앙인 모두의 성덕으로 제시된다.
그렇다고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는 이미 유대교 안에서 널리 수행되었던 德目들이며,
예수님 당대에는 특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善行을 쌓을 목적으로 사용했던 수단들이다.
자선과 기도와 단식에 대하여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새로움은 무엇인가?
일단 이러한 선행을 수행함에 있어서
‘일부러 남에게 보이기 위한 목적’(1절)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선행이 일부러 남들이 보는 앞에서 수행되거나,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그 자체가 이미 償을 받은 것으로 간주된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상을 받기 위해서는 다음 선행지침을 엄수해야 한다.
즉 ‘자선을 베풀 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할 것’(3절)이며,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할 것’(6절)이고,
‘단식할 때 얼굴을 깨끗이 하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할 것’(17절)이다.
그러면 다른 사람은 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숨은 일까지 모두 보시는 하느님께서 보답해 줄 것이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내리시는 선행지침을 글자 그대로 따르라는 것은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모든 선행이 사람의 안정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숨은 일도 다 보시는 하느님을 지향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선과 기도와 단식 등의 선행을 행하면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칭찬이나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인간의 본성에 속한다.
자신의 선행을 남들이 알아줄 때 기분 나빠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받을 상을 다 받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상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자선을 통하여 사랑을, 기도를 통하여 신뢰심을, 단식을 통하여 겸손을
선물로 받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을 향한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무엇보다도 속죄의 힘을 가진다.
부디 속죄와 보속으로 은혜로운 40일이 되도록 노력하자.
사순절은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단순히 연구하고 사색하는 기간이 아니다.
동감하고 이에 동정을 표하는 기간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모범을 우리의 표양으로 삼고 그것을 사는 기간이다.
나의 잘못을 뉘우치며, 회개하고 실제로 그 잘못으로부터 돌아서는 기간이다.
꾸준한 반복을 통하여 그분의 법과 정신을 따라 사는 배움의 기간인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이승화 시몬 신부
재의 수요일입니다.
사순 시기의 시작이죠
부활을 맞이하기 위해서 함께 기도하고
우리의 나약함을 인정하며 자비를 청하는 때입니다.
그런 점에서 재의 수요일에 뿌려지는 재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는 낙원에서 쫓겨난 인간의 나약함입니다.
자유라는 선물을 받았지만
절제하지 못했기에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분과 같아지고 싶어져서
그분이 금지한 행동까지 손을 내밀었습니다.
절제되지 못한 자유는
그만큼 위험함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우리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행위로써
속죄의 재를 머리에 받게 됩니다.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라는 말씀으로
죄를 지은 우리를 다시 초대하십니다.
그렇기에 부활을 맞이하기 위한 여정에
우리 모두가 동참하게 됩니다.
인간의 나약함을 바라보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기억하는 날
사순시기는 은총을 담을 준비하는 정화의 때이며
은총으로 충만해지는 기쁨의 때가 됩니다.
이 은혜로운 시기
우리 각자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고 죽음을 맞이하며
함께 부활할 수 있는
은총의 여정을 함께 걸어가는 날이 되길 기도합니다.
출처: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 https://frsimon.tistory.com/1605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마태 6,1. 4.15.18)
우리는 세상 살아오면서 ‘~하는 척, ~하는 체하면서’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인 말과 생각과 행동을 하면서 살아왔는지 모릅니다.
오늘은 사순절 첫날인 재의 수요일입니다.
사순시기 동안 철저한 마음 준비를 통해서
주님의 부활을 잘 맞이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은혜로운 회개의 때 우리에게 주시어 우리 죄를 아파하며 뉘우치게 하시네.” (성가124장)
재의 수요일 예식의 특징은 이마에 재를 얹는 것이기에, 사제는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죽음을 바라지 않으시고 오직 회개를 바라시니,
저희의 간절한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며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 머리에 얹으려는 이 재에 + 강복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이마에 재를 얹어주며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권고합니다.
사순절 동안 줄곧 들려 오는 소리는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도록,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2코린 5,20)라는
초대의 말씀입니다. 이 초대에는 아무도 예외가 없으며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하느님과 화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이제라도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고 돌아오너라.” (요엘 2,12~13) 라고 호출하시는
하느님께 돌아설 때, 요엘은 우리의 자세가 단지 외적인 회개보다는
철저한 내적 회심의 표시로 마음을 찢고 돌아오라! 고 요청합니다.
마음을 찢고 하느님께 돌아섰다는 표시는
복음의 선행 곧 ‘자선, 기도와 단식 실천’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행위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사람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앞에 행해야 합니다.
지금껏 행해 왔던 관습적이고 형식적인
남에게 보이기 위하고 칭찬받기 위한 겉치레적인 자선과 선행,
남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한 위선적인 기도,
위선자들처럼 난 단식합네 하고 침통한 표정으로 하는 형식적인 단식
그리고 그 밖의 많은 겉치레들……
이런 가식과 위선을 벗어 던져 버리고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일을 행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참된 의로움이라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앞에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행하는 것이며,
이렇게 행할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큰 상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물론 이런 회개의 표시는 자선-기도-단식의 행위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자선을 베푸는 것은 하느님으로 받지 않았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남과 나누거나 남에게 베풀 수 없습니다.
베풂으로 받는 것이 바로 자신이 살아 있다는 존재의 기쁨과 보람 그리고 행복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 존재의 원천이신 사랑의 하느님을 체험하면서
하느님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단식을 통해서 단지 음식을 먹지 않고 육식을 금하거나
다른 좋아하는 것을 금하는 것만이 아니라, 세상의 재물과 세속적인 것으로 채워진
그리고 채우기 위한 탐욕으로 가득 찬 자신의 영혼에 탐욕과 이기심을 비우고,
하느님과 하느님의 것으로 채우기 위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러기에 금년 사순절을 통해 우리는 성전에서 기도하던
세리의 자세와 태도를 가지고 하느님 앞에 서고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세리는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죄인으로 낙인찍힌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세리는 자신은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아야 할 존재임을 알았기에,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루카 18,13)하고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세리가 기도하는 모습을 성서는 아주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루카 18,13)
기도하였다고 말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이며 겸손한 모습입니까?
그에 반해서 하느님보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삶을 살아 온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자 말로 기도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되먹지 못한 거만한 태도로 하느님 앞에서 마저 머리를 쳐들고
그것도 하느님께 겸손하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과시와 자화자찬,
아니 그보다 타인을 비교하고 무시하는 이 기도문이 정말 구역질 나지 않습니까?
어쩌면 우리 또한 하느님 앞에 기도할 때, 세리처럼 거리야 멀지 않더라도
마음으로나마 주님의 자비와 사랑에 모든 것을 맡기는 자세로
멀찍이 주님 앞에 서는 것이 진정한 참회와 자비를 청하는 마음의 표현이지 않을까요?
이런 태도는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예수님을 따르던 예수님의 모든 친지와 갈릴래아부터 함께 따라온 여자들도
‘멀찍이 서서’ (루카 23,49) 그 모든 일을 지켜보았던 태도와 비슷합니다.
루카는 왜 이토록 자세하게 묘사할까요?
그 해답은 사도 베드로의 권고안에 담겨 있습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과 또 멀리 있는 모든 이들,
곧 주 우리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이에게 해당됩니다.” (사도 2,38~39)
우리 모두 이제 우리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 자비의 음성을 듣고
몸과 마음으로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사순절이 되도록 합시다.
주님께서 따뜻한 음성으로 부르시고 우리의 痛悔 하는 마음을 인정해 주십니다.
“주님, 숨은 일도 보시는 당신 앞에 정직하고 솔직하게 서게 하여 주시고,
이 사순시기 동안 우리의 모든 가식과 위선적인 말과 생각과 행동에서 벗어나
당신 앞에 참된 우리 본래면목을 되찾아 가는 은혜로운 때,
구원의 날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