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가 깃든 삶, 새 달력 첫날/ 김남조(1927∼)
깨끗하구나
얼려서 소독하는 겨울 산천
너무 크고 추웠던
어릴 적 예배당 같은 세상에
새 달력 첫날
오직 숙연하다
천지간 눈물나는 추위의
겨울 음악 울리느니
얼음물에 몸 담그어 일하는
겨울 나룻배와
수정 화살을 거슬러 오르는
겨울 등반대의 노래이리라
추운 날씨 모든 날에
추운 날씨 한평생에도
꿈꾸며 길가는 사람 나는 되고 지노니
불빛 있는 인가와
그곳에서 만날 친구들을
꿈꾸며 걷는 이 나는 되고 지노니
새 달력 첫날
이것 아니고는 살아내지 못할
사랑과 인내, 먼 소망의 서원을
시린 두 손으로
이 날에 바친다
온라인 게임을 하다 보면 여러 번 죽게 된다. 죽어야 경험치도 쌓이고 죽어야 공략법도 알게 된다. 죽어야 사는 게임의 세계에서 캐릭터는 영원히 살 수 있다. 현실은 그 반대다. 모든 것은 단 한 번뿐이다. 탄생도 한 번, 첫사랑도 한 번, 죽음도 한 번이다. 그러니 때로는 바라게 된다. 모든 것이 ‘리셋’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다시 시작한다면 후회와 미련은 우리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출발점에서 인생은 깨끗하게 빛날 것이다. 물론 불가능하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아니까 새해 첫날을 기리게 된다. 이날은 특별하다. 새 달력의 첫 장, 첫날을 보며 우리는 새로 태어나는 기분을 조금 느낄 수 있다. 봄도 여름도, 모든 절기와 기념일도 다시 한번 돌아올 것이다. 새해 첫날은 일종의 ‘작은 리셋’이다.
힘들고 괴로운 것은 지난해에 모두 묻자. 가능할지 불가능할지 묻지 말고 다시 처음처럼 시작하자. 우리는 새해 첫날을 이런 마음으로 바라본다. 이럴 때 필요한 건 냉소나 자조가 아닌 긍정과 동반이다. 김남조 시인도 새해의 사랑과 인내를 위해 고개 숙여 기도하고 있다. 이렇게 소망이 가장 어울리는 날. 그런 날이 바로 ‘새 달력 첫날’이다.
✵ 김남조(金南祚, 1927~ ) 시인은 196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문학가, 대구 출생. 1950년 “연합신문”에 「성숙」, 「 잔상」 등을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진솔한 자기 삶의 증언과 묘사를 통해 인간의 삶과 사랑을 그리는 시를 주로 썼다. 시집으로 『목숨』(1953), 『겨울 바다』(1967), 『설일』(1971), 『귀중한 오늘』(2007) 등이 있다.
1960년 그는 한결 더 겸허한 태도로 인간이기 때문에 갖게 되는 고독 · 고뇌 · 비애 같은 정서와, 신앙에 바탕을 둔 구도적 자세를 겹쳐 보여준 시집 『정념의 기』를 펴낸다. 여기서 ‘기’는 정념의 고독과 허무를 내면화하고 있는 시적 자아를 표상하는 이미지다.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 / 없는 것모양 걸려 왔더니라. //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이기지 못해 / 눈 오는 네거리에 나서면 // 눈길 위에 / 연기처럼 덮여 오는 편안한 그늘이여, / 마음의 기는 / 눈의 음악이나 듣고 있는가. // 나에게 원이 있다면 / 뉘우침 없는 일몰이 / 고요히 꽃잎인 양 쌓여 가는 / 그 일이란다. // 황제의 항서(降書)와도 같은 무거운 비애가 / 맑게 가라앉은 / 하얀 모랫벌 같은 마음씨의 / 벗은 없을까. // 내 마음은 / 한 폭의 기 // 보는 이 없는 시공에서 / 때로 울고 때로 기도드린다.
- 김남조, 「정념의 기」, 『정념의 기』(정양사, 1960)
이 기는 끊임없는 에로스의 욕망으로 흔들리고 있는 기임과 아울러 종교적 성스러움과 정결함을 지향하는 기다. 이 기의 비애가 무거운 것은 그것이 안고 있는 모순 때문이다.
1963년 김남조는 다섯 번째 시집 『풍림(楓林)의 음악』을 펴내고 ‘오월 문예상’을 받아 문학적 입지를 굳힌다. 1967년 시집 『겨울 바다』를 펴낸 그는 1971년 시집 『설일(雪日)』과 전 6권의 합본 시집 『김남조 시집』을 잇달아 내놓는다.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 미지(未知)의 새 /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 매운 해풍(海風)에 / 그 진실마저 눈물마저 얼어버리고 // 허무(虛無)의 / 불 / 물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 나를 가르치는 건 / 언제나 / 시간(時間)······ /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 남은 날은 / 적지만 // 기도(祈禱)를 끝낸 다음 / 더욱 뜨거운 영혼(靈魂)을 갖게 하소서 / 남은 날은 적지만······ // 겨울 바다에 갔었지 / 인고(忍苦)의 물이 / 수심(水深)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 김남조, 「겨울 바다」, 『겨울 바다』(상아출판사, 1967)
그는 시작 활동을 하는 한편 ‘한국시인협회’ 회장, ‘한국여류문학인회’ 회장, 1985년 제33회 ‘서울시 문화상’, 1988년 ‘대한민국 문화 예술상’, 1990년 예술원 회원에 피선되고, 1993년 숙명여대에서 정년 퇴임을 한 뒤에는 같은 학교의 명예 교수.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동아일보 2022년 1월 1일(토), 〈詩가 깃든 삶, 나민애(문학평론가) 〉》, 《Daum, Naver 지식백과》/ 사진: 이영일∙고앵자, 생명과학 사진작가∙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
첫댓글 고봉산 정현욱 님
김남조 시인의 '새 달력 첫날'
새해를 맞아 읽고 음미하기에 딱 좋은 시네요
새해 첫날아침 저는 송구영신 묵은 것은 보내고 새것이 왔으니 세상도 더 찬란하게 빛나거나 하이얀 눈이 천지를 뒤덮어 씻은듯 눈부시겠지 하는 기대에 저도 모르게 창밖을 내다보게 되더군요
이치적으론 시각의 차이는 없어도 감각의 차이는 있다고 보여지는데 이는 새해가 오면 뭔가 꿈을 실현할 수 있을것이란 희망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정말 작년 한 해 들풀님 내외 덕분에 많이 공부하고 많이 깨우치게 되었지요
감사해요
올해도 변함없는 편달 바랍니다.
무원 김명희 교장선생님
힘들고 괴로운 것은 지난해에 모두 묻자. 다시 처음처럼 시작하자. 새해 첫날은 소망이 가장 어울리는 날.
김남조 시인의 '새 달력 첫날' 공감하면서 다시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