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0.05.火. 맑음
문경새재 유스호스텔 뒷산 계곡에 숨겨져 있는 것들.
어제 밤의 열정과 자기애自己愛를 향한 도취도 막상 다음 날 아침이 되면 민망하고 쑥스러운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어찌하는 수 없다. 그저 약간의 시간이 지나가면 자연스레 해결이 되는 문제이긴 하니까 아침식사나 잘 하자고 스스로에게 등을 다둑여준다. 밤새 내리던 비가 식사를 할 즈음에는 그쳐 있어서 하늘이 잔뜩 흐려 있기는 하지만 오늘로 예정된 100차 답사 기념식과 운동회를 치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소박한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니 출발시간까지 50여 분이 남아 있다. 가벼운 산책이라도 할까 하고 눈썰매장 슬로프가 있는 조붓한 길을 따라서 천천히 걸어 올라간다. 포장길이 끝나고 나타나는 으슥한 오솔길은 작은 계곡을 따라가며 산등성이로 이어져 있다. 가끔 땅 위로 튀어나온 뾰족한 돌과 짱돌이 구르는 길을 걷다가 점차 경사진 길이 나타나면서 둥그런 통나무를 가로로 걸쳐놓고 그 양쪽에 세로로 통나무 말뚝을 박아 고정시킨 계단이 보인다. 그런 계단을 몇 차례 오르고 나면 오솔길이라 부르기에는 나무가 촘촘히 우거진 숲길이 계속 계곡을 끼고 산 깊숙이 풀리어 있다. 그리고 이곳에는 짙은 구름이 밀려다니면서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는 중이다. 계곡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주위가 회색에서 짙은 회색으로, 점점 부드러운 검은 색에 가까운 암회색으로 바뀌어 간다. 빗방울도 조금씩 더 굵어진다. 그러던 것이 마저 더 걸어들어가자 좁다란 숲길이 마침내 계곡과 합해져 버린다. 여기부터는 계곡이 길이고, 길이 계곡이 되어 저기 보이는 산등성이까지 이어져 있는 모양이다.
그 계곡 가운데 서서 저 안쪽을 가만 쳐다본다. 멀리서는 보였던 산등성이는 구름에 싸여 보이지 않고 저만큼 계곡 굽이 길까지만 어슴푸레하게 내다보일 뿐이다. 이럴 때 내가 항상 하게 되는 상상想像이 있다. 저 계곡 굽이 길을 돌아가면 무엇이 있을까? 막상 돌아가 보면 계곡의 또 다음 굽이가 어슴푸레 보일 뿐이겠지만 내 머릿속의 화면에는 신비롭게 회색빛을 발하는 안개로 만들어진 궁전과 웅장하고 오래된 성들이 즐비하게 나타난다. 바람에 날리는 깃발과 근위병들의 구호 소리도 간간이 들려온다. 돌다리를 달려가는 말발굽소리와 갑옷에 칼집이 부딪혀 쩔꺽대는 소리도 드문드문 들려온다. 하얀 수염이 멋진 왕이 있다면 기품 있는 왕비도 있을 것이고, 용맹한 장군이 있다면 아리따운 공주님도 살고 있겠지. 그렇다면 그 회색 궁전의 나라에 어떤 신화와 전설을 만들어줄까. 먼저 왕과 왕비와 장군과 공주의 모습을 만들어낸 뒤에 그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그 이미지가 불러오는 상상의 소재를 씨줄 날줄 삼아 이야기를 짜나가야 하겠지.
한 편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 뒤 계곡에서 벗어나와 다시 눈썰매장이 있는 조붓한 길을 따라 내려온다. 나는 50여 분 동안의 산책길에서 한 나라의 건설과 번영을 만들어냈지만 또 그 안에 사랑과 미움과 환희와 근심도 만들어놓은 셈이다. 원래 없었던 나라라면 아무것도 없었겠지만 일단 내 머릿속에서라도 생명을 얻은 나라라면 좋은 것도 좋지 않은 것도 함께 생겨나고 말았겠지. 내 상상 속에서 생명을 얻은 그들이 과연 행복해할지 불행해할지는 내가 아무래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일뿐이고, 또 다른 어떤 나라를 만들고 싶어질 때에는 내 가슴 속의 고민이 한결 더 깊어지겠지.
(- 100차 답사: 문경새재 유스호스텔 뒷산 계곡에 숨겨져 있는 것들. -)
첫댓글 유스호스텔 뒷산 계곡에 동화 나라가 있었군요...................^^
같은 길을 산책했는데 역시나 작가님의 세계는 다르군요 저는 음악을 들으면서 악성들을 생각했는데...
멋지십니다.
그렇게 멋진 상상을 하는데...똑같은 시간에 방에서 수다만...ㅎㅎㅎ
전 사실 꼭 아침싼책을 하겠다고 다짐했는데...
그 앞 날 후유증(?)으로 퍼지고 말았습니다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