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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17일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제1독서 : 이사 58,9ㄷ-14
복 음 : 루카 5,27ㄴ-32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27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28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29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
30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렸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3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32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재작년에 코 수술을 받았습니다.
콧속에 혹이 나서 냄새를 맡지 못했고 또 숨을 쉬기도 힘든 상태였습니다.
수술 후에 정말 힘들었습니다.
코안을 꽉 막고 있는 솜으로 인해 답답해서 어떻게 할지 모를 정도가 되었고,
순간순간 찾아오는 통증에 어떤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선택은 계속 누워만 있었습니다.
자다 깨다 만 반복하며 하루 종일 누워 있었습니다.
저를 아는 분은 가만히 있지 못하는 저임을 잘 아실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꾸물거리는 것을 제일 싫어하고,
어떤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되면 곧바로 행동하는 것이 저였습니다.
그런데 병원에 입원해서 있는 이틀 동안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현대 간호학의 창시자인 ‘나이팅게일’은
환자와 건강한 사람의 차이를 ‘걷는 것’이라고 구분합니다.
환자는 걷지 못하고, 건강한 사람은 걷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두 다리를 걷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인생에서 자신의 길을 중단한 사람도 환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간이 없다고, 또 돈이 없다면서 잠시라도 걸음을 멈추고 있다면 지금 아픈 것이라고 하십니다.
저도 경험해 보니 아프면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픔은 육체뿐 아니라 정신에서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아프지 않도록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육체의 건강을 위해 평소에 운동하고 몸에 좋은 음식을 섭취하지요.
그렇다면 정신의 건강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정적 감정을 몰아내고 긍정과 희망의 감정이 가득할 때 가능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강림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의사가 필요한 사람이 많습니다.
육체의 건강을 위해 의사가 필요하지만,
요즘 시대에는 정신의 건강을 위해 의사가 필요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특히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이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는 이 세상 안에서
욕심과 이기심이 만연하면서 마음의 병을 앓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걷지 못하고 시련과 고통 속에서 포기와 좌절을 반복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의 메시지가 더 큰 힘이 됩니다.
걷지 못하고 자리에 멈춘 사람을 위해 이 땅에 오셨음을 분명히 밝히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따르는 주님의 메시지는 모두 희망적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올바로 따르는 이는 이 희망 안에서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절망 안에서 앞이 보이지 않아 걷지 못할 때, 얼른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제대로 걸을 수 있도록 하는 한 줄기 ‘빛’입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리인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과
레위의 집에서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루카 5,27)
사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발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발걸음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곧 앵무새처럼 입으로만 혹은 다람쥐처럼 몸짓으로만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자세와 태도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화답송>에서 말해주듯이, ‘진리 안에서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 가치관, 방식에 있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죄인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불결한 이들과의 접촉은 그도 불결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과 더불어 식사를 하십니다.
‘식사를 함께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상징입니다.
그것은 서로 기쁨과 사랑을 나누는 행위요, ‘한 가족’임을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그들에게 보내는 신의요, 자비요, 호의입니다.
그들을 단죄한 것이 아니라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속으로 들어와 그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자신의 몸에 죄를 묻힘으로 죄인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죄인들의 회개를 앞세우기보다,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자비를 베푸십니다.
흔히, 우리는 죄지은 이에게 ‘먼저’ 회개하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함께 식사를 하시며, 당신과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십니다.
‘먼저’ 죄인을 찾아오시고, ‘먼저’ 우리를 부르시고, ‘먼저’ 죽으시고,
‘먼저’ 당신을 건네주시고 자비를 베푸십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그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루카 5,27),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2)
이는 우리가 죄인인 까닭에 부르셨다는 말씀임과 동시에,
그리스도인이란 죄를 짓지 않은 의인들인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야 하는 죄인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사람은 모두 죄인입니다.”(로마 3,9.23 참조).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되었습니다.”(로마 3,24).
그러니 용서해야 하는 일을 소명을 받은 죄인들입니다.
곧 이미 사랑과 자비를 입었기에,
또한 그렇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소명을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를 따라라”(루카 5,27) 하심은
우리 역시 죄지은 형제에게 ‘먼저’ 다가가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루카 5,32)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당신은 죄인인 까닭에 저를 부르셨습니다.
찾기도 전에 먼저 부르시고,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용서받았으니 용서하게 하소서.
먼저 찾아가고 먼저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께서는 레위라는 세리를 부르신다.
그는 돈 욕심이 사납고, 소유욕으로 가득 차, 자기 것이 아니라도
그것을 소유할 욕심에 정의 따위는 관심도 없는 자였다.
세리는 본디 그런 사람들이었다.
돈 외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던 그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구원을 받았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라”(27절) 하셨다. 레위는 예수님을 마음으로 따르고 있다.
그는 한때 어부들이 위험한 일터에서 땀 흘려 번 것을 강제로 빼앗던 사람이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남의 재산을 착취하던 직업을 버렸다.
수치스러운 자리를 떠나 마음을 다하여 주님이 가시는 길을 따르기로 하였다.
그러고는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누구든지 주님을 자기 안의 집에 맞아들이는 사람은
가장 맛난 음식인 가장 큰 기쁨을 맛보게 되어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주님을 바리사이들이 비난한다.
그들은 주님께서 죄인들과 어울림으로 율법을 어긴다고 비난했지만,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는 것에 대해 시샘하고 꼬투리를 잡으려는 마음 때문이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32절)
그분은 하느님의 의로움을 따르지 않고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려고 하는 자들(로마 10,3 참조)을 부르지 않으셨다는 말이다.
그분은 자신의 나약함을 알고 자기가 많은 잘못을 저질렀음을
고백하는(야고 3,2 참조) 사람들을 부르신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은 그들 바리사이들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이다.
그분은 교만한 자들이 아니라 겸손한 자들을 부르신다.
그들은 끝까지 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참으로 자신의 덕행으로 즐거움을 맛볼 사람,
그리스도를 자기 집안에 모셔 들인 사람은 큰 잔치를 마련한다.
그 잔치는 선행들로 차린 영적인 잔치로,
교만한 사람들은 맨입으로 돌아가고 가난하고 겸손한 이들은 배부르게 먹는 그런 잔치이다.
레위는 잔치를 통해 자신의 기쁨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세리의 일을 하던 레위를 선택하시어
얼마나 의롭게 피어나도록 하셨는지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는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그가 일원이 된 사도단은 그가 어떤 사람으로 바뀌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은 인간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려고 오신 분이시다.
마땅히 우리의 마음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어,
그들을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함을 오늘 복음은 가르치고 있다.
의인인 체하는 죄인
반영억 라파엘 신부
불이 났을 때 소방대원은 목숨을 걸고 불 속으로 뛰어듭니다. 그것이 그들의 소명입니다.
그들은 어떠한 위험을 감당하더라도 인명을 구하고 피해를 최대한 줄이고자 합니다.
보통 사람은 위험을 피해 달아나지만, 그들은 위험 속으로 달려갑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신앙이라면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라” 하시며 레위라는 세리를 부르셨고,
레위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랐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도 온전히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적인 계산을 하느라 온전히 따르지 못합니다.
불을 향해 달려가는 소방대원처럼 예수님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5,31)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병자와 죄인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병자를 낫게 해주고 죄인을 구해준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인이 병자라고 알고 있는 환자가 있는가 하면,
병자임을 모르고 있는 병자가 있습니다.
본인이 죄인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죄인이 있는가 하면,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죄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입는 사람은 자신이 병자요, 죄인임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은 본인이 병자이면서도 병자임을 인식하지 못했고,
죄인이면서도 죄인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결국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하고 말합니다.
자신들이 스스로 건강하며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까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무시하지는 않았으면 좋으련만 남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죄입니다.
정작 주님의 도움을 받아야 할 죄인은
주님의 도움을 외면하고 여전히 의인을 자처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무시당하고 비난받으며 살았던 세리나 죄인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큰 은총입니다.
더군다나 의인으로 자처하며 상종도 하지 않는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나를 따르라” 하시며 음식을 함께 나눌 수 있게 안배하시니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오늘도 병자를, 죄인을 부르십니다.
병자요,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은 그분의 식탁에서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게 될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고서 자기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사람보다는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뉘우친 죄인을 하느님께서는 더 사랑하십니다”(교부 사르마타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느님께 마음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 마음을 돌리는 회심의 노력이나 기간은 죽는 순간까지 항구해야 합니다.
결코 일회적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은총의 사순절에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는 마음의 할례를 받고
회개의 눈물로 다시 태어나는 행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부하게 내렸다”는 말씀대로
하느님의 자비가 영원에서 영원까지 한결같음을 믿으며
하느님의 자비를 영원토록 노래해야 하겠습니다(성 베르나르도).
고해소 앞에 길게 늘어서 있는 죄인들이여!
여러분은 죄의 용서로 초대받았으니 기뻐하십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회개
오상선 바오로 신부
어제는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왜 단식을 하지 않느냐?"고 시비를 걸더니,
오늘은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루카 5,30) 하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시비를 거네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 일행의 행실이 맘에 들지 않습니다.
죄인을 죄인으로 대하지 않고 친구처럼 지낸다는 거죠.
나름 철저히 하느님의 뜻을 찾고 실행하는 그들은 사실 '구분'의 명수입니다.
안식일과 일하는 날을 구분하고, 의인과 죄인을 구분하고,
율법을 지키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를 구분합니다.
장소를 구분하고, 정(淨)한 것과 부정(不淨)한 것을 가릅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아는 율법 지식과 권한으로 이런 '구분'에 타인도 따르길 바랍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자신들이 옳고,
그들 눈에 모든 세상사는 흑과 백이 명료하기 때문입니다.
구분은 분별의 지혜로 발전할 수 있어 그 자체는 나쁜 게 아닙니다.
문제는 '구분'에 그치지 않고, 한쪽을 취하면
다른 한쪽은 버리거나 폄하하거나 소외시킨다는 점입니다.
이는 공동체 안에서 특권의식과 패배주의, 대립, 단절, 괴리, 불일치를 야기합니다.
반면, 예수님은 구분하지 않고 모두 포용하는 분이십니다.
의인과 죄인을 구분하셨다면 애초에 죄인인 인간들 틈으로 들어오지도 않으셨을 겁니다.
그리고 레위 같은 세리를 제자로 부르실 리 없으셨겠죠.
예수님께서는 흑과 백 사이에 셀 수 없이 무수한 층위가 존재함을 아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 모두를 다 아우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루카 5,29).
꽤나 성대한 잔치였나 봅니다.
세리의 집이니 동료 세리들은 당연히 왔을 테고,
평소 같으면 그들과 한자리에 있는 것도 꺼릴 바리사이, 율법학자들까지 모였습니다.
그런데 복음사가는 잔치 손님들을 소개할 때
"죄인"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그저 "다른 사람들"이라고만 했습니다.
"죄인"이라는 말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루카 5,31).
건강하다는 것은 의학적으로 제시된 어느 기준 이상일 때 쓰는 말일 뿐,
결코 신체 모든 부분의 완전함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건강 상태와 병든 상태 사이에 무수한 층위가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또 의인과 죄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의인으로 괜찮게 보아주는 타인의 평가는 잠시 제쳐 두고 스스로를 깊이 성찰할 때,
한 치의 죄악이나 부정 없이 완전히 의롭다고 자부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반대로 어느 한 곳도 선한 구석 없이 완전히 극악무도한 죄인이 있을까요?
의인과 죄인 사이에도 무수한 층위가 존재합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어디는 건강하고 어디는 약할 수 있습니다.
또 얼마간 의인이고 얼마간 죄인이기도 합니다.
바리사이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병든 이, 죄인"을 정면으로 거론하셨지만,
단지 세리와 죄인들만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 아닐 것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오히려 우리 모두가 병든 이고 죄인이라 당신이 필요한 존재들이라고 선언하신 것으로 들립니다.
그런데 스스로 병들었음을 의식할 때라야 의사를 찾고,
스스로 죄인임을 의식할 이라야 구원자를 찾기 마련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율법에 의해 죄인이라 손가락질 받던 이들은
공동체의 가르침과 불화하는 자신의 실존과 한계를 절감하면서
그 괴리 사이에 드리워진 외줄을 아슬아슬 타고 살아온 이들입니다.
스스로 누구보다 죄인임을 자처하며 살아온 이들이고요.
그러니 누가 건강을 되찾겠습니까?
겉보기에 멀쩡해서 속으로 병이 난 줄도 모르고 건강에 자신 있어 하며
의사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약하고 모자라서 병든 몸을 추스르며 의사를 찾는 사람일까요.
또 누가 구원되겠습니까?
양심과 영혼의 의로움보다 율법에 기인한 의로움으로 스스로를 의인이라 자부하는 이들일까요,
아니면 부서지고 낮추인 영, 겸손한 마음으로 또다시 넘어질 게 뻔한 길을 돌이키고
또 돌이켜 염치불구하고 하느님 발치로 모여드는 이들일까요.
하느님께서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통해 율법의 정신을 사는 진정한 태도를 알려 주십니다.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이사 58,10).
율법에 의해 소위 죄인이라 불리는 이들이 메고 있는 멍에를 더 부끄럽게 만들지 말고,
죄인이라 함부로 손가락질하지 말고, 험담도 비난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무지하고 살기 바빠서 율법의 어느 조항을 어겼는지도 모르는 이들에게
자상히 하느님의 가르침을 나눠 주고, 율법의 온전한 준수가 불가능한 삶 속에서도
그들이 죄책감에 짓눌려 찌부러지지 않도록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실 그들의 병이 나의 병이고 그들의 약함이 나의 약함임을 깨달을 때
진정 율법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과 가르침은 아무리 다른 말들로 표현되어도 '더 사랑하라'는 촉구입니다.
좀 더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실천한 이에게 더 큰 사랑의 보상이 약속됩니다.
굶주리고 고생하는 이들의 병과 약함을 돌봄으로
"내 어둠이 빛이 되고"(이사 58,10),
"내 넋이 흡족해지고 내 뼈마디가 튼튼하게 될 것입니다"(이사 58,11).
그러니 진정 구원받을 이는 내가 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레위뿐만 아니라 바리사이, 율법 학자들에게도 이 초대를 하신 겁니다.
알아듣고 못 알아듣고는 안타깝지만, 각자의 몫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벗님은 죄인이신가요?
축하드립니다. 예수님이 벗님을 부르러 오셨다네요.
벗님은 영육 간 건강에 문제가 있나요?
축하드립니다. 최고의 명의이신 예수님께서 고쳐주신다네요.
오늘은 의인이라 자만하지 말고, 건강하다 자만하지 맙시다.
세리처럼 죄 많은 인간임을 고백하고, 영육이 허한 사람임을 고백합시다.
그래야 예수님을 만나고 치유를 받고 구원을 받습니다.
내가 아무리 죄인이어도, 내가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하느님은 나를 예뻐하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오늘 우리가 봉독한 복음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명 한명을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시는지를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루카 福音史家 표현은 이렇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저는 여기서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선에 대해서 묵상을 좀 해봤습니다.
예수님의 시선 과연 어떤 시선이었을까요?
당시 유다인들의 세리를 바라보는 시선은
한 마디로 징그러운 벌레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었습니다.
그들은 레위를 바라보면서 속으로 이렇게 욕을 했습니다.
“저런 매국노, 로마 앞잡이, 인간 말종, 쳐 죽일 놈”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레위는 분위기상 말단 세리가 아니라
일정 지역을 책임지는 중간 관리자급 간부 세리였습니다.
동족으로부터 수모를 당했지만, 주머니 사정은 넉넉했습니다.
그러나 레위도 한 인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맨날 하는 일이 가난하고 고통받는 동족들을 후려쳐서 세금을 뜯어내는 일이었습니다.
맨날 동족들로부터 싸늘한 시선을 받다 보니, 삶의 피폐해지고 위축되었습니다.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갈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속마음을 환히 꿰 뚫어보시는 예수님께서 레위를 바라보시고
그의 갈등하는 마음을 읽으신 것입니다.
레위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선을 다른 사람과는 백팔십도 달랐습니다.
그 시선은, 측은지심의 시선, 연민의 정으로 가득한 시선,
부드러운 시선, 안타까운 시선, 짠한 시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시선을 레위에게 보내면서 그와 무언의 대화를 나누시는 것입니다.
때로 대화는 말로만이 아니라 시선으로도 충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시선으로 레위에게 이런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애야, 그동안 세리로 살아오느라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았느냐?
내가 네 마음 다 알고 있다. 네가 지금까지 겪어온 수모와 비참을 다 보고 있다.
길을 걷다 보면 발이 더러워지기 마련이란다.
지난 세월은 이제 뒤로 하고 나와 함께 새롭게 시작하자.”
세관에 앉아 있던 레위는 평생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예수님의 그런 따뜻한 시선에 큰 위로와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갑자기 레위의 눈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걷잡을 수 없는 회심과 감사의 눈물이 쏟아져 내렸을 것입니다.
이어서 건네시는 예수님의 말씀,
“나를 따라라!” 레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어섭니다.
목숨과도 같은 장부도, 수금한 돈도 다 내팽개치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예수님의 그 따뜻한 시선, 연민의 정으로 가득한 시선이
철옹성 같았던 레위의 마음을 무너져 내리게 하고 녹아내리게 한 것입니다.
그 무너진 바로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들어가십니다
그날 저녁 레위의 집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레위가 예수님을 위해 준비한 잔치였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의 제자가 된 레위가 동료 세리들과 작별하는 송별식도 겸했습니다.
수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그 잔치에 참석했습니다.
그 자리는 요즘으로 치면 조폭 두목 결혼식 피로연,
아니면 조폭 두목 어머니 칠순잔치 자리와 비슷했을 것입니다.
덩치가 산만한 조직원들, 죄란 죄는 다 짓고 사는 사람들이 그 자리에 총집합한 것입니다.
호시탐탐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꼬투리를 잡아 고발하려고
혈안이 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한 건 올렸다며, 예수님께 따집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그때 예수님께서는 역사에 길이 남을 통쾌한 한 말씀을 건네십니다.
오늘 우리 죄인들에게 너무나 은혜로운 말씀이기도 합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여러분들, 사순 시기를 시작하면서, 이런 예수님의 모습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틈만 나면 욕을 바가지로 먹던 세리와 죄인들을 사랑스런 눈으로 바라보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시선으로 오늘 우리들 한명 한명을 바라보십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어떠하든 그분께서는 우리는 예뻐하시고 사랑하십니다.
이제 내 나이가 70이고, 80인데, 예뻐할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죄란 죄는 다 짓고 살아왔는데, 이런 나를 예수님께서 예뻐하실 리가 없어! 라고
절대 말하시면 안 됩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늙었다, 추하다, 하며 외면하지만,
하느님 눈에는 언제나 우리가 사랑스럽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무리 죄인이어도, 내가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하느님은 나를 예뻐하신다, 나를 사랑하신다, 나를 애지중지 하신다는 마음으로
올해 고백소 안으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난 오늘 기꺼이 병자요 죄인이고 싶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치유하신 얼마 후
길을 가시다가 레위라는 세리를 불러 제자로 삼으시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나자렛의 회당에서 공생활 開始를 선포하신 예수님은 갈릴래아 호수주변으로 이동하여
본격적인 복음 선포의 활동을 시작하셨다.
가파르나움에서의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온갖 병자들을 고쳐주시며
마귀를 쫓아내시고 어부들을 뽑아 제자로 삼는 등
예수님의 복음 활동은 크게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과
병자치유⋅구마 기적의 활동과 제자 교육의 세 가지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이 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만큼 중요한 것은, 바로 선포된 복음이 인간 측에 수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선포된 복음이 무조건 인간에 의해 수용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그만한 요건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님에 의해 선포되는 복음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기쁜 소식이며,
이는 곧 하느님의 선물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선물을 베풀 때 다른 무엇을 주시지 않고,
당신 스스로를 주신다면 인간이 과연 이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물어보아야 한다.
인간이 이 선물을 받는데, 장애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바로 罪다.
죄는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허물어뜨리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이 장애물이 제거되지 않고서는 하느님의 선물은 수용되기 어렵다.
따라서 예수께서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들것에 눕힌 채 지붕을 뜯어 내려보냈을 때
그들의 용기와 믿음을 보시고 병자의 병만 치유하신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의 병인 죄까지도 용서해 주셨던 것이다.(5,18-26)
이 일로 말미암아, 루카 복음에서 예수와 바리사이파 율사들 간에 본격적인 반목이 시작되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죄의 용서는 오직 하느님만이 하시는 일이다.
그들이 예수 안에 육체의 치유 능력이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었지만,
죄의 용서까지는 능력 밖의 일로 믿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창조 이래로
깨어진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친분 관계를 회복시키는
메시아이심을 啓示하는 일은 복음서의 중요한 목적이다.
따라서 루카는 중풍 병자를 놓고 병의 치유보다 죄의 용서를 더 중요하게 여겼기에
당시 죄인으로 취급받았던 세리를 제자로 삼고
그들과 함께하는 식탁 공동체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예수께서 레위라는 세리를 ‘나를 따라오너라.’(27절)는
단 한마디의 말씀으로 당신 제자로 삼았다.
죄인을 제자로 삼은 것이다.
지금까지의 삶을 청산하고 예수님을 따라야 할 레위가
친구들을 모아놓고 송별 만찬을 준비했던 모양이다.
여기에 예수님도 당연히 함께 자리하셨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눈에는 못마땅하게 보였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죙니들과 식탁에 함께 앉으신 것이다.
이는 의사가 앉아서 병자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손수 찾아 나섬이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신 人子의 사명인 것이다.
사순시기는 이렇게 하느님께서 손수 병자와 죄인을 찾아 나서시는 때인다.
하느님 친히 병자와 죄인들을 당신 식탁에 초대하여 식사와 친교의 공동체를 마련하시는 것이다.
초대받은 병자와 죄인들 중에 스스로 자격이 있어 그 식탁에 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것은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죄인들도 마찬가지다.
식탁에 들기 위해 우리가 갖추어야 할 일은 허물을 벗고 죄를 씻는 일이다.
따라서 세관에 앉아 업무를 수행하던 레위에게 ‘나를 따라오너라’는 말씀은
곧 ‘죄로부터 떨어져라’는 말씀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사순시기는 은총의 때인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식탁 공동체에 앉을 수만 있다면,
나도 기꺼이 병자요, 죄인이고 싶다. 아니, 이미 병자요 죄인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