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지 행복
법정(法頂)은 학승(學僧) 이다.
글자 그대로 평생을 공부하는 승려다.
그래서 나는 그분을 존경한다.
생각과 말과 행동이 올바르기 때문이며
그가 쓴 글들은 진솔하기 이를데 없다.
지금처럼 혼탁한 종교계에서 그분은 우리에게
기준과 기대를 가질 수 있게 하는 큰 스님 이기도 하다.
그분의 본명은 박재철이며
1932년 10월 8일 전라남도 해남에서 출생했다.
그런데도 늘 꼿꼿하고 건강해 보인다.
전남대학교 상과대학 3학년을 마쳤을 때
통영에 있는 미래사(彌來寺)에서 당대의 고승인
효봉(曉峰)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효봉스님-
그리고 같은해 7월,
사미계(沙彌戒)를 받았다.
사미는 불문에 들어가 십계(十戒)를 받고
정식 중이 되기 위한
구족계(具足戒) 를 받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다.
구족계는
비구와 비구니가 지켜야할 계율(戒律)이며
비구에 250계, 비구니에 500계가 있다.
줄여서 구계(具戒) 라고도 말한다.
1959년 3월 통도사의 금강계단에서
자운(慈雲)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비구(比丘)는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은 남자 중을 이르는 말이다.
그뒤 지리산 쌍계사, 가야산 해인사,
조계산 송광사등 여러 선원에서
수선안거(修禪安居) 한바 있다.
수선은 선정(禪定) 을 수행하는 것으로서
참선(參禪)하여 삼매경(三昧境) 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1970년대 후반에는 작은 암자인 불일암(佛日庵)을 짓고
송광사 뒷산에 청빈의 삶을 실천했다.
2005년 이후로는 강원도 산골에서
화전민이 살던 오두막에서 스스로 땔깜을 구하고
채소밭을 일구면서 청빈의 삶을 계속하고 계셨다.
1996년,
7천평의 대지와 40동의 건물이 있는
성북동소재의 유명한 요정 '대원각'을,
소유주 김영한 여사(1916-1999) 로 부터
시주받았으며, 이듬해 이를
'길상사'로 고치고 회주가 되었다.
회주(會主)는 법회를 주장하는
법사(法師)를 이르는 말이다.
2003년 12월, 법정은 길상사를
주지인 덕조스님에게 맡기고
회주의 자리에서 물러났으며
10년 넘게 살고 있는
강원도 산골의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자기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아는자 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길상사 에서는
가을정기법회가 있었으며,
법정은 이 법회에서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자신의 소중한 생각을 피력했다.
그분은 법문을 통해 '청명한 가을날씨를 보면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든다'고 했으며
'행복과 불행은 외적상황이 아니라 내적으로
어떻게 받아 들이느냐에 달렷고' 를 강조했다.
법정은 자신의 경우를 소개하면서
우리 스스로가 자기안에서 행복찾기를 권했다.
물론 우리는 그분과 같은
청빈의 생활을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근본에서
인간이 가지는 행복은 질적으로 같은 것이며
방법과 환경은 달라도 그 행복에 도달하는 길은
크게봐서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법정의 진솔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분은 자기의 삶에서 맑은 여백을 주고,
일상을 녹슬지 않게 하는 네가지 행복을 소개 했다.
모두가 평범한 것이고 일상적인 것이어서
더 마음에 다가오는 말씀들이다.
그 첫째가
마음의 벗이 되는 책이다.
정말 학승다운 얘기다.
역사적으로 모든 사회에서 서책(書冊)은
일부계층의 전유물 이었다.
일부 사대부(士大夫) 계층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맹(文盲) 이었다.
서양이 구텐베르그의 인쇄술 발명으로
책이 급속히 보급된 것과 대조적으로
우리사회에서는 그런 혁명적인 사건이 없었다.
책을 읽지 않는 지금의 나쁜 풍토는
어떤 의미에선 세습적인 것이기도 하다.
점토판에 쐐기글자를 썼던
'수메르' 문명이래 파피루스와 양피지,
그리고 종이책이 만들어 지기까지의
문명사에서
책-독서는 호모 사피엔스의
문화적 DNA 가 되었다.
글자가 있음으로서 책이 만들어졌고
책이 있음으로서 지식이 전달되고 학문이
일어 날 수 있었다.
체험적인 얘기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는 모든 대합실에서
책을 읽는 사람이 많은곳이 선진국이고,
책읽는 사람을 찾아 볼수 없는 곳이 후진국 이었다.
그 지식의 차이가 국력과
문화수준의 차이인 것이다.
경제적 물량에서는 쿠웨이트와 영국이 같다 해도
문화적인 삶의 질에서는 천지간
차이가 나는게 그 때문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훌륭한 제도교육을 받았다 해도
책을 읽지 않으면 발전 할 수가 없다.
삶의 여백이 좁아지고
녹슬게 되는것은 당연하다.
인간, 인간성에 접촉하는 방법에서
컴퓨터는 책의 대체가 될 수 없는 차원이다.
인터넷 에서는
'삶의 질감'을 체험하지 못한다.
그러나 책은 그것을 만질 수 있는 촉감에서
가장 뛰어난 '인간의 벗' 이다.
영원히 그렇다.
다음이
무료 할 때 마실 수 있는 차(茶) 라고 했다.
차-茶는, 천천히 마시면서 음미하는 음료다.
왜 천천히 마시는가.
생각하면서 마시기 때문이다.
다기(茶器)가 발달한 것도
차를 마시면서 눈으로는
그림, 색깔을 보며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도(茶道)는
'여백' 을 즐기는 세련된 인간의 자세다.
인도의 동,서 고트산맥을 여행하면서 본
어마어마하게 넓은 차밭은,
그 규모에서 세계적 이었다.
수요가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차-茶는 정말 여백이다.
우리는 왜 커피에 매료되는가.
사실은 맛 보다도 그 향기 때문이다.
커피향, 커피냄새,
그 자극적이고 섬세한 냄새가
우리를 어떻게 매료시키고 있는가.
스님의 말씀은 정말이다.
다음이 굳어지려는 삶에
탄력을 주는 음악이라고 했다.
법정의 성경지식이나 사양고전음악에 대한
이해와 수준은 범상치가 않다.
정말 모든 음악은
'영혼이 거니는 뜰' 이다.
유행가는 즐겁고, 고전음악은
우리를 각성케 한다는 말은 정말이다.
음악의 시작은 타악기(打樂器),
그리고 현(鉉) 과 관(管) 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오케스트라의 기본편성은
그순서 그대로다.
동,서양의 음계가 다른 것은
전적으로 토양의 문제일 뿐이다.
음악이 우리의 삶에 탄력을 준다는 것은
감성(感性)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기쁨과 슬픔의 감정적 변화 없이 산다는 것은
목석(木石) 이 돼 간다는 뜻이다.
음악이 우리에게 주는 그 정서적 선물은 우리의
순수한 인간성을 지켜주는 울타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음악의 세계도 영원한 것이다.
마지막이 자기의 일손을 기다리는
채소밭 이라고 했다.
법정은 일급 농사꾼이자 살림꾼일 것이다.
그가 쓴 글에, 장마에 김치단지가
떠 내려가는 얘기가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채소밭은,
인간과 자연이 접촉하는 구체적인 현장이다.
우리가 주말이면
산과 들, 강과 바다로 가려는 마음은
그게 우리의 본향이기 때문이다.
자연과 접촉하지 못하고 사는
현대인은 그런 의미에서 불행한 사람들이다.
특히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위에서만
자라고 있는 애들이 더 가엽다.
추수가 끝난 논에 내려 앉은
큰기러기 떼를 보는것 만으로도
기쁨이 넘친다.
수로를 따라 걷는 동안은
잡념 같은 건 있을 수가 없다.
인간은 자연속에 있으면 '치유' 된다.
법정은 그 은밀한 비밀을 터득한 분이다.
그분이 생전에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나오지 않는
이유중 하나도 그것일 것이다.
누가 그 은밀한 기쁨을 방해 할 수 있겠는가.
행복은 어떤 정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르게 느끼는 마음인 것이다.
생긴게 다르고
성격이 다른 것과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공통점은,
그 모든 행복이 '일상-日常' 안에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이미 자기가 가지고 있는데
발견하지 못하고 있을뿐이다.
⊙책을 읽는 즐거움,
⊙차를 마시는 여유로움.
⊙음악을 듣는 기쁨과 만족감,
⊙자연에 안겨 치유되는 놀라운 시간
모두가 일상적인 것들이다.
'돈' 은 그것들에 다가서는 수단, 방법이지
결코 행복자체는 아니다.
언론은 법정이 말씀하신 법문에 대해,
'최근 어려운 상황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로했다' 고 전하고 있다.
우리가 그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