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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19일 사순 제1주간 월요일
제1독서 : 레위 19,1-2.11-18
복 음 : 마태 25,31-4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1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32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33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34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35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36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37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39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40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41 그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42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43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44 그러면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45 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46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본당 교우들이 제게 늘 바빠 보인다고 하십니다.
단체 모임에 강복 주러 갈 때 거의 뛰다시피 다니는 모습을 보고,
또 무슨 일이든 서두르게 하는 모습을 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지금 제 책상을 보며 충분히 공감합니다.
빈틈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책상을 채우고 있는 책과 노트,
그리고 필기구들은 저의 바쁨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정표를 두 달 치씩 확인하며 사는 것 역시 바쁘게 사는 모습일 것입니다.
부모님의 죽음 이후 그리고 아는 지인의 부고 소식을 계속 들으면서
제 죽음에 대해 오랫동안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오십 중반을 살았으니 분명한 것은 이제 살아온 날보다 죽을 날이 더 가깝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더 바쁘게 지금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을 갖고
열심히 하려고 늘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바쁘게 살던 중에, 운동하다가 허리를 삐끗했습니다.
허리가 아프니 다 힘들어졌습니다.
걷는 것도, 눕는 것도 심지어 양말 신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앉았다 일어나는 가장 기본적인 것도 힘들어서 천천히 또 아주 조심스럽게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겸손하게 됩니다.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면서 살았는데, 무엇이든 다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도록 이제까지 나와 함께해 주신 주님의 사랑을 느끼며 살아야 했습니다.
맞습니다. 저의 능력과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떠올리고 따른다는 것은
그만큼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영광스러운 심판관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심판을 받게 되는지를 보여주시지요.
즉,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가진 것 없는 이들에 대한
사랑과 정의의 실천에 따라 심판받게 된다고 하십니다.
성경이나 교리 지식, 신심 행위가 심판 기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보다 지금까지 믿고 고백한 신앙을
실제 이웃에게 어떻게 실행했는지가 그 기준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교만함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묵묵히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능력과 힘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분의 기준을 따르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어렵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하여 정성껏 기도와 희생, 봉사를 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한 우리의 사랑이 결국 나의 구원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우리는 <사순 첫 주간 월요일>을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레위 19,2)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는 성덕으로의 부르심은
나중에 바오로 사도에 의해 “아버지의 뜻”으로 선포됩니다. 곧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의 뜻은 바로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1테살 4,3)
그리고 이 부르심은 오늘 <복음>에서 ‘자비와 사랑을 실행한 사람’으로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은 ‘최후의 심판’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심판의 기준’이 무엇인지 눈여겨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 기준은 신앙이나 종파가 아닙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이 믿었던 것처럼, 이스라엘인이냐 이방인이냐가 아니요,
죄를 지었느냐 짓지 않았느냐가 아닙니다.
초월적인 신비체험이나 관상도 아니요, 기적이나 예배도 아닙니다.
교리나 신심도, 신분이나 성공도, 부나 힘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사랑과 자비의 실천’일 뿐입니다.
특별히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마태 25,40)에게 해 준 사랑과 자비의 실천입니다.
그들에게 해 준 것이 곧 예수님께 해 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를 분명히 말해줍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그렇습니다.
그분께서는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을 당신의 ‘형제’라고 부르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해 준 것이 당신에게 해 준 것이라고 하시고 그들과 당신을 동일시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 되고,
하느님을 인간들 사이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마더 데레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세상 사람들이 외면하는 버려진 사람들의 얼굴 속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보았다.’
이를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요한 4,20)
한편, 이 심판에서,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처벌을 받은 왼편의 사람들이
어떤 큰 범죄나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단지 무관심하고 소극적이었을 뿐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처벌을 받은 것은 그들이 특별한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적극적인 사랑을 하지 않은 사실에 있음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사랑하지 않음, 곧 ‘자비를 베풀지 않음이 죄’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죄짓지 않으려고 애쓰기보다 사랑하려고 애쓰는 일이 중요합니다.
사도 야고보는 말합니다.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곧 죄가 됩니다.”(야고 4,17)
그런데, 이 심판에는 또 하나의 특이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을 베푼 이든 베풀지 않는 이든,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둘은 정반대의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을 베풀지 않은 이가 자신이 행한 것을 모름은 마치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에서처럼,
자신에게 빠져 타인에게 무관심하였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반면에, 사랑을 베푼 이가 자신이 행한 것조차 모름은
이기적인 자신을 떠나서 온전히 이타적인 사랑을 베푼 것임을 말해줍니다.
전자는 자신에게 푹 빠져 눈이 멀어져 버린 경우요,
후자는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자신이 사라지고 빛이 된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마태 25,40)
주님!
어느 누구에게나 무관심하지 않게 하소서.
어느 누구든지 하찮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나에게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가 존귀하기에 귀중하게 여길 줄 알게 하소서.
결코, 당신의 선물을 보잘 것 없이 여기지는 말게 하소서. 아멘.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님의 말씀은 이 사순절에
어떠한 마음으로 이 시기를 살고 부활을 맞이할 수 있는지를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에 우리가 함께 할 수 있으려면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면서 하느님의 축복 받는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신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본성 안에서 굶주리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 안에서 굶주리시고,
당신의 가난한 이들 안에서 목 말라 하시고, 당신의 종들 안에서 헐벗으신 분이시다.
모든 병을 고쳐 주신 분은 당신의 종들 안에서 병드셨다.
모든 사람을 해방하시는 분이 당신의 신자들 안에서 감옥에 계시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혼자가 아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 때문에 이 모든 일을 그들과 함께 겪으신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34절)
주님께서는 옳은 일을 한 그들을 칭찬하셨다.
아버지께 복을 받는다는 것!
이렇게 큰 영예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판단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35절).
얼마나 대단한 영예인가! 얼마나 큰 복됨인가!
그분은 그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드러내신다.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 임금은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41절) 하신다.
영원한 불은 악마와 그의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것이지,
인간들을 위하여 준비된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아버지께서는 사람들을 저주하시지 않는 분이시다.
그들의 행실을 단죄하신다.
사람들을 위하여 준비한 것이 아닌데 그들 자신이 스스로 그 속으로 던져 넣었다는 것이다.
스스로 그렇게 만든 것이다. 여기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자기들이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들이 단죄받는 이유는 그들이 저지른 악행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당신의 종들 안에서 굶주리고 목말랐을 때 보살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릇된 일을 저지르지 않은 자들이 이런 단죄를 받았다면
악마의 일을 행하는 자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46절)
죄인들은 영원한 벌을 받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우리를 그분께로 인도해 주며,
그분을 닮고,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게 할 것이다.
이웃 안에서 주님을 알아 모시고 사랑하는 사순절이 되도록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사랑으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
“가끔 나는 사람들에게 ‘거지에게 동냥을 줬느냐’고 물어봅니다. 그들이 ‘네’라고 대답하면,
나는 ‘당신은 동냥을 줄 때 그 사람의 눈을 바라봤나요?
아니면 그들의 손이라도 잡아주었나요?’라고 되묻습니다.
눈을 맞추고 손을 잡아야 진정한 그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은 단지 돈만 던져주고 가버리거든요.”
어느 날, 허름한 옷을 입고 술에 취한 상태로 성당 앞을 서성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행려자처럼 보였습니다. 내심 걱정되었습니다.
성당에 어떤 해가 되는 일을 하면 어쩌나? 마침 몇몇 신자들이 돈을 주어 보냈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어떻게 도와줄까? 생각하지 않고 귀찮은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부끄러움이 큽니다.
저는 눈을 마주하거나 손을 잡아줄 생각은 하지 않고 지극히 인간적인 계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가난한 사람들을 동일시 하셨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그리고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25,45-46).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구원과 심판의 기준을 구체적인 이웃사랑의 실천에 두셨습니다.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나그네 등등
가장 작은 이들에게 베푸는 사랑이 곧 주님께 드리는 봉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이웃사랑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마지막 날 심판은 양 아니면 염소, 둘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중간, 양다리 걸치기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많이 사랑하면서 살았니?
막상 실천의 기회가 오면 머리로 계산하고 따집니다.
말로나 혀끝으로 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반대의 삶을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하고
민첩하게 해야 합니다”(성 그레고리오).
그래야 주님의 마음에 들 수 있습니다.
이리저리 재지 말고 그가 새 출발 하길 간절히 기도하면서 베풀면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다가가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은 지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글 모르는 시골 할머니가 신학 교수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성 보나벤뚜라).
“삶이 끝날 때 우리는 사랑으로 심판받게 될 것”(십자가의 성 요한)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기회가 좋든 그렇지 않든 행동으로 사랑하는 날 되길 희망합니다.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모습'(Imago Dei)
오상선 바오로 신부
우리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은
우리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Imago Dei)으로 창조되었다고 정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건 모르건, 의식하건 의식하지 못하건
저마다 하느님의 모습을 담고 있는, 그분의 닮은 꼴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레위 19,2)
거룩한 사람, 즉 성인이 되라고 하시네요.
저같이 부족하기 짝이 없고 죄인이고 성질 더러운 사람이
어떻게 성인이 될 수 있겠냐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하지만 그분이 그렇게 명하시니 어떻게 하든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겠지요.
어떻게 해야 성인이 될 수 있을까요?
거룩함은 하느님의 본성입니다. 하느님께만 붙여질 수 있는 속성입니다.
그분은 인간과 구별되는 존재,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권능과 영광, 신비의 존재이십니다.
물론 사람에게도 일상에서 따로 떼어져 성별 된 존재나,
또는 그런 모습을 드러낼 때 거룩하다는 수식어를 붙이기도 하지요.
말하자면 욕구나 욕망 등의 세속 원리와 다르게 존재하고 사는 모습에
부여하는 것이 일반화된 거룩함의 통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소에 계신 하느님의 영광 앞에 향을 올리고 머리를 조아리며
인간으로서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예를 갖추었습니다.
그런데 독서에서 하느님이 모세를 통해 요구하시는 거룩함의 실천은 경신례 문제가 아닙니다.
소위 '나에게 더 잘하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어지는 금지 명령들을 보면,
사람을 해치거나 불이익을 주는 모든 일,
사람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모든 일,
사람을 위축시키고 부끄럽게 만드는 모든 일,
하느님 백성의 일치와 조화를 깨뜨리는 모든 일을 하지 않는 것이 곧 거룩함입니다.
이제 거룩함은 어떤 개념으로 지성소에 갇혀 있지 않고,
사람 사이, 실패와 눈물과 슬픔이 흥건한 세상 한복판으로 내려왔습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거룩함의 실천들은 결국 이 한마디로 요약됩니다.
이처럼 거룩함의 요구는 이웃사랑의 요구로 1차 매듭이 지어지는 듯 보이는데,
먼 훗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말씀과 함께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을 이루게 되지요.
이제 우리는 복음에서 그 유명한 최후 심판 이야기를 만납니다.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또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
'나처럼 거룩해지라'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시던 구약의 거룩하신 하느님,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주님께서, 때가 차자 세상 한가운데로 들어오시더니,
이제는 "내가 바로 그들이다." 하고 폭탄선언을 하신 겁니다.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약한 이들과 당신을 동일시하시면서요.
누가 예수님인가요?
굶주린 이, 목마른 이, 나그네, 헐벗은 이, 병든 이, 감옥에 갇힌 이...
이들이 예수님입니다.
이제 거룩함은 저 하늘 끝에서 땅 위 성전 안 깊숙한 지성소로 내려오신 것도 모자라,
세상에서 가장 천대받고 소외된 이들 한가운데로 들어가신 겁니다.
이제 우리는 거룩함을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고맙게도 예수님은 우리의 거룩함, 우리의 구원을 위해 도처에 현존하시면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거룩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의인은 어떤 사람인가요?
오늘 하느님께서는 우리 보고 거룩한 사람이 되고, 의인이 되라고 하시네요.
거룩한 사람은 신에게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웃에게 잘하는 사람이라네요.
의인은 나보다 나은 사람들에게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보다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잘하는 사람이라네요.
벗님 여러분은 거룩한 사람이고 의인이지요?
그러시리라 믿습니다. 그러시길 축원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저는 어린 시절에 공산주의는 함께 할 수 없는 집단이라고 교육을 받았습니다.
학교에서 반공 포스터를 그리면 그 구호가 섬뜩했습니다.
‘무찌르자 공산당, 때려 잡자 김일성’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나중에 저는 그 시기는 ‘냉전’의 시대였음을 알았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세상은 두 개의 진영으로 나뉘었습니다.
하나는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였습니다.
그 깃발 아래 아메리카, 서유럽, 남유럽, 북유럽이 함께 있었습니다.
아시아에는 남한, 일본, 대만이 함께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러시아가 주도하는 공산주의였습니다.
그 깃발 아래 동유럽, 중국, 북한, 베트남이 있었습니다.
미국과 러시아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동맹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념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1989년 동독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이념의 대립은 자본주의의 승리로 마무리되는 것 같았습니다.
중국은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는 논리로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면서
가난에서 벗어나는 선택을 하였습니다.
한국도 북방외교를 채택하면서 중국, 러시아와 수교를 하였습니다.
이념의 벽은 자본주의와 경제성장이라는 파도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국제질서는 자본과 자국의 이익이라는 논리에 의해서
어제의 적은 오늘의 동지가 되기도 하고,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두 개의 깃발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사탄의 깃발입니다.
사탄의 깃발은 화려해 보이고, 성공과 명예가 주어질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사탄의 깃발 아래 모이지만 그 끝은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깃발입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은 초라해 보이고, 힘들고 외롭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깃발은 우리를 하느님과 하나 되게 합니다.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시작하며, 영원한 생명에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는 어느 깃발 아래 있어야 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는 셈을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인가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게 산 사람들,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지금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는 사람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지금 병들고 외로운 사람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장례미사 때, 오늘 복음의 말씀을 읽습니다.
지금 하느님 품으로 가는 마지막 길에 있는 고인이
생전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평소에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과 함께했다면, 병들고 지친 이웃들과 함께했다면
하느님 품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이라는 말입니다.
생전에 자신만을 알고, 가난한 이웃들을 돌보지 않았다면, 병든 이들을 외면했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고인이 된 사람은 장례미사 때 들려주는 이 말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장례미사 때 이런 복음을 읽는 것은
지금 살아서 이 복음을 듣는 우리들이
복음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되새기는 것입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이냐시오 성인의 ‘두개의 깃발’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사탄이 깃발을 선택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을 선택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은혜로운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마태오가 전하는 예수님의 마지막 가르침으로서
최후의 심판에 관한 내용이다.
달리 보면 이는 가르침이라기보다 최후의 심판에 관한 예수님의 예언이다.
엄밀히 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마태오 복음 22장에 기록된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끝난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라는 것이다.(22,39-40)
그다음부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준비하는 26장까지는 예언 말씀이다.
예언 말씀은 구체적인데서 보편적인 것에로 확대하여 언급된다.(23-25장)
예수께서는 우선 ‘사랑의 이중계명’을 기준으로 놓고
가르치고 말만하며 정작 행하지 않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위선을 탓하시고, 그들에게 7가지 불행을 선언하시며,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유다인들의 멸망을 예고하신다.(23,1-35)
그리고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 세상의 종말과 종말의 징조들을 예언하신다.(23,37-24,28)
그다음 부분은
① 인자의 來臨에 대한 예언
② 未定인 종말의 날의 시간에 대한 언급
③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
④ 열 처녀의 비유
⑤ 달란트의 비유
⑥ 최후 심판에 관한 예언으로 이어진다.(24,29-25,46)
번호를 매긴 이 부분의 대목들을 잘 살펴보면 ②~⑤를 빼고
①과 ⑥을 직접 연결시킬 때 더 자연스러워 보임을 알 수 있다.
즉 ① 인자의 내림 예언(24,29-31)과 ⑥ 최후 심판 예언(25,31-46) 사이에
②~⑤의 말씀이 삽입되었다는 말이다.
①과 ⑥이 직접 연결될 수 있는 구절들을 읽어보자.
① “그러면 하늘에는 사람의 아들이 표징이 나타날 것이고,
땅에서는 모든 민족이 가슴을 치며 울부짖을 것이다.
그때에 사람들은 사람의 아들이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은 울려 퍼지는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어
그가 뽑은 사람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불러 모을 것이다.”(24,30-31)
여기에 오늘 복음의 시작 부분을 직접 연결하여 보자.
⑥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떨치며 모든 천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영광스러운 왕좌에 앉게 되면 모든 민족들을 앞에 불러놓고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그들을 갈라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자리 잡게 할 것이다.”(25,31-33)
이렇게 두 대목이 매끄럽게 연결된다.
마태오도 복음을 집필할 때 처음에는 이 두 대목을 바로 연결하려고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기원후 70년에 실제로 있었던 예루살렘의 멸망이
곧바로 세상 종말과 인자 내림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곧 있을 것으로 믿었던 세상 종말과 인자내림이 지체하게 되자
80년 이후 마태오가 복음서를 실제로 집필할 때 ②~⑤를 삽입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②~⑤의 대목이 보여주듯이
① 인자의 來臨과 ⑥ 최후의 심판을 대비하는 일이다.
이는 마태오복음 공동체뿐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은 비중으로 적용된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다가올 인자의 내림을 깨어 기다리고,
내림하실 인자께서 주관하실 최후의 심판을 잘 준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최후심판을 잘 준비하는 것인가?
오늘 복음을 잘 살펴보자.
천사들을 거느리고 영광에 싸여 오신 인자가 왕좌에 앉아 모든 민족들을 불러놓고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두 부류로 나눈다.
이는 낮에 양과 염소가 들판에서 함께 풀을 뜯어 먹다가
밤이 되면 각각의 우리에 드는 것과 같다.
양과 염소로 갈리는 기준은 사랑과 자비를 ‘행함’과 ‘행하지 않음’이다.
여기서 의미있게 보아야 할 대목은, 인자는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을 당신 자신과 동일시하고,
갈려선 사람들은 이를 서로 다른 인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이웃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푼 의인들 중
어느 누구도 그 이웃이 ‘주님’인 줄 몰랐다고 말하고 있으며,
사랑과 자비를 베푼 적이 없는 자들은 도움을 받아야 할 이웃이 ‘주님’이었다면
모른 체 하지 않고 기꺼이 베풀었을 것이라며 변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양쪽의 말을 다 일축하고 각각의 경우를
‘나에게 베푼 것’과 ‘나에게 베풀지 않은 것’으로 대별 하신다. 결국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주님)에게 해 준 것이다.”(40절)는 말이다.
양과 염소처럼 갈려 선 사람들은 누구도 이렇게 될 줄을 몰랐다.
오직 인자만이 그런 기준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비유가 아니라 최후 심판에 있을 실제 상황이다.
최후 심판의 실제 상황에서 세상 창조 때부터 마련된(34절)
‘영원한 생명의 나라’와 ‘영원히 벌 받는 곳’의 구분은
보잘것업는 사람에게 사랑과 자비를 ‘행한 것’과 ‘행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진다.
착각하지 말아야 할 점은 이 보상에 대한 결정이
최후의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현실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느냐 않느냐에 따라
이미 보상이 결정된다는 말이다.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이 바로 종말에 왕좌에 앉아
최후의 심판을 주관하실 ‘주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原理는 예수님의 공생활 중 가르침에서 이미 드러났다.
산상설교(5-7장)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예수께서
“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7,21)고 하신 말씀을 상기해 보라.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고 그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이다.
쉬운 듯하나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웃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 때 그가 ‘주님’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좋다.
그것은 단지 인자의 심판 기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에서 주님은
‘네가 자비를 베푼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그가 바로 나였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오늘 복음은 부활시기가 아닌 시기의 장례미사 복음으로 지정되어 있다.
물론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복음들도 있지만,
이 복음의 ‘내용이 길다’는 이유로 집전자 측으로부터 선포가 거절되는 경우도 많다.
장례미사에 더러 비신자들이 참석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그들에게 이 복음보다 더 좋은 가르침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되도록 오늘 복음이 장례미사의 복음으로 선포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마리 문모 수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 25:40)
매번 사순시기를 맞이하면
십자가에 계신 예수님의 모습이 더 눈에 들어옵니다.
아.. 맞어..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계신 분이시지..
화려한 곳
높은 곳
빛나는 곳이 아니라
가난한 곳
낮은 곳
아파하는 곳에 계시는 분..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선
그곳에 가야 함을 깨달으며
지금 나의 시선은 어디로 향해있는지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출처 :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복음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