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박성훈의 차이나 시그널] 中최고법원 "中이 韓 베꼈다"...드라마처럼 뒤집힌 '상표권 판결'
중앙일보
입력 2022.07.31 20:07 업데이트 2022.08.01 02:07
박성훈 기자중앙일보 베이징특파원
2006년 7월 쿠쿠홈시스(구 쿠쿠전자)는 돌솥을 채용한 '일품석' 압력밥솥을 국내 처음 출시했다. [다나와 홈페이지 캡쳐]
현실은 때론 드라마보다 극적이다. 중국에서 한국 기업의 상표권이 침해받고 있다는 소식이 적지 않았지만 이번에 정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상표권을 침해당한 우리 기업이 1, 2심에서 패소했다가 중국최고인민법원 재심에서 판결이 뒤집혔다. 수교 이래 처음 벌어진 일이다.
시간은 1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6년 7월, 쿠쿠전자는 돌솥밥을 지을 수 있는 국내 최초의 압력밥솥 ‘일품석’을 출시했다. 가장 맛있고 한국적인 밥맛을 만들어내겠다는 집념의 결과였다. 출시 1년 만에 10만 대 이상 팔렸다. 중소기업 쿠쿠전자는 국내 밥솥 점유율 70%를 차지하며 1위로 올라섰다.
여세를 몰아 2012년 중국 시장에 ‘일품석’을 출시했다. 그런데 2015년 뜻밖의 사건이 벌어진다. 중국인 정젠홍(鄭儉紅ㆍ54)이 쿠쿠전자를 상대로 판매 중단과 손해배상액 1000만 위안(19억원)을 요구하는 상표권 침해 소송을 냈다. 쿠쿠로선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맞소송으로 쉽게 이길 수 있다고 판단했지만 오산이었다.
쿠쿠가 판매한 '일품석' 밥솥에 새겨진 상표(위)와 동일한 모양의 상표가 정젠홍이 판매했다는 밥솥 포장(아래)에 부착돼 있다. [중국 법무법인 유니탈렌 제공]
중국 회사가 되레 손배소 제기
정씨는 2007년 ‘일품석’ 상표를 출원했고 2008년 ‘일품석전기회사’를 설립한 뒤 2010년 정식 상표 등록을 완료했다. 중국법은 상표를 등록한 지 5년 동안 문제 제기가 없으면 법으로 인정된다는 조항이 있다. 정씨는 이를 악용했다. 등록 시점이 5년이 지날 때를 기다렸다 2015년 곧바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쿠쿠 측은 디자인이 동일하고 2006년 한국에서 판매를 시작해 당연히 정씨가 도용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심지어 2007년 초 중국 광둥성 가전 전시회에 ‘일품석’이 출품돼 당시 정씨가 이를 보고 베꼈을 가능성이 충분했지만 1심이 열린 선전(深圳)중급법원은 2016년 말 정씨의 손을 들어줬다. 쿠쿠의 타격은 엄청났다. 제품 판매가 중단됐고 판매처에서 밥솥이 전량 회수됐다. 2012년부터 3년간 중국서 팔린 ‘일품석’ 밥솥만 수십억 원 대였다.
2019년 중국 광저우 고등법원 2심 재판에서도 패소했다. 중국법상 손해배상 최고액은 300만 위안(약 5억5000만원), 그런데 고등법원은 두 배인 600만 위안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억울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해 8월, 법원이 강제 집행에 들어가 쿠쿠 중국법인 직원들의 급여 계좌까지 동결됐다. 주중 한국대사관이 지원에 나섰다. 중국최고인민법원에 재심 청구를 포함한 정부 의견서가 제출됐다. 악의적 사례로 의심되니 재심을 검토해달라는 우리 정부의 공식 요청이었다. 인민법원이 움직였다.
위는 쿠쿠가 돌솥밥이 가능한 압력밥솥 제품 '일품석'에 부착한 상표 '一品石' . 아래는 정젠홍이 자신의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에 부착한 유사 상표. [중국최고인민법원 판결문 캡쳐]
그로부터 다시 2년. 결국 결론이 뒤집혔다. 중국최고인민법원이 최근 공개한 26쪽 분량의 판결문에 따르면 재판부는 “추사체를 이용한 ‘일품석’ 상표에 대한 쿠쿠의 저작권이 인정되고 정젠홍이 사전에 제품을 보고 도용했을 것으로 넉넉히 추정된다. 정씨가 등록한 상표는 합법성이 없고 악의적으로 사용한 행위는 권리남용으로 인정된다“며 쿠쿠에 승소 판결을 내렸다. 불법으로 인정받는 데 7년이 걸렸다.
쿠쿠 승소에 7년, 그 사이 큰 손실
그사이 쿠쿠는 ‘일품석’ 판매를 접었고 막대한 손실과 타격을 입었다. 소송을 맡은 중국 법무법인 유니탈렌(UNITALEN)의 정이(鄭毅) 변호사는 “저작권이 재심 사건에서 뒤집힌 최초의 판례”라며 “한국 기업 상표에 대한 악의적 선등록자가 합법적으로 등록했다는 이유로 이를 악용하려는 것을 사법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선례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최근 중국에서 한국 기업 상표에 대한 무효, 취소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 사이에선 유명한 조선족 김 모 씨가 그 사례다. 김 씨는 한국기업들의 상표권을 선점한 뒤 돈을 요구해 왔는데 청정원ㆍ종갓집ㆍ빙그레ㆍ국대떡볶이ㆍ뽀로로를 비롯해 국내 치킨 브랜드 대부분을 김 씨가 먼저 중국에 등록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중국 상표국 데이터베이스 분석 결과, 김 씨 명의로 출원된 상표만 758개, 그가 설립한 자회사 10곳 명의로 등록한 것까지 포함하면 총 3164건에 이른다. 이 중 930건(29.3%)이 현재 무효나 취소 처리돼 국내 기업이 상표권을 회복한 것으로 확인됐다. (7월 28일 기준)
서창대 주중한국대사관 특허관은 “중국 정부가 김 씨를 블랙리스트에 올린 것으로 보인다”며 “김 씨가 연루된 정황이 드러나면 곧바로 상표 등록을 취소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김 씨 일당이 법망을 피하기 위해 타인 명의로 악의적 등록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해당 업체의 지분 소유 구조나 인적 연결 고리를 찾아낼 수 있어 악의적 선등록이 취소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한국 제품 인기도 낮아져
중국의 상표거래 사이트에 올라온 한국 '짝퉁 상표'들. 하림·불고기브라더스·풀무원·뽀로로 등이 보인다. [자료: 특허청, 윤영석 의원]
중국에서 저작권 보호가 강화된 건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는 중국 제품의 질이 좋아지고 반대로 한국 제품에 대한 선호도가 낮아지고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나온다. 한국 유명 브랜드에 대한 도용이 더는 실익이 없을 만큼 한국 제품의 위상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글로벌 저작권 단속을 대행하는 중국 기업 시노페이스(SINOFAITH) 한제훈 팀장은 “최근 중국 분위기는 한국 상품에 대해 거의 무관심한 수준이다. 한국 상표를 도용하려는 시도는 거의 사라졌다”며 “한국 인기 드라마나 예능에 대한 불법 유통도 과거 큰 기업들이 움직였지만 요즘은 돈이 안 되는지 개인들이 주로 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중국 최대 쇼핑 행사 중 하나인 ‘6·18 쇼핑축제’에서 한국 화장품 업체가 처음으로 판매량 10위 내에 한 곳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자동차·휴대폰 등 글로벌 브랜드조차 중국 내 점유율은 1% 미만이다. 중국 사법당국이 자국 기업 경쟁력에 지장이 없다는 판단 아래 상표권 판결을 내리기 시작했다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박성훈 베이징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