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물안 개구리의 가출
박말이 (2012년)
그 날 밤 희미한 달빛을 이고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태어 난지 9개월 된 어린것을 등에 업었다, 초등학교 일학년인 첫째는 어디에 숨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고구마 밭을 초벌 다 매고 저녁 밥을 하려는 순간 그에게 쫒겨났다. 6월 초순의 뜨거운 해가 서산에 걸친 순간이었다, 등빠진 삼베 적삼과 주름 나간 인주 치마를 입은 채로 어린 아이만 포대기로 챙긴것은 배고픈 아이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서였다
이웃집에 사는 사촌 오빠네 집에 저녁 해와 같이 숨었다.
사촌 오빠가 벌벌 떨고 있어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그가 집에 불을 지르고 장독을 부수고 돌 담장을 던져 장독을 깨부수는 소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사촌 오빠네 집까지 울리는 진동 때문이었다. 사촌 오빠는 "큰일 났다"를 연발하고 있었다, 나는 견딜수가 없었다 갑작스레 날아 온 돌에 맞지 않으려는 웃물안 개구리처럼 후들거리는 다리로 어둠을 타고 윗동네 종동서 집으로 찾아 갔다.
내 몰골을 본 종동서가 "우짠일이고 "놀라며 물었다.
눈물이 자동으로 흘렀지만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언젠가 이런일이 벌어질 것 같은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가 선원으로 취직이 되지 않는 것을 내 탓처럼 여기는 것을 근근히 버티고 있든 중이었다. 그 사람의 비위를 거스린 것은 하루 종일 밭메느라 시중을 들지 못했든 탓이었다. 여느 때는 어디로 나가서 들어 오지 않다가 그 날은 군대에서 가져온 푸른 침대에서 하루 종일 누웠다가 일어난 소동이었다.
종동서 집은 언덕배기를 채고도 더 걸었다
그가 집을 부수는 괴성소리만 들리지 않아도 안정이 되었다. 자정이 지나 이슬이 내리는 새벽길을 나섰다. 결혼 생활 9년 9개월에 종지부를 찍는 발 걸음이기도 했다. 잠시 홀가분한 기분을 맛보는 순간이기도 했다. 온 세상이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하고 희미한 달빛이 내 발길을 비추고 있었다. 푸른작살 아랫마을 오솔 길 (풀과 돌이 가득한) 그 정적 속에 파도가 자갈돌을 사르륵 사르륵 익숙하게 굴리고 있었다. 동네를 벗어나 어름살매(장천으로 흐르는 계곡)에서 어릴 때 학교갔다 오다 다리 아프면 쉬든 평평한 돌 위에 아이를 등에서 내려 안고 앉아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지금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그 바다가 참 조용하다는 아늑한 느낌은 아직도 남아 있다.
욕지에서 부산으로 왕래하든 여객선 복운호가 있었다.
밤길 어린 십리를 걸어 여객선이 닫는 마을 고모네 집 마루에서 포대기를 덥고 잠시 눈을 붙이고 난 아침에 놀란 고모네 집 며느리의 웃 옷을 빌려 입고 붉은 해가 한 발 쯤 솟은 아침, 복운호에 몸을 실었다 아무 생각없이 대책없이 배 바닥에 쓸어져 잤다. 배 멀미에 시달려 일어 서지 못했다 하루 해가 걸려 낮서른 부산에 도착해 아버지가 입원해 계신 복운 병원으로 갔다. 위중했든 아버지는 며칠후에 돌아 가셨다.
남동생과 여동생이 지내는 자취방에서 3개월이 흘러 등에 업혀온 아이의 돌이 지나갔다
어린 동생들의 신세를 지는 답답한 마음에 견딜 수가 없었다 무엇을 하든 돈을 벌어야 했다.낮에는 두 동생이 나가고 나만 홀로 남아 생선장수 흉내를 내 봤다 그 때는 생선을 머리에 이고 다니며 파는 아낙들이 더러 있었다. "칼치 사이소! 생선사이소! 고등어 사이소!" 방안인데 또 혼자인데 아무리 외어봐도 입밖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근처에 셋타(편물)목 붙이는 일을 해 봤자 돈은 되지 않고 눈병만 났다 노랗고 빨간 세타의 색채가 너무 강해서 눈이 부시었다.
그 무렵 남동생하는 사업이 망했다
엎어진데 덥친격으로 남동생이 병이 났다 나는 통영 이모집으로 갔다. 이모집도 넉넉치 못했다 이모가 계주를 하다 빗더미에 앉아 있었다 이제는 무엇이라도 해서 내힘으로 돈을 벌어야 했다. 어려서 부터 배운것이 농사짓는 일이었다. "너 같은 건 집 나가면 식모밖에 더 하겠어?"그는 입 버릇 처럼 말했었다. 그 사람의 예상을 깨고 싶었다. 그 차중에 무슨 자존심이 남아 있었든지 참 아이러니 하지만 옷장사(일명 보따리 장사}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런데 아이를 업고 다닐수는 없는 노릇이 었다
시집에서 나오면 돌아 갈 곳은 친정뿐인 시절이었다.
아이를 업고 이혼이든 도망이든 별거든 친정으로 돌아 가면 아무도 그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물론 누이 자매를 괴롭힌 남자의 자식으로 보기 때문이라는 것은 알지만 눈치가 보여 마음이 아팠다. 그렇다고 원망할 수 없는 노릇이기도 했다. 막 돌지난 아이를 애비가 있는 큰집에 데려다 주고 이모집 마루에 누웠으니, 아무도 오지 않는 깊은 산 속에 짐승이 어릉대는 밤, 비가 내 가슴에 내리는 수숫대 움막이라도 아이 둘만 품에 안을 수 있다면 아무 위안이 없을 것 같은 허한 가슴에 뜨거운 눈물이 귀전으로 빗물처럼 흘러내려 귀속이 멍멍했다
그리고 이웃 아이가 엄마를 부르는 소리는 내 가슴을 때렸다
어디서 엄마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움질 움질 놀라기도 했다. 꿈속에서 엄마를 부르는 아이들의 소리가 메아리로 들렸다. 그 메아리를 따라 올라갔다 커다란 성이 나타났다. 말 두마리가 코를 꽤인채 고삐가 대롱대롱 성벽에 매여 있었다. 엄마라는 메아리는 성 안에서만 들리고 나는 그 말 때문에 아무리 애를 써봐도 성안에 들어 갈 수가 없었다 순간 어떻게 들어 갔는지 저녁 햇살이 비치는 성안에 내가 서서 아이들을 찾고 있었다 성안은 운동장 같았는데 관중석은 은빛 보라빛으로 빤짝이는 보리 이삭들로 가득하고 엄마란 그 애타는 메아리는 들리지 않고 괴괴했다
이런 비슷한 꿈을 간간히 꾸었지만 지난 밤 꿈은 달랐다.
어떤 마굿간에서 거적을 들추웠는데 내 발등에 소금 한줌이 주루루 쏟아졌다. 그 날 큰 언니가 찾아 왔어 돈 2만원을 주고 갔다. 땡전 한 푼 없는 나에게 빛같은 돈이지만 고맙다는 말도 못했다. 그 돈으로 부산 진시장에 가서 메리야스를 한 보따리 사왔다 그 보따리를 이고 나간다는 것이 너무 너무 부끄러워 며칠을 딩굴고 있었다. 그 보따를 가르키며 "이모 저 원수 덩어리를 어떻게 하지요?" 하고 물었다 보다 못한 이모는 나에게 봇짐을 머리에 얹어 주며 뒤따라 나와 이웃을 돌았다. 그렇게 이모를 의지 한 채 시작한 일이 차차 익숙해 갔다
그런데 남의 집 방문이 그렇게 어려울 줄 몰랐든 것이다
남의 집을 들어 갈때 정면으로 보는 부끄러움은 그래도 덜했다. "안사요" 하는 말에 얼른 나왔어 뒷통수가 떨어져 나갔는지 만져 보았다. 나는 논3마지기 값만 뫃이면 절로 가리라 마음 먹고 열심히 옷장수를 했다. 세월은 나를 단골로 만들어 갔다 그리고 나를 기다리는 손님이 생기기 시작했다.하지만 한시도 아이들을 잊을 수가 없었다. 헐벗거나 꾸중한 아니들이 보이면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일년을 키워서 보낸 아이를 이년이 흘러도 보지 못했다. 단골들은 아이를 둘식이나 버리고 나온 서른의 푸른 여인의 속사정을 알리가 없었다.
아이들이 길바닥에 넘어져 자다가 뜨거운 햇살에 얼굴이 타서 물집이 생겼다는 소문, 개에게 물려서 가슴과 얼굴에 큰 상처를 입었다는 소문, 큰 아이의 책가방이 걸레같고 책가방 속에는 공책 한권 없더라는 소문과 작은 지게를 맞춰서 풀짐을 지우고 깻단을 지운다는 시 아버지는 아이가 엎어지면 아이를 밟고는 넘어가도 일어켜 주는 일이 없다는 그런 소문이 소문만은 아니었다.자꾸만 내 가슴에서 바람소리가 났다. 비록 시어른들이 저지르고 있는 학대일 지라도 그것은 내가 아이들을 버린 죄임이 틀림없었다 논3마지기 돈만 벌면 절로 간다는 나의 신념이 귀로에 서게 된것이다.
정말 지긋 지긋한 이속세를 떠나고 싶었다;
아는 사람이 없는 절간에 뭍혀 살다가 십 년 쯤 흘러 세상에 한 번 나와 보리라. 천방지축 아나무인인 그가 어떤 생활을 하고 사는지 알고 싶었다. 그 때에 내 생각은 참 현실에 동떨어져 있었다. 우선 아이들을 어떻게 살라고 그런 생각을 했다니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단순덩어리가 아니면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는 바보이지 싶다. 아이들은 아이들 대로 집나간 어미의 자식이라고 있는 미움 없는 미움 다 받으며 노골적인 학대를 다 받으며 살고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니 만에 하나 아이들이 어찌되면 피를 토할 사람은 내가 아니었을까! 대천지 원수끼리 헤어졌어 좋겠지만 그 상처는 힘없는 아이들이 고스란히 감당할 몫이라는 그 사실을 나는 외면했든 것이다.
우물안에 개구리가 딱하나 고칠 수 없는 병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의 잘못 모두가 나의 탓인 것이다.
소가 아파도 심지어는 흉년이 들어도 하다 못해 숱까락 몽뎅이가 뿔어져도 나의 못남을 운운하든 병이 숨겨져 있는 그 속, 하지만 바같세상은 그런 병과는 무관했다. 그 병을 무시하는 동시에 나 하나를 버리고 아이들을 택하기로했다. 나는 남동생에게 재결합을 비쳤다. "그 사람이 변한 것 처럼 기운이 빠져 보였어"하고 말했다 남동생은 "매형이 달라졌다고 착각하지 마라" "옛 날 그대로 산다고 치고 재결합인지 뭔지 해야 할거야" 나는 잠간 망서리다 "네가 우리 아이들이라고 생각해 보면 어떻겠어?" 나는 결심한 듯 되물었다.
2년하고도 4개월이 더 지나 아이들을 만나는 날이 왔다.
시어머니께서 아이들을 데리고 왔었다. 큰 아이는 엄마라도 부른다는 것이 입술만 달삭 했다. 큰 아이 옷에 쇄까래가 하얗고 작은 아이는 유독히 똥배가 빵빵했다. 작은 아이는 할머니가 가고 나서 울기 시작했다. 집에 가겠다고 밤마다 울었다. 업고 밤을 새우면서 나도 같이 울었다. 제 에미를 몰라보게 만든 내 심사가 아프고 또 아팠다. 엄마 젖을 떼듯이 다시 정을 떼고 다시 옮겨 오는 것을 반복하는 어린것의 눈물은 내 어깨에서 잠이 들었다. 어느 날은 옷을 들고 "갈꺼야"를 중얼거리면서 문턱을내려 서기도했다. 시간은 약이라드니 내 아이들의 상처도 그렇게 아물어 갔다.
2022.9.1.
영양가 없는 긴 글 읽어 주셨어 감사합니다~~^^
첫댓글 산다는 것이 자갈 산을 끝없이 오르는 거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수연선생님~~^^
정말 힘들게 사셨군요. 정말 산다는게 뭔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제 모두 잊으시고 건강하게 여생을 즐기십시오.
너무 감사합니다~~^^행전 선생님^^
인생의 어떤 삶이든 고난이 있지 않겠습니까
어느곳 어떤 환경에서든 어려움이 있고 난관이 있겠지만
어떤 인연과의 만남에서 발생되는 영화와 불행 또한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험난한 가사밭 인생길 헤쳐나오신 말이 선생님의 남은 삶의 길은 평온하고 행복한 날들이 되시기를 기원 합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너울 선생님^^
너무도 험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과거에 쓰신 여러 글에서 짐작을 했지만,
읽는 내내 가슴이 아팠습니다. 때론 제 일처럼 분하기도 했습니다.
시아버지의 몰인정하고 몰지각함은 알고있었지만, 바깥분도 크게 다르지 않군요.
아무리 무책임해도 자기 자식인데, 그렇게까지 학대를 하다니...
여생이나마 평안하시길 기도합니다.
이해하셨어 너무 감사합니다~~^^정암 선생님^^
죄송하고 부끄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