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 카다안의 침입은 원나라 내부의 군사적 투쟁이 고려까지 불동이 튄 경우였다. 1290년 1월 경 원나라에서 돌아온 오인영(吳仁永) 등은 이 정보를 입수하여 충고려 조정에 카다안이 침공해 온다고 보고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홍자번(洪子藩)과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정가신(鄭可臣) 등에게 명령을 내려 군사를 징발하는 한편,
안전(安戩)을 경상도 도지휘사(慶尙道都指揮使), 김지숙(金之淑)을 전라도 도지휘사(全羅道都指揮使)로 각각 임명해서 군을 편성하도록 했다.
2월 1일, 조정에서는 추가적으로 중군만호(中軍萬戶) 정수기(鄭守琪)를 금기산동(禁忌山洞)에 보내 주둔시키고, 박지량(朴之亮)은 이천현(伊川縣)에, 한희유는 쌍성에, 김흔(金忻)은 환가현(豢猳縣)에,
나유(羅裕)
통천에 각각 주둔케 하여 적에게 대비하도록 했다.
헌데 이 당시에 소문으로는 카다안의 세력이 이미 쭉쭉 밀고 들어와 있다고 알려졌고, 이 때문에 민심이 흉흉하자 홍자번은 일단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는 편이 좋겠다고 권했고, 조정의 여론도 이와 비슷했다. 그런데
최유엄(崔有渰)과
허공(許珙)만은 이를 반대했는데, 이 당시에는 충렬왕이 부재 중이었다. 원 강점기에는 고려 왕이 자주 원나라에 가야 했는데 이 때문에 자리에 없던것. 허공 등은 "왕이 없는 상태에서 마음대로 수도를 옮기면 안 된다." 고 이를 반대했는데 재상들은 "허공이 본래 똑똑하다고 들었는데 지금 개소리 하는거 보면 그렇지도 않구만?" 하며 비아냥거렸지만 허공은 끝까지 버티며 수도 이전을 찬성하지 않았다.
헌데 이후 원나라에서 온
인후(印侯)는
"쿠빌라이 황제가 고려 왕에게 말씀 하셨는데, 감히 함부로 수도를 옮기자고 지껄이는 사람이 있다면 잡아오라고 했다."고 해서 사람들은 허공이 맞는 말을 했다며 감탄했다고 한다.
한편 원나라에서 체류 중이던 충렬왕은 3월 경 고려로 다시 돌아와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5월 무렵에 일전에 보낸 김흔, 나유, 정수기 등이 지금의
함경도 길주 지역인 해양(海陽)까지 카다안이 밀고 들어왔다고 보고를 올렸다. 이에 5월 13일에 충렬왕은 전군을 소집하여 점검을 한 다음, 5품관 이하의 문관으로부터
내시(內侍), 다방(茶房), 3관(三官), 5군(五軍), 금학양관(禁學兩官)에 이르기까지 모두 종군하도록 했다. 또한 원나라에서도 김연수(金延壽)를 보내 카다안의 침공 사실을 보고하도록 했다.
이후 6월 3일에는 대장군 한신(韓愼)에게 명령하여
서경의 병사를 이끌고 동계(東界) 지역을 방비하도록 했다. 한편 쿠빌라이 칸의 대답 역시 도착했는데 "반란 토벌군을 보내려면 시간이 좀 걸릴테니, 고려군이 주요 루트를 방어하고 있어라." 라는 지시였다.
이런 상황에서 시간만 하염없이 흘러 7월이 되자 충렬왕은 대신들을 불러 모아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본래 몽고 출신인
인후(印侯)는 이렇게 말했다.
"주상께서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동계(東界)로 나아가 적의 진격로를 차단하십시오. 적이 만약 개경 근처까지 육박해 오면 주상께서는 강화도로 들어가시고 저희들에게 분부하시어 군사를 거느리고 방어하도록 하소서."
즉 충렬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국경 지대에서 합단적을 막고, 하다하다 안 되면 강화도로 피난하라는 이야기였다. 그러자 충렬왕은 앞의 국경 지대로 군사를 이끌고 나가라는 말은 무시하고 뒤의 말에 대해서만 패기 넘치게 대답했다.
"백성은 곧 나라의 근본인데 짐이 어찌 먼저 피난하여 민심을 혼란시키겠는가? 적이 비록 이긴 기세를 타고 여기까지 쳐들어올지라도 짐은 삼군의 후군(後軍)이 되어 사직(社稷)을 보전할 것이다!"
이때까지의 말만 보면 그야말로 간지폭풍의 발언이었지만……8월 20일 무렵 충렬왕은 대장군 유비를 원나라에 보내 구원병을 독촉하는 한편
강화도로 좀 도망가도 되겠냐고 허락을 구했다. "어찌 먼저 피난하겠는가?" 라고 사자후를 터뜨린지 한달 무렵 만에 완전히 말을 바꾼 것(……) 이를 쿠빌라이 칸이 허락하자 충렬왕은 10월 무렵 노약자와 여자들을 강화도로 보내고, 11월에는 국사(國史)와 보문각(寶文閣), 비서시의 문적,
태조 왕건의 소상(塑像), 궁인들을 강화도로 보내며 피난 준비를 분주하게 했다.
그런 상황에서 원나라에서 온 평장사 토리티무르(闍梨帖木兒)는 사람을 보내 충렬왕에게
"마땅히 고려 왕은 수도에 머물며 우리 군사를 위로하고 음식 등을 베풀어라." 라고 했지만 충렬왕은
이 말조차 씹고 인후를 보내 수비하게 하고는 12월 18일 강화도로 들어가버렸다.
적이 쳐들어와도 사직을 보존한다며? 사직 보존하겠다곤 했지 백성 보존하겠다곤 안했다 왕이 강화도에 들어가 있는 동안 개경은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使司)
송분(宋玢)이 담당하며 수비를 맡았다.
그러나 송분은 이튿날 바로 도망쳤으며 당시 서경유수였던
정인경(鄭仁卿)도
강화도로 도망쳐 왔다. 그러는 사이 카다안의 침략군은
쌍썽총관부(雙城摠管府) 관할 지역이었던 화주(和州) 무렵까지 도달했다. 진군속도는 늦장을 부리는 편이었지만 그 행패는 대단히 극심했는데, 카다안의 침략군은
사람을 죽여 양식으로 삼고, 부녀자를 잡으면 강간을 한 다음 살을 저며서 포를 떠먹었다. 가히 인와마경이 따로 없는 판이었다.
그런 난장판 속에서 12월 4일 경, 원나라에서 보낸 토리티무르, 평장사(平章事) 세도칸(薛闍干), 우승(右丞) 타추(塔出) 지휘 휘하의
보병과
기병 1만 3천여 병력이 고려에 진입했다. 이에 따라 상황은 고려군, 카다안의 침략군, 카다안을 토벌하러 온 원나라 병사들이 섞인 혼전으로 변모했다.
첫댓글 이무의 강제무쌍
헐 이거 예전에 해동천자님이 원나라가 고려를 남겨둔 이유 중 하나로 언급하신 적이 있는 걸로 기억하는데 ㄷㄷㄷ
합단적의 난은 그 이전에 일어난 [나얀의 난], 즉 동방왕가가 지긋지긋한 반란자 카이두와 합세하여 일으킨 난의 후속입니다...-_-; 난이 일어나자 쿠빌라이는 즉시 대병을 출동시켜 나얀과 카이두의 연계를 원천차단했고, 충렬왕도 군대를 이끌고 국경까지 나아가 시위하는 제스쳐를 취하죠. 나얀의 난은 보름만에 전격적으로 진압되었지만, 그 잔당이 카단을 중심으로 모여들어 고려를 침공... 이 두 반란을 진압한 쿠빌라이는 요동일대에 '요양행성'을 설치하여 통제권을 장악합니다...ㅎㅎ;;
@★海東天子☆ 흠 그렇다면 원나라는 고려왕실을 존속시킨 목적을 어느정도 달성한 셈인가요???
@배달민족 뭐... 원말까지 크게 시끄러운 일 없었으니...^^;
하여간 충들은..
원충갑의 척준경 못지않은 무훈이 정말 감동적이네여~ 그리고 세도칸 또한 명민한장수인거같고 이무는뭐;;; 죽기아니면 까무러치기 충렬왕이나 충선왕은 현대판 대통령같음 노세노세 왕되서 노세~
순간 카디안으로 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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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피스의 그... 와타루왕이 생각나내여
뭐 충렬왕의 행태를 쉴드쳐주고 싶은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지만서도, 쿠빌라이가 한 말에 왕이나 신하들이 속으로 '니들때메 나라가 막장인거아냐 이 ㅅㅂ야'라고 외치고 싶었을지도......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