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 만종(晩鐘) - 그림 속 죽은 아기의 관은?
그림 속 죽은 아기의 관은 왜 사라졌을까?
장 프랑수아 밀레의 '만종(晩鐘)'
부모님의 손을 잡고
루브르 미술관을 방문한 한 소년이
어떤 그림 앞에서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그림 속에 어린 아이의 시체가 담긴 관이 보여요.”
소년은 계속해서 비명을 지르며 불안에 떨었다.
소년이 본 그림은
바로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명화 중
가장 많이 본 그림 중의 하나로 꼽히는
밀레의 ‘만종’이다.
밀레(Jean-François Millet)는
프랑스의 화가로 농민의 생활상을
작품으로 담아내며
‘가장 프랑스적으로 농민들을 그린 화가’라고 평가받는
바르비종파(Barbizon School)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바르비종파는
파리 근교 퐁텐블로
(Fontainebleau) 숲 근처의
작은 마을을 중심으로
19세기 초
정치적 혼란과
급격한 산업화에 지친 예술가들이
자연주의를 지향하며 활동한
프랑스 화가 집단이다.
농부의 집안에서 태어난 밀레는
가난한 농부들이 힘든 농사일의 고단함에도
오히려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고,
또한 그들에게는 대자연에 대해
상상하기 힘든 애착이 있음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밀레는 그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담아내며
노동의 고단함과
땅에서 살아가는 숭고한 삶을 표현했다.
밀레의 만종은
붉은 노을이 지는 저녁 들판에서
가난한 농부 부부가
멀리서 울리는 교회의 종소리(만종)를 들으며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드리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아름다운 전원의 풍경과
부부의 기도하는 모습이
보는 이로 하여금
종교적인 경건함과
평화로운 마음까지 들게 한다.
그러나 처음에는 아무도 이 작품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림을 그릴 당시
밀레는 지독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2년의 작품 활동 끝에
그림이 완성되었지만
의뢰인(미국인)은 작품을 사들이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다른 수집가가 이 작품을 사들였지만
“그림을 보고 있으면
시끄러운 종소리가 계속해서 들린다.”며
다른 작품으로 교환해 갔다.
밀레는 ‘키질하는 사람’을 통해
농민 화가로서의 시작을 알렸지만
빈농들의 생활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이
항상 문제가 되었다.
당시에는 농촌 풍경을 그릴 때
도시 부르주아의 취향에 맞추어
목가적인 전원 풍경으로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림의 주 의뢰인이었던 부르주아들이
불안한 마음으로
사회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때였기 때문에
작품에서 빈농 문제를 다루는 것은
‘혁명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밀레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삶’을 그리는
‘농민 화가’라는 이름도 얻었지만,
노동의 현장을 지나치게 미화시켜
사회적 불안을 조장한다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라는 비난도 받았다.
이러한 당시의 분위기에서
부르주아들이 그의 작품을 외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밀레는 1859년
살롱전에 ‘만종’을 출품하며
작품을 제작한 계기를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는 들에서 일을 하다가
종이 울리면 일을 멈추고,
가엾게 죽은 이들을 위해
삼종(三鐘)기도를 드렸다.
그것을 생각하며 그렸다.”
우리는 밀레의 만종에서,
하루 일을 마친 농부 부부가
교회 종소리를 들으며
기도하는 평화로운 저녁의 모습을
느끼게 되는데,
정작 그림을 그린 화가는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장면을
작품 속에 담아내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앞서 부모님의 손을 잡고
루브르 박물관에 갔던 그 소년은
왜 밀레의 만종 앞에서
어린 아이의 시체가 담긴 관이 보인다고
비명을 질렀을까?
비명을 질렀던 소년은
훗날 평생 동안 비합리적이고
비상식적인 예술을 추구하는 화가,
광기와 모순과 신경질을 예술로 승화시킨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예술가가 된다.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다.
1932년
밀레의 만종은
한 차례 수모를 겪는다.
만종을 관람하던 한 정신이상자가
그림을 칼로 찢어버린 것이다.
당황한 루브르는
그림을 복원하기 위해
전문가에게 X-Ray 촬영을
의뢰하게 되었다.
여기서 나온 뜻밖의 검사 결과가
모두를 경악하게 한다.
만종의 그림 속
감자 바구니로 칠해진 아래 부분에
관으로 추정되는
작은 나무상자가
밑그림으로 그려져 있었던 것이
발견된 것이다.
어린 달리는
만종을 처음 본 순간
예술가의 직관으로
죽은 아기의 관을 본 것일까?
스스로를 편집광적 예술가라고 부른
달리가 본 것은 환상이 아닌
사실이었던 것일까?
살바도르 달리는
어린 시절 밀레의 만종에서
죽은 아기의 관을 보았다고 했다.
그는 20세기 초
미국과 유럽 미술계에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며
피카소 같은 천재로 인정받는다.
근대에 와서
우리는 여러 과학적 방법을 이용하여
미술품을 분석하고
작품 속에 숨어 있는
새로운 이야기를 밝혀내기도 한다.
1932년
루브르에서 실시한 X-Ray 검사 결과는
밀레의 만종에 숨은 이야기를 찾아냈다.
그 실체가 무엇이든
감자바구니 이전의 밑그림이
존재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만종이 그려질 당시
농촌에서는
굶주림에 신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배고픔을 참고
씨감자를 심으며
봄이 오기를 기다렸던 부부가
들판에서 일을 하는 동안,
그들의 사랑하는 아기는
배고픔을 이기지 못 하고
숨을 거둔 것이다.
밀레는 애초에
만종의 그림 속 감자 바구니가 그려진 자리에
죽은 아기의 관을 그려 넣었다.
붉은 노을이 지는 저녁 들판에서
가난한 농부 부부가
죽은 아기를 묻기 전
마지막 기도를 하는 모습의 그림이
‘만종’이었던 것이다.
그 그림은 신앙적 경건함과
감사함을 나타내는
평화로운 분위기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농부들의
처절한 현실을 보여주고,
자식이 죽어가는 동안
내내 침묵했던 신에 대하여
원망 대신 기도로써
슬픔을 극복하는
농부들의 삶을 담아내고 있다.
밀레가 이 그림을 그렸던 당시에
친구와 주고받은 편지에 의하면
그는 아이들에게 먹일 것이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고,
이로 인해 극심한 두통과
스트레스로 자살에 대한
충동 속에서 있었다고 한다.
밀레는 왜 그림 속에 그렸던
죽은 아기의 관을 지우고
대신해서 감자 바구니를 그려 넣은 것일까?
밀레는 시대성을 반영한 그림 때문에
사회주의자로 오해를 받았지만
농촌의 일상을 솔직하게
그림으로 담아내려고 했다.
그래서 피폐한 농촌의 일상을
그림에 반영하며
처음엔 만종에
죽은 아기의 관을 그려 넣었다.
2년의 작품 활동 끝에
그림이 완성되지만
의뢰인이 작품을 사들이지 않자
밀레는 만종을 살롱전에 출품한다.
그런데 작품을 출품하기 전
그림 속에 그려진
죽은 아기의 관을 본 친구가
심사과정에서의 파장을 염려하며
밀레에게 작품을 수정할 것을
간곡히 조언한다.
밀레는 고민 끝에
친구의 조언을 받아들여
아기의 관을 지우고
대신 그 자리에
감자바구니를 그려 넣는다.
이후에 만종은
농촌의 평화로운 풍경을 담은
그림으로 유명해졌고,
여러 예술가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오르세 미술관(Musée d'Orsay)
그리고 지금은
프랑스의 자존심이자
전 세계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오르세 미술관의 보물이 되었다.
만종은 한 때 미국의 손에 있었다.
밀레는 1859년
미국인의 의뢰로
만종을 완성하였으나
의뢰인이 작품을 인수하지 않는 바람에
그에게 제작비를 지원한
화상의 손을 거쳐
그 그림은 경매에 붙여진다.
당시에 만종은
이미 프랑스의 자존심이 되어 있던 터라
온 국민은 심각한 자괴감에 빠진다.
만종이 미국으로 팔려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프랑스 정부는 시민 모금 활동을 벌이고
미국과 치열한 경매 경쟁에 응하였으나
부자나라 미국을 당해 내지 못 해
결국 만종은
미국 미술협회 소유로 넘어간다.
1906년
예술의 가치를 알아본
프랑스 최대 백화점의 소유자였던
알프레드 쇼사르는
미국으로부터 다시
만종을 구입하여
루브르 박물관에 기증한다.
이후 만종은
현재의 오르세 미술관으로 옮겨지며,
지금까지 한 번도 거래된 적이 없는
프랑스의 독보적인 보물로 남게 되었다.
“나는 일생을 전원밖에 보지 못했으므로
내가 본 것을 솔직하게 표현하려 하였다.”
하루 일을 끝낸 농부 부부가
신에 대한 감사 기도를 하고 있는
만종에 숨어 있는 슬픈 이야기는
지금도 밀레의 연구가들에게
끊임없는 이야기로 재해석되고 있다.
또한, 밀레의 만종을 본 순간
그림 속에서 죽음을 느꼈던
20세기를 대표하는 천재 예술가 달리는
만종에서 느낀 불안감을
일생동안 여러 오마주(hommage)
작품으로 남겼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
아직 국화가 지지 않은
초겨울의 어느 날
밀레의 만종과 달리의 만종을
비교 감상하는 것은
색다른 흥미를 줄 것이다.
최경희 교육학 박사
재경대사9회 동기 남부수도사업소 김성달 소장이 카톡으로 보내준 동영상을
옮겨온 글로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