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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조용기 목사
2014-09-14 22:31:26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두려움』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매일 같이 수많은 크고 작은 두려움의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두려움은 그것이 크던 작던 그 안에 파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두려움의 종류도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질병의 두려움, 실패의 두려움, 불행에 대한 두려움, 인정받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 버림당할까 하는 두려움, 재난에 부딪힐까 두려움 등등 그 두려움이 어떤 것이든지 이것이 오랫동안 마음을 점령하게 되면 재앙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입니다.
(요일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다시 말하자면 죄를 범하고 형벌을 받는 것처럼 두려움도 그에 따른 형벌이 있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마음에 부정적인 무서운 과대망상을 가지고 있으면 이것이 우리를 위축시킵니다. 용기를 잃고 담력을 잃게 하며 당황하며 낙심하게 합니다.
두려움은 믿음을 무력화하고 패배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원수에게 저항할 힘을 잃게 만듭니다. 왜 우리는 두려워하며 살아야 합니까?
첫째로, 죄는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인간은 두려움 없이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과 사랑의 교통속에 사는데 두려움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사랑을 잃어버렸을 때 비로써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온전한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다고 했는데 사랑의 관계가 두절되면 그 자리에 두려움이 와서 점령하게 되는 것입니다.
(창3:8-10)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옛날에는 하나님이 오실 때 반기며 뛰어나가서 하나님의 손을 잡고 동산을 거닐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 두려워하여 숨게 되었습니다. 왜 그러느냐, 죄를 지어서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영광을 잃고 벌거벗었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잃고 하나님 앞에 두려워 떨며 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도 범죄하여 양심이 벌거벗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릴 때 공포에 시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범죄하여 두려움에 떠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은 무엇일까요?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혔다고 말한 것입니다.
(창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그들이 범죄하고 벌거벗은 수치를 가릴 수가 없어 벌벌 떨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에덴에서 처음으로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리고 가죽옷을 벗겨 옷을 만들어 입혔습니다. 그들이 범죄하기 이전에는 에덴동산에 피 흘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범죄로 말미암아 그 벌거벗은 몸을 입히기 위해서는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리고 가죽을 벗겨 그들에게 옷을 입혔습니다. 비로서 죄의 값으로 말미암아 짐승이 죽고 피를 흘리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죄를 위해서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시고 그 의의 가죽을 벗겨 우리를 입히실 것을 벌써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분명히 보여 주신 것입니다.
(롬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예수님의 보혈로 인한 대속을 통하여 값없이 주시는 의의 의복을 받아 입는 것 이외에는 부끄러움을 덮을 도리가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무화과 나무 잎으로 앞치마를 해서 입었으나 햇빛이 비치니까 그냥 쭈굴쭈굴 말라 버리고 만 것입니다. 무화과 나뭇잎으로 아무리 앞치마를 해입어도 수치를 가릴 수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짐승을 잡아 피를 흘려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힐 때까지는 그들은 수치를 가릴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인류의 행실이나 수양이나 도덕을 통해서 자기의 죄악을 덮어 보려고 애를 써도 그것은 헛수고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수치와 곤욕을 가릴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 죄를 위하여 몸 찢고 피 흘려서 죽으시고 그 결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시는 용서와 의의 옷을 받아 입기 전에는 우리의 수치는 덮어지지 아니하고 그로 인한 우리 마음의 공포는 사라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롬8:33-34)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 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 하리요"라고 말씀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용서와 의를 주시므로 아무도 그 사람을 정죄할 수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둘째로, 여러분 마귀가 가져다 주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오는 두려움은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해서 죄의 용서를 받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랑의 교통이 이루어지면 죄가 사라지고 두려움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을 때 두려움이 오는 것인데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오면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가 가져다 주는 두려움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이유 없는 두려움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나는 내게 오는 인터넷 편지 중에서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의 하소연을 종종 봅니다. 그들은 앉아도 두렵고 서서도 두렵습니다. 일이 안 될때도 두렵고 일이 잘되어도 반드시 불행이 다가올 것이라는 마음의 두려움이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유 없는 두려움인데 이것은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니라 마귀가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딤후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하나님은 이유 없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지 않습니다. 사랑과 능력과 건실한 마음을 주시죠. 우리의 마음속에 불안과 공포심을 가져다 주는 것은 원수 마귀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먼저 두려움을 가지고 우리를 공격해서 무력화시키고 난 다음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욥3:24-26) "나는 먹기 전에 탄식이 나며 나의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것 같구나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임하였구나"
욥은 자기가 시험과 환란을 당하기 전에 이미 그 마음속에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이 있었고 무서움이 있었습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가슴을 쓸어 내리면서 그는 진땀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왜 이렇게 마음이 두려운고." 그는 그 마음속에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자녀들이 다 비명행사 하지 아니할까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패가망신할까 두려움이 있었고, 혹은 불치의 병이 들지 않나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마귀는 먼저 욥에게 두려움을 갖다 주고 놀라움을 갖다 주고 그를 무력하게 만들고 저항력을 없애 버리고 난 다음에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벧전5:8-9)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왜 사자가 소리를 부르짖으며 다닙니까? 그 소리를 듣고 다른 짐승들이 두려워서 저항력을 잃어버리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마귀는 먼저 우리에게 불안과 공포심을 갖다 주고 불안과 공포심에 얼어붙은 우리 마음에 재난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부정적이고 불길한 생각을 차단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대속을 통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기 신분을 깊이 인식하고 거기에 서서 부정적이고 불길한 생각을 단호하게 물리쳐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누군지 확실히 알면 굳세어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용서와 의와 영광을 얻은 자기 신분을 알아야 됩니다.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마귀와 세속이 쫓겨 나가고 성령충만과 거룩함을 얻은 자기 신분을 확인해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마음에 병과 육체의 질병에서 해방되고 놓여남을 받은 당당한 주권을 가진 자라는 자기 신분을 인식해야 됩니다. 또한 저주와 가난이 다 청산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을 받고 사는 자기 자신이 되었다는 것을 인식해야 됩니다.
사망과 음부가 철폐되고 우리에게는 부활과 영생과 천국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신분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 어떠한 마귀의 두려움과 공포의 공격이 와도 거기에 단호하게 대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지 모르면 마귀가 와서 마음대로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킬 수 있죠. 내가 누군지 알면 우리는 거기에 서서 단호하게 마귀를 대적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기도하며 마귀의 생각이 다가오면 대적해야 됩니다. 불길한 생각이나 부정적인 생각이 오는 것을 마음속에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우리가 말씀에 서서 부정적인 생각이나 불길한 생각은 예수의 이름으로 단호하게 대적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에 서서 하나님의 은혜를 굳세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롬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 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우리는 종이 아닙니다. 종의 영을 받은 사람은 무서워 떠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양자의 영을 받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어 기도하는 우리들이 되었으므로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하고 성령과 함께 살므로 두려움을 이길수가 있는 것입니다.
(약4:7)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대적하지 않으니까 자꾸 달려들지요. 대적하면 피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계속해서 우리는 어떠한 환경에도 찬양을 그치지 말아야 됩니다. 찬양 중에 거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감사와 찬양을 드릴 때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임재하여 계시고 하나님의 빛이 있는 곳에 어두움이 찾아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빌4:6-7)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의 평안이 우리의 마음을 점령하여 군대가 지키듯이 지켜 주시기 때문에 두려움이 쳐들어 올수가 없는 것입니다.
미국에 유명한 목사님이었던 로만 빈센필 박사는 두려움에 관해서 이런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조사해보니 40%는 지나간 과거에 대한 두려움이고, 50%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것이고, 10%만이 현재적이라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상 90%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으로 죽은 미국 청년수가 30만 명이었는데 아들과 남편을 일선에 보내고 두려움 때문에 심장병으로 죽은 시민수가 100만 명이 넘었습니다. 그것 보십시오. 적군의 총칼에 맞아 죽는 것보다 더 마귀가 가져다 주는 두려움과 공포에 심장병으로 죽는 수가 더 많았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트럭 운전사가 초상집에 관을 가져다 달라는 부탁을 받고 트럭에 관을 싣고 운전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한 사람이 손을 번쩍 들면서 태워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태워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태우고 트럭 운전사가 운전을 하고 가는데 갑자기 소낙비가 와서 소낙비가 쏟아지니까 트럭 위에 타고 있던 사람이 피할 수가 없어 관뚜껑을 열고 관속에 들어가 뚜껑을 덮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비도 안 맞고 좋으니까 잠이 들어 버렸어요. 그런데 또 가다가 두 사람이 태워 달라고 손을 들어서 또 운전사가 트럭을 세우고 두 사람을 태워 주었습니다. 그 두 사람이 좋다고 관 옆에 타고 있는데 한참 있다가 관속에 있는 사람이 잠이 깨어 가지고서 관 뚜껑을 열고 쓱 일어나니까
이 두 사람이 기절초풍을 하고 트럭에서 뛰어 내려서 한 사람은 바퀴에 치어 죽고 한 사람은 굉장한 큰 부상을 입게 된 것입니다.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데 사실은... 관속에서 사람이 나오니까 혼비백산해 가지고서 뛰어 내려서 죽기도 하고 부상도 입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알고 보면 두려움은 그와 같은 것입니다. 큰 것이 아닌데 지레 겁을 집어먹어서 도망을 치다가 상처를 입고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환경이 가져다 주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광야를 천신만고로 지나온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이유는 열 정탐꾼이 정탐한 땅에 대한 절망과 두려움 때문인 것입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정탐할 때 광야를 바라보고 높은 성벽을 바라보고 그 성에 사는 네피림의 후손 아낙자손 대장부를 보고 그만 두려움에 잡혀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돌아와서 절망과 두려움에 대한 보고를 하니까 이것이 강한 전염성이 있어서 이 보고를 들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안과 공포에 떨고 그들은 땅을 치고 울며 통곡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장관을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말한 것입니다.
광야를 지나오며 체험한 하나님, 그들에게 언약을 주신 하나님을 깡그리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두려움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빼앗아가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 결과로 열 사람도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고 함께 점령당한 두려움을 가지고 부정적인 생각을 품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로 쫓겨나서 40년 만에 모두 다 죽게 된 것입니다.
(민14:9)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라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말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과 함께 그 땅을 보고 그 백성을 보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제켜놓고 그 땅과 그 백성을 본 열 정탐꾼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워했습니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따라옵니다. 그들은 형벌을 받아서 죽고 쫓겨나고 말은 것입니다.
(민14: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두려움은 신앙의 반대인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포기하면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증거요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성경에 신약을 보면 두려움으로 물에 빠진 베드로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그 제자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배를 타고 먼저 가도록 독려했기 때문에 그들은 배를 타고 먼저 건너가는데 밤에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바람에 시달리고 있는데 예수님이 물위로 걸어오게 된 것입니다. 한밤중에 제자들이 유령인줄 알고 다 무서워했는데 예수께서는 말씀하기를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주님이시어든 나로 물위로 걸어오게 하소서" 예수님께서 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말씀을 믿었을 때 그는 물위로 걸어갔습니다. 마음속에 믿음이 있을 때는 그리스도와 능력으로 연결되어서 물위로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바람과 파도를 바라보고 말씀을 잊어버리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았을 때 그 마음에는 믿음을 잃고 두려움이 꽉 들어차자 물에 빠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4장 30-31절에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실상은 바람을 보고 파도 때문에 빠진 게 아니라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보십시오. 믿음이 들어오면 두려움은 쫓겨나가고 두려움이 들어오면 믿음이 쫓겨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시46:1-3)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고 의지하는 사람은 마음속에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두려움을 내어 쫓아 버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2002년 1월 27일 자 순복음가족신문에 난 간증을 보니까 금천대교구 문향수 권사님의 간증이 기록되어 있어요. 악성빈혈합병증으로 그는 죽어가다가 그 마음속에 두려움을 내어 쫓고 기도한 결과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어느날부터 음식냄새가 역겹고 입맛을 잃어 밥을 못먹게 되자 살이 점점 빠졌고 기운이 없어 움직이지도 못하고 약만 의지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본즉 악성빈혈에 합병증으로 체내에 호르몬 생산이 잘 안되며 폐까지 손상되었는데 원인을 알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병이 낫는다는 기약도 없고 평생 약만 먹다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에 두려움이 와서 낙심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죽은 나사로에게 걸어 나오라고 하신 예수님, 죽은 사람도 다시 살려주신 예수님이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이것이 말씀을 늘 공부하고 있으면 하나님의 성령이 필요할 때 말씀을 기억나게 해 주신다는 하나의 증거인 것입니다. 순간 권사님은 "나는 아직 죽은 것이 아닌데 죽은 나사로도 살리는대 살아있는 나는 기도하면 병이 낳을 수 있다"는 소망이 마음에 솟구쳐 오르면서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그래 내 병을 고쳐주실 분은 예수님뿐이다.
사람은 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능치 못함이 없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분이 지금 내 병을 고쳐주실 것이다. 두려움을 내어쫓고 마음에 생각을 바꾸어 먹었습니다. 배에 살이 없어 앉아 있을 수도 없었는데 어느새 기운이 솟아나서 병원에서 받아온 약을 다 던져 버리고 아들이 부축을 받아 기도원으로 향했습니다.
한걸음 한걸음 걸을 때마다 예수님 하면서 겨우겨우 걸어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마음이 기쁘고 편했으며 곧 힘차게 걸어 다닐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기도원에 가서 겨우 성도들과 함께 합심기도를 시작했는데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셔서 나태한 신앙생활 회개하고 하나님에 대한 전폭적인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이미 나의 질병을 고쳐 주셨다. 고쳐 주셨다고 그는 선언했습니다.
기도원에서 하산하는데 부축 없이 혼자 걸어서 집으로 왔는데 밥 짓는 냄새가 구수해서 밥을 잘 먹으니 몸이 회복되기 시작하고 자고 일어나면 살이 찌고 기운이 돌아왔습니다. 보는 사람마다 무슨 약 먹고 그렇게 살아났냐고 놀라워했습니다. 죽을 목숨을 구해주신 분은 예수님이라고 그는 전도했습니다. 병원에 가서 다시 조사해보니 폐도 깨끗이 나았고 빈혈도 없어졌고 온몸이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환경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는 두려움을 내어 쫓고 살수있다는 예수님의 생각으로 바꾼 결과 병 고침을 받고 삶은 180도로 좋게 변하게 되고 질병에서 건강으로 절망에서 삶으로 좌절에서 기쁨으로 죽음에서 영생으로 변화되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야웨를 기뻐하라 이것이 너희 힘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마음에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마음에 근심은 뼈로 썩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누가 저를 일으키겠냐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두려움이 있을 때에 우리는 파괴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유 없는 두려움은 마귀가 가져오는 것이므로 단호하게 마귀를 대적해서 내어쫓아야 되는 것입니다.
넷째, 인간을 의지할 때 두려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 만난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배를 타고 가는데 대화의 꽃을 피우다가 예수님을 잠재워 버리고 말았습니다. 큰 풍랑을 만났으나 그들이 그 풍랑 속에서 배를 안전하게 저어갈 수 있는 힘이 부족했습니다. 그들은 역부족을 통감하고 죽음의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그래서 주무시는 예수님께 찾아가서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우리를 돌보아 주시지 아니하시나이까" 예수님을 깨웠을 때 그들은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막4:37-38)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마8: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인간이 자기 힘을 의지할 때는 두려워 했으나 예수님을 의지할 때는 믿음을 가질 수 있고 주님이 물결을 잠잠하게 만들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인간을 의지할 때는 인간의 힘은 한계에 부딪히기 때문에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항상 성령과 말씀으로 충만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면 우리 마음속에 두려움이 사라지고 믿음이 들어오고,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내 믿음대로 될찌어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인간을 의지한 사울과 그 군대는 골리앗을 두려워했습니다. 블레셋 군대 중 거장 골리앗이 싸움을 걸며 너희 중에 나를 상대할 이 있으면 나오라고 40일동안 고함을 치는 바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다 불안과 공포에 떨며 무력하게 되고 만 것입니다.
(삼상17:11)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
두려움이 오니까 사울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력화되었습니다.
(삼상17:32)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그를 인하여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다윗은 골리앗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믿음이 두려움을 내어쫓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들어오면 믿음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사울과 그 군대는 전혀 믿음이 없었으나 다윗은 비록 17살 먹은 초립동이었으나 그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골리앗을 보고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삼상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가 골리앗을 대항하여 싸워서 그를 쳐 물리친 것입니다. 다윗의 신앙 고백을 보십시오.
(시27: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그는 두려워하지도 않고 무서워하지 않은 것은 야웨를 그의 빛으로 삼고 구원으로 삼은 것입니다. 야웨를 자기 생명의 능력으로 삼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말씀을 읽고 기도하여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고 나의 피난처요,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 되면 저가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연병에서 건지실 것을 알기 때문에 두려움과 공포에서 해방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심리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개들이 왜 어떤 사람들이 지나가면 유난히 짖고 어떤 사람에게는 짖지 않는가? 개들은 무엇인가 안정되지 못한 사람이 두려운 마음을 품고 개 앞을 지나가면 두려움 때문에 떠는 진동이 개의 촉감에 전달되므로 개가 짖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두려움을 가지고서 지나가는 사람에게는 개가 그 사람의 두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옛날에 아버님이 과수원을 했는데 우리가 개를 십 수 마리 키웠습니다. 개가 사람이 오면 뛰어나가서 짖는데 달아나는 사람은 영락없이 물립니다. 달아나는 사람은 개가 반드시 가서 물어요. 그러나 달아나지 않고 당당하게 걸어오는 사람은 주위에 빙글빙글 돌지만 결코 달려들어서 물지를 못합니다. 두려워하면 두려움의 파장이 나가서 개가 그 파장을 느끼고 두려워하는 사람을 물고 찢습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두려움을 가지면 마귀는 그 두려움을 냄새 맡고 그 파장을 알고 와서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만 마음에 믿음이 있으면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론조사 결과 통계를 보면 한국인 절반 이상이 점술을 믿고 있으며 궁합이 나쁘면 결혼하지 않는다는 것이 3분의 1이나 됩니다. 왜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를 믿지 못하므로 그들 마음속에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 두려움을 장사에 밑천으로 삼는 것이 사주, 팔자, 궁합인 것입니다. 사주, 팔자, 궁합이란 사람이 두려워하여 떠니까 미래에 대한 예측을 해주므로 돈벌이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게 오는 수많은 인터넷 편지를 보면 사주팔자를 보고 난 다음 얼마나 두려워서 정신적인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다가 제게 구원해 달라고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차라리 안 봤으면 좋겠는데...
한 젊은이가 사주팔자를 보았는데 올해는 물을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일류회사의 사원이었는데 해외 출장 나가게 되었는데 바다를 건너가기 때문에 그는 물을 조심하라고 해서 안 건너갔습니다. 그래서 잘못 보여서 승진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애인이 여름 휴가 때 수영을 가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물을 조심하라고 했다고 해서 수영 안가고 거부했다가 애인에게 버림을 당하고 장가도 못 들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너무 마음이 답답하고 우울하고 공포증이 생겨서 애가 죽어 버리겠다고 물 속에 뛰어 들어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그 어머니가 와서 하는 말이 "야 이놈아! 올해는 물을 조심하라고 했는데 왜 물에 뛰어 들어갔느냐?"라고 했습니다. 아이 사주 팔자만 안 봤으면 잘 지냈을 텐데 그놈의 물을 조심하라고 하는 바람에 신세를 망쳤습니다.
여러분 그런 것은 결코 믿을 것이 못됩니다. 인간의 약한 점을 이용해서 돈을 버는 사업인 것입니다. 야웨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신분이 확실한데 왜 두려워하는 것입니까?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그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에게 주신 이가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을 선물로 주지 아니 하시겠느뇨? 하나님을 사랑하는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일이 합동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계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라고 했습니다.
두려워 하지 말아야 되요.
(요일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 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두려워하면 그에 해당하는 형벌이 따라와요. 두려워하는 그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요. 우리가 그리스도를 모시고 죄를 회개하고 보혈로 씻음 받고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하게 설 수 있는 것은 사랑이 오면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말미암는 믿음인 것입니다. 사랑과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인생을 살면 강하고 담대하게 두려움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보혈을 통하여 하나님 안에서 생활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즐기고 확신한 데 거하며, 주님 안에서 받은 새로운 신분을 확실히 갖고 그 안에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모든 사물을 바라보며 항상 말씀과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을 자랑하고 인간을 자랑치 않고 의지하지 않고 살게 될 때, 우리는 두려움에서 해방을 얻고,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을 갖고 확신으로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고 말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우리는 말씀을 읽고 성령 충만하여 당당하게 살아나갈 때 영광에서 영광으로 승리로운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우리의 인생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나 마음속에 가지는 믿음은 주님께서 함께 하셔서 내 믿음데로 될찌어다 할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는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에게 갖다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우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마음속에 두려움에 떨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랑이 깨어졌을 때 두려움이 다가오고 마귀가 이유 없이 우리에게 압력을 가하여 불안과 공포를 가져오고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환경을 바라보면 두려워하게 됩니다. 인간 자신을 의지하게 되면 능력의 한계점을 느끼고 두려워하게 되옵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랑하고 사랑을 받고 마귀를 쳐서 물리치게 도와주옵시고 두려움에서 해방되게 도와주시고 운명과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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