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19대 내물왕때 납량주의 태수였던 박제상이 눌지왕시절에,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졌던 내물왕의 둘째아들 복호(卜好)를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여
데려오고 다시 왜(倭)에 인질로 보내진 셋째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구하고자
7월에 박제상을 주축으로 신자천(申自天), 배중량(裵仲良)이 모의한후, 왜에
망명한것으로 가장하여 도착 하였다.
"신라왕이 나의 부모를 죽이고 나를 해치려 하므로 도망쳐 왔소"
왜왕은 그말을 곧이듣고 장차 신라를 칠때 미사흔과 박제상을 앞잡이로 삼고자
그들을 끌어 들였다.
어느정도 신임을 받게된 박제상은 미사흔을 데리고 바다에 나가 뱃놀이를
하면서 탈출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던중,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해무가 끼자
제빨리 미사흔을 몰래 신라로 떠나 보냈다.
미사흔을 떠나 보낸후 숙소로 돌아온 박제상은, 왕자를 구하기 위한 계책이었음을
밝혔다.
"나는 계림(鷄林)의 신하이다. 나는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망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을것이며 계림의 모진 종아리는 맞을 지언정 왜국의 작록은 받지 않을
것이다" 하며 발바닥을 멋겨 갈대밭을 끌고 다녀도 굴하지 않고 불에 달군 철판
위로 끌고 다녀도 끝내 굴복하지 아니 하자, 왜왕은 그를 목도(木島)로 유배
시켰다가 마침내 불에 태워 죽이고 말았다.
부사로 갔던 김철복(金轍復)이 말을 끌고 가서 박제상의 의복을 수습하고
매장하여 이 사실을 혈서로 써 말의 입에 물리고 채찍을 쳐 바다로 쫓고 자결
하였다.
말이 신라로 돌아와 궁궐 앞에 이르러 혈서를 토하고 죽으니 왕이 그 혈서를
읽고 크게 슬퍼 하며 대아찬에 추증하고 양산에 비를 세워 충절을 기리토록
했다.
눌지왕은 두아우를 찾아 크게 기쁘하며 잔치를 베풀고 우식곡(憂息曲)이란
노래를 지어 불렀는데, 이도 잠시 박제상의 죽음을 접하고 매우 슬퍼 하였다.
눌지왕[訥祗王]이 두 동생과 같이 우식곡[憂息曲:근심을 다 푸는 곡조]를 지음
이니 동사[東史]에 다음과 같이 실려있다.
▣ 삼귀시곡[三句詩曲]
常대華隨風落扶桑 = 동생이
바람따라 부상으로 떠나갔으니
扶常萬里鯨예浪 = 부상 일만리에 큰 고래 따위 물결일세
縱有音書誰得將 = 비록 음서가 있음을
누가 능히 전할 것인고
常대華隨風返鷄林 = 동생이 바람따라 계림으로 돌아왔으니
鷄林春色擁雙闕 = 계림의 봄빛이 쌍궐을
옹위 하였네.
『삼국유사』에는 박제상을 기다리는 부인의 유적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신라충신 박제상공 부인 유적(新羅忠臣朴堤上公夫人遺蹟)
처음 제상이 떠날 때 그 부인(夫人)이 듣고 쫓아 가다가 미치지 못하고
망덕사문(望德寺門) 남쪽 모래 위에 이르러 드러누워 길이 부르짖었으므로
그 모래를 장사라 하였다. 그 친척 두사람이 그를 부액하여 집으로 돌아
오려는데 부인이 다리를 뻗고 앉아 일어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땅을
'벌지지'라 하였다.
한편, 박제상의 부인 김씨는 남편이 고구려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시 왜국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첫째딸 아기(阿奇)와 셋째딸 아경(阿慶)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마침내 미사흔만 돌아오고
남편은 순절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두딸과 함께 단식, 자진하니 몸은 부서지고
화해서 끝내 망부석이 되고, 넋은 치술조(鳥)가 되어 왜국의 목도(木島)까지
날아가 남편의 넋을 맞아 신라로 돌아왔다고 한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잃은 차녀 아영(阿榮)은 가정을 위하여 굳게 살면서
다섯살된 남동생을 지극정성 기르니 이 남동생이 바로 가야금(琴)의 달인
백결 박문량(朴文良) 선생이다.
누나의 손에서 자란 박문량이 어렸을때부터 검소하여 백번을 기워[백결(百結)]
입었을 정도로 누추한 누더기 옷만 걸치고 다녔다.
어느해 세모에 부인이 조를 찧어 별식을 올리지 못함을 한탄하자, 그는 가야금
으로 방아찧는 소리를 연주하여 아내를 위로 해주었는데 이 음악이 후세에
대악, 방아악으로 전해졌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

*남천(南川)벌에 세워져 있는 '신라충신박제상공부인유적'

*삼국유사에서 말하는 망덕사의 옛 절터

*보물 제69호인 망덕사지 당간지주

*경주시 배반동 964번지..

*망덕사터 서남쪽에 자리한 당간지주..
65센티 간격으로 서로 마주하고 있으며 구멍을 파서 당간을 고정시키는
일반적인 것과는 달리 상부에 네모난 홈을 파서 당간을 고정시켰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해 추정하면 신문왕 5년에 망덕사가 건립되었고,
당간지주 역시 망덕사와 함께 건립 된 것으로서 통일신라시대의 초기건축
양식과 조각수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옛 망덕사 절터의 기왓조각.

*주변의 논밭에 흩어진 잔재 유적들..



첫댓글 멋지네요 좋은 지식 감솨르~~~~~~~~~~~~~
고맙습니다. 우리 조상이야기를 소상히 적어주셔서.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