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은 밤 여덟 시를 막 넘어가고 있었다. 주위는 가로등 하나 없는 캄캄절벽이다. 다만, 내 뒤를 따르는 승용차가 몇 대 있을 뿐이다.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가뜩이나 좁은 왕복 2차선 도로는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차들의 강한 불빛과 아스팔트에서 반사된 불빛으로 심히 혼란스럽다. 내가 주춤주춤 하니 뒤차들이 왕왕대고 눈을 치뜨며 빨리 가라고 독촉한다. ‘내가 가기 싫어서 안 가나? 도무지 앞을 분간할 수 있어야 빨리 가지…’하며 투덜대다가 차마저 이상하여 길가에 세웠다.
아침 9시에 집을 출발했다.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아이들 다섯 식구다. 한가위를 맞아 온 식구가 한꺼번에 움직이는 것도 처음이다. 종가는 약 180km 떨어진 대전이다. 방송을 들으니 많이 막힌다고 하니, 평소보다 두세 배로 소요시간을 잡으면 오후 두세 시에는 도착하리라 생각했다. 점심은 도로 한가운데서 맞을듯하니 아예 버너 코펠과 라면도 준비했다. 나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휴가 때처럼 떠났다.
호기롭게 고속도로 입구에 이르니 역시 차들이 바글바글하다. ‘음~ 과연 명절이구나.’ 오히려 ‘명절은 이래야 하지’ 하며 제법 호기를 부려 본다. 그러나 좀 많아 보이던 차들이 갈수록 늘어나니 한 시간여를 걸려 톨게이트를 겨우 통과했다. 찔끔 놀랐지만, 걱정은 크게 하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인가. 대한민국 제일의 경부고속도로 아닌가. 잠시 후면 한강물처럼 흐를 것이다.
그러나 길바닥은 서울의 모든 차들이 다 모였는지, 남북회담 북쪽인사의 말처럼 승용차를 모조리 징발하여 고속도로에 보냈는지 끔찍하게도 차가 많다. 일분을 기다려 1미터를 간다. 도무지 고속도로란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반대편 서울로 가는 길은 어쩌다 한 대씩 지나가니 부럽기 짝이 없다. 이런 때는 하행차로를 늘리는 가변차로 정책은 없을까도 생각해보지만, 지금 당장은 그저 기다리는 것이 다다.
아이들은 좁은 차 안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 울상이고, 어머니와 아내 또한 힘들어 안절부절못한다. 여기 평택 인근까지 60여km를 오는데 벌써 여섯 시간이 더 걸렸다. 나는 나대로 찔끔찔끔 가는 자동차의 흐름에 맞추려니 다리가 심히 아프다. 수동이라 더욱 힘이 든다. 다리가 쥐가 나는 것 같다. 어머니가 보다 못해 ‘에미하고 교대하면 좋지 않으냐’고 하시지만, 겨우 장롱면허 수준이라 본인도 고사하지만, 나도 아내에게 차를 맡기기는 어려워 그냥 갔다. 후회막급이다. 수동 자동차를 산 것이…. 돈을 아끼려 그랬지만, 사실 당시는 자동기어방식은 연료소비도 많을 뿐 아니라 차 값도 비싸기 때문에 수동형 차가 더 많았다. 아마 요즘 젊은이들은 수동형 차량이 무엇인지 모를지도 모르겠다.
“엄마, 우리 밥 먹고 가” “배 고파”
그러자. 애비도 힘드니까” “그럴까요. 어머니”
갓길로 빠져 펀펀한 곳에 자리를 잡고 버너에 불을 지펴 물을 끓이기 시작했는데, 가만 보니 우리 같은 사람이 무척 많다. 사람들 생각이 그저 오십보백보다. 아이들은 모처럼 해방감을 만끽하며 좋아한다. 소풍 왔다. 진작 그럴 것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한 삼십 분을 쉬고 허기도 채우니 기분도 상쾌하다. 그러나 한 가지 소풍객이 앉았다 간 자리에는 어김없이 허연 쓰레기가 바람에 날린다. 방송에서도 자주 본다. 아쉬운 일이다.
다시 본선으로 진입했지만, 주차장 같은 고속도로 사정은 나아진 게 없다. 도무지 목적지인 대전 종형 댁까지는 몇 시간이 더 걸릴지 짐작도 못하겠다. 오늘 안에 갈 수나 있을지 걱정이다. 결국 평택에서 고속도로를 벗어나 국도로 들어섰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지만, 고속도로보다는 조금 나은 것 같다. 진작 여기로 올걸 그랬다고 박수를 쳤다. 그러나 천안시내를 종단하는데 또 두어 시간이 걸렸다. 아마도 고속도로에서 지친 차들이 나 같이 일반도로로 밀려나온 모양이다. 나의 머리나 그들의 머리나 그게 그거다. 당장 눈앞의 이익에 눈이 먼다.
여하튼 이미 벗어났으니 대책은 없다. 이 길로 그냥 가는 수밖엔 없다. 한데, 어둑어둑해지는 날씨에 비가 뿌리기 시작한다. 밤길운전에 비는 전혀 반갑지 않은 존재다. 그래도 서둘러 계룡산 입구에 도착하니 이미 저녁 여덟 시를 넘어선다. 이 고개를 넘으면 대전이다. 집을 떠난 지 11시간째다. 왕복 2차로의 좁은 도로에 접어드는데, 자동차가 이상하다.
핸들이 왼쪽으로 꺾이며 차가 중앙선을 넘는다. 깜짝 놀라 바로 잡았지만, 반대편에서 오는 차량이 없었기 다행이다. 정신이 번쩍 들며 등줄기에 땀이 흐른다. 핸들을 좀 더 힘주어 잡아 보지만, 일이 분에 한 번씩 그런다. 마치 틱 장애가 있는 사람모양으로 운전대가 왼쪽으로 툭툭 꺾인다. 그 때마다 옆자리의 아내는 자지러진다. 가로등 하나 없는 좁은 길에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내리니 불안하기 짝이 없다. 맞은편에서 오는 차들은 많지는 않지만, 자꾸만 나에게 달려드는 듯하다. 달려드는 것은 나이면서. 와중에도 혹여 자동차 정비소가 있을까 두리번거리지만, 이 산길에 있을 리가 만무하다. 설령 있어도 시간상으로 영업을 할 시간도 아니다. 거기에 내일은 한가위다. 기대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이렇게 정비소가 절실히 필요한 때도 없었나 보다.
그저 이곳을 빨리 벗어나는 게 최선이지만, 일단 차를 갓길에 대고 좀 쉬면서 차를 살펴본다. 원인은 짐작도 못하겠다. 타이어와 관련한 몇 가지 상식이 있을 뿐 자동차에 대하여 아는 게 없지만, 보닛을 열고 뭘 아는 것처럼 여기저기를 만져보고 흔들어 본다. 그래도 잠시 쉰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그 후론 별일 없었다.
그렇게 형님 댁에 도착하니 9시. 집에서부터 꼬박 12시간이 걸렸다. 나는 운전에 힘들었지만, 식구들은 좁은 공간에서 버티느라 몸살이 났었다. 주차하고 나니 온갖 피로가 몰려온다. 마중 나온 형님이 마치 큰 사고에서 살아나온 사람처럼 반가이 맞으며 수고했다고 격려한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고생했다. 나중에 회사 동료들과 그 얘기를 하니, 어떤 이는 전남 순천까지 18시간이나 걸려서 갔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다.
평소 내 고향이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천안인 것을 참 다행으로 여기며 선친들께 감사드린다. 오랫동안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고향을 수없이 찾지만, 크게 어렵지 않았다. 열차표 버스표를 예매한 적도 없지만, 다녀오는데 크게 어렵지 않았다. 어떤 때는 시내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 가기도 하지만, 요즘엔 수도권전철이 있어 평소와 다르지 않게 넉넉하게 다녀올 수 있다. 고향이 지독히도 먼 남도 사람들에게 미안하기도 하다.
아침이 되어 한가위 차례를 지내고 아버지 산소를 거쳐 귀갓길에 오르며 자동차 정비소를 찾아보지만, 영업 중인 곳은 찾기가 쉽지 않다. 한데, 신기한 것은 어제 같은 이상 현상이 없는 것이다. 귀신에 홀렸나 보다. 집에까지 별 어려움 없이 돌아왔지만, 결국 어느 날엔 선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니 견인차를 불러 정비공장으로 실려 가고 말았다. 그 밤에 그만 했기를 감사할 따름이다. 조상의 보살핌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내년부턴 차례를 다시 내 집으로 모시기로 어머니와 아내와 합의했다.
(1993년 9월 한가위 날의 일기를 보며)
첫댓글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그래도 고향을 갈 수 있었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이제는 편안한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한가위 잘 지내셨습니까.선생님.
건강하세요.
그 때 그런 시절이 있었지요
저도 경북 김천 고향에 다녀오다 바로 부산까지 오면 연료가 충분한데 차가 밀려 지체하면 혹시나 연료가 부족 할까 봐
구미지나 칠곡 주유소에 보충하러 들어갔다가 비는 장대 같이 쏟아지는데 다른 사람들도 같은 마음인지 모두 주유소에 들어와
주유하고 나오는데 5분 안 걸리는 곳에서 도로까지 빠져 나오는 것도 3시간 소요. 부산 까지는 1시간30분~2시간 거리가 9시간 소요된 적이
있답니다
비 오는 날이고 추석 명절이었으니 똑 같은 날 같은 경험을 했네요. 온 가족이 함께~
많은 사람들이 경험했을 것이고 그날의 고통스러운 교통 상황의 경험은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김천에서 부산까지 9시간이 걸렸으면, 제 고생과 아주 비슷한 고생이셨군요.
요즘도 명절 때는 막히지만, 예전보다는 훨씬 좋아진 것 같습니다. 다행한 일입니다.
저는 비오는 날 좁은 산길을 가다 자동차마져 고장이 나 크게 당황했더랍니다.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인데...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아찔합니다.
부산에서 청도까지 3시간 넘게 걸린 적도 있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아마도 그런 추억이 없는 사람이 없겠죠. 고맙습니다.선생님
한때 저도 귀성객이 부러운 적이 있었죠. 명절 손님을 맞는 것이 아닌 나도 명절 쇠러 가고 싶다는 간절하던 생각.
그런데 이천에 살면서 공주시댁으로 귀성객이 되었을때 비로소 그때 집에서 손님 맞는 것이 편하고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귀성길에 라면도 끓여 드시고 약간 낭만적이라 하면 돌이 날아올려나요.
돌은 무슨 돌..^^
떠날 땐 저도 그런 맘으로 호기롭게 출발했다니까요 ^^
가며 가며 하나둘 기대와 다른 현실에 죽을 맛이었죠.
그래도 그만하길 천만다행이라고 생각날 때마다 자위하고 있어요. 허 허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건필하시와요^0^*
고맙습니다. 난정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