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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처분(殺處分)
이갑로
심 기자(記者)는 이런 것을 믿는다. 언젠가는 사람의 혼이, 관절이 사람보다 정교하게 움직이는 로버트 안으로 들어가리라는 것을 믿는다.
긴 연휴중이다. 5월 1일은 근로자의 날 다음날은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월요일인 5월 5일은 어린이날이다. 오늘은 일요일 아침, 17층 아파트 창문을 열자 멀리 식장산(食藏山)이 희미하게 보인다. 비를 잔뜩 머금은 세찬 바람이 불어온다. 이 비바람의 진원지는 어디일까? 그리고 지난밤에는 왜 유난히 세찬 바람이 불어온 것일까? 저 산 너머에는 골령골이 있고 그 골령재를 넘어가면 옥천군 군서면 사양리가 있다.
거실에 켜놓은 티브이에서는 오늘도 AI(조류 인플루엔자)바이러스로 죽어가는 닭들이 매몰현장으로 차량에 실려 가고 있다. 우리 집 티브이는 알아서 대신 눈을 감아주듯 저절로 화면이 꺼졌다가 켜졌다가 한다. 지금은 화면이 까맣게 변해 있을 것이다. 모처럼 긴 연휴로 딸이 내려와 거실에 놓인 제 침대에 잠들어 있다. 아내가 낡은 가죽소파를 내다 버리고 딸아이의 침대를 가져다 놓은 것이다. 퇴근하면 아내는 티브이로 연달아 연속극을 보다가 잠들곤 한다. 서울 경찰청에 다니는 딸은 벽을 향해 모로 누워있다. 어제는 휴일 첫째 날이었는데 출근 하라는 문자가 왔었다. 광우병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볼에 젖살이 남아있는 중학생들과 허우대만 어른보다 웃자란 고등학생들이 주축이 된 새로운 시위가 청계천에서 이루어지더니 점점 전국으로 확산이 되는 기미를 보이고 있다. 물론 그 빌미가 된 것은 이 대통령 미국 방문 시 졸속처리 된 쇠고기 협상의 문제점도 있다. 딸은 사이버 수사대 요원이다. 문자의 진원지를 찾아내어 처벌하는 것이 사이버 수사대가 할 일이다. 한참 짐을 꾸리던 딸은 또다시 문자를 받고 집안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 친구를 만나고 늦게 들어와서 잠들어 있다.
실직 후 담배를 다시 이은 심 기자는 창문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본다. 그러고 나서 담배에 불을 붙인다. 자신도 몰래 눈치를 보는 습관이 생겼다. 오늘은 왠지 저곳을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 기자는 그런 육감이 몸에 배어있었다. 물론 자주 가던 곳이었으나 그곳으로 터널이 뚫리고 계곡이 매몰되고 그 위에 2 차선 아스팔트가 깔린 이후로는 휑하니 지나치는 길일뿐이었다. 비록 산 아래 길은 메워졌으나 터널 위로는 아직 훼손되지 않은 길이 보전되어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늘 궁금했고 자신의 과거를 확인해보고 싶은 곳이었다. 등산로라기보다는 묻힌 추억을 되살리는 길이다. 아내와 딸을 데리고 가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한 장소이기도 했다.
그것보다도 지금 견디기 힘든 것은 얼마 전에 공모한 모신문사에 보낸 장편소설 때문이다. 그 심사가 지금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당선이 된다면 일억 원의 상금과 명예가 생기는 것이다. 평생 글만 써온 자신으로서는 그 길밖에 없다고 매달려온 길이다. 운명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 운명의 시간은 촛불처럼 타들어가는 것이다. 이미 지나갔을 지도 모른다. 오직 당선자의 전화만 울리기 때문이다. 더 이상 초조하게 기다릴 수만 없었다. 물론 편집부로 전화를 해볼 수는 있다. 그러나 전직 신문기자인 자신이 전화를 한다는 것에는 동의 할 수가 없다.
심 기자 자신이 신문사 기자로 있을 때 신춘문예를 담당한 적이 있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원고들 한두 명의 예심의원들은 짧은 시간동안에 그 많은 소설을 읽을 수가 없었다. 영혼들이 버려지고 있었다. 글자는 뼈였다. 그 글자들이 조립되고 만들어지는 허상에 영혼들은 달라붙어있었다. 책상위에서 원고지는 밀려났지만 영혼은 쓰레기통 속에서 통곡을 했다. 심 기자는 그것은 실력보다는 운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우리가 배우자를 선택할 때 실력보다는 첫인상을 중요시 하는 것처럼 스치는 수많은 후보들이 길거리에서 그냥 스치고 지나가는 것처럼 임시로 마련된 편집실 회의실은 하나의 집단 맛선 장소였다. 심 기자는 후회했다. 어찌 한 페이지에 글자를 조립해서 허상을 세우고 살을 덧대서 영혼을 불어넣고 자신이 하는 말을 교육시켜 심사 위원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튼튼하게 자랐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분신이 모래알처럼 부서지는 아니 덜 익은 깍두기처럼 입속에서 으깨지는 고통이 저려왔다. 그러다가도 실력이라고 생각했다. 운도 실력이라고 생각한다. 심사위원을 현혹시키는 운이야 말로 아우라…… 아우라……분명 그러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자신은 당선자가 내뿜는 그 아우라에 스스로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러나 아직 포기할 시간은 이르다. 자신의 갈비뼈에 자리한 영혼에 끊임없이 텔레파시를 보내야한다. 기죽지 말아야 한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다. 짧은 스침에도 내면까지 환히 드러내보여야 한다고 텔레파시를 보낸다. 당선과 낙선의 차이는 백지장 하나 차이지만 그것은 생과 사의 갈림길이다. 당선작은 살아서 곳곳에 활자를 치고 다니지만 낙선작은 폐기되어 다시 파쇄 된 분말로 재활용되어야한다. 요번에 쓴 작품은 우주선에 관한 줄거리였다. 무인 우주선 이야기다. 심사위원들은 말할지도 모른다. 유인우주선 시대에 무슨 무인우주선에 목숨을 걸 일이 있냐고 지나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심 기자는 생각했다. 유한한 인간의 몸으로는 저 광활한 몇 억 광년이나 떨어진 다른 태양계에 도착할 수 없다고 그래서 인간의 몸속에서 영혼만 분리해내는 작업이 성공한다면 인간은 비로소 저 광활한 우주에 주인이 된다고, 그런 꿈과 희망을 지구인들에게 심어주고 싶다는 스토리였다. 지금까지의 당선작들은 지구에 갇힌 도시의 시시콜콜한 이야기였다. 심사위원들이 주로 하는 이야기는 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불만 섞인 편견이었다. 심 기자는 그것을 일찍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작품도 그런 컨셉으로 구상을 했고 또 절묘하게 얼개를 만들었었다. 자신의 생각으로는 완벽한 소설이었다. 그러나 아우라……아우라……기계가 갖는 그 차가움에 피부 같은 따스함은 없을 터 그게 문제였다. 그것은 분명 운이었다. 간단하게 짐을 챙기고 나온다.
늘 준비된 배낭에 떡과 김밥 물병과 귤 몇 개 비스켓 사탕들이다. 오늘 하루 먹을 것과 약간의 돈과 조난 시 어둠을 밝힐 플래시 등이다.
“갑시다.”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던 동행의 손목을 쥐어 잡 듯하며 끌고 나온다.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었으나 일부러 우산은 챙기지 않았다. 어차피 땀에 흠뻑 젖을 것이므로 우산은 필요가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함께 타고 내려와 살갑게 출발을 한다. 반석동을 출발해서 갑천변을 미끄러져 내려가 다시 대전천을 거슬러 올라갈 예정이다. 갑천이야 매주 토요일 데이트하는 길이지만 대전천을 거슬러 올라 산내로 낭월동에서 골령골로 접어들어야 한다. 비에 젖을 것도 없이 엉덩이와 발을 제외하고는 전혀 살이 붙지 않은 체형이다. 한번 젖은 옷은 다시 젖지 않는 법이다. 그래도 보온을 위해서 방수 옷 한 벌을 배낭에 챙겨 넣었다. 만약 조난 시에는 생명과도 바꿀 수 있는 물건들이다.
“장거리 여행이니 천천히 출발하자!”
월드컵 경기장에서 조치원으로 뻗은 대로변에 나오니 답답한 가슴이 조금 열렸다. 갑충 같은 차량들이 죽 밀려있다. 나중 행복도시와 연결하기 위해 넓게 만들어 놓은 8차 선 도로다. 갑자기 가던 길을 멈추고 심 기자는 중학교 동창인 김운식에게 전화를 한다. 등산을 좋아하는 친구 이므로 집에만 있다면 같이 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친구는 직접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흔쾌히 동행하기로 했다. 지나치는 길 이므로 20에서 30분 후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둔산동 수정아파트에 사는 친구다. 그는 대전교도소에 교도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중학교 때 심기자와 짝꿍이었다. 충남대 앞을 지나 까르프 유성점 옆 대교를 지나자마자 다리에서 고수부지로 내려왔다. 넓은 잔디밭이 연초록으로 변해있고 마치 양탄자 위를 걸어가듯 푹신 거린다. 물이 빠진 갑천 바닥에는 잿빛 왜가리들이 죽은 듯이 앉아있다. 대여섯 마리는 되는 듯하다. 매일 먹이 사냥에 여념이 없던 왜가리들이 미동도 하지 않고 무춤 서있다. 지난밤 거센 바람에 지친 탓이지도 모른다고 짐작해 본다. 왜가리는 2 마리부터 대여섯 마리가 짝을 지어 날아다닌다. 쉴 때도 같이 쉬는 모습이 이채롭다. 잔뜩 흐린 풍경 속에 쉬는 것인지 아니면 회의를 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다. 그래도 끝없이 이어진 고수부지 잔디밭에는 조깅을 하는 사람들, 축구를 하는 사람들로 이곳저곳에서 와! 하는 함성이 강을 가로질러 건너오기도 한다.
집에만 있을 때는 꽉 막힌 일상이 나와 보면 갈 데도 있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생기게 마련이다. 마라톤 연습을 하는 여자를 뒤따라간다. 긴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달리는 폼이 예사롭지 않은 실력이다. 멀리 삼천동 둔산대교 밑에서 운식 친구가 기다리고 있다. 삼천동은 대전천과 유등천이 합쳐지고 다시 그 물이 엑스포 앞에서 갑천과 합수되어 신탄진을 거쳐 금강으로 흘러간다. 강이 세 개가 흐른다고 해서 삼천동이 되었단다. 친구는 기골이 장대하다. 멀리서 봐도 금방 눈에 띈다. 중학교 동창모임인 청심회 회원이기도 하다. 이마가 넓고 시원하다. 가끔 말썽을 부리는 수감자들이 친구 앞에서는 꼬리를 내린단다. 졸업 후 잠시 우체국에 근무하다. 줄곧 교도관으로 있었다니 체질이 아닌가 생각도 해보았다. 심기자는 손을 들어 흔든다.
“혹시나 해서 전화 했는데 억지로 나온 건 아니지?”
“뭘 내가 고맙지, 전화 해줘서.”
“이분을 소개할게 제주도 분인데 지금 둔산여고에서 국어 선생님으로 계셔….”
쭉 뻗은 키에 제법 단단해 보였다. MTB에 헬맷 까지 갖춘 모습이 꽤 열심히 운동을 하는 분 같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장금선이라고 합니다.”
운식은 의아해 하는 심 기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요기 나오는데 이분을 만났어요, 알고 지내는 분인데 같이 가자고 하네. 혼자 가기는 뭐한데 아는 분하고 같이 가면 좋겠다며 따라 가겠다고 친구, 괜찮지?”
“나야 아무렴 괜찮지 말구.”
심 기다는 다시 한 번 일행이 된 사람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일행은 잠수교를 건너 서쪽 편으로 갔다. 그 곳에는 유채꽃 밭이 있다. 봄에 그 많던 노란유채꽃은 사라지고 작은 꼬투리가 잔뜩 매달려 있다. 하상도로를 지나치는 차량 소음이 심해 대화는 주고받을 수 없고, 주변을 감상해가며 가는 수밖에 없다. 유채씨앗 하나가 뿌리를 내려 유채꽃을 피우고 엄청나게 많은 씨앗을 맺었다. 참으로 놀라운 번식력이다. 유채 밭에는 다른 잡초를 볼 수가 없다. 오직 한 종류 유채 밭이다. 그토록 강하다는 잡초도 유채 밭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어느 곳에서는 유채꽃 대신 배추꽃을 피운다고 했다. 그 이유는 꽃 모양이 똑같은 데다 꽃 피는 기간이 배추꽃이 훨씬 길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이곳 유채꽃 밭은 대전시가 매년 가꾸는 곳이다. 배추꽃 일리가 없다. 인간사회에도 염치없고 사기꾼에다 살인자가 있는 것처럼 칡 같은 식물은 소나무 같은 것을 타고 올라가 온통 자신의 줄기와 잎을 펼치고 자리를 잡는다. 결국에는 도움을 준 소나무에게 햇빛을 가리고 고사시켜버린다. 사람으로 치면 자신을 밟고 올라온 후배가 선배를 고사시켜 내쫓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심 기자는 조기 퇴직을 당했다. 유채 씨로 기름을 짠다고 한다. 나중에 바이오 연료로 사용할 예정이라고 한다. 사람은 잔인하다. ‘씨를 모아서 기름을 짜서 자동차 연료로 사용하겠다니’ 구경꾼 들이 유채꽃 밭에 들어가 사진을 찍었는지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있고 개울 쪽으로는 유채꽃 관람로 라는 푯말이 서있기도 하다. 언제는 예쁘다고 껴안고 사진은 찍더니 기름을 짤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다. 강바닥에는 갈대가 쑥쑥 올라오고 있다. 아무래도 여름을 나려면 적어도 몇 번은 잠기고 쓰러지는 물난리를 겪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만의 단단한 결속력으로 자신들의 터전을 지켜낼 것이다. 홍명상가 전에서 길은 툭 끊어 졌다. 일행은 하상 자전거 도로를 벗어나 인도로 올라갔다. 심 기자는 준비해온 떡과 김밥을 꺼내 놓았다. 백화점에서 파는 인절미와 김밥이었다. 아침 아내가 전자렌지에 돌려 싸준 것이다. 아직도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네 집사람 잘 있냐? 너무 예쁘더라. 나는 깜짝 놀랐어!”
“그래 고맙다.”
운식은 갑천변에서 조깅을 하다 퇴근길에 산책하던 심기자와 부인을 만난 적이 있었다.
“같이 오지 그랬어? 날씨는 좋지 않지만”
“응, 딸내미가 서울에서 왔어, 하루만이라도 같이 있겠다고 해서”
“……”
“의외로 홀가분하다. 혼자 나와 보니……아무 부담도 없고, 쉴 나이도 됐고”
“장 선생님도 많이 드세요.”
노인 한분이 자전거를 타고 언덕아래 넓은 주차장을 지나간다. 어디로 가는지 지켜보았다. 대전천 위에 댐처럼 지어진 홍명상가 밑으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사라진다. 사라진 곳을 보니 주차장 바닥에 흰색으로 희미하게 화살표가 그려져 있다. 한쪽에는 상하행선 하상도로가 있고 안쪽으로 주차장이 있는데 그리로 자전거가 통과하는 것이었다. 자전거 전용도로가 있지만 도로가 없으면 주차장으로 가면 되는 것이지 막혔다 이어지는 물길처럼 아주 끊어진 길은 아니었다.
후드득……후드득……후드득……
굵은 빗방울이 떨어진다. 하늘을 보니 잔뜩 흐려 있다. 일행들은 홍명상가 밑으로 비를 피했다. 매연냄새와 시궁창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리고 달리는 차량의 바람에 먼지들이 날아올랐다. 홍명상가 밑은 캄캄했다. 멀리 가지런한 기둥사이로 끝이 보였다. 다행히 휴일이라 차량은 많지 않았다. 심 기자는 선두에 서고 운식과 장 선생이 뒤를 따랐다. 누구하나 되돌아가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비가 반가울 리는 없지만 운동 광들은 이런 상황을 즐기며 뚫고 가려는 도전정신이 있다. 말하자면 이런 정도의 어려움은 실전에 있어서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홍명상가 밑을 빠져나오기 전에 젖을 만한 물건들은 꺼내 모두 비닐 봉투에 넣고 배낭에 넣은 다음 지퍼를 올렸다. 길은 계속해서 주차장으로 이어졌다. 인동에 이르러 서는 주차장도 없어지고 잡초가 자란 잔디밭이다. 그곳에도 자전거는 오고 갔는지 물에 잠긴 고래 등 같은 길은 나있었다. 비는 잠시 그쳤다. 대전천도 별 변함은 없었다. 대전천의 발원지는 추부터널 입구에 있는 만인산 아래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 깊은 계곡은 아니지만 폭우가 내린다면 아마 한 시간 이내로 수위가 높아져 하상도로는 폐쇄될 수도 있다. 길은 쭉 뻗어있다. 가오지구가 아파트 단지로 변하면서 그 인근에 있는 대전천변도 갑천 변처럼 산책로와 자전거 도로를 만들어 놓았다. 종달새도 강바닥에 있고 왜가리들도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문득 살 처분 당하는 티브이 화면 속 닭들이 떠올랐다. 노란 쌀 마대에 담긴 닭들이 구덩이에 던져지고 있었다. 바다이야기로 망하고 전라도 해안가에 가서 닭을 키운다는 홍규 친구의 얼굴이 오버랩 되기도 했다. 죽은 닭들도 있겠지만 대부분 살아있는 상태로 마대에 담겨져 실려 왔다. 숨이 막혀온다. 잡혀온 닭들이 무슨 죄가 있으랴 때마다 날아오는 저 왜가리나 흰뺨검둥오리들이 병을 옮겨올지 모른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적확하지는 않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강의 복원을 알리는 저 조류들이 AI 바이러스를 옮기는 주범이란다.
아직은 총을 들고 잡지는 않지만 축산업이나 가금류를 키우는 농가들은 저 것들이 심지 없는 폭탄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사람과의 신뢰도 도타워져 가까이 가도 날아갈 시늉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번 신뢰가 깨지면 모두 살처분 대상이 될 것이다. 한 지역에 AI가 확인되면 그 곳을 중심으로 반경 수 킬로미터에 키우는 닭들은 살처분 하게 되어있다. 단지 그곳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살처분 대상이 된다. 그곳에 공기를 마시고 물을 먹었다는 이유로 죽는 것이다. 저 원앙부부는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른다. 그저 자유롭게 먹이를 찾아 옮겨 다니는 것이다. AI에 걸리면 결국에는 죽지만 잠복기가 있으므로 병에 걸렸는지는 알 수가 없다. 지상에는 길이 있어 차단하면 되지만 허공에는 길이 너무 많아 차단이 불가능하다. 아무리 미물이지만 새들도 알 것이다. 갑자기 집단으로 죽는 것을 보면 무섭고 자신에게 닥칠 공포에 자꾸 멀리 달아나고 싶을 것이다. 축산농가 사장님의 눈에는 보기도 싫을뿐더러 당장 잡아 죽이고 싶을 것이다. 그들을 환영하는 환경론자들도 싸잡아 죽이고 싶을 것이다. 석교동 자락에서 산책로는 끝이 나고 일행은 큰길로 올라왔다. 삼거리 금산방향으로 꺾어 주유소를 지나 자동차운전시험장으로 자전거는 길을 이으며 간다. 끊어진 길도 실처럼 당겨 이으며 간다.
*
대전 마전 간 지방도로에서 산내초등학교를 옆에 끼고 옥천 가는 길로 들어섰다. 여기서 부터는 매우 위험했다. 차도만 있고 인도는 없다.
이곳도 내가 어렸을 적에는 꽤 넓은 개울이었다. 그때만 해도 민둥산이라 비만 오면 일시에 많은 물이 넘쳐흘렀다. 그러던 것이 사방공사로 녹음이 우거지면서 폭 2, 3 미터의 도랑에 돌을 쌓아올려 한쪽에는 마을과 공장이 들어서고 산언저리 쪽에는 밭을 일구어 전혀 딴 풍경으로 변했다. 조금 올라가니 오른쪽으로 호렙산 기도원이 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있던 기도원이다. 운식은 뒤따라오고 장 선생은 멀리 뒤처져오고 있다. 기도원 앞에서 일행은 장 선생을 기다렸다. 장 선생은 조금 지친 기색이었다.
“장 선생님 힘들지요?”
“아니요. 주변을 좀 둘러보느라 늦었어요.”
“이곳은 처음이지요?”
심 기자는 장 선생한테 당연한 듯 물었다. 물론 운식은 이곳을 알고 있었다. 몇 번 이곳을 넘나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가끔 옥천 읍내 사람들도 옥천 삼걸이 길이 막히면 이곳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군서 사양리 와는 이웃마을이 되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충청북도와 대전광역시로 나뉘어 있지만 거리상으로는 아주 가까운 곳이다. 예전에는 이곳이 아주 깊은 골짝이었지만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곳이다.
“예, 처음 이예요. 그런데 산내 민간인 학살현장이 여기 어디쯤인가요? 산내 골령골에 있다고 들었는데……”
“저기 푯말이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 있나 모르겠네요. 이 일대가 전부……”
“그래요. 그럼 두 분 먼저 올라가세요. 난 좀 둘러보고 갈게요.”
장 선생은 일방 적으로 선언하고 있었다. 그리고 못을 박듯 자전거를 가로수에 묶고 열쇠를 채웠다.
“맞아요. 이곳이 제주 43사건 죄수들이 처형된 곳이지요.”
“죄수라고요?”
장 선생은 심 기자를 매섭게 처다 보았다. 마치 모욕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굴었다.
터널이 뚫리기 전까지만 해도 골령골은 웅숭깊은 산 이었다. 군서 사람들은 옛날부터 이곳을 지나 다녔다. 낭월동과 군서는 도경계선 이었고 옥천장 보다도 대전장이 더 가까웠다. 곤룡골은 군서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넘어 다니는 험준한 새재였다. 어머니는 심 기자가 태어나기도 전의 사건을 자분자분 말씀해 주셨다. 곤룡재에서 쉬어 갈 때면 말이다. 군서 사람들은 1950년 7월 어느 날부터 콩 볶듯 들리는 총소리에 힘 부친 작대기 떨듯 떨며 곤룡재에서 산굽이 끝에 있는 구렁텅에서 벌어지는 사건 현장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숨어서 몰래 내려다 본 것이다. 군용트럭에 실려 온 사람들 그들은 마늘을 엮듯 대여섯 명씩 묶여 있었고 트럭에서 굴러 떨어져 무릎을 꿇리면 총을 든 군인들이 다가와 직접 머리에 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하얀 뇌수와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구덩이에 굴러 떨어지고 민간인 같은 젊은 사람들이 곧게 펴서 절인 배추 독에 쟁이듯 밟았다. 그리고 인부들이 구덩이에서 나오면 또다시 총을 쏴서 확인 사살까지 했다. 하도 여러 날 총소리가 계속되니까 군서 사람들은 일부러 구경을 오기도 했단다. 무서워 내려갈 엄두는 못 냈지만, 물론 그때 영문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처음에는 살아서 도망친 사람도 몇 명 있다고 들었다. 30 미터에서 100 미터짜리 구덩이를 여러 개 파고 트럭에 싣고 온 죄수들을 구덩이 가에 세우고 멀리서 군인들이 사격을 하면 죄수들은 구덩이로 떨어졌다. 미군과 군인들이 돌아가고 나면 민간인들이 뒷수습을 했다. 그때 다행히 총에 맞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철사 줄을 살짝 풀어주고 흙을 덮었다고 한다. 그러면 그 사람은 야음을 틈타 도망쳤다고 한다. 그런 사건이 들통 난 이후로 머리에 직접 총구를 대고 사살했다는 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군서 사람들은 단지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죄수들이라는 풍문은 들었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 어머니도 죽은 사람이 많다는 것만 알았지 누구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만약에 그때 누군가 그곳을 서성거렸다면 사상범으로 몰렸을 지도 모를 일이다.
심 기자가 그곳을 지나다닌 것도 초등학교 전부터였다. 사건발생 10년쯤 지났을 때다. 사람들은 이곳을 골령골로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원래 이곳 지명은 용을 닮았다 해서 곤룡골 이었다. 현장은 농사짓는 사람들이 흙으로 깊이 덮어 뼈는 보이지 않았지만 계곡을 흐르는 물은 김치 국물처럼 붉었다. 도랑의 바닥과 돌들도 쇳물에 물든 것처럼 온통 붉은 색을 띄었다. 어머니는 그 물이 핏물이라고 했다. 직접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로서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살처분 현장 밑에서는 흙 묻은 신발도 씻지 않았다.
장 선생을 뒤로하고 조금 올라가니 골령골은 2 차선으로 활처럼 휘어 올라가고 왼쪽으로 넓게 도랑을 건너는 곳이 있었다. 심 기자는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목표지점이 확실했다. 그러나 왼쪽 계곡은 심 기자를 당기는 듯 했다. 아마 바람이 불어온 곳도 이곳 이라는 듯 한줄기 바람이 계곡 쪽 비포장 도랑을 앞서 건너고 있었다. 그러나 심기자와 동행만 있었다면 당연히 오른쪽 골령골로 방향을 잡았을 것이다. 잠시 머뭇거리던 심 기자는 ‘골령골은 이제 아무 정취도 없어.’ 혼자 중얼거린다. 그 계곡을 흐르던 물길을 좌우로 넘나들며 솔숲을 걷던 산길과 멧새 곤줄박이 같은 새소리 그리고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가 화음을 이루던 계곡을 걸어가면 마치 바람처럼 교향곡 속을 걸어 들어가는 착각을 일으키기도 했던 곳이다. 손 담그면 가제가 살던 맑은 계곡은 매몰되어 아스팔트길로 포장되어 있다. 한 참을 올라가면 중간에 목을 축이는 샘번지(약수터)도 있었다. 지난겨울에 차를 몰고 이곳을 지나다 골령재를 올라 보려 했으나 잡목이 우거지고 겹겹이 쌓인 낙엽이 산길마저 지워 오를 수가 없었다. 일행이 좌측 도랑을 건너 비포장 길을 택해 가다보니 임도 입구가 나왔다. 이정표에는 임도시작, 임도 끝 3.05 Km 라고 나무판에 음각되어 있었다. 그러나 철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차량출입금지” 라고 쓰여 있다. 일행은 옆으로 난 개구멍 길을 이었다. 심 기자는 자신의 동행의 등허리를 잡고 불끈 들어 옮겼다. 개구멍으로는 몇몇 등산객들이 일행보다 먼저 들어와 있었다. 그러나 등산객들은 심기자 일행을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아이를 무등태우고 하산하던 뚱뚱한 등산객이 심 기자를 가로막더니 물었다.
“어디까지 가세요?”
심 기자보다 동행을 쳐다보며 물었다.
“가는데 까지 가 보려 구요.”
등산객들은 처음이라는 듯 걱정스럽게 일행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심 기자와 운식은 계족산임도 마라톤 13.5 Km을 함께 완주할 정도로 체력에는 자신 있었다. 그것도 맨발로 뛰는 마사이 마라톤이었다. 3.05 Km는 구지 생각하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는 거리였다. 임도는 차량이 교행 할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심 기자는 많이 놀랐다. 골령골과 능선 하나를 두고 일란성 쌍둥이 같은 계곡을 보니 운식 친구보다 더 흥분하고 있었다. 입에서는 ‘와! 와!’ 하는 탄성만 지르고 있었다.
“심 기자, 천천히 가.”
“왜?”
“길이 가팔라서 도저히 타고 갈 수는 없잖아? 애들 여기다 두고가면 어떨까? 해서.”
“내가 알기로는 이 길이 식장산 하고도 연결이 되어 있는데 그리로 넘어 갈 수도 있잖아 그러면 다시 이곳으로 올 수도 없고, 그래 내려올 때 타고 올 수도 있잖아 그냥 끌고 가자.”
“그렇게 합시다.”
임도는 계곡을 하나도 훼손하지 않은 채 소장처럼 접혀 차량이 뒤집히지 않을 정도의 임계각을 유지하며 계곡을 오르고 있었다. 새로 심은 나무도 많았지만 원시림이 잘 보전되어 있었다. 군데군데 차돌 바위가 놓여 있어서 심 기자는 사진에 담았다. 서성골 외에는 어디서도 그렇게 큰 차돌 바위는 본 적이 없었다. 일행은 가풀막에서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비는 몇 방울 떨어 졌으나 옷이 젖을 정도는 아니었다.
“친구 제주 43 사건 알고 있어?”
운식은 심 기자라고 평소 부르던 호칭을 친구로 바꿔 불렀다.
“알고 있었는데 사실 여기와 연관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지……”
“말도 마, 소름끼치는 사건이야. 625 전쟁으로도 많은 민간인이 죽었지만 전쟁 이전에 수 만 명의 희생을 치른 사건이야.”
“그럼 제주 43 사건과 여기 산내학살 사건도 연관이……”
“그러니까, 정부 수립 전 1947년 3월 1일 제주도 삼일운동 기념식장에서 시위 군중에 발포해서 6 명의 시위대가 죽은 사건이 불씨가 된 사건이야. 그 불씨는 폭발해 제주도 전체로 번져 나갔지. 그러다 1948년 4월 3일 엉뚱하게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부소속 350 여명 무장대가 경찰서를 습격하는 사건이 터 졌어 무기를 탈취했고, 더 많은 공산주의자가 무장하게 되었지. 명분은 남북 단일정부를 지지하는 남로당이 흉흉한 제주도 민심에 불을 지른 것이지 이에 당황한 미군정당국과 단독 남한정부를 준비한 민주세력이 공산당과의 싸움으로 비화되었지. 무자비한 미군정은 병력을 증파 토벌작전을 펴면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게 된 거지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산으로 피신했고 급기야 해안에서 5 Km 까지만 주거가 허락되고 산으로 피신한 자들은 공산주의자로 인정하여 무조건 사살명령이 떨어진 거야. 또 피신했다, 고는 하나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비는 가구가 있으면 공산주의자로 낙인을 찍어 대살(代殺)을 단행한 거야. 즉 일가족 몰살이라는 살처분을 한 거야 약 2만에서 3만 명 정도가 이런 식으로 희생되었으니 제주도 사람 누구도 피해자가 아닌 사람이 없었지……”
“그럼, 대전형무소에 있던 43 사건 죄수들이 골령골에서 살처분 되었다는 거야?”
“그 수가 대략 3000 명쯤 되지 7000 명 까지 보는 증언자도 있지만 영국 기자가 쓴 기사를 들춰보면 대전형무소외에 타 형무소에서도 데려다 죽였다는 거야, 워낙 쉬쉬하는 사건이라 누구든 발설하지 않으니까 자세히는 모르지.”
그때, 운식의 핸드폰이 울었다. 대전교도소의 고위 교도관인 운식은 급한 일이 생겼다면서 급히 산을 내려갔다. 급경사를 따라 멀어져가는 운식의 뒷모습을 보며 심 기자는 외쳤다. 쏜살같이 사라진다.
“조심해……, 조심해……”
심 기자는 중얼거렸다. ‘모두 다 불확실한 시대를 사는 것.’ 이 아닌가 생각했다.
숲속에서 낙엽 헤집는 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두 손잡고 동행과 걷는 심 기자는 숲과 동행을 번갈아 올려다보고 내려다본다. 갑자기 무서운 생각에 섬뜩하다. 서성골 사는 주석이 친구가 멧돼지 마주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서성골의 서당골이다. 서당골이면 이곳에서 반대편 산중턱이다. 멧돼지는 먹이를 찾는 반경이 제법 넓다. 산에서 마주쳤을 때 멧돼지는 도망치지 않았다고 한다. 새끼가 있을 때는 공격적이라는 것이다. 금방이라도 한 떼의 멧돼지 가족이 길을 막을 것처럼 한기마저 느낀다. 멧돼지는 잡식성이다. 주로 집단생활을 하는 멧돼지는 10여 마리씩 떼를 지어 다닌다. 심기자는 동행의 손목을 움켜잡는다. 만약에 싸움에서 진다면 뼈도 못 추릴 상황이다. 동행만 남겨둔 채 길 위에서 사라진 몸이 될 것이다. 싸움에는 전략이 필요했다. 이기는 습관 중에는 이런 것이 있었다. 전략의 습관(방법을 아는 것도 힘이다.) 멧돼지가 빠를까? 동행이 더 빠를까? 심기자는 중학 3 년 동안 동행과 통학을 한 적이 있다. 내리막길이라면 승산이 있었다. 간헐적으로 낙엽 헤집는 소리가 들려온다. 언제 심 기자를 감시하고 있다가 불쑥 길 위에 나타날지 모른다. 그때 별안간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한~많은~ 이 세상~ 야속한 임~아~”
아마 그 사람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위기에 몰렸을 때 서로 결속하고 동지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속에 들어가 보지 않고 어찌 속단할 수 있으랴 만은 같은 사람으로 지원군이 있다는 것에 안심이 된다.
동행의 포즈를 잡아주고 심 기자는 셔터를 누른다. 길 위에 서 있는 동행을 보며 ‘치즈, 하나 둘 셋.’ 외치며 셔터를 누른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가 셀프카메라를 찍듯 추억을 남긴다. 극한 상황에서 심 기자는 욕정을 느낀 적도 있다. 마치 따라오지 못한 와이프를 생각하면서……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어떨 때에는 어느 술집여자를 떠올리며 은밀한 곳에서 수음을 즐긴 적도 있지만 동행에는 적어도 두 사람의 혼이 들어 있는 게 틀림없다. 그 것도 심 기자와는 상관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혼자 사지로 가는 남편과 손님 없이 기다리는 술집여자가 살점하나 붙어있지 않아 매우 스키니한 동행의 어디에 집을 짓고 붙어있는 것이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가끔 바퀴에 돌 튀는 소리만 있을 뿐이다. 그런 동행에 오늘은 저 밑에 남겨 두고 온 장 선생이 툭툭 튀어나와 시비를 건다.
“나는 장 선생과 오는 초면이고 내가 기자였다, 고 해서 그 사건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법도 없잖아……”
“당신은 언제나 갑 이었어 을에 대해서 뭘 알아?”
심 기자는 동행을 달아나지 못하게 임도 끝 지점 이정표에 기대고 줄로 된 열쇠를 채웠다. 좌로는 식장산 가는 길이고, 우측으로는 만인산 가는 등산로다. 여기서 부터는 부득이 동행과 헤어져야한다. 비는 아직도 오락가락 한다. 심 기자는 카투사 근무 시 제주도에 들린 적이 있었다. 주둔지 동두천 턱걸이 캠프 호비에서 근무할 때 제주도로 훈련을 갔었다. 모슬포에 있는 미군 기지였다. 모슬포 앞바다는 바닥이 환희 보이는 바다였다. 우리는 해안가 절벽에서 레펠 훈련을 했다. 마을 이곳저곳을 지나며 이국적인 풍경에 젖어있었다. 저녁에는 마을에 나와 회도 먹으며 동네 꼬마들한테 사투리도 열심히 배웠는데 지금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루는 외출을 나와 후임인 동철과 둘이 협제동굴에 간적이 있었다. 동철이 펜팔로 사귀는 장금주 라는 처녀가 있는 곳을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금주는 협제 동굴에서 표를 파는 곳에 근무를 하고 있었다. 동철과 심 상병은 공짜로 들어가 동굴을 구경하며 셋이서 데이트를 즐길 수 있었다. 그때 심 기자는 실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석회동굴에 있어야 할 종유석 하나 붙어있지 않은 동굴이었다. 그때는 동철과 금주는 너무 가까운 사이처럼 보였다. 금주는 동철과 심 상병을 집으로 초대했다. 금주의 집은 협제 동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금주의 집에도 돼지를 기르고 있었다. 잘 깔아준 풀 위에 돼지는 누워 있었다. 물론 한쪽에는 변소가 있었다. 화단이 마당 한쪽에 있었는데 그곳에 각종 종유석이 즐비했다. 심 상병이 놀라는 눈치를 보이자 금주가 달려와 말했다. ‘사실은 경비가 허술해 도난을 많이 당해서 잠시 집에다 보관중인 것입니다.’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작지만 아주 깨끗한 집이었다. 여름이라 방문은 활짝 열어놓은 채였고 부모님은 집에 계시지 않았다. 금주는 제주에서는 귀하다는 쌀로 손수 밥을 지어 주었다. 그사이 심 상병은 벽에 걸린 그림들을 감상했다. 연필로 그린 그림이지만 초상화가 인상적이었다. 언니의 초상화도 있었고 귀엽고 깜찍한 금주의 초상화도 벽에 걸려 있었다. 아버지가 그린 것이라고 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제주도 사람들이 미군에 좋은 감정일 수는 없었다. 우린 그것도 모르고 군복을 입고 제주도의 마을을 드나든 것이었다. 심 상병이 제대 후 신문사에 입사 했을 때 금주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금주는 모그룹 계열사의 경리과에 취직해 서울에 와 있었다. 주로 회현동 근처에서 만났는데 그럴 때마다 금주는 제주도 친구들이나 후배들을 데리고 나왔다. 그 후 여러 번 데이트를 했다. 동철과 헤어진 듯 가끔 동철의 소식을 물어 왔으나 동철은 이미 결혼을 약속한 다른 여자가 있었다. 제주도 사람들도 충청도 사람들처럼 순수하구나 생각했었다. 금주는 언니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언니는 일찍이 뭍으로 나와 공부를 하여 공주에 있는 사범대학에 다니고 있다고 자랑했었다. 자신은 여상을 나와 T그룹에 경리사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녀와 심 기자는 안양에 살고 있었다. 주로 안양 유원지를 데이트 장소로 많은 이야기를 했다. 심 기자는 만안동에 있는 단독주택에서 방을 하나 얻어 자취를 하고 있었다. 그 날은 비가 내려 결국 자취방으로 비를 피해 함께 들어 왔다. 그녀는 젖은 옷 때문에 잠시 젖은 옷을 말리려고 들어왔었다.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이야기를 하며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옷을 빨아 널었다. 잠시 심 기자의 추리링이 금주를 알몸을 가리고 있었다. 그때 언니와 자신의 얘기를 하며 언니를 자랑했다. 키도 크고 예쁘다며 누구나 반할 얼굴리라고, 그날 결국 통행금지에 걸려 자고 갔다. 심 기자는 금주를 건드리지 않았다. 심기자는 그녀를 지켜주고 싶었다. 다음날 같이 서울로 출근하는 전철 안에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뒤늦게 안아 주기라도 했어야 했다고……
그 후 어느 대부터 서로 연락이 끊긴 상태였다. 아마 결혼을 했겠지 생각했다. 길은 능선을 따라 서성골 뒷산으로 이어져 있었다. 옛 골령골과 도풀갱어처럼 닮은 낭월골은 꼭대기가 같았다. 숲 사이로 고향마을이 보였으나 낯설게 보인다.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좌로는 동오리 눈 아래는 서성골 우로는 마랑골이 숲 사이로 내려다 보였다. 처음 제대 후 서성골에 왔을 때 밤에 나는 이 산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늦게 잠이 들었는데 새벽 시간쯤 산은 큰소리로 웅 웅 거리며 큰소리로 울었다. 개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짖었고 동네 장독대들은 불규칙하게 덜거덕 거렸다. 심기자는 제대하면서 전의에 불타고 있었다. 3 년 동안 준비한 전투를 한 번도 써먹지 못하는 것이 끝내 아쉬웠었다. 지진은 몇 분간 계속되다 쉬고 또 집이 흔들리고 천정에서는 흙이 떨어졌다. 지진이라기보다는 산이 우는 소리였다. 그 괴이한 소리는 전쟁준비로 무서울 게 없던 전역 군인을 혼비백산하게 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은 아침밥을 먹으면서 아무도 지난밤의 일을 꺼내지 않는 것이었다. 골령재에서 심기자는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앉아 쉬던 곳에는 숲이 우거져 대전 시내도 보이지 않았고 골령골 산굽이도 숲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최근 세워진 안내판만이 이곳이 골령골 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한 무더기의 무너진 돌탑이 낙엽에 반쯤 덮여 있었다. 산내로 내려가는 길도 군서로 내려가는 길도 숲으로 막혀 있었다. 망덕봉 가는 길만 뚫려있었다. 군서로 가는 길은 매우 험준한 길이었다. 겨우 사람하나 다니는 길, 절벽에 달라붙은 길이었다.
심 기자는 장 선생이 금주의 언니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왜 미처 그 생각을 못했을까? 3.05 키로 미터 가파른 임도를 심 기자는 브레이크를 거의 놓은 채 달렸다. 넘어지면 또 일어나서 달렸다. 비는 억수같이 내리고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산은 금방 어두워 졌다. 멧돼지 가족보다 더 무서운 것이 쫓아오더라도 심 기자는 그 이상 달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넘어져도 누가 받쳐주는 것처럼 맨바닥은 푹신 거렸다.
*
장 선생은 촛불시위 현장에 있을 것이었다. 심 기자는 기자 생활에서 얻은 동물적 추리력으로 알았다. 은행동 촛불시위 현장은 캄캄했다. 몇 백 명의 시위대가 아스팔트 위에 앉아서 종이 컵 속에 촛불을 하나씩 밝히고 있었다. 그들의 구호는 원시적이고 비 이성적 이었다. 심지어 미국을 비방하는 문구도 원색적으로 적혀있었다. 심 기자는 등산용 플래시를 머리에 썼다. 막장에서 탄 캐는 광부들처럼, 고무 밴드가 달려있어 야간 등산을 하는데 용이한 장비였다. 한번 스위치를 누르자 불이 켜지고 두 번 누르자 조도가 높아졌다. 세 번 누르자 경고등처럼 점멸등으로 바뀌었다. 그 상태로 구경꾼들을 헤집고 들어갔다. 그리고 조도를 높이는 스위치를 눌렀다. 길 맞은편 사람들까지 눈에 들어왔다. 심 기자는 맞은편 한 사람을 주목했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 초점을 맞췄다.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
“저, 미친년 안야?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찾아왔어!”
“얘들아 숨어 선생님이야!”
심 기자는 얼른 스위치를 껐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누군가 분을 참지 못하고 촛불을 장 선생 앞으로 던졌다. 그리고 몇 개의 촛불이 더 날아갔다. 곧바로 경찰이 에워쌌다. 그리고 촛불은 더 이상 날아가지 않았다.
“여러분, 어린학생들은 집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경찰이 장 선생의 입을 틀어막았다. 장 선생은 힘없이 현장에서 끌려 나갔다.
“전교조 선생님들 제발 아이들을 선동하지 말아주십시오!”
장 선생은 누가 맨 처음 욕을 했는지 아는 것처럼 외치며 사라졌다.
아까 대전천을 따라 내려오면서 어릴 적 수영을 하던 기억을 되살렸고 그곳에 운치 있던 바위 하나를 떠올렸다. 그 바위는 강줄기가 휘어지는 지점에서 길 쪽으로 약간 치우쳐 있었는데 마치 화양동계곡에 있는 바위처럼 크고 기암괴석으로 생긴 바위였었다. 심 기자는 기억을 되살려 몇 번을 강물이 돌듯 오르내렸다. 그러다 강바닥에서 이상한 흔적을 발견했다. 직경 10 센티미터의 반 원추 음각이 대여섯 개가 약간 사선으로 바위 등에 나 있었다. 그때야 알았다 물 흐름이 방해된다고 누군가 바위를 없애 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대전천에서 오직 그 바위만이 추억 속에 있었는데 아쉬웠다. 더 이상 대전천의 운치는 없었다. 장 선생이 끌려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심 기자는 장 선생이 그 바위 인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해본다.
심 기자는 살처분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병들어 죽는 것과 산닭들을 매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어차피 죽을 것이므로 땅에 묻는다. 그것은 사람의 논리다. 사람도 어차피 죽는 것이라면 말기 암 환자를 산채 땅에 묻어도 괜찮은 것인가? 요즘 닭들은 어떤 입장에 서있을까? 매일 모이를 주던 주인은 쫓겨나고 하얀 가운을 입은 낯선 사람들이 쳐들어와 목을 비틀어 자루에 동족들을 쓸어 담는다. 그리고 구덩이에 매몰처리 된다. 사람이 죽이려는 것은 닭이 아니라 닭 속에 스며든 에아이라는 조류인플루엔자 일 것이다. 오랜 시간이 경과되면 면역력이 길러지고 사람보다 역사가 긴 닭의 기원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사람에게는 사상이 그 인플루엔자 같이 면역력이 없는 어린학생들에게는 급속 확산될 수 있다. 부처님은 살처분을 찬성할까? 물론 반대하시리라. 그러나 악성 병원균은 생명체라고 보기 어렵다. 닭의 살처분은 닭이 가지고 있는 고병원성 인플루엔자 때문이다. 대게 닭을 죽이는 인플루엔자는 닭이 만들기 마련이다. 삶의 영역이 점점 줄어들어 철창에 갇혀 생활을 하다 보니 누군가 몰래 병원균을 만들었으리라. 아니 저절로 자생되었으리라. 상대방을 죽여야 운신의 폭이 넓어지지 않을까 해서…… 생명체가 신의 창조물이라면 이 수를 조정하는 것도 창조자의 몫일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나 부처가 이를 뒤에서 조정하고 있는 것인가? 미국 사람들도 민주주의를 외치고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생존의 폭을 넓히려는 음모가 있다고 봐야한다. 제주도에서는 한 마을에 남로당에 가입된 사람이 있어다는 이유로 마을이 몰살되었다. 친척이 남로당에 가입되었다는 이유로 가족이 대살(代殺)당했다. 사람에게는 사상이 곧 고병원성 바이러스다. 그곳에 살았다는 이유로 사상에 물들지 않은 주민들도 몰살당해야 했다. 언제나 큰 사건의 원인 제공자는 전면에 나서지 않고 있다. 생명의 원인 제공자는 창조자인 예수나 부처가 아닌가? 살처분의 명은 예수가 내리고 부처는 명분상 반대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아이가 사람에게 감염 되는 것처럼 광우병도 사람에게 감염될 수도 있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캐나다나, 미국 소는 모두 살처분 대상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류에 암 같은 대 재앙이 다가올 수도 있는 일이다. 그래도 부처님은 살처분을 반대하십니까? 물어보고 싶다. 광우병은 미래의 광인 병이다. 이것은 지구상의 과잉된 인류를 조정하기위한 병일지도 모른다. 스스로 숫자를 줄인다면 예수는 슬며시 광우병을 거두어들일 것이다. 부처는 분명 대답해 주지 않고 본인에게 답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스스로 깨우치라고 말할 것이다. 신(神)은, 고무신 구두 하이힐 슬리퍼 등산화 운동화도 모두 신들이다. 신은 우리가 신고 또 우리가 벗을 수 있다. 신과 신은 똑 같다. 편리에 의해서 만든 것이다. 광우병은 아직 한국에 오지 않았다. 오지도 않은 광우병을 가지고 선생님과 학생들 사이에 편이 갈리다니, 제주 43 사건이 떠올랐다. 지인이 운영하는 카페에서 장 선생의 아버지를 만났었다. 75 세의 고령이었다. 17 세 되던 해에 제주도에서 거제도로 피난을 나왔다고 했다. 심기자의 생각을 바로잡아 주었다. 그 당시 그 들이 부르는 노래를 배워 따라 불렀다고 했다. 그 정도 물들었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해 주셨다. 외삼촌이 이미 전라도로 피신을 하였기에 어쩔 수 없었다는 말씀도 하셨다. 요즘 돌아가는 조짐이 그때를 떠올린다고 하시면서 적당히 선을 넘지 않게 해야 된다고 했다. 먼저 힘을 길러야지, 하면서 소주를 마셨다. 무엇이 민주화운동인가? 심 기자는 무시무시한 살처분을 거리낌 없이 외치는 아나운서의 입을 보면서 아이들의 입에서도 거리낌 없이 내뱉는 것이 아닌 가 걱정했다.
캄캄한 방에 심 기자는 누워있었다. 누군가 자꾸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얼굴이 환한 황금색이었다. 자세히 보니 대학생 정도 돼 보이는 볼 살이 오른 여자였다. 여자는 섹스를 요구했다. 심 기자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누워 있었다. 심 기자는 말했다 ‘다음에…… 다음에 하자…… 기회는 얼마든지 있어……’ 여자는 달아오른 듯 자꾸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닭들은 땅속을 걸어 다닌다. 왜가리들은 지하의 하늘을 날아다닌다. 누군가 심 기자를 보고 예수님이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살처분을 찬성하신다지요? 라고 묻는다. 예수는 그런 의견을 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정 알고 싶으면 부처님께 물어 보세요? 나는 부처의 님편 이예요. 사람은 아니 지요. 심 기자는 늦잠을 잤다. 오늘은 2552 번째 부처님오신 날이다.
“절에 가야지!”
짙게 화장한 와이프가 내려다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