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의 아름다운 사찰] 마르지 않는 해탈수, 원효를 만나다… 평택 수도사
원효스님의 해골물 설화를 그린 수도사 대웅전의 벽화
원효스님의 석굴 수행 행적을 찾아가는 길에 만난 평택 수도사는 사실상 그 발단이라고 해야할 곳이다. 원효스님은 의상스님과 함께 이곳을 지나면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중국 당나라로 가는 배를 타려고 했으나 밤중에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어 유학길을 접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유명한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아는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다. 중국의 ‘송고승전’에 실려있으며, 그것도 원효스님 이야기가 아니라 의상스님의 이야기 가운데 등장한다. 더불어 해골물을 마신다는 이야기와도 조금 다르다. ‘송고승전’에는 이렇게 나온다. 즉, 당나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가다가 한밤중에 폭우를 만나 당혹스런 차에 다행히 토굴을 찾아 몸을 피하고 편하게 하루를 묵었는데, 아침에 보니 그곳은 무덤이었던 것이다. 주변에 해골도 널려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부득이 하루를 더 묵을 수 밖에 없었다. 아마도 계속되는 폭풍우로 인해 떠나기로 했던 배도 발이 묶여 하루를 더 기다릴 수 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전날에는 그 토굴에서 안락하게 편히 잘 수 있었지만, 일단 그곳이 무덤인 줄 알았기 때문인지 원효스님은 계속 귀신 꿈을 꾸고 귀신이 나타날 것만 같아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같은 장소인데도 무덤인 것을 몰랐을 때와 알았을 때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다른 것을 알고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이다.
평택 수도사 전경과 언덕 너머의 바다 풍경
그렇다면 해골물을 마셨다는 이야기는 언제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정확한 출처는 아직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만약 오래된 것이라면 나름대로 또다른 근거를 가지고 있을 것이기에 해골물 설화를 당장 무시하지는 않기로 한다. 여하간 토굴과 무덤이라는 큰 흐름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다.
이때 원효께서 깨달은 내용이 바로 "일체유심조"라고 널리 알려져 있으나, 실제는 약간 다르다. 이 역시 큰 뜻으로 보면 같은 의미이지만, 원문을 읽고나면 원효스님이 왜 유학을 포기했는지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원문은 이렇다.
심생즉종종법생(心生則種種法生) : 마음이 생겨나면 각각을 분별하는 마음이 생기고
심멸고감분불이(心滅則龕墳不二) : 마음을 멸하면 토굴과 무덤도 둘이 아니네
삼계유심만법유식(三界唯心萬法唯識) : 세계는 오직 마음에 딸린 것이며, 현상은 인식에 딸린 것이니
심외무법호용별구(心外無法胡用別求) : 마음 밖에 따로 법이 없는데, 어디서 무엇을 따로 구하랴
수도사 대웅전(중앙) 및 명부전(향좌측), 사찰음식체험관(향우측)
원효스님은 무덤에서 하루 묵으면서 세 번째 구절 ‘만법이 유식’임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가 당나라에 유학가서 배우려고 했던 것이 바로 유식불교였다. ‘유식’임을 깨달았으니 굳이 ‘유식불교’를 배우러 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원효스님이 깨달음을 얻은 장소, 즉 오도처(悟道處)가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몇가지 설이 있다. 가장 유력한 곳으로 알려진 곳이 바로 이곳 평택 수도사이며, 그밖에 화성의 몇몇 장소가 물망에 오르기도 한다. 이러한 차이는 원효·의상스님이 배를 타러 가려던 항구인 당항진을 어떤 경로로 이동했는가에 따른 이견이다. 충북 영동의 추풍령을 지나 평택을 거쳐 화성 당항진으로 이어지는 남쪽 길로 갔을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와 함께 북쪽 계립령을 넘어 여주를 통해 뱃길로 서쪽으로 나아갔을 것이라는 견해의 차이이다. 이번 글에서는 어느 곳이 맞는가에 대해 다루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재 우리가 원효대사의 오도처로서 찾을 수 있고, 어느 정도 컨텐츠가 갖춰진 곳은 평택 수도사이며, 상당한 신빙성을 갖고 오랜 세월 오도처로 인식되어 온 곳이기도 하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수도사 바로 뒤가 바다임을 알 수 있다. 현재는 해군 2함대 사령부가 자리잡고 있어 지금도 항구로 중요한 지역이다. 더구나 원래 수도사의 자리는 현재의 위치에서 바닷가로 고개를 넘어 원정리 봉수대(괴태곶 봉수대) 인근이었으나 이곳에 과거 산업시설이 들어서면서 사찰과 마을이 모두 지금의 위치로 이전해올 수 밖에 없었고, 지금은 수도사의 원터가 해군기지에 편입되어 있다. 지금보다도 더 바다가 보이는 가까이에 수도사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의 수도사는 그렇게 이전해 왔지만, 경내 큰 나무 아래에 있는 승탑은 원위치에서 옮겨오면서 함께 이전해온 것이라고 한다.
원효 깨달음 체험관
여하간 원효스님이 배를 타려고 했던 곳은 당진일 수 있지만, 이곳에서도 멀지 않으니, 이 바닷가 어느 토굴에서인가 원효스님은 깨달음을 얻으셨던 것이다. 물론 애초부터 깨달음을 얻은 토굴은 무덤이었으니, 현재 그곳이 그대로 남아있을리는 만무하다. 다만 다양한 컨텐츠를 통해 그 깨달음이 흔적을 이곳에서 느끼고 읽어볼 수 있다.
우선 <원효대사 깨달음 체험관>에서는 문화해설사의 친절한 설명으로 수도사가 원효대사의 오도처로서 가지는 의미에 대해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체험관 안쪽에는 동굴 형태로 만들어놓고 원효스님의 그 깨달음을 얻던 날 밤의 행적을 체험해볼 수 있도록 꾸몄다. 폭우가 내리던 밤의 모습은 광케이블이 늘어진 동굴공간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날의 비를 재현했다. 빗줄기처럼 늘어진 광케이블 사이로 들어서면 천둥소리가 들리고 마치 설치미술 속에서 자연을 만나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이내 큰 동굴 안에 들어서는데, 비록 원효스님이 머물렀던 토굴은 이처럼 크지 않았겠지만, 당시의 천둥치는 날 밤을 상상하기에는 충분하다.
깨달음 체험관 내부의 토굴 체험
인상적인 것은 원효스님이 해골물을 마시고 난 다음 날이 밝아오는 순간에 동굴 바닥에 빛이 켜지면 투명한 바닥 그 아래로 해골들이 늘어서 있는 것이 갑자기 드러나 깜짝 놀라게 된다. 그 ‘놀람’의 순간에 깨달음이 있었던 것이기에 신선한 접근으로 다가온다. 수도사를 방문하시면 꼭 이 체험관에 들러 광케이블 빗줄기를 지나 이곳 해골방에서 영상을 시청해보시기를 권한다.
원효스님의 깨달음을 충격요법으로 체험했다면, 이번에는 좀 더 여유롭게 생각에 잠길 수 있는 공간으로 걸음을 옮긴다. 대웅전 뒤쪽으로 대나무가 우거진 숲으로 오르는 잘 조성된 산책길을 따라 조금 오르면 ‘해탈수’라는 이름이 붙은 작고 아담한 건축을 만나게 된다. 그 건물 한쪽은 해골에서 물이 솟아나오는 방이고, 다른 방은 천정이 둥글게 개방되어 햇살과 바람이 개운한 현대식 선방이다. 둥글게 내려오는 햇살을 둘러싸고 벽에 기대어 앉아 맑은 물이 고인 연못을 바라보며 잠시나마 명상에 잠길 수 있는 곳이다.
대웅전 옆으로 해탈수 올라가는 대나무숲길
현대식 건물이지만, 필자가 과거 파키스탄의 간다라 유적지를 답사할 때 들렸던 옛 스님들의 수행처가 떠올랐다. 가운데 연못을 두고, 그 연못 주변에 스님들이 앉아 물에 비치는 형상들을 바라보며 참선했던 흔적이 남아있는 절터였다.
원효스님의 수행처로 전해지는 곳은 대부분 약수와도 관계가 있다. ‘송고승전’ 속 원효스님의 깨달음 이야기에는 ‘물’이 등장하지 않지만, 원효스님과 연관된 전국의 석굴 유적에는 특별한 물이 동반되는 경우가 많다. 석굴과 물, 그것은 토굴과 해골물의 또다른 변용으로 보인다. 해골물 설화를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아닐까. 수도사 해탈수가 그 이야기를 전해준다.
수도사의 두 번째 토굴체험장소인 해탈수(왼쪽)와 원래의 수도사터에서 옮겨온 조선시대의 승탑
평택 수도사에는 원효스님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그 토굴 같은 것은 비록 전하지 않는다 해도 이곳에 이르면 바로 언덕 너머 바다의 기운이 느껴진다. 스님들 뿐 아니라 급변하는 삼국의 정세에 따라 당나라로 오갔던 많은 백제, 신라 사신들의 숨가뿐 걸음도 느껴진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당나라로 유학가기 위해 배를 타려던 원효스님과 의상스님의 기대와 불안감도 느껴진다. 그리고 고국에서의 마지막 밤일 수도 있는 그 밤을 지내던 비장한 각오도 느껴진다. 신라의 두 거장 스님의 행적이 느껴진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감흥이다. 비록 원효스님의 오도처로 잘 알려져 있지만, 여하간 의상스님도 거쳐간 곳이 아닌가. 또 의상스님도 처음에는 원효스님처럼 당나라 현장법사 문하에서 유식불교를 배우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화엄불교를 배우는 것으로 진로를 바꿨다. 이 역시 직간접적으로 원효스님의 깨달음이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었을까?
폭풍우는 요란하게 두 분의 걸음을 붙잡았지만, 두 스님은 이곳에서 조용하면서도 거대하게 한국 불교의 새 흐름을 설계하고 계셨다.
주수완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