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대작 <황금나침반>에는 인간과 영혼의 관계에 대한 종교적, 철학적 고찰이 담겨 있다. 아이들의 영혼을 주무르려는 어른들의 야심, 악으로부터 인간을 지키기 위해 자유의지를 거세하려는 교회의 음모가 운명의 아이, 리라에 의해 드러난다. 모험극 이상의 방대한 의미를 숨긴 <황금나침판>을 세 개의 키워드를 통해 풀이한다.
<황금나침반>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해 의문을 품으며 출발한다. 사람들이 각자 저마다의 모습을 반영하는 실물인 데몬이란 것을 가지고 마녀와 용맹스런 아머 베어(전사의 성품을 가진 곰)족과 함께 어울려 살고 있지만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현실세계처럼 사람과 유일신앙의 기독교다. 인간세계를 지배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세계까지 손아귀에 넣고 싶어하는 교회는 성체위원회라는 이름 혹은 고블러라는 별명을 가진 조직을 통해 어린 아이들을 납치하고 비밀스런 실험을 감행한다. 진실만을 알려주는 황금나침반을 가지게 된 소녀 리라(다코타 블루 리처즈)는 성체위원회의 음모를 파헤치게 될 운명의 아이. 그녀는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아닌 다른 어떤 곳에서 전해지는 물질 더스트의 존재에 궁금증을 갖게 되면서 끝을 알 수 없는 모험에 몸을 맡긴다. 여기가 전부라고 생각했지만 저 하늘 너머에 어쩌면 존재할지도 모르는 세상. 말괄량이 소녀를 추동하는 것은 이 세계의 한계를 벗어나고 싶은 자유의지다. 황금나침반에 의지한 채 혈혈단신 세상 앞에 내던져진 리라는 고블러들에게 납치당한 친구 로저(벤 월커)를 구하기 위해 노스폴(북극)로 향하고 있지만, 그녀가 밝혀내는 사건의 진실은 좀 더 거대하다. 바로 인간을 특별하게 만들어줬던 존재 데몬을 육체로부터 떼어내려는 시도였기 때문이다. 인간이 존재한 이래 가장 다양한 방법으로 가장 오랜 시간 고민해왔던 주제가 바로 종교다. <황금나침반>은 판타지의 힘을 빌려 종교를 통한 인간 존재의 비밀을 캐묻는다.
키워드 1 데몬│고유한 영혼의 표식
"리라와 그녀의 데몬은 부엌 쪽에서 보이지 않게 한쪽 벽에 바싹 붙어 어두워지고 있는 홀을 지나갔다." <황금나침반>의 원작자 필립 풀먼이 소설의 첫머리부터 등장시키는 존재는 주인공 리라와 그녀의 데몬이다. 언뜻 보기에 데몬은 의인화된 현명한 애완동물쯤으로 여겨진다. 리라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시시콜콜 잔소리를 늘어놓는 모습이 딱 그렇다. 그러나 필립 풀먼이 인간의 영혼을 대변하는 동물 형상의 존재로 등장시킨 데몬은 시공간의 장벽을 넘고 환상과 현실이 공존하는 <황금나침반>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첫 단추다. 흔히 인간은 동물처럼 단순히 생존과 번식을 위해 살다가 죽는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삶에서 만족하지 않는다. 모름지기 인간이라면 육적인 것 이상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마음을 갖기 마련이다. 유사 이래 수많은 종교에서 영혼이라 부를 만한 어떤 것의 존재를 믿어왔고, 살아 있는 동안은 육체와 공존하지만 육체가 죽으면 사후세계로 떠난다고 생각하는 오랜 신념도 여기서 기인한다. 물과 단백질, 지방으로 구성된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동물이 아닌 생각하고 느끼고 목적을 추구하는 고귀한 존재. 인간이 스스로의 가치를 격상시킬 수 있었던 결정적인 증거가 바로 영혼이다. <황금나침반>에 등장하는 데몬은 이러한 인간의 오랜 욕망을 시각화한 것이다. 영화 속에서 데몬은 인간과 대화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충고도 마다하지 않으며 공포와 즐거움, 경계심, 설렘, 기대감, 분노, 긴장감 등 다양한 감정들을 함께 공유한다. 재미있는 것은 영화 속 데몬의 모습이 개, 늑대, 독수리, 표범, 원숭이, 담비, 고양이 같은 동물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동물들의 특성을 통해 사람의 성품과 정체를 가늠해볼 수 있다. 충직한 하인과 집사들의 데몬으로는 듬직한 개가 등장하고, 야만적인 타타르 족의 데몬은 늑대로 묘사된다. 아름답고 화려한 외모를 가진 콜터(니콜 키드먼) 부인은 영리하고 계산이 빠르며 음모를 꾀하는 황금색 원숭이로 그려진다. 민첩하게 주위를 살피고 목표하는 것을 향해 신속하게 움직이는 황금색 원숭이는 온화한 모습의 콜터 부인이 감추고 있는 그녀의 내면세계다. 리라에겐 한없이 엄하고 무섭기만 한 삼촌, 아스리엘(다니엘 크레이그) 경은 위엄 있고 저돌적이며 행동력 있는 인물로 흰 표범의 데몬이 그의 인격을 나타낸다. 데몬에 관한 또 하나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아머 베어족의 왕 이오푸르 락니손이 데몬을 간절히 원한다는 설정이다. 리라는 이 점을 교묘히 이용해 왕위를 빼앗긴 이오렉 버니슨에게 복수의 기회를 만들어준다. 이오푸르는 하늘의 갑옷을 자신의 영혼으로 삼는 아머 베어족의 전통을 버리고 인간처럼 데몬을 통해 영혼을 확인하고 싶은 어리석은 존재로 등장한다. 그 이유는 바로 콜터 부인의 매혹 때문인데, 전사 곰의 힘을 이용하려는 콜터 부인에게 이용당하면서도 인간이 되고 싶다는 욕망에 시달린다. 말하자면 자신을 부정하게 된 삐뚤어진 이 전사 곰은 갑옷을 던져버리고 데몬을 가장할 수 있는 인형을 손에 쥔다. 리라는 특유의 재치와 천재적인 말솜씨로 이오푸르의 욕망을 자극해, 그가 데몬을 가지려면 이오렉과 1대 1의 결투를 해야 한다고 부추긴다.
키워드 2 인터시즌│인간을 좀비로 만드는 수술
데몬이 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주인과 다른 성(性)을 가진 존재라는 점, 어린 아이들의 데몬은 시시때때로 변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차차 하나의 모습으로 굳어진다는 점, 데몬은 다른 사람과 물리적으로 접촉할 수 없다는 점 등 <황금나침반> 세계에서의 데몬 규칙은 다양한 함의와 상징을 지니고 있다. 영화 속에서는 사건의 빠른 전개 때문에 데몬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묘사가 다소 미흡하다는 점이 그래서 더 아쉽다. <황금나침반>이 나열하는 모든 개별 에피소드는 영혼이란 인간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찾아가는 여정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황금나침반>을 보는 관객들을 현실세계의 교회가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과 잃어버린 자유의지에 관한 철학적 탐문으로 이끈다. 평생을 자신의 데몬인 판탈라이몬과 함께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리라와 아이들은 곧 정신과 육체를 온전히 자기 것으로 인지하고 있는 순수한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성체위원회에서는 그 옛날 이브가 아담을 추동해 함께 선악과를 먹었던 사례를 번복하길 원치 않는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유일신의 규칙을 깨부쉈기 때문이다.(필립 풀먼은 교회의 유일신앙을 독재자의 횡포라고 바라본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위험한 것으로 규정하는 교회의 시선은 곧 이러한 사고를 사전에 막기 위한 인터시즌을 감행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성체위원회를 지휘하는 콜터 부인은 리라에게 인터시즌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더스트는 아주 나쁘고 사악한 거란다. 어른들과 그들의 데몬은 더스트에 아주 심각하게 감염됐기 때문에 손을 쓰기엔 너무 늦었어. 그렇지만 아이들은 빨리 수술만 하면 더스트의 위험에서 벗어난단다. 모든 것이 편안해진다니까. 영원히 말이야! 너도 알다시피 어릴 때는 데몬이 훌륭한 친구지만 나이가 들어 사춘기가 돼봐라. 너도 곧 그럴 나이지만 그때는 데몬들이 온갖 성가신 생각과 감정들을 불러일으킨단다. 그렇게 되기 전에 간단한 수술만 받으면 너는 영원히 고통을 겪지 않게 되지." 성체위원회는 기요틴처럼 생긴 단순한 금속 칼날을 가진 기계 속에 아이와 데몬을 각각 떨어뜨려 집어넣은 뒤, 그들을 분리하는 실험을 실시한다. 실험결과 몇몇의 아이들은 데몬과 떨어졌다는 참을 수 없는 상실감 때문에 충격을 받고 즉사하거나 혹은 정신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데몬을 찾아 떠돌다가 지쳐 쓰러진다. 데몬을 잃어버린 아이들은 육체만 가진 좀비처럼 생기를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리라는 황금나침반의 지시에 따라 낯선 마을에서 인터시즌을 당한 소년을 발견한다. 원작에서 그 소년은 헝겊으로 된 인형을 손에 쥐고 자신의 데몬을 목 놓아 부르며 돌아다니는데, 마을 사람들의 눈에 그는 유령이나 다름없는 존재로 비춰진다. 분리 수술을 받은 어른들 역시 꼭두각시로 변해버린다. 이미 스스로의 정체성, 즉 데몬의 형상을 알고 있기에 충격은 아이들에 비해 적은 편이다. 인터시즌을 실행하는 북극의 요새 볼반가르에서 실험을 돕고 있는 어른들은 대부분 초라한 데몬을 가지고 있거나, 아예 데몬과 분리된 존재로 등장한다. 원작 소설의 두 번째 이야기인 <마법의 검>에서의 콜터 부인 대사는 영혼이 분리된 인간에 대한 보다 직설적인 조롱을 담고 있다. 그녀는 데몬을 떼어버리고 자신의 수하가 된 군인들을 두고 공포심과 상상력 그리고 자유의지를 상실한 존재라고 비꼬듯 얘기한다. 자신의 몸이 갈가리 찢어지더라도 싸우라는 명령이 그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하게 된 군인들 역시 좀비와 다름없다는 것. 이는 사람들의 영혼을 착취하는 데 나선 거대 권력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거니와 스스로를 영혼 없는 좀비로 격하시켜버린 현대인들에 대한 은근한 조롱이다.
키워드 3 성체위원회│절대권력으로 세상을 지배하다
필립 풀먼이 오늘날 악마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는 데몬의 의미를 되살린 것은 왜일까? Daimon 혹은 Demon이라고 쓰는 이 단어는 그리스어로 수호정령이란 기원을 가지고 있다. 기원전 2세기경에는 종교적인 명칭으로 쓰이기도 했는데 <황금나침반>에서 그러하듯이 분리된 자아, 영적 자아를 부른 말이었다고 한다.(출처 필립 풀먼의 삼부작 어떻게 읽을 것인가? 문학평론가 김성곤) 원작 소설의 나머지 이야기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다른 세계는 인간이 찾으려 해서는 안 되는 교회의 금기다.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증거, 더스트란 물질을 찾아내려던 아스리엘 경 역시 교회의 표적이 된 것은 마찬가지다. 아스리엘 경은 평행우주의 원리를 깨우치고, 이 세계와 다른 세계를 잇는 다리를 건설하려는 야심을 갖게 된다. 영화에서는 묘사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만들어질 2편 <마법의 검>과 3편 <호박색 망원경>에서는 같은 시간, 같은 공간 속에 무수히 많은 세계가 공존하고 있다는 평행우주의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리라는 아스리엘 경이 만든 다리를 통해 현대와 유사한 세계로 가게 된다. 아스리엘 경의 실험이 성공함으로써 성체위원회가 세상을 지배하던 논리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음이 증명된다. 이는 믿음이 없다면 지옥이라고 단언하며 권력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교회의 기조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다. 필립 풀먼은 기독교 교리를 통해 의미가 반전된 데몬의 의미를 판타지소설의 중요한 소재로 되살려내, 교회를 향한 비판을 구체화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강연에 나선 그는 우리는 진리를 알고 있다. 그 진리를 믿지 않으면 너희들을 죽이겠다고 말하는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이 바로 세상을 망치는 장본인이라고 말한 바 있다. 각자의 고유한 논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극단의 폭력과 다름없다는 주장이다. 원작 소설 <황금나침반> 3부작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사람들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긍정할 수 있는 힘을 되찾아야 한다고 설득한다. 성체위원회의 음모를 파헤치는 장본인은 다름 아닌 자유의지로 용기 있게 세상과 맞서는 소녀 리라다. 아쉽게도 영화 <황금나침반>의 무게중심은 빠르게 전개되는 리라의 모험에 있다. 그러나 모험의 이면에는 충분히 곱씹고 유추해도 좋을 근본적인 질문들이 숨어 있다.
필름 2.0 송순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