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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이 늘 바라고 원하지만 막상 쉽지 않은것이 마음의 평강입니다. 왜냐면 우리 마음을 요동치게 만드는 일들이 숱하게 있기 때문이에요. 심지어 어떤 때는 따지고 보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아주 작은 일때문에 그만 마음이 조각나 버리고 흔들리는 그런 경험을 합니다. 이런 저런 노력을 해 보지만 쉽지가 않아요. 여러분 지난 한 주간 어떠셨어요?
오늘 본문 7절을 보니까 “하나님의 평강”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성경원문을 보면 에이레네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우리 성경에서는 문맥에 따라 어떤 곳에서는 평화 또 어떤 곳에서는 평안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같은 말이에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평강이죠.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평안에 관한 그림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그림은 아름다운 가을 산 자락에 잔잔하게 뻗어있는 맑은 호수의 그림입니다. 호수 위에는 푸른 하늘에 풍개 구름이 두둥실 떠있어요. 산 기슭의 빨간 단풍잎들과 아름답게 어울리는 햇살이 한 없이 평화롭기만 합니다. 도 한 그림은 바닷가입니다. 온통 먹구름이에요. 하늘도 캄캄합니다. 장대깉은 비가 쏟아지고 성난 파도가 무서운 기세로 바위에 부딫힙니다. 그런데 그 바위틈에 작은 굴이 있어요. 그 안에 새 집이 있는데 어미새가 아기새들을 품고 잇습니다. 아기새들은 그 폭웅우속에서 새근 새근 잠자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말하는 에이레네는 후자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우리가 아무것도 염려할것 없고 근심 걱정 억울함 분노 두려움 이런것들이 하나도 없는 그런 환경속에서 오는 평안이 아니에요. 그런것들이 다 있는것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으로 인하여 오는 그런 평안인거에요.
오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사도 바울이 지금 여러가지 염려와 근심으로 가득찬 빌립보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평강을 말하고 있는데, 여러분 이 편지를 쓰는 사도 바울이 지금 어디에 있나요? 여전히 감옥에 있어요. 인권 인권 하는 미국의 감옥도 무시무시 한데 당시는 어떠하였겠어요. 건강도 악화되었습니다. 이미 스스로 죽음이 예견되고 있었어요. 더군다나 들려오는 바깥 소식은 주를 사랑하는 성도들이 잡혀가고 환난당하는 소식이에요.
더군다나 그는 열방을 향한 복음 전파의 꿈을 안고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왔어요. 오는 과정도 풍랑을 만나서 보통 힘든게 아니었잖아요. 또 하나님께서 분명히 내가 로마로 보낸다.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도 하셨어요. 그런데 이게 뭡니까? 충분히 하나님께도 따지고 원망하고 할 만한 그런 여건이었어요. 그런 상황속에서 그의 마음이 과연 평안을 누릴 수 있었겠습니까?
사람으로는 안되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평강으로는 될 줄로 믿습니다. 사도바울이 지금 그 하나님의 평강을 말하는것입니다. 지금 그가 평강에 관한 세미나를 하는것도 아니에요. 평안에 관한 깨우침을 주는것도 아니에요. 자신의 경험입니다. 이 비참한 감옥속에서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평강으로 넘치게 되었나? 어떻게 생각하면 원통 할 수도 있고 억을 할 수도 있고 화 날 수도 있고 그런 형편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평강을 회복하였는가? 간증하고 있는거에요. 그리고 지금도 이런 저런 아픔을 겪고 흔들리고 요동칠 수 밖에 없는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참 하나님의 평강으로 채울것을 당부 하는거에요. 여러분 우리가 가져야 할 평강이 바로 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강인줄을 믿습니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그 평안을 누릴 수가 있을까? 본문6- 7절을 다시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세가지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는 원리를 주십니다. 그 첫번째 원리는 따라 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성경원어를 보면 “메덴 메림나테” 이렇게 써져 있습니다. 메덴은 금지를 나타내는 현재형 명령법입니다. 메림나테는 염려에요. 그러니까 아무것도 염려 하지 말라는 말은 “염려를 지금 당장 중단하라”는 말입니다. 왜냐면 염려라는것이 순식간에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망쳐버리거든요. 이게 또 얼마나 전염성이 빠른지 주변도 그렇게 만들어 버리거든요. 그래서 일단 스톱 하고 말씀 하시는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울거나 투정을 부리거나 하면 이런 말 합니다. 그만 뚝! 여러분 이런 저런 염려가 있으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시간 말씀 하세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우선 당장 염려를 중단하라” “염려 뚝”
긍정적인 사고방식이란 말을 처음 쓴 노만 빈센트 필 박사는 어떤 연구기관의 조사를 인용하여 염려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마 많이 들어 보셨을거에요. 사람이 걱정하는 일중에서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일에 대한 걱정이 40%,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한 걱정이 30%,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이 22%, 우리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에 대한 걱정이 4%라고 나머지 4%가 정말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인데 그런것들은 사실 우리가 염려 한다고 조금도 변화되지 않는다는거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연구기관 보고서도 안 보시고 염려에 대하여 이미 이렇게 말씀 하셨어요. “너희중 누가 염려한다고 해서 키가 한자를 더 자라게 할 수가 있겠느냐?” 매일 매일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으로 살으라고 하시는거에요.
무엇보다 염려를 하면 슬그머니 따라 붙는것들이 있어요. 슬픔, 불안, 초조, 두려움, 이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동반하게 되는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신경질적인 됩니다. 말투가 거칠어 지고 쉽게 짜증도 부리고 화도 냅니다. 보통때는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고 아무렇지 않게 들리고 보이는 사소한것들이 다 걸려요. 그러면 마땅히 생각 할 바를 못해요. 소심하게 되고 정말 영양가 하나 없는 생각에 사로 잡혀서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심리적으로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버립니다. 당연히 마음에 평강이 있을 수가 없지요.
그러면 몸에 반드시 이상이 생깁니다. 잠언17장 22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사람의 염려는 그 사람의 뼈를 마르게 한다” 염려가 건강을 해친다는 말이에요. 의학보고서에 의하면 위질환의 80%가 신경성 이라고 합니다. 염려를 하면 사람이 긴장합니다. 신경질적이 되죠. 그러면 위액이 비정상적으로 분비가 된답니다. 당연히 위염 위계양에 걸리기 됩니다.
2차세계 대전 연구 보고서 중에 이런 보고도 있어요. 2차대전때 죽은 미국 사람이 40만명 정도인데 그 기간에 심장병으로 죽은 사람이 2백만이랍니다. 그런데 그 중 절반인 100만이 군인 가족이랍니다. 남편 아들 애인을 전쟁에 보내고 정신적인 긴장과 불안 염려로 인하여 심장 질환이 발생하여 죽게 되었다는거에요. 우리 몸안에 존재하는 암세포 같은 나쁜 세포들도 이런때에 폭발적으로 핵분열을 합니다.
더 위험한것은 영적인 문제가 발생을 한다는 사실입니다.믿음으로 인내로 어렵게 쌓아 놓은 믿음의 기초를 이 염려가 흔들어 댑니다. 염려라는 자체가 그렇잖아요. 하나님에 대한 신뢰도가 낮아지는게 염려 아닙니까? 그래서 기도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조지 물러는 이런 말을 했어요. “믿음이 시작되는곳에는 염려가 사라지고 염려가 시작되는곳에는 믿음이 끝난다.” 우리가 염려에 압도되어 하루 하루 지나다 보면 진짜 그래요. 하나님의 모습이 자꾸 흐려집니다. 하나님의 음성도 희미해져 가요. 더군다나“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자를 찾고 있는 사탄마귀가 가만히 있겠어요.” 아차 하는 순간에 하나님과의 사이에 두터운 벽을 쳐 놓은 방에 가두어져 버리는거에요.
사랑라는 여러분! 염려가 들때마다 먼저 당장 염려를 중안하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서 5장 7절을 보면 조금더 구체적으로 염려를 중단 할 수 있는 방법을 말씀 합니다. 이렇게 말씀 해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주께서 너희를 권고하시리라” NIV 영어 성경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Cast all your anxiety on him, because he cares for you” 모든 염려를 주님께 Cast 진짜 던지는거에요………... 우리의 모든 사정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 그 모든 염려 다 받으실줄로 믿습니다.
두번째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는 그리하면의 원리입니다. 따라합니다.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아멘
여러분 성도들은 염려대신 기도하고 간구로 하나님께 아뢰는 사람들임을 믿습니다.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로 아뢰는것을 통틀어서 우리는 기도하고 하지요? 염려하는 시간에 하나님께 기도 하는거에요. 염려하고 있는것들을 하나님께 간구하는거에요. 왜냐면 염려를 막는것이 기도이고 염려로부터 해방시키는것이 기도이기 때문 이에요. 염려에 대한 해결책이 다른것이 아니라 바로 기도라고 말씀하시는거에요. 여러분 지난 한 주간 염려했던 제목들 있죠? 기도의 제목으로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염려를 기도로 바꿀 줄 아는 지혜와 능력이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염려하기 쉬운것들에 대하여 기도할때에 주의 할점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일에 기도 하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감사함으로 기도 하는거에요. 여러분 우리가 기도 할때에 혹시 골라가며 기도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기도 할것 안할것 고르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 하시기를 바랍니다. 왜냐면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이거든요. 우리 가 자녀들을 키울때도 그래요. 분명히 무슨 염려가 있고 걱정이 있는는것 같은데 엄마 아빠한테 말 안 하면 마음이 섭섭합니다. 나를 못 믿어서 그런가? 내가 해결해 줄 능력이 없다고 생각을 해서 그런가? 그런데 자녀들이 미주알 고주알 이야기 하면 얼마나 기쁜지를 모릅니다. 부모와 자녀들간에 서로간의 신뢰가 쌓여 나가게 마련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 같아요. 하나님이시니까 당연히 우리의 속 사정 까지도 다 아시지만 우리가 작은 일 큰일 관계없이 모든 일에 기도하고 간구하고 아뢴다면 하나님과의 돈독한 신뢰의 관계가 이루어지는거에요. 그래서 시편보세요. 다윗은 정말 낱낱히 자신의 아픔, 슬픔, 걱정, 염려, 두려움 자신의 모든 겉사정 속사정을 다 하나님께 토로합니다. 그럴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시는 평강이 있는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어요. 신뢰의 관계가 깊이 쌓이는거죠. 그러니까 그런 기도의 토로 후에 그가 어떻게 변합니까? 평강을 줄 상황은 하나도 안 바뀌었지만 그는 진심으로 하나님께 찬양드리고 감사드리고 경배와 영광을 올려 드리는 모습을 우리는 수도 없이 볼 수가 있어요.
또 하나님께서는 감사로 기도히고 아뢰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염려와 감사는 서로 반대의 마음 상태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염려 근심으로 괴로워하는 것은 그 문제를 내가 해결해 보려고, 미리부터 근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내가 앞일을 헤쳐가려고 먼저 고민부터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감사하다는 것은 그것과는 반대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내 염려 근심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이야기에요.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감사 할 수가 있어요. 더군다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든것까지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또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응답을 주시잖아요. 우리는 아이스 크림 간구 했는데 거기다가 체리 얹어서 주시지 않으십니까? 그러니까 미리 감사 할 수 있잖아요. 그렇게 감사함으로 기도 할때에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사로 잡는 무게 중심이 되는거에요. 이 감사 기도가 틀 풍성하시기를 바랍니다.
세번재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는 원리입니다. 따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 하나님의 평강을 주십니다. 본문 7절이 말씀 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란 말은 우리의 구세주이시고 삶의 주인되신 예수님을 말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셨나요? 무엇이 그 분을 우리의 구세주가 되게 하시고 삶의 주인이 되게 하셨나요? 바로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우리의 죄, 아니 나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 죽으심을 이해하는 거에요. 왜 채찍에 맞으셨나? 깨닫는거에요. 왜 능욕을 당했고 왜 침 밷힘을 받으셨나 믿음으로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못 박하셨고 누구를 위하여 죽으셨나? 그 십자가의 사건이 내 심령속에서 살아 있는거에요.
그래서 “나를 위하여, 나의 죄를 위하여 그렇게 하셨구나…나를 살리시기 위하여 죽으셨구나” 가슴 절절이 고백되는것입이다. 그리고 다시 사심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소망이 되시고 우리로 하여금 영원히 하나님 품안에서 영광을 누리며 눈믈 없고 고통 없고 사랑만 있는 그 복된 삶의 주인공이 되게 하셨구나… 여러분 진정한 하나님의 평강은 거기에서 오게 됩니다. 아무리 염려를 중단하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감사로 아뢰어도 이 모든 하나님의 평강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가능하다는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날개 아래 진정으로 안겨 있을때에 우리에게 주시는 복된 선물이란거죠.
그 십자가와 부활의 믿음을 가슴 깊이 품고 소망으로 삼는 자들에게 비로서 그 평안이 살아서 역사 한다는거에요. 영원한 하늘나라에 대한 복음의 진리가 내 영혼을 지배할때에 참 평안이 임하게 되는거에요. 고통을 평안으로 바꾸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복음으로 나에게 온전히 입히어 질때에 참 하늘의 평화가 오는것입니다. 일시적인 감정의 평강이 아니에요. 깊은곳에 염려를 감추고 겉으로 포장된 그런 평강이 아닙니다. 모든 염려를 하나님의 평강으로 바꾸는 십자가의 비밀인것입니다.
위대한 복음전도자 성 프란시스가 하루는 자기 집 하인이 우물에서 물 을 길어 오는 모습 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물을 길을 때마다 한 가지 이상 한 행동을 했습니다. 그리 깊지 않은 우물에다 큰 물통 을 내려 물을 가득히 담은 후 끌어 올리는데 물통을 내리기 전에 항상 조그 마한 나무토막 하나를 그 물통안 에 던져 넣는 것이었습니다. 프란시스는 참 신기하다 싶어 그 하인에게 그 이유를 물어 보았다고 합니다. "왜 물을 길어 올릴 때마다 물통 속에 나무 조각을 집어넣어 끌어올리느냐?" 그랬더니 그 하인이 이렇게 대답 했습 니다. "물을 퍼 올릴 때 나무 조각을 물통 안에 넣으면 물의 요동이 훨씬 줄어 듭니다.그래서 물이 밖으로 흘러 넘치는 것을 최대한 막을 수 있습니다. 나무토막을 안 넣으면 물이 제 마음대로 출렁거려서 꺼내고 보면 반 통 밖에 안될 때가 많거든요."
하인의 설명을 들은 프란시스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 자기 친구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친구여 우리는 얼마나 자주 흔들리는 마음의 물통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두려움으로 흔들리는 마음, 고통 으로 심하게 요동하는 마음, 절망으로 부서지는 마음, 이것은 마치 심하게 흔들리고 출렁 거리는 물통과 같은 것이지. 그러나 그럴 때마다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막대기를 던져 보게."
여러분 마음이 요동칠때마다 여러분의 심령속에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던지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흔들릴때에 즉각 나 때문에 고통당하신 그 십자가의 주님을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라는 말이에요. 마음이 답답하고 고요가 깨질대에 그럴 때마다 바로 캄캄한 어둠을 헤치고 부활하신 그 예수님을 믿음의 눈으로 보라 보시기를 바랍니다.
말씀 맺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세요. 빌립보 교회만 평강하기를 원하시는게 아니라 우리 가주 장로교회도 평강하기를 기뻐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민수기 6:26절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내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또 요한복음 14장 2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것은 세상이 주는것 같이 아니하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
세상이 주는 평안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평안으로 우리 모두 늘 행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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