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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주가가 지난주 한때 사상 최고가를 찍었다. 세계 시장에서 불티나게 팔리는 LED TV와 휴대전화가 힘을 보태긴 했지만 주가 상승을 이끈 동력은 반도체 부문의 부활 조짐이다. 실제 올해 2분기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은 메모리 업계에서 유일하게 흑자를 기록했다. 엘피다·난야·마이크론 등 주요 경쟁사들이 2007년 이래 적자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과는 크게 다른 행보다. 꽁꽁 얼어붙어 있던 메모리 시장에도 화색이 돈다.
올 상반기 내내 0.9∼1.1달러 선에 머물던 1기가비트 DDR2 D램 고정 거래 가격은 이달 들어 뚜렷한 반등세를 보이고 있다. 8월 말 현재 가격이 1.4달러를 넘어섰다. 삼성전자가 주력 상품으로 밀고 있는 40나노급 DDR3 D램 역시 대박 조짐을 보이고 있다. 27일 찾아간 경기도 용인시 기흥의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선 오랜만에 “없어서 못판다”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다.
주식 투자자들은 삼성전자에서 흘러나오는 이런 ‘굿 뉴스’를 이전의 반도체 초호황 시절과 연관 짓고 싶어하는 눈치다. 일각에선 ‘삼성전자가 메모리 반도체로 또다시 조(兆) 단위의 수익을 거두는 대박 신화를 재현할 것’이란 희망 섞인 관측이 나온다. 반도체 전문가나 증권가 애널리스트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삼성이 최근 3년간의 혹독한 ‘치킨 게임(출혈 경쟁)’에서 선두 자리를 더욱 굳건히 지킨 데다 유일하게 투자 여력이 있는 만큼 이제 완벽한 독주 체제를 즐기는 일만 남았다”는 장밋빛 전망 일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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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삼성전자는 말을 아끼고 있다. 현재의 상황이 팡파르를 울릴 만큼 호전된 상황이라고 보기 힘들다는 이유에서다. 삼성전자 내부에서는 오히려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 모처럼 봄 기운이 퍼지는데도 부동의 1위인 삼성전자는 이처럼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경쟁사·정부 얽힌 새로운 게임 양상”
1980년대 미국 반도체 업계는 라이벌 일본 업체의 맹공에 백기를 들었다. 그런 D램 업계는 90년대 이후에도 세 차례나 피말리는 서바이벌 게임을 치러야 했다. 반도체 시장이 활황세를 보일 때마다 D램 업체들이 앞다퉈 증산 경쟁을 벌이거나 새로운 경쟁자들이 시장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쟁은 결국 제살 깎아 먹기식 출혈 경쟁으로 이어졌다. 그때마다 버틸 여력이 있는 몇몇 회사만 살아남고 맷집이 약한 업체들은 중도에 타월을 내던졌다.
어느 한쪽이 쓰러질 때까지 계속되는 이 싸움에선 승패는 물론 잔류와 퇴출도 명확히 갈렸다. 전문가들은 이런 D램 업계의 죽고살기식 경쟁을 ‘치킨 게임’이라고 이름 붙였다. 50년대 미국 젊은이들이 즐겼던 자동차 게임에 빗댄 것이다. 차를 타고 서로 마주보고 돌진하다 먼저 핸들을 꺾는 운전자가 지는 게임 방식과 엇비슷하다는 이유에서다.
2006년 말부터 최근까지 D램 업계의 숨통을 조였던 ‘3차 치킨게임’도 예외 없이 혹독했다. 2006년 대만 업체들의 증설 경쟁으로 촉발된 출혈 경쟁에 허덕이는 상황에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난해 미국발 금융위기까지 터졌기 때문이다.
부동의 1위인 삼성전자조차 결국 공급 과잉에 따른 가격 하락을 견디다 못해 올해 1분기 7년 만에 반도체 부문에서 적자를 기록하는 수모를 겪었다. 하지만 이번 치킨 게임의 결과는 이전과 사뭇 달랐다. 승자와 패자를 확실히 가리지 못한 채 어정쩡한 상태로 휴전이 돼버린 것이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안두수 차장은 “치킨 게임이 사실상 막을 내렸지만 독일의 키몬다가 올해 1월 파산한 것을 빼고는 일본·대만 등의 주요 경쟁업체들은 거의 모두 살아 있다”고 말했다.
이는 앞서 벌어졌던 ‘1차 치킨 게임(96∼98년)’이나 ‘2차 치킨 게임(2001∼2002년)’ 때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당시엔 두 번 모두 내로라하는 대형 업체들이 대거 탈락했다. 1차 치킨 게임 땐 LG전자와 미국 모토로라, 일본 후지쓰 등이 반도체 사업에서 손을 털었다. 이와 더불어 일본 NEC와 히타치가 반도체 사업부문을 서로 합쳐 엘피다를 설립하는 등 일본 업체들의 철수가 두드러졌다. 2차 치킨 게임의 결과도 비슷했다. 반도체 사업의 누적 적자를 견디지 못한 일본 도시바와 미국 IBM이 결국 포기했다. 반면 살아남은 업체들은 과열 경쟁과 공급 과잉 현상을 일시에 해소하는 승자의 기쁨을 만끽했다. 하지만 이번 치킨 게임 승자의 전리품은 초라하다. 그 이유는 바로 각국 정부의 개입 탓이다.
삼성경제연구소 박성배(반도체·LCD 담당) 수석연구원은 “반도체 사업 진출과 퇴출을 시장에 맡겼던 이전과는 달리 이번엔 각 나라 정부가 반도체 업계 지원에 적극 나섰다”며 “이로 인해 경쟁사는 물론 경쟁사의 정부까지 얽히고 설킨 전혀 새로운 게임이 펼쳐지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일본 정부는 지난해 말 세계 3위 D램 업체인 엘피다에 300억 엔(약 3900억원)을 지원한 것을 비롯해 1100억 엔 규모의 금융권 차입도 다리를 놔줬다. 대만 정부는 6개 메모리 업체를 통합해 하나의 회사(타이완메모리)로 만드는 대만판 ‘빅딜 정책’을 펴고 있다. 중국 정부는 대만산 반도체 구매 의사를 밝히는 등 측면 지원에 나설 태세다.
키몬다 역시 파산 직전까지 독일 작센주의 자금 지원을 받았다. 미국 마이크론의 경우 전략적 제휴 관계인 인텔로부터 자금 수혈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불안한 휴전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여전히 전 세계적으로 12인치 웨이퍼 기준으로 10만 장 규모의 공급 과잉 상황이 해소 안 된 것으로 보고 있다. 반도체 가격이 조금 꿈틀거리기라도 하면 잠시 소강 상태였던 공급 과잉 현상이 언제라도 다시 불거질 수 있다는 판단이다.
익명을 요구한 삼성전자 고위 임원은 “반도체 공장 신설 등 대규모 투자에 나섰다가 경쟁사들에 반도체 수요가 다시 살아나는 것 아니냐는 ‘잘못된 신호’를 줄 수도 있다”며 “설령 여력이 있다 해도 이전처럼 공격적인 투자에 나서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DDR3·원낸드 등 주력 계획
삼성전자는 D램 시장이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난 것만은 분명해 3분기 반도체 부문 실적이 2분기보다 더 나아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다만 시장 지배력을 더욱 키우기 위한 전략은 새롭게 손을 본다는 방침이다. 이전처럼 대규모 선행 투자로 경쟁사를 압도하는 물량 공세보다는 고부가가치 제품과 고객 특화형 제품으로 차근차근 점유율을 넓혀간다는 포석이다. 상태가 안 좋은 경쟁사들이 정부 지원 등으로 끝까지 버티는 ‘지구전’ 태세로 들어간 데 따른 대응이다. 국내 조선업계가 돈이 안 되는 벌크선이나 유조선 대신 해양석유탐사시설 등 고부가가치 선박에 전력을 집중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삼성전자에 당장 떨어진 과제는 시장에서 품귀 현상까지 빚고 있는 DDR3 D램의 양산 체제 구축이다. DDR3는 기존 DDR2보다 처리 속도가 두 배 빨라 수요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삼성전자는 아직 전체 D램의 20%에 불과한 DDR3 생산 비중을 연말까지 50%까지 끌어 올릴 계획이다. 절전형 반도체 특화 전략도 서두르고 있다. 삼성전자가 지난 7월 선보인 40나노급(1㎚는 10억분의 1m) 2기가 DDR3는 기존 제품에 비해 전력 소모량이 40% 적다. 24시간 가동해야 하는 서버용으론 최상의 제품으로 떠올랐다. 컴퓨터 서버용 시장은 전체 메모리 시장의 8%에 불과하지만 일반 D램보다 4∼6배 이상 비싼 값에 팔린다. 삼성전자가 가장 신경을 쓰는 대표적인 ‘하이엔드(최고급 상품) 시장’이다.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박순규(전략그룹 부문) 부장은 “저전력 반도체는 경제성 측면뿐만 아니라 에너지 절약, 환경 보호라는 세계적 조류와도 맞아 떨어지는 만큼 수요가 폭발할 것으로 보여 총력을 다해 키워 나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물론 고민도 적지 않다. 이전의 노트북·휴대전화처럼 폭발적으로 메모리 반도체의 성장을 받쳐줄 신제품 출현을 기대할 수 없어서다. 하이닉스를 비롯한 경쟁업체들도 조만간 40나노급 양산 체제 경쟁에 뛰어든다. 하지만 후발 주자들을 완전히 따돌릴 수 있는 18인치 웨이퍼 공장 신설은 여전히 ‘청사진’으로만 머물러 있다. 18인치 웨이퍼는 상용화되면 현재 가장 일반적인 12인치에 비해 생산성이 2.5배 늘어난다. 하지만 공장 하나 짓는 데 8조원가량 들고 장비업체들도 몇천억원을 쏟아부어야 하는 탓에 아직 상용화할 엄두를 못 내고 있다.
비메모리 분야를 키우는 것도 쉽지 않은 과제다. 삼성전자는 비메모리 분야에선 여전히 후발주자에 머물러 있다. 당장 올 2분기만 봐도 삼성전자가 비메모리 부문에서 거둔 매출(8억1000만 달러)은 비메모리 분야 부동의 세계 1위인 인텔(72억8000만 달러)의 9분의 1에 그친다. 삼성전자는 그래서 메모리와 비메모리 기능을 결합한 퓨전 제품에 주력할 계획이다. 낸드 플래시에 S램을 장착한 ‘원낸드’, 여러 종류의 모바일 D램을 하나로 합친 ‘원D램’ 등이 그런 전략에서 나온 것들이다.
삼성전자는 요즘 SSD(Solid State Drive)도 세밀하게 들여다 보고 있다. SSD는 반도체를 이용해 정보를 저장하는 장치로 몇 개의 반도체를 하나로 묶은 일종의 패키지 상품이다. 장차 하드디스크를 대체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 시장엔 이미 인텔 등 비메모리 강자들도 눈독을 들이고 있다. 시장성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지난해 약 6000만 달러에 그친 세계 SSD 시장은 2012년엔 56억 달러 규모로 급성장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