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근 高永根 (1853-1923)】 "명성왕후 시해 우범선 처단"
"적괴참살복국모수 賊魁斬殺復國母讐"
역사를 자세히 공부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우범선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기 힘든다. 다만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의 아버지라고 하면 그러냐고 할 뿐이다. 하지만 우범선의 우리나라 근대사에 있어 꽤나 굵직한 사건에 중심에 있던 인물이다. 그는 1895년 10월8일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 당시 일본이 경복궁에 데리고 들어갔던 조선훈련대의 제2대대장이었다. 1857년생인 우범선은 을미사변 직후인 1896년 1월 서울에 처자를 남겨둔 채 일본으로 망명해 사카이 나카라는 일본 여자와 결혼했다. 그러나 우범선은 망명 7년째 되던 1903년 11월24일, 히로시마현 구레시에서 한국에서 온 자객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다. 어떤 일로 살해되었을까.
우범선을 살해한 자객은 고영근이었다. 우범선은 살해한 고영근은 일본 경찰에 자수했고 그는 살해이유에 대해 ‘국모시해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일본의 우익단체 흑룡회는 1933년 『동아선각지사기전』을 편찬하면서 우범선이 명성황후의 사체를 버리라고 지시한 기록을 담았다. 그 노트가 쓰이기 약 30년 전인 1903년 11월 우범선을 살해한 고영근이 자수할 때 소지했던 ‘한국 정부 앞으로 보내는 서한’에도 우범선에 대해 ‘시국모소체지극역대악(弑國母燒體之極逆大惡, 국모를 시해하고 그 몸을 소각한 극역 대악)’이라고 되어 있어 우범선이 사체를 소각했다는 사실은 당시 일반인에게도 널리 펴져 있었다.
그럼 우범선은 왜 이런 일에 가담했을까. 그는 1857년 서울의 중인집안에서 태어나 별기군의 간부로 일하고 있었는데 당시 일본교관이 지도하였다고 하며 이 과정에서 극심한 모멸을 당하자 사직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불만은 민씨 일파 등 수구세력에 대한 불만과 저항심을 품게 된 것은 아닌가 보고 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그는 훈련대 해산이 결정되자 훈련대 제1대대장 이두황 등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고 1896년 1월 일본으로 망명한다. 우범선은 도쿄의 혼고에 살고 있을 때 주인집 하녀인 사카이 나카라는 열다섯 살 어린 일본 여성과 결혼했다. 미우라는 나카의 중매인이 우범선의 인품에 대해 묻자 “좋은 친구이지만 언제 살해될지 모르는 사내야. 이 점을 감안해서 중매를 서주게”라고 대답했습니다. 미우라는 우범선이 조선에서 보낸 자객에 의해 언제 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고영근은 1854년생으로 상민출신이다. 그는 민씨 가문의 실력자였던 민영익 가의 청지기, 즉 시중꾼으로 궁중을 출입했다. 그리고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아 종2품직인 경상좌도병마절도사까지 올랐다. 그러던 그가 1903년 10월 28일 히로시마현 구레시에 있는 우범선의 집에 나타났다. 그는 우범선의 경계를 풀게 하고 자신도 구레에 살고 싶으니 방을 얻어달라고 부탁한다. 우범선은 고영근을 자신의 집에 사흘간 기숙시키며 살 집을 알아봐주었으며 고영근은 오카야마에 있는 노윤명에게 연락하여 노윤명도 구레에 도착했다. 1903년 11월 24일 저녁 6시경, 우범선이 대접한 저녁자리에 고영근이 초대받았다. 새로 구할 방을 정하고 집주인과 계약을 마친 것이 그 이유였다. 그 자리를 즐기던 중 고영근은 단도를 꺼내 우범선의 오른쪽 목을 찌르고 수차례 찔렀다. 그리고 노윤명은 준비해 두었던 쇠망치로 우범선의 머리를 난타하니 우범선은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47세였다. 당시 고영근은 49세였고 노윤명은 30세, 우범선을 살해한 뒤 인근에 있는 와쇼마치파출소로 찾아가 자수했다. 그러면서 고영근은 조사과정에서 “우범선은 왕비를 살해한 극악무도한 자이므로 한국의 신하로서 그대로 있을 수 없어 죽였다”고 진술했다.
12월24일 히로시마지방재판소에서 열린 공판에서 고영근은 이렇게 주장했다. ‘예심결정서를 읽어본즉, 그대로 해도 좋으나, 단지 ‘모살죄’라고 하는 것은 유감이다. ‘적괴참살복국모수(賊魁斬殺復國母讐·적괴를 참살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의 여덟 자를 넣어야만 본뜻이 되며, 또 노윤명을 공모자라고 그러는데 그는 전적으로 종범으로 단지 방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변호인들은 고영근, 노윤명을 의사(義士)라고 주장했고 일본에서도 충신효자의 모살죄는 경감해주는 판례가 있다며 형량 경감을 주장했다. 그리고 이 소식이 알려지자 고영근의 죄를 사면해야 한다는 움직임도 일었다. 이에 고종도 주한 일본공사를 보소 고영근과 노윤명에 대한 선처를 호소했다. 그리고 12월 26일 히로시마 지방재판소에서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럼 우범선이 살해당한 것에 대해 일본은 어떤 반응을 했을까. 일본 언론에서는 지방지 뿐만 아니라 전국지에서도 이 사건을 보도했으며 사건 현장의 도면까지 그려가며 참상을 전했다. 그리고 일본 언론은 우범선을 ‘열사’라고 표현했으며 ‘강개의 지사’인 우범선이 살해 당한 것은 비문명의 오욕이라고 보도했다. 우범선은 현재 구레시의 작은 사찰에 잠들어 있다. 일본인들의 묘 가운데 유일한 한국인의 묘다. 대한제국에서는 민씨들이 은밀히 축하연을 열만큼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것에 대한 한을 덜려고 했다.
이 사건에 대해 일본은 축소하려고 했다. 고영근이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벌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영근의 노복이었던 노윤명은 적극적으로 해명했다. 그는 일본에 오기 전에 거듭 지시를 받았다고 했는데 궁녀를 통해 황태자에게 복수를 위임받았고, 일본에 오기 전에 거듭 지시를 받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고영근은 자신의 독자적인 판단에 의한 암살이라고 했다.
‘고영근은 국왕의 명에 의해 망명자들을 죽이기 위해 처음 우리나라에 도래한 자로서……’ 「고베유신일보」 1903년 12월 2일
대한제국과 일본에서는 이 사건의 배후로 고종을 지목하였다 .고종은 왕비가 살해된 후 ‘역괴 조희연, 우범선, 이두황, 이진호, 이범래, 권형진은 불문장단하고 즉각 참수하여 짐에게 바쳐라’라고 하였다. 이미 고종은 우범선에게 참수형을 내린 것이다.
고영근에 대한 고종의 신뢰는 두터웠다. 1890년 외국상인들의 양품상점으로 시전상인들이 피해를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고종은 고영근에게 특명을 내려 시장을 폐쇄하게 하였다. 그러나 고영근은 정부가 외교와 개혁 노선이 달라 대립하던 독립협회를 강제 해산하자 이를 다시 세우는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1899년 6월에는 중추원 의장 조양식과 박정양 등 수구 대신들의 집에 연이어 폭탄이 투척되는 폭열탄 사건이 일어났다. 정부는 범인 체포에 1000원, 밀고에 500원의 상금을 걸었다. 이 사건의 배후에 있던 것이 고영근으로 그는 이 일로 인해 일본으로 떠났다. 그런데 이 폭탄 사건에 대해 꾸며낸 일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그러면서 일본에 와 있던 친일파들을 처단하려는 계획의 일환이라고 본 것이다.
‘능참봉 자의로 비석을 세우고 단독 자행을 대죄하기 위하여……’ 「동아일보」 1922년 12월 13일
고종 사후 2년, 능참봉에 지원한 백발의 노인이 있었다. 능참봉은 조선 시대 각 능(陵)의 일을 맡아 보던 참봉을 말하며 품계는 종9품이었다. 그리고 이에 지원한 이는 바로 고영근이었다. 그리고 고영근은 무덤을 지키면서 고종과 명성황후에 합장되어 있는 홍릉에 비밀리에 비석을 세웠다. 이 비석은 홍릉이 청량리에 있을 때 만들어진 것으로 고영근이 바로 세우기 전에는 홍릉 한 구석에 미완의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비석에는 ‘대한 홍릉 명성황후’라는 8글자만이 새겨져 있었고 나머지는 미완이었다고 한다. 공백이었던 이유는 일본이 존호와 황제라는 명칭을 쓰지 못하게 하려는 일본의 규제 때문이었다. 이에 고영근은 극비리에 인부를 동원해 ‘고종태황제’를 새기고, ‘대한고종태황제홍릉 명성태황후부좌’라고 합장을 의미하는 부좌를 추가해 비문을 완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