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은 주일마다 '바이블25'와 '당당뉴스'에 연재 중입니다.
축복의 언어
설 명절을 맞는다. 세간의 경험에 따르면 설이 지나 음력 대보름 어간이 되면 어느새 봄이 기웃거린다. 아직 시절은 겨울 한복판이지만, 새 봄에 대한 기다림과 설레임으로 사방이 부석거린다. 생명있는 것들이 모두 제 모습을 숨기고 지내는 엄동설한인데, 벌써 봄이라니? 언제나 세월의 달력보다 마음의 달력이 빠른 셈이다.
며칠 전에 신앙과 담을 쌓고 사는 어느 교수 분과 새해 인사를 나누었다. 평소 내가 교회에서 하는 대로 “새해 복 많이 받으셨다지요”라고 했더니, 그이는 정색을 하며 평소 내가 경험한 이들과 다른 반응을 보였다. “아니예요. 저 앞으로도 계속 받아야 해요.” 아하! 그리스도인과 아닌 사람은 이런 차이가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은 우리나라 전통 예절의 어법도 같다. ‘새해 건강하셨다지요? 새해 번창하셨다지요? 새해 평안하셨다지요?’ 듣자니 한글학회 한갑수 선생의 이론이다.
설날의 즐거움은 마음껏 덕담(德談)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흔히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미래의 소망을 말하는데, 원래 덕담은 이미 복을 받은 것으로 인정하고 축복하는 것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셨다지요.” 그 모범은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선지자들이 한 예언의 말씀은 그 시선이 현실에 정지되지 않고, 현실보다 앞서 나갔다. 예언자들은 미래의 일을 말하면서도 완료형을 사용한다. 예언형 문장을 가리켜 역사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그러니 축복이든 희망이든 덕담은 결코 가볍지 않다.
교회력으로 주현절은 축복의 절기다. 독일에서는 주현일(1.6)에 현관문이나 정문 벽에 축복문을 쓴다. 마치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입춘축(立春祝)과 같다.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 ‘봄이 시작되니 크게 길하고 경사스러운 일이 많이 생기기를 기원한다’는 내용과 비슷하다. 교회 전통에서 주현일은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를 방문한 날로 축하한다. 그래서 작은 크리스마스, 세 박사의 날, 선물을 나누는 ‘박싱 데이’(Boxing Day)라고 부른다.
그런 이유로 주현절은 축복하는 때이다. 서양식 입춘축의 내용은 “주여 이 집에 은혜를 베푸소서”이다. 축복문의 형식은 올해의 경우 20와 25 사이에 동방박사 세 사람의 이름(카스퍼, 멜키올, 발타사)의 이니셜을 나란히 적는다. ‘20+C(Caspar)+M(Melchior)+B(Balthasa)+25.’ 이것을 풀이하면 라틴어로 ‘그리스도께서 이 집을 축복하시기를’(Christus Mansionem Benedicat)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카톡이든, 문자든 성탄과 새해를 알리는 이모티콘이 무성했는데, 웬걸 요즘은 많이 뜸해졌다. 너무 쉽게 인사를 전하는 만큼, 상대방도 대수롭지 않게 대한다. 가는 정이 가벼운 만큼 오는 정도 무성의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새해 인사와 인정을 나누는 다정함도 잠시 디스플레이에서 눈 깜빡일 새만큼만 머물다가 쉽게 휘발되니, 아쉬움이 크다. 어떻게 하면 사이버상의 언어가 아닌 진심의 언어를 회복할 수 있을까?
아일랜드 사람들은 축복의 언어에 민감하다. 겔트십자가와 영성시가 대표적이다. 그들의 영감 어린 기도문과 찬양가사에서 잘 드러난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해마다 2월 1일이면 짚으로 만든 십자가를 집 안 중심에 건다. ‘성 브리지드 십자가’이다. 밀짚을 사용해 가로와 세로로 엮은 십자가인데, 소생하는 봄을 맞는다는 의미이다. 환대(歡待)의 의미인 브리지드 십자가는 우리 집을 방문하는 사람에게 두 팔을 벌려 축복하는 모습이다.
아일랜드의 축복기도문이다. “주님! 내 손이 만지는 것들을 축복하기 원합니다. 내 귀가 듣는 것들을 축복하기 원합니다. 내 눈이 마주치는 것들을 축복하기 원합니다. 내 입이 단어 하나하나를 축복하기 원합니다. 내 이웃을 축복하기 원하고 그가 나를 축복하기 원합니다.”
아일랜드의 국화는 샴록(토끼풀)이다. 아일랜드에 복음을 전한 성 패트릭이 세 잎 클로버(three-leaf clover)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한 까닭이다. 아일랜드를 녹색의 나라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다. 그만큼 온 땅에 토끼풀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축복하라, 토끼풀 같은 삶일지라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복에서 배제된 사람, 그런 존재는 아무도 없다. 2025년 새해에도 반짝반짝 긍정하고, 두루두루 감사하고, 미리미리 은혜를 누리는 그런 모두이길 빈다.
첫댓글 "주여 이 집에 은혜를 베푸소서" 내 가정과 이웃을 위해 드릴 평생의 기도 제목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