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음보살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에 있는 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은 관음경에서는 모든 고통과 소원의 성취로, 천수경에서는 지옥에서도 구해주시는 다라니로, 화엄경에서는 깨달음의 향한 길잡이로, 반야심경에서는 지혜의 정수로 나타나시면서 세세생생의 모든 중생들에게 수많은 복덕과 가피를 주고 계신다. 관세음보살이 가진 수많은 눈과 수많은 손으로 우리 모두를 미혹에서 건져주신다고 하니 마음속에 관세음보살 한 분만 제대로 심으면 그 어떤 순간에도 두려울 것이 없을 것이다.
<이 땅의 관세음보살>이라는 연재를 통해 필자는 우리나라에서 관음성지라고 할 만한 곳들을 하나씩 살피보고, 그 곳에서 우리 앞에 나투신 관세음보살의 생생한 모습과 영험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연재에는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유명한 관음성지들도 있을 것이고,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들도 있을 것이다. 모쪼록 이 연재를 통해서 우리가 다시 한 번 관세음보살의 가피력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2006년 11월 옥천암에 있는 <보도각 백불(普渡閣 白佛)>이 서울시에서 매 달 선정해서 홍보하는 이 달의 서울시 문화재로 선정되었다. 보도각 백불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17호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서울로 도읍을 정할 때 성공을 기원하였던 불상이다.
이 불상에 대한 정확한 명칭은 ‘홍은동 보도각 마애보살 좌상(弘恩洞 普渡閣 磨崖菩薩 坐像)'이며, 간단하게 백불(白佛)혹은 해수관음(海水觀音)이라고 불린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서울 한 복판에 갑자기 무슨 해수관음이란 말인가?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이제 홍은동으로 발길을 돌려보자.
지하철 3호선 홍제역에서 시내버스 110, 170, 7018, 7730 번 중 하나를 타고 유원 하나아파트 정류장에서 내리면 눈앞에 냇가가 하나 보인다. 바로 홍제천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 키 높이 보다 더 높은 곳에는 내부순환도로가 다니고, 수많은 자동차와 사람들이 번개처럼 지나다니고 있었다. 바로 그 지점에 돌에 새겨진 하얀 불상이 눈에 띈다.
불상의 뒤쪽은 산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적당한 높이와 기울기로 불상과 사찰 그리고 그 동네를 감싸고 있음이 느껴졌다. '서울에 이런 곳이? 빌딩 숲만을 서울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로군' 이란 생각을 하면서 길을 건너가 보았다.
생각보다 꽤 넓은 차안과 피안을 가로지르는 냇물을 지나서 사찰로 들어섰다. 바로 옥천암이다. 옥천암은 천년관음기도도량이라고 알려진 꽤 영험 있는 사찰이다. 대웅전을 대신하는 수덕전에는 그 안에 신중단, 지장단, 산신단, 칠성단, 독성단, 영단을 좌우로 배치해 놓고 있다. (http://www.okcheonam.com)
매우 추운 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야외에 모셔진 백불 아래에서 기도를 하고 계신 보살들이 보였다. 추위마저도 두렵지 않는 저 간절한 소망은 무엇일까? 보도각 백불의 영험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보고 싶다는 충동이 밀려왔다. 그 때 사중 스님 한 분이 말을 걸어 주셨다.
그 스님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백불의 뒷모습까지도 알려주셨다. 백불 뒤쪽으로 돌아가 보면 커다란 바위에 깊은 물길 같은 것이 나 있다. 그것은 바로 일제 강점기 때 일본 사람들이 이 곳 백불이 너무 영험하다고 해서 그 정기를 없애기 위해서 불상의 정수리에서 아래쪽으로 길을 내버린 것이라고 한다. 어쩌면 이런 일이 다 있을까? 싶어서 백불 뒤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다시 발걸음을 돌려 종무소로 갔다. 그 곳에서는 옥천암과 백불에 대한 여러 가지 영험담을 들을 수 있었다. 이제부터 보도각 백불의 신비한 영험의 세계로 들어가보자.
덕삼총각 몽중가피 이야기
보도각 백불에 대한 영험담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다. 유력자와 관련된 영험은 태조 이성계의 한양도읍을 위한 기도와 흥선 대원군 부인의 고종에 대한 천복을 기원하는 기도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이야기들 보다 더 솔깃하게 들린 것은 바로 보도각 백불님의 ‘몽중가피'에 대한 영험담들이었다. 보도각 백불의 관세음보살은 간절히 기도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꿈속에 나타나서 그 소원을 들어주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조선 말 순조 7년, 지금의 고양시에 살고 있던 윤덕삼이라는 총각은 칠십이 넘는 노부모를 모시고, 나무장사를 해가며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그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서른이 넘도록 장가를 가지 못했다. 어느 날 나뭇짐을 지고 홍제동에서 세검정 쪽으로 내려가다 담배 한 대를 피며 고개를 들어보니 그 곳에 절이 보였다. 그리고 바로 옆으로 하얗게 색칠을 한 불상이 하나 보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바로 관세음보살상이었다.
그 앞에서는 스님과 많은 신도들이 기도를 하고 있었다. 한참을 넋을 잃고 쳐다보다가 기도를 마치고 오던 노보살에게 ‘간절히 바라면 꼭 한 가지는 이루도록 해주신다'는 말씀을 듣고 그때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소원을 빌었다. 그렇게 100일이 지난 어느 날, 덕삼은 꿈속에서 관세음보살의 가피를 받게 되었다. 꿈에서 보살이 말해준 대로 자하문 문이 열리는 첫 새벽에 처음 들어온 심 낭자와 혼사를 치르게 된 것이다. 그 후 덕삼은 심 낭자와 결혼도 하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가장 유명한 덕삼총각의 몽중가피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보도각 백불 관세음보살의 가피는 그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종무소에서 만난 옥천암 신도분들은 너도나도 자신들의 기도와 보도각 백불의 영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셨다. 이들은 모두 관음정근, 천수경, 신묘장구 대다라니 등 관세음보살과 관련된 경문을 읽거나, 다라니를 외우는 관음기도를 하루도 거르지 않는다고 한다.
몇 해 전 한 신도는 병명을 몰라 고생을 하면서도 100일 기도를 올렸는데, 100일이 지나자 결국 아픈 곳이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한다. 또 작년에는 경복고등학교를 다니는 한 학생이 이곳에 와서 내내 기도를 하다가 KAIST에 입학을 하게 된 후 자신의 부모까지도 이 절로 인도해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 절에서 기도를 하면 집안이 편안하고 화목해져서 부부간의 불화도 없어진다고 한다. 이 절의 신도들은 이렇게 말했다. “백날이 다 좋을 수는 없지만 기도의 시기가 지나고 보면 그 기도는 커다란 뭔가가 되어서 내 앞에 와 있는 것 같아요. 인연에 따라 더뎌지기도 하고 늦을 수도 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그렇다. 관음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처음에는 우연인가 싶다가도 나중에는 그것이 다 가피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의 간절한 소망과 관세음의 신묘한 가피력을 안고서 보도각 백불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보도(普渡)라는 말은 널리 중생을 구제한다는 뜻이다. 바로 관세음보살을 상징하는 말이다.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이 관세음보살을 ‘해수관음(海水觀音)'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아마 보도각 앞으로 흐르는 홍제천을 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며, 우리나라의 3대 관음도량에 있는 관세음보살처럼 이 곳의 보살에게서도 그만큼 커다란 가피를 바라는 신도들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눈에 띄는 하얀 불상과 빨갛고 도톰한 입술의 색감은 차라리 조금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하지만 면마다 꽃무늬가 수놓인 아름다운 보관을 쓰고 있는 것이나 굵은 목걸이와 팔찌 등을 보면 화려한 관세음보살의 모습을 그대로 조각해놓은 것임을 엿볼 수 있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 정도에 만든 것으로 추정하는 이 불상은 오른손은 손바닥이 밖을 향하도록 가슴 높이로 들어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 왼손은 왼쪽 무릎위에 올려놓은 아미타수인을 하고 있다.
보도각 백불은 365일 24시간을 내내 기도를 위해서 개방해놓고 있다. 버스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에도 금방 띌 만큼 하얀 관세음보살의 앞에는 영하의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용맹정진 기도를 하고 있는 신도들의 간절한 소망들이 꺼지지 않는 촛불이 되어 자리하고 있었다.
/자은림 (불교연구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