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도, 예술도, 과학도, 구제도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은 아니다
교육과 도덕성이 꼭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나치들도 매우 잘 교육 받았던, ‘서구 문화’의 문화적 보존자들이었던 것이다. 정부가 사람을 선하게 만들 수 없듯이, 교육은, 심지어 기독교 교육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을 선하게 만들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들은 교육과 자기 자녀들의 교육을 열심히 추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교육이 나쁜 자식들을 선하게 만들기 때문이 아니라 적어도 무지한 자가 좀더 잘 알 수 있도록 도와 주기 때문이다. 교육이 사람을 구속(救贖)해 줄 수 없다는 말이 곧 교육이 사람의 눈을 뜨게 만들어 줄 수 없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예술은 문화를 건설하도록 하나님이 주선 필수불가결한 선물이다. 그리고 예술은 타락의 산물이 아니라 창조의 결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좋은 정부나 좋은 도덕성이나 좋은 교육에 의해 구원받을 수 없듯이, 좋은 예술에 의해서도 구원받을 수 없다.
예술의 목적은 사회를 개선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니며, 개인을 개선시키는 데 있는 것도 아니다. 만약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한다면, 나치들은 병리 현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예술은 그 실용주의적인 용도를 위해, 도덕적 영향을 끼치기 위해 혹은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은 세뇌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술이 좀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것이라는 믿음을 줄 수가 없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어느 영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 고유한 영역(자연 세계) 가운데서의 과학은 문화 가운데서 매우 유용한 목적에 기여해 왔다. 그러나 과학이 그 자체의 경계를 넘어 영적인 실재들을 설명하고 인생의 의미를 설명하려고 들 때, 과학은 두뇌 과학의 선구자인 존 에클스 경(Sir John Eccles)이 관찰했듯이, ‘하나의 미신’ 이 되어 버린다. 동시에 성경이 그 점에 대해 전적으로 함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사들이 지질학자들에게 지구의 나이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것 역시도 목사로서의 영역의 한계를 위반하고 있는 것이다.
홈리스(homeless, 부랑자들)를 도와 주고, 낙태하지 않도록 여인에게 상담 해주는 일은, 특히 그들이 크리스천일 경우, 우리 크리스천이 의당 개입해야 할 활동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활동은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활동은 아니다. 그런 활동이 사회가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 줄 수 있음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들 어 내고 말씀과 성령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는 것은 복음 자체다. 크리스천들은 두 왕국을 분명하게 구별하면서도 두 왕국 모두를 건설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pp 133-135)
인간의 왕국과 하나님의 왕국 사이의 구분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인간의 왕국 안에서의 영역 사이의 구분이다 그러나 두 왕국 자체 사이의 구분을 회복하려면, 두 왕국의 구별되는 본성, 목표, 목적, 사명에 대한 구분을 회복 하려면, 그 이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어거스틴의 시대에서 로마가 하나님의 왕국이 아니었듯이, 미국은 우리 시대의 하나님의 왕국이 아니다.
도널드 블뢰쉬는 말한다. “하나의 교회로서 교회는 율법의 전파를 통해 사회에서의 중요한 도덕적 이슈들에 대해 말해야 한다. 교회는 방향들을 지적해야 하지만, 대체로 교회는 정치적인 지침을 제기해서도 안 되며 정책을 결정하려고 시도해서도 안 된다”.
인간의 왕국(즉 문화)의 시민들로서 우리는 성경적으로 습득한 전망을 가지고서 우리의 소명을 탁월하게 수행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비기독교인들이 설득 없이 그 전망을 수용하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소금’ 이 되어 방부제 노릇을 하고, ‘빛’이 되어 죄와 구속의 드라마에 대한 열린 안목을 가져다주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마르틴 니묄러(Martin Niemoller)는 개혁파 목사였다. 히틀러를 반대했던 고백교회에서의 그의 리더십 때문에 그는 히틀러가 직접 관장하는 죄수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묄러는 항상 강단을 영원한 진리를 설교할 기회로 사용했다. 그 영원한 진리들은 그가 직접적으로 그 국가 사회주의 체제를 비난했을 때 얻었을 효과보다도 더 깊이 임박한 위기에 대해 사람들을 더 흔들어 놓았다. 인간의 왕국 안에서 니묄러를 한 사람의 영웅으로 만들었던 것은 그가 한 개인 시민으로서 행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의 설교는 그를 하나님의 도성에서의 한 사람의 신실한 사역자로 만들어 주었다.
세상은 교회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한다. “그대는 진정으로 그대의 전하는 메시지를 세상에 맞추어야 한다. 그대는 진정으로 그대의 신조를 현 세대와 조화있게 맞추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그대는 다시금 영향력 있고 힘있게 될 것이다” 많이 듣던 소리가 아닌가?
거기에 대해 니묄러는 이렇게 응답하고 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그것은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소금이 그 맛을 잃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소금이 어떻게 쓰여지는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염려할 바가 아닙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소금이 그 맛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전에 사용했던 오래된 슬로건을 적용하자면, ‘복음은 그 복음으로 남아야 하며, 교회는 그 교회로 남아야 하며, 복음적 크리스천들은 복음적 크리스천들로 남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제발 그 복음에서 독일적 복음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제발 독일적 교회 크리스천들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독일적’을 ‘미국적’으로 바꾼다고 한다면, 그의 시대의 국수주의적인 독일 복음주의자들에 대한 니묄러의 메시지는 아마도 우리에게도 적절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왕국은 덧없는 이데올로기와 자칭 중요한 로비스트와 정치가의 광적인 운동에 조금치도 의존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자신과 우리를 속여 정치가 진정으로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라고 믿게 만들고 있다.
우리는 기독교계의 정기 간행물들이 성조기 게양대를 에워싸고서 기도드리고 있는 고등학생들의 사진을 실은 광고를 게재할 때, 두 왕국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금치 못한다. 물론 우리는 우리 국가와 그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그렇지만 기독교 국가(미국)에 대한 충성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속해 있는 거룩한 나라(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충성을 혼동하는 위험이 거기에 자리잡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하나님을 시민 종교의 마스코트로 변질시키지 않도록 항상 경계해야 한다.
전국 복음주의자 연맹의 어떤 리더가 “만약 클린턴이 당선되면,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될 것인가?’라고 묻는 것을 들었을 때, 내가 “로마가 무너져 버린 이 때 교회가 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라고 개탄했던 제롬의 말을 연상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 언급은 정치가들의 힘에 대한 믿기 어려울 정도의 확신을 보여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상의 왕국과 그 지상 왕국 안에 있는 어떤 특정한 의사 일정의 성공을 그리스도의 나라와 혼동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성의 성공을 위해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성령만을 의지하면서, 좀더 성경적으로 사려 깊으며 시간이 증명해 주고 있는 창조적인 참여와 전문적인 지식으로 설득하는 정책으로 복귀할 수 있을 것이다. (pp 135-139)
참 하나님을 미국의 부족신으로 전락시키는 찰스 피니식 도덕 운동
도덕주의가 지난 200년 동안 복음주의 안에서 상당히 우호적인 피난처가 되어 왔음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19세기에 있었던 커다란 도덕 개혁 운동들은 시민 사회적인 의라는 명분에 사로잡혀 얼마나 쉽게 교회의 영적인 사명(잃어버린 자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을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이끌어 말씀과 성례를 통해 하나님의 저주와 복을 선포하고 건전한 권징을 유지하는 일)을 잃어버릴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구원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도덕적 개선의 문제라고 보는 이런 사상을 복음주의자들이 가지게 된 그 뿌리는 찰스 피니(Charles Finney) 등의 사람들에게 있다. 그 사상을 확실히 하기 위해, 피니는 원죄와 전적인 무능력(즉, 인간의 본성이 죄에 속박되어 있다는 사실)과 같은 고전적이며 성경적인 교리를 땅 속에 깊이 묻어 버려야 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본질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하면서 어떻게 도덕적인 캠페인을 벌일 수 있겠는가?
자아 및 자아의 죄악성에 대한 성경적 교리가 제거되자, 피니는 하나님의 주권 교리에 대한 운동을 제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인간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중심적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대리적 속죄 교리(즉,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악을 대신해서 형벌을 당하셨다는 교리),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직 은혜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칭의 교리(그는 칭의 교리를 다른 복음이라 불렀으며, 칭의 교리가 도덕적 개혁을 가로막고 있다고 주장했다)를 제거해 버려야 했다.
찰스 피니는 그 이단의 원흉인 펠라기우스의 노선을 따라 기독교 메시지를 완전히 탈바꿈시켜 버렸다. 이 노선은 역사상 다른 누구에 의해서 보다도 나중에 많은 교회 회의에서 정죄되었던 노선이었다. 데이비드 마틴이 말하는 바 ‘신학적 추구’는 이미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쇼가 진행되고 있으며(전도), 도덕적 승리가 이루어지고 있는 한(정치) 아무도 신학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다. 현대 교회 성장운동과 기독교 우파운동은 미국의 부흥 운동 안에 도도히 흘러가고 있는 이런 도덕주의적 물결을 그저 영속화시키고 있을 따름이다.
근본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은 보통 유일한 중보자며, 유일한 길이며, 진리이자 생명이라는 그리스도의 배타적이며 독점적인 주장들을 가장 큰 목소리로 옹호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도 아버지 하나님께로 갈 자가 없다(요15장).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가장 큰 목소리로, 대중에게 ‘미지의 신’에게 경배를 드리라고 압력을 가하고 있으며, 그 신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어떤 특정한 신이나 중보자가 필요하지 않다는 인상을 주고 있는 집단도 바로 그 집단들이다. (즉, 무슬림도, 유대인도, 힌두교도들도, 불교도들도, 뉴에이지 운동자들이나, 염소 숭배자들도 이 무형의 미국 신에게 기도드릴 것이 기대되고 있다.) 공화당 사람들이나 민주당 사람들이나 모두 연설할 때마다 ‘하나님’ 라는 말을 집어 넣어서, 마음을 사려고 노력하고 있는 집단이 바로 우리 복음주의자 집단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요, 역사의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미국적 경험에 속하는 하나의 부족신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절대적인 진리의 수호자들이 되어야 할 바로 우리가 말이다. (pp 152-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