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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하신 하나님(창22:1-19)2017.6.25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당신이 약속하신 모든 것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신실하다는 말은 거짓이 없고 좌우로 치우침이 없다는 말입니다. 신실은 하나님의 성품이요, 보증수표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인간을 속이지 않으십니다. 인간을 이용하지도 않으십니다. 다만 인간이 하나님을 이용하고 기만하고 속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어떤 속임에도 결코 속지 않으십니다. 때문에 로마서3장4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도다 할지어다”. 왜냐면 하나님은 미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미쁘다는 사전적인 의미가 신실하다는 말을 내포합니다.
그런데 미쁘신 하나님은 당신이 약속하신 모든 것을 반드시 이루어주십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 5장24절은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신실하심은 하나님의 고유한 성품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수없이 많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물론 지금도 우리와 지속적으로 약속을 하고 계십니다. 때마다 일마다 많은 약속을 맺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지키지도 않습니다.
물론 불신자는 몰라서 그럴지라도 믿음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신뢰하지 않는 것은 불순종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 안에서 성취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신실하지 아니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한번도 당신의 언약을 깨뜨리신 적이 없으십니다. 당신의 약속을 파기하시거나 포기한 적도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신실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때문에 민수기 23장 19절은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고 말씀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이십니다. “여호와“는 언약과 관련된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의 백성과 그를 연결시켜주는 이름입니다. 여호와는 '여호와'(YHWH)란 발음은 히브리어 자음에 아도나이의 모음을 붙여 만들어진 이름으로 야훼가 정확한 발음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언약을 맺으시고 성취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이란 의미입니다.
한마디로 여호와의 이름은 말씀하시고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주로 ‘언약을 지키시는 자’, ‘택한 백성을 구속한 자’란 의미로, 인간을 구원해 주시는 사랑의 언약과 그 실천에 관련해서 쓰인 이름입니다. 이것은 모세에게 가르쳐 준 이름으로 “스스로 있는 자”(I AM THAT I AM)에서 유래된 이름입니다. 그는 스스로 존재하시며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신명기7장 9절은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라고 말씀하십니다.
(1) 신실하심은 여호와 하나님의 절대적인 성품입니다
이사야서 14장24절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 하나님은 당신이 하신 모든 약속을 반드시 이루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약속이 하나라도 지켜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말씀해 보십시오. 성경에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말씀해 보시라는 말입니다. 비록 지금 하나님의 때가 아니어서 성취되지 못한 것은 제외하고요.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언약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시므로 우리 주 예수님이 신실하십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은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신실입니다. 고린도후서1장 20절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신실함은 말씀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 말씀은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신실함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함은 우리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시편은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자하심이나 성실하심은 모두 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품을 말합니다. 신실함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신실하심으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모든 만물을 다스리십니다. 그리고 자기 형상대로 지으심을 입은 인간에게 당신의 신실하심을 나타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대로 모든 것을 이루시고 계십니다. 한번도 당신의 약속을 변개하시거나 포기하지 아니하십니다. 한번도 취소한 적도 없으십니다.
하나님이 구약을 통해 약속하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는 2천 년 전에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다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물론 지금도 이루어져 가는 중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들어 있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당신의 신실하심을 드러내십니다. 신실하심은 성 삼위 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절대적인 신실함은 인간들의 상대적인 신실함과는 전혀 다릅니다. 절대적인 신실함은 어떤 상황이나 어떤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때문에 믿는 우리가 신실함이 마땅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신실함을 닮아야 합니다. 세상에 아무리 신실한 사람이 있다할지라도 언젠가는 변합니다. 세상의 신실함은 육신적인 신실함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적인 신실함은 절대 우리를 온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 비록 신실한척 할지라도 금방 깨어져 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예수님의 신실함을 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신실함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신실함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믿는 자들이 그다지 신실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신실함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신실하지 못하다는 말은 자기 마음과 생각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나 계획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불행은 하나님의 언약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불신자라는 말은 믿음이 없는 자요, 믿지를 못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심하지 않으시고 전적으로 믿어주시는데,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우리를 믿어주시는 믿음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비교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나를 믿어주시는 하나님의 믿음이 훨씬 더 크고 위대하십니다.
빛이 세상에 왔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를 못했습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땅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했습니다(요1:11).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사람들은 받아드리지 못합니다. 예수 안에 하나님의 참 생명이 있음에도 믿지를 못합니다. 한마디로 인간이 신실하지 못해서 그럽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사랑받는 비결이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믿어주는 것입니다. 부부지간도 마찬가지요, 부모 자식사이도 마찬가지며 친구지간이나 사제지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와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믿어주지 못하는 것이 비극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신실하지 못하면 주변의 모든 것을 불신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도 자기 자신이 신실하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자신이 신실하지 못한 안경을 끼고 살면 상대방을 절대 신뢰하지 못합니다. 내 자신의 신실함의 상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척도가 됩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신실하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전적으로 신뢰할 터이나, 자신이 신실하지 못하면 결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2)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전적으로 믿었습니다
누구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절대적으로 믿고 신뢰하던 인물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을 전적으로 신뢰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하란에서 공식적인 만남을 가졌습니다(창12:1).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칠십 오세였습니다. 당시 그는 자기 소생 자식하나 없는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상상할 수 없는 거창한 약속을 하십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을 창대케 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당시 상황으로 볼 때는 말도 안되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너로 큰 민족을 이루어주겠다는 것이요, 둘째는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해 주겠다는 것이며, 셋째는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매우 구체적으로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을 땅의 티끌같이, 바닷가의 모래알같이, 하늘의 별과같이 창대케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기가 막힌 약속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그 약속을 전적으로 받아드렸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말씀하십니다(15:6). 그리고 이삭을 후사로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도 의심없이 받아드렸습니다((창17:19). 물론 그 약속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먼저 하나님께 아들을 달라고 요청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후사 문제를 가지고 협상한 적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믿음이 생기겠습니까? 아무리 신앙이 좋아도 받아드리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당시 여러 가지 여건이나 상황으로 볼 때 결코 납득할 수 없는 약속이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8:11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여러분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자연적인 생식 기능으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성적 무능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경수가 끊어진 사라 역시 고목나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과학적으로는 이미 끝이 난 것입니다. 정상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상식적으로는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습니다. 믿음은 바랄 수 없는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합니다(히11:1).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은 역사가 일어납니다. 상식이 통하는 것만을 믿는 것, 가능한 것만 믿는 것, 과학적으로 입증되는 것만 믿는 것, 보이는 것만 믿는 것은 건강한 믿음이 아닙니다. 과학은 보고 믿는 것이지만, 믿음은 믿고 보는 것입니다. 비록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해도, 자연적으로는 불합리해도 의심없이 믿는 것이 성경적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아브라함은 소유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집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명령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하나님 너무 하십니다’고 통곡을 했을 것입니다. 차라리 나를 잡아 죽이시라고 소리치며 항변했을지 모릅니다. 주실 때는 언제고 달라는 이유가 무어냐고 따지고 반문했을지 모릅니다. 특히 오늘날 같이 자녀에 대한 애착이 강한 시대라면 오죽했겠습니까?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독자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한 마디 변명도 없이 즉시로 순종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3) 하나님은 신실한 자를 기억해주십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신실한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한 자를 기억해 주십니다. 대표적으로 구약의 신실한 자의 대명사처럼 생각되는 사람은 요셉입니다.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신실했습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잔머리를 굴리지도 않았고, 잔꾀를 부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한결같이 신실했습니다. 억울한 옥살이를 하면서도 신실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요셉을 기억하셨습니다. 그리고 보상해 주셨습니다. 나이 삼십 세에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신약에 나오는 요셉도 신실한 사람입니다. 마리아와 정혼하고 동거하기도 전에 성령의 잉태된 것을 증거 하여도 그는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했습니다(마1:19). 여기서 나오는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은 신실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한 요셉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한 자를 기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교회를 다녀도 신실하지 못합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신실함이 없습니다. 어찌 보면 신실한 자를 찾기가 보물 찾는 것보다 더 어려운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신실함을 전적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겨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사흘 길을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올라가면서 아브라함의 생각은 오직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이루실 것을 믿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이삭을 번제로 드릴 생각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인류의 모든 죄악을 짊어지고 십자가를 지기 위해 갈보리 산을 올라가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본 것입니다.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우리를 위해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는 예수님을 본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보았을 것입니다. 본문 22:4절에 나오는 3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삭은 3일 동안 죽은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무덤 속에 계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행위의 동기를 받으십니다. 그의 중심을 보십니다. 결과보다는 동기를 보신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결과에 집착합니다. 하나님은 삼일동안 그의 믿음의 순종을 보신 것입니다. 모리아 산으로 묵묵히 올라가는 이삭의 순종을 보신 것입니다. 아무런 저항 없이 올라가는 이삭은 삼일 동안 장사된바 되셨던 예수님의 죽으심의 그림자였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와 세우신 언약을 반드시 지킬 것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열국의 아비가 되리라는 약속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번제로 바치라는 이삭을 통해서 이루실줄 믿었던 것입니다. 이삭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바라 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이레’입니다. 어둠속에서 빛을 본 것이요, 절망 가운데서 소망을 본 것입니다. 인간의 작은 계획 보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본 것입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이 신실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한 아브라함을 인정해주시고 지지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신실은 신실과 통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습니까? 어느 정도 신뢰하십니까? 전적으로 신뢰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다면 하나님도 우리를 전적으로 지지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전적으로 신뢰하십시오. 장차 하나님의 행하실 모든 일을 100% 신뢰하십시오. 그것이 당신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신실함입니다. 결코 당신이 신실하지 못하다면 하나님의 어떤 일도 믿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신뢰한 것만큼 신실하다는 증거입니다. 성경에 주어진 하나님의 모든 언약을 전적으로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제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신실하지 못하면 헛된 수고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으려면 반드시 내안에 나를 성전 삼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구하고 찾아야 합니다. 그분을 구하고 찾는 것은 그분의 마음을 부어주시고 깨닫게 하시며 누릴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신실함이 부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실함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신실한 마음으로 풍성해질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신실함을 드러내는 성도가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함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믿음이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인생의 주가 되시고, 왕이 되시며, 머리가 되시고 전부가 되시면 하나님의 신실함으로 충만한 인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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