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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마 5:6)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새해를 맞일하여, 매주일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산상수훈 가운데, 특별히 팔복에 관하여, 한 주일씩 살펴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우리는 무리 지어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팔복의 첫 번째 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3절)
두 번째 복은 애통하는 자의 복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4절)
세 번째 복은 온유한 자의 복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5절)
팔복에 대하여 살펴보고 있기 때문에, 팔복에 대한 설교가 다 끝나기 전에, 팔복의 순서를 한번 외워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팔복은 텅빈 마음 상태인 가난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 가난입니다. 그러면 울 수밖에 없습니다. 애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컷 울고 나면, 마음이 부드러워집니다.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부드러운 마음이 온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텅빈 마음에 아무 것이나 채울 수 없는 것처럼,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다고 해서, 아무 것이나 품을 수 없습니다. 옳고 좋은 것으로 채워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의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게 될 때, 배부르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네 번째 복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누가복음 16:19-31절을 보면,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멋진 옷으로 호화롭게 치장하고, 날마다 산해진미를 먹고 마시며, 누리고 싶은 모든 것들을 누리며, 즐기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거지 “나사로”는 낡고 찢어진 옷을 입고, 온몸은 쑤시고 아픈 상태로, 부자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허기진 배를 채우며, 죽지 못해, 주리고 목마른 삶을 겨우 버티며,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리하듯이, 부자와 거지 나사로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죽은 후, 이 땅에서, 처참하게 주리며 목말라하던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큰 위로를 받았지만, 이 땅에서, 호의호식하며 살았던 부자는 지옥에서,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으면서, 주리고 목말라해야 했습니다.
부자는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눅 16:24)라고 절규했습니다.
우리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하여, 주리고 목마름의 실제를 보게 됩니다.
여러분! 지금껏 살아오면서, 주리고 목말라 한 적이 있었습니까?
6절 말씀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주리고 목마르다”라는 말은 입이 심심해서, 단순히 요기를 채워야 하는 정도의 주림이 아니라, 당장이라도, 먹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매우 급박한 상태를 말합니다.
여기서 “주리다”라고 하는 것은 어쩌다 한 끼 정도 먹지 않은 단순한 배고픔이 아니라, 당장 무엇인가 먹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 즉 아사 상태를 말합니다.
예를 든다면, 집 나간 둘째 아들은 허랑방탕하여, 가진 모든 재물을 낭비했습니다. 그후, 돼지를 치면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보았을 때, 그것이라고 먹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은 단순히 배고픈 상태라고 한다면, 그 쥐엄 열매조차도 먹지 못하여, “나는 여기서 굶주려 죽는구나”(눅 15:17)라고 생각하고, 아버지 집을 향하여 돌아갈 때가 바로 주린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명한 설교가인 마틴 로이드 존스는 “사람이 조금만 배고프면, 돼지 우리를 찾지만, 정말 배고프면, 아버지를 찾는다.”라고 말했습니다.
살기 위해서는 아버지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암 5: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리고 목마르다”
사람이 무엇인가에 “주리고 목말라 한다”라는 것은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미 죽은 사람은 주리지도 않고, 목말라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리고 목말라 한다”라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요, 더 나아가,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아프고 병든 사람은 식욕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래서, 몸이 날로 쇠해간다고 해도, 제대로 먹거나, 마시지를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먹어야 산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먹을 때가 될 때, 먹을만한 음식을 찾고, 마실 것을 찾는다고 하는 것은 매우 건강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배꼽시계”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건강하다고 하는 증거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적인 삶도 그렇습니다. 영적으로 주리고 목말라 하는 사람은 매우 건강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주리고 목마름일까요? 세상 사람들은 경제적인 부, 좋은 직장, 사업의 번영, 사랑, 권력의 쟁취에 주리고 목말라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대한 주리고 목마름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의”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옳다”라는 것입니다. “정의”, “의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 5: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로마서 3:10-12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 당시에나, 사도 바울 당시에나, 옳게 사는 사람, 바르게 사는 사람, 정의로운 사람, 의로운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는 정도에 어긋나지 않는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정의를 위하여, 의리를 지키며,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착하고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는 단지 “옳게 살아야 한다. 바르게 살아야 한다.”라는 그런 의미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서, “가난”이라고 하는 것이 물질적인 가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 것처럼, “애통”이라고 하는 것이 뭔가 손해를 보거나, 억울한 일을 당해서 흘리는 눈물이 아닌 것처럼, “온유”라고 하는 것이 나약하고 연약해서, 어쩔 수 없이 낮아질 수밖에 없고,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 것처럼, 여기서 “의”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옳다”거나, “정의”, “의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그 세상 그 누구보다도, 정의롭게 살아야 하고, 의리 있게 살아야 합니다. 악하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남의 것을 빼앗고, 남에게 폐를 끼치고, 다른 사람의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게 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마태복음 5:2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더 선하고 착하게, 의롭고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가 밝아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옳은 일을 하면, 복을 받을 것이다. 그는 배부를 것이다”라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의로우신 하나님”, 그리고 “그 의로우신 하나님을 믿는 것”, 더 나아가, “그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고 하는 것은 의로우신 하나님을 갈망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의로우신 하나님을 갈망하는 그 자체가 바로 “의”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까?
창세기 15:6절을 보면, 그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의로 여겨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났기 때문입니까? 그가 할례를 행하였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쳤기 때문입니까? 그런 이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하신 이유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옳고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 일 때문에,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에는 우리보다 더 선하고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선하고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더, 하나님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된다 할지라도, 흔들림없이, 처음부터 마지막 날까지, 오직 하나님만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갈망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주리고 목말라 해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시 42:1-2)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처럼, 그렇게 갈급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복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고 했는데, 그들이 받을 복이 무엇입니까?
“배부를 것임이요”
예수님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고, 배부를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배부르다”라고 하는 것은 “완전히 포만할 정도로 무엇을 가득 채운다”라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든다면, 마트에 가면, 시식 코너가 있는데, 이것저것 물건을 고르다가, 시식 코너에서 음식 하나 받아먹는 정도가 아니라, 고기 뷔페 집이나 무한리필 집에 가서, 원없이 먹다가, “죽어도 더 이상 못 먹겠다. 이제 더 못먹어. 원없이 먹었다.”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멈추지 않고 먹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 것으로는 만족함이 없습니다. 배 부르지가 않습니다. 욕심에는 끝이 없습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합니다. 그렇다가, 있던 것까지도 사라지고 맙니다.
없던 것도 있어지고, 있던 것도 없어지는 것이 세상일입니다. 오늘 만족하다가도, 내일 불평이 쏟아지고, 지금 불평하다가도, 금방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도 우리의 일상입니다. 세상 것으로는 주리고 목마름이 완전히 해갈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6:3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입니다. 그 생명의 떡을 먹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3-5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고, 생수이신 예수님을 마셔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수가 성의 야곱의 우물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그 사마리아 여인은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떡과 생수를 마실 때, 우리는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6:3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영적인 배고픔과 목마름이 완전히 사라질 것입니다.
시편 34:10절을 보면,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다 배부름을 경험한 다윗은,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시편 23편을 보면, 다윗은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절), “내 잔이 넘치나이다”(5절)라고 고백했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사람, 잔이 넘치는 삶을 살고 싶지 않습니까?
의로우신 하나님을 찾고 찾을 때, 그 하나님을 나의 주님으로, 나의 목자로 고백하고, 믿고 따를 때, 부족함이 없는 삶, 넘치는 삶, 모든 것이 더하여지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남은 인생 동안,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의”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주리고 목말라 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윗은 평생 의에 주리고 목말라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평생 의에 주리고 목말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까지, 자신이 매우 부요한 자라고 믿었습니다. 자신의 출신, 배경, 지식, 율법에 대한 열심 등, 세상 그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이 최고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자기 자신이 가진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 것들로,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나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7-8)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라고 고백했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을 찾고 찾는 삶, 하나님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복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어느 날 빵을 먹는데, 앞에 앉아 있던 개가 루터의 손이 올라가면 위로 향하고, 손이 내려오면 밑으로 향하며, 계속 그 빵 조각을 바라보았습니다. 루터는 자기가 먹어야 할 빵을 개에게 주고,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저 개가 주인의 손에 쥔 빵이 있는 곳을 향하듯이 종의 눈이 언제나 주의 손에 있는 생명의 떡을 향하게 하소서! 주님을 향하게 하옵소서! 종이 이 눈을 허탄한 데 팔지 아니하고, 주께로 향할 수 있도록 눈을 열어 주시옵소서!”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주리고 목마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갈급함이 주님 만나는 날까지, 계속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위에 주리고 목말라 함으로, 하나님을 찾고 찾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배고프지 않은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에게 크신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세상 것으로는 만족함이 없습니다.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와 함께 하여 주옵소서.
부족함이 없는 삶, 넘치는 삶, 배부른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