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16일 / 한나회 헌신예배
공감으로부터 오는 헌신
누가복음 16:19~31
오늘은 한나회 헌신예배로 봉헌합니다.
한나회 권사님들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기에, 한남교회가 기틀을 잡아가던 시기에 교회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이십니다. 한나회 권사님들의 기도와 봉사와 수고로 인해 지금의 한남교회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변함없이 한남교회를 구석구석 살피시고 기도해 주심으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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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코로나를 비롯해서 우울한 소식들만 가득하던 차에 지난 주 오랜만에 온 국민이 축하하고 기뻐할 만한 일이 있었습니다.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상 2020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장편영화상, 각본상, 감독상, 작품상 4개 부분을 석권하였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올해로 92회를 맞이하는 아카데미상은 백인이 아닌 유색인종과 영어권이 아닌 비영어권 영화에도 수상함으로 새로운 장을 열어갔다는 평가가 줄을 이었습니다. 언론은 봉준호 감독의 수상식 소감을 ‘촌철살인’이라고 하며 극찬했습니다. 트로피를 전기톱을 잘라 참석한 영화인 모두에게 나눠주고 싶다는 말이나, 밤새워 술 마실 준비가 되었다는 말 등 그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마다 주목을 했습니다.
■공감능력
저도 생방송은 아니지만, 녹화방송을 잠시 보았습니다. 그러나 봉준호 감독의 수상소감보다 저는 <조커>라는 영화의 주연배우로 남우주연상을 받은 호아킨 피닉스(Joaquin Phoenix)의 수상소감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A4용지 한 장 정도 되는 짧지 않은 그의 수상소감을 통해서 저는 그의 팬이 되었습니다.
호아킨 피닉스의 수상소감을 요약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저는 동료 배우나 이곳에 계신 분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영화는 제게 아주 특별한 삶을 주었습니다. 영화가 저나 여러분에게 준 커다란 선물은 ’목소리 없는 자‘의 목소리를 영화로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고통스러운 이슈를 생각했으며, 영화를 통해서 우리는 젠더 불평등이건, 인종 차별이건, 성소수자의 권리이건, 원주민 권리이든, 동물권이든 간에 부정의에 대항한 싸움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우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고, 자연을 약탈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공장식 축산으로 소를 강제로 인공 수정시키고, 그가 낳은 송아지를 빼앗고, 그의 우유를 빼앗아, 커피와 시리얼에 넣으면서도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무언가를 희생하거나 포기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류는 창조적이고 독창적이기에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들과 환경에 도움이 되는 시스템을 창조하고, 개발하고, 적용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일생 건달로 살아왔고 이기적으로 살아왔습니다. 저는 잔인할 때도 있었고, 함께 일하기 어려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제게 두 번째 기회를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제 생각에는 우리들이 서로 반목하지 않고 지지하며, 서로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순간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격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의 수상 소감은 자기 기쁨에 도취되어 자기들만의 리그와 축하잔치에 매몰되지 않고, 그의 관심은 끊임없이 고통당하는 타자를 향해 있습니다. 고통당하는 타자에 대한 공감능력이 탁월한 것이지요.
■기생충의 불편함
저도 <기생충>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시면서 이 영화를 보셨는지 알 수 없지만, 저는 이 영화가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의 축소판이요 현대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영화를 보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 이야기를 했고, 저도 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봉준호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서 던지고자 했던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계층 간의 단절과 괴리문제는 어쩔 수 없는 문제이니 어느 쪽을 악하다고 할 수 없다.‘고 결론짓는 영화의 결말이 뭔가 찜찜합니다. 영화에서는 ’누가 기생충‘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반 지하에 살던 이들이나 저택 지하에 살던 이들이 기생충일 수도 있고, 큰 저택에 살고 있는 부자가 기생충일 수도 있습니다. 기생충은 죽여야 한다는 일반적인 생각에 따라, 영화에서도 기생충에 해당하는 이들이 살죽습니다. 그 기생충에는 부자도 있고, 가난한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관객은 잔인하다고 생각할 뿐, 살인자에 대한 혐오도 죽은 자에 대한 측은함도 느낄 수 없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천재성은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어느 쪽도 선악의 구조로 나눠 정죄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그래서 이 영화가 불편한 것입니다.
작품상 수상소감을 전한 CJ부사장의 수상소감을 들으면서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생충>이라는 영화가 주는 메시지를 그는 자기 자신에게 던져보았을까? 그는 자신의 저택 지하에 사는, 반 지하에 사는 사람들의 존재를 알기는 할까? 이 영화의 흥행으로 모아들인 수입 중 얼마 정도가 이 영화가 던진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사용될까? 이 영화가 희망 없는 현실에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한다면, 그냥 그들만의 잔치일 뿐인데 왜 이토록 우리는 열광할까? 이 영화의 성공으로 몇몇 사람들의 계단만 더 높아지는 것으로 결말이 지어질 것이 자명한데 우리는 왜 이렇게 열광하는 것일까? 수상소식이 들려오자 벌써 ’봉준화 영화박물관‘을 만들겠다, ’봉준호 동상‘을 만들겠다, ’기생충 촬영지 탐방코스‘를 만들겠다는 등등 ’기생충 스러운 공약이 난무하면서 <기생충>을 갉아먹고 있습니다. 너무 비판적입니까?
■ 주 안에서 자랑하라
사고의 지평을 신앙생활과 연결시켜 확장해 보겠습니다.
신앙생활을 개인과 하나님과 ‘일대 일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 혼자 잘 믿고 구원받는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과 제대로 된 일대일의 관계를 맺으려면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이웃의 아픔과 기쁨에 공감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이웃의 아픔과 기쁨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으면서 ‘개인구원’에만 관심이 있고, 자기가 복 받는 것에만 관심 있고, 자기가 누리는 풍요로움에만 관심이 있다면 어린 아이의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오전에 고린도교회에 관한 말씀을 잠시 나누었습니다만, 고린도교회에 쓴 편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아픔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했지만, 성숙한 믿음을 갖지 못하고 늘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제 젖을 떼고 밥을 먹어야겠는데, 젖만 달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할 수 없어 밥을 주고 싶지만, 밥을 먹어야 하는 어른에게 이유식을 만들어주듯 합니다. 사도 바울로서는 참으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아볼로파, 게바파, 바울파니 나뉘어 싸움질하고, 급기야는 바울을 비난합니다. 그 답답함을 참을 수 없어 책망합니다. 바울의 복음에 공감하지 못하고, 그저 자기들 믿고 싶은 대로 믿겠다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그저 누구누구로부터 추천서를 받았다고 자기 자랑하는데 급급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그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면서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고후 10: 17)고 말합니다.
구원의 감격과 개인적인 신앙의 기쁨을 누리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카데미상 수상을 받고 누군들 그렇게 기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조금 더, 한 걸음만 더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 부자와 나사로 비유
이 비유에서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바는 부자가 왜 죽은 후에 음부의 불꽃 가운데에서 괴로움을 당해야만 했는지 입니다. 인과응보론에 의하면, 부자가 된 것은 선하게 살았기 때문이요, 기복신앙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복입니다. 그러니 부자라는 것이 문젯거리도 아니요, 날마다 잔치를 베푼들 그게 무슨 문제란 말입니까? 그리고 비유를 보면 딱히 부자가 나쁜 짓을 한 것도 없습니다. 그냥 능력이 있으니까 날마다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긴 것입니다. 단지 호화롭게, 사치스럽게 잔치를 벌였다고 음부에 간다면 이것이야말로 불공평한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 부잣집에서 잔치가 벌어지면, 가난한 많은 사람들에게 떡고물이라도 하나 생기는 일이었기에 그리 나쁜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였을까요?
공감이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 부잣집 대문 앞에서 ‘나사로’라는 거지가 있었습니다. 그의 목적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배를 채우고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녀 결혼식장 식당에 노숙자들이 밥을 얻어먹겠다고 와서 어슬렁거립니다. 참으로 난감하겠지요. 식권을 주고 밥을 먹고 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잔치의 분위가 어찌될까 난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저라면, 식권을 주는 대신 식사비를 주고 다른 곳에 가서 식사할 것을 권했을 것입니다. 비유에는 부자가 거지 나사로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안 주었다 이야기도 없습니다. 아마도 잔치의 분위기를 유지하고자 먹을 것을 주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부자의 문제는 누군가는 자기의 대문 앞에서 굶주리고 있는데도 남의 문제로 생각하고, 그것도 매일 잔치를 벌였다는 것입니다. 이웃과 공감하지 못하는 이 지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서 ‘이웃의 아픔에 무관심한 사람’은 이후 자신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그 순간에도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보험들 듯 선한 일을 하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공감’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말씀을 조금 확대해석하면 ‘하나님 나라는 공감하는 자의 것이다.’이런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 공감으로부터 오는 헌신
‘공감’의 국어사전전적인 의미는 ‘남의 주장이나 감정, 생각 따위에 찬성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낌’입니다. 영어로는 다양한 표현이 있지만 저는 ‘compassion’이라는 단어를 좋아합니다. com은 ‘함께’라는 뜻이고, passion은 ‘열정’이라는 뜻도 있고, 열이 난다는 것과 연결되어 ‘고통’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니 ‘compassion’은 타자의 아픔과 기쁨을 함께 열정적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열정 때문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감의 의미입니다.
지난 64년 동안 한남교회가 잘 해온 일도 있습니다. 그리고 극복해야할 일도 있습니다. 한남교회를 위해 헌신한다는 것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교회를 관심 있게 바라보면, 극복해야 할 일, 개선해야할 일, 부족한 일이 보입니다. 그것을 나의 문제로 알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것, 이것이 ‘공감으로부터 오는 헌신’의 의미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의 문제에 무관심하고, 주인의식 없이 남의 문제로 알고,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은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어떤 헌신도 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당면한 다양한 일들을 공감하지 못하고 겉돌면 헌신할 수 없습니다.
헌신하고자 하신다면, 교회의 작은 일에도 관심을 주십시오.
‘나는 여기까지만’이 아니라, 게시판도 세세히 살피시고, 친교의 소식도 꼼꼼히 살피시고, 교회 안팎도 꼼꼼히 살피십시오. 다음 주 오후예배는 ‘영화로 드리는 예배’를 드리는데, 소개된 영화 ‘어바웃 타임’을 보고 오십시오. 헌신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작은 일이라도 진행되는 일들에 관심을 주시고, 그 일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심지어는 주어진 안내에 따라 영화를 보고, 책 읽는 것도 헌신임을 기억하십시오.
이렇게 헌신하면 무엇에 유익할까요?
하나님께서 주님의 일을 위해 헌신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복을 누립니다. 성령이 도우시는 삶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 좋습니다. 한 계단, 한 걸음만 더 올라가시고, 내딛어 주십시오. 그러면 보이는 것이 달라지고, 지평이 달라짐으로 말하는 것이 달라지고, 삶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하지 마시고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데까지 이르는 깊은 영성을 가지고 살아가길 바랍니다.*